제73장. 잠시만요, 형님(2)
- 삐걱.
딱 그런 소리가 나는 듯 했다.
실제로 들린 것은 아니었으나 분명 그런 소리가 났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이틀을 넘게 침대에 파묻혀 있었지 않나. 그랬던 몸을 재빨리 일으켜 세우려 했으니 온몸에서 백 년 넘은 나무 서랍 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할 수밖에.
"이 참에 누운 자세에서 앉은 자세로 텔레포트하는 법을 알아내 보지 그래."
침대에 붙은 게 아닌가 싶은 머리를 주먹 하나 쯤의 높이로 간신히 들어올리다 '윽' 소리를 내며 도로 드러눕는 아르센에게 이런 말이 들려왔다. 찌푸려진 얼굴을 끙끙거리며 힘겹게 되돌린 아르센이, 의외로 꽤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꽤 솔깃한 말씀이기는 합니다만. 못 합니다."
"왜. 이미 해봤어?"
"아직 시도해 본 적 없습니다."
"그럼 한 번 해보지, 왜."
아르센이 손가락을 들어 문 밖을 가리켜보였다. 그러더니 건네진 말에 대한 대답 대신 조금 다른 소리를 꺼냈다.
"치료실에 있는 발칸 놈들이 저까지 여든 다섯입니다."
"어. 많더라."
칼리안과 싸운 여든 일곱 중 시스파니안의 축복을 받은 부군단장 한 명. 베이거나 찔린 곳 없이 사뿐히 목만 밟히는 바람에 진작에 완치된 마법사 한 명. 그렇게 둘을 뺀 여든 다섯이 치료실들에 들어있었다.
"그런데도 치료실 구역 복도가 조용하지 않습니까?"
"조용해야지. 아픈 놈들이 모여 있는데."
"몸이 좀 아프다고 조용하면 그게 발칸입니까?"
"몸에 구멍나고도 안 조용하면 그게 사람인가."
"우리 왕자님께서 직접 만들어주신 구멍인데 어떻게 조용히 하고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든 다섯이나 되는 놈들이 왜 저렇게 얌전히 치료실 안에 처박혀있는 줄 아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치료실 안에 있기 답답하다고 누운 자세 그대로 텔레포트 써가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군단장님께 발각당했습니다. 그래서 다같이 마법도 금지당하고 치료실 밖으로 외출도 금지당했습니다. 몰래 나가다 들키면 천장에서 플레임 스피어 내릴 겁니다. 바뀐 자세로 텔레포트하는 마법도 그것 때문에 연구 못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마나실 후작님께서 너무하셨네. 사람이 답답하면 나돌아다닐 수도 있고 그런 거지."
애써 편을 들어주는 말에 웃은 아르센이 설명을 더했다.
"군단장님 식사하시던 테이블 위로 텔레포트 했습니다."
"누운 채로."
"맞습니다. 누운 채로 올라갔습니다."
"어······ 그래."
"이 기회에 그 좋은 소파에 좀 누워 보려다 그만 계산을 실수해서 말입니다."
"그래. 그랬구나."
"네. 그렇습니다."
"그 놈은 살아있냐?"
"지금 얘기 나누고 계시지 않습니까. 안 죽었습니다, 협회장님."
"······ 어. 그래."
내새끼 엄마가 안 죽고 살아있다 하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내새끼 엄마가 저런 새끼인 게 심히 걱정스럽다 해야 할지.
카이리스 마법사들의 수장으로서 그들의 온갖 미친 짓거리를 통제하고 마법 학교의 학생들도 가르치고 정보 조직도 이끌다보니 그나마 일반인에 가까운 사고가 가능한 코코 아빠가 코코 엄마를 향해 혀를 쯧쯧 찼다. 그리고 힘들게 찾아낸 다른 주제를 꺼내들었다.
"여하간. 어깨 다쳤다며?"
"네. 어깨 다쳤습니다. 저만 유일하게 칼 말고 화살 맞아 다쳤습니다, 협회장님."
"그래. 자랑이다."
"자랑 맞습니다. 우리 왕자님께서 직접 빼주신 화살도 여기 이렇게,"
방금 전까지 제 몸 하나 못 가누던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베개 밑으로 손을 쑥 넣었다. 그러더니 그 곳에 뒀던 마법사 주머니 안에서 길고 긴 화살 하나를 꺼내들었다.
"현장 정리하던 대원들한테 잘 받아다 놨습니다."
컬렉션들이 착실하게 잘 모이고 있다.
칼리안이 알았다면 그 화살 도로 집어들고 남은 수명에도 구멍을 내줬겠지만 아직 모르고 있으니 됐다.
아르센이 뿌듯한 얼굴로 화살을 한 번 살펴봤다. 그리고 칼리안이 루비 커프스 다루듯 애지중지 조심해가며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그 후에는 끙끙거리며 그것을 다시 베개 밑에 밀어넣었다. 그 작태를 지켜보다 짙은 한숨을 쉰 에우리아가 물었다.
"다친 건 어깨인데 왜 몸을 못 움직여?"
"정확히 목 뼈가 부러지지 않을 만큼만 맞았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움직이든 목이 아픕니다. 어깨보다 목이 더 아픕니다, 협회장님."
"그럴 것 같았는데 결국 또 맞았구나."
"네. 맞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왕자님 손속이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 상황에 뼈를 안 부러뜨리고 때릴 수가 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아무튼 날아오는 화살 붙들어 잡아서 어깨 내리찍으실 때 얼마나 멋있었는지 협회장님은 모르실 겁니다."
"어. 궁금했는데 안 궁금해졌어. 나는 그냥 모르고 살려고. 평생."
에우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두터운 종이 몽치를 꺼내 아르센에게 건넸다.
그것을 보며 반색한 아르센이 물었다.
"위문편지 주십니까?"
"뭐. 위문편지긴 하겠네. 내가 써서 주는 거니까."
아르센이 다시 한 번 멋들어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귀가 아니라 마음 속으로 들렸다는 뜻이다.
그렇게 한참을 낑낑거리며 간신히 일어나 앉은 아르센이 종이 뭉치를 받아들었다.
"협회장님."
"어."
"보통 병문안 오면서 이런 편지 주십니까?"
"그게 왜."
"편지에 제목이 있습니다만."
"편지에 제목 붙어있을 수도 있지."
- 원거리 통신망 재구축과 기존 통신설비 교체 작업에 따른 마법물품 예상 수요 추산 결과 및 소요 비용 절감 방안에 대한 1차 보고서.
"붙어있을 수 있기는 합니다만. 제목이 좀 깁니다. 한 눈에 안 들어옵니다. 뭔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게 뭡니까?"
"보고 있잖아. 읽어."
"네. 읽어보겠습니다."
물론 위문편지가 맞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내용에 조금 놀란 아르센이 다치지 않은 쪽 팔로 종이를 넘겨가며 내용을 확인했다.
"저희 통신 시설 개선합니까?"
"그렇다던데."
"마법사 협회에 있던 지역간 통신 담당 부서를 발칸으로 옮깁니까?"
서로의 목소리를 주고 받는 마법 물품.
칼리안의 손목과 손가락에 주렁주렁 달려있고 히나의 귀에도 있는 그것. 장신구 형태는 아니었으나 기능은 동일한 통신용 마법 물품이 각 지역의 대표 영지에도 하나씩 있었다. 유사시 수도 카이리시스에 상황을 알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그것들은 모두 왕궁이 아닌 마법사 협회에서 관리되고 있었다. 왕궁 전체가 여전히 시스파니안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공격 마법이든 단순한 통신 마법이든 외부에서 들어오는 마법은 전부 다 차단되었고, 그에 따라 카이리스에서는 왕궁 밖에 위치한 마법사 협회 안에 통신 담당 부서를 따로 두고 관리해왔었다.
그러던 중, 내 동생이 옛 형님과 대화를 좀 나누겠다 하시는데 그럴 때마다 매번 그 비싼 걸음을 왕궁 밖까지 직접 옮기는 수고를 치르셔서야 되겠느냐 여긴 완두콩이 앨런 마나실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내 동생의 복지를 좀 챙겨주겠다는 지극히 인도주의적인 그 의견에 강제로 설득된 대마법사는 통신 마법만은 시스파니안의 마법 방해에서 벗어나도록 조치를 했다.
"어차피 이젠 굳이 협회에서 해야 할 일도 아니니까."
따라서 통신 물품을 더이상 마법사 협회에서 담당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왕궁에서 직접 각 영지와 통신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 셈이니까.
"그럼, 발칸에서 통신 마법을 담당하게 됐고 중소 규모 영지에까지 통신 장비를 지급하기로 전하께서 승인을 하셨으니······ 그걸 어떻게 활용할 생각인지와 그 많은 통신 마법 물품을 어디에서 어떻게 수급할지, 비용은 어떻게 할지. 뭐 그런 것을 정해야 해서 이런 보고서 써 오신 겁니까?"
"그렇지."
"그런데 그걸 왜 제가 이제 알았습니까?"
"꼬맹이 네가 그걸 왜 여태 몰랐는지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대체 어떤 놈이 저 모르게 이런 귀찮은 의견을 냈습니까?"
"칼리안 왕자님."
"······ 아."
카이리스의 각 지역으로 연결되는 이동 마법진 구축이 끝났다. 당장 급한 것이 마무리됐으니 이제 그 다음 일을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없지는 않았으나 부족한 점이 많았던 통신 설비를 개선하자는 의견을 냈다. 칼리안이.
"방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줄게."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협회장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칼리안이 의견을 내고 플란츠가 살을 붙이고 앨런이 동의하고 슈린츠에 있는 르메인이 승인한 뒤 에우리아가 추산한. 그러니까 발칸 마법사 측의 실무 책임자이자 실질적인 결정권자였으나 치료실 안에 있느라 끼어들 틈을 잃어버린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의 의견만 쏙 사라진. 그런 보고서를 아르센이 다시 들여다봤다.
"네. 저는 찬성입니다."
"다 읽고 말해."
"다 읽었습니다. 문제되는 것 없습니다. 통신 장비는 협회 창고에도 아직 많이 있으니 통신 장비가 없거나 망가진 영지에는 우선 그것을 배포하고. 부족한 물량을 리베른에서 구해오면 더 저렴하겠지만 보안에 관련된 물품을 타국의 것으로 쓰기는 어려우니 우리가 직접 만들되 제작 비용이 모자라면 칼리안 왕자님 금고, 아니. 폴룬 상단에서 빌리겠다는 것 아닙니까?"
"맞아."
"네. 상단 측에서 돈 빌려주는 조건으로, 중간 거래상을 거치지 않고 텐실의 다이아몬드와 소금을 직거래 할 방안을 모색해달라 요청했다는 것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앞으로 통신 업무 담당할 협회 마법사 세 명이 발칸에 합류할 것이라는 내용도 읽었습니다."
위문편지가 아니라서 불만이 가득한 채로 대강대강 넘겨보는 듯 하더니 그 사이 내용은 제대로 확인했다.
에우리아가 오랜만에 능력 좋은 부군단장 티를 내는 아르센을 향해 말했다.
"중소 영지에까지 전부 다 통신을 연결하겠다 하셔서 비용이 엄청나게 늘어났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일인가 싶기는 하네."
"생각 같아서는 이 나라 전체를 다 둘러싸는 방벽이라도 만들고 싶어하실 겁니다. 그것이 불가능하거니와 각 영지에 성벽을 쌓고 보수하라 할 수도 없으니 통신이라도 연결해두려 하시는 겁니다. 그래야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곧바로 발칸이 나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온 놈들 때문에?"
"일단은 그렇습니다."
세크리티아를 방문하던 길에 보았던 방벽. 발칸의 힘 앞에 무력하게 무너졌을 것 분명한, 단 하나뿐이었던 그 방벽을 떠올린 아르센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무엇이든 대비하여 나쁠 것 없다 여기실 분입니다."
"그건 맞는 말이지."
"네, 협회장님. 아무튼 이건 제가 한 번 더 검토해보고 전달하겠습니다."
"그래."
고개를 주억거리던 아르센이 억 소리를 냈다. 그보다 조금 더 큰 '뚜둑' 소리가 목에서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아프다는 말도 안 나오도록 아픈 목을 부여잡은 아르센이 한참을 또 끙끙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 협회장님."
"어."
"세자위에서 안 내려오겠다 결정하신 듯한 부군단장님께서 오늘 코코 데려가지 말고 그냥 둬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코코 데려가려고 온 김에 그 보고서 저한테 주신 것 아닙니까?"
"온 김에 데려가려고 했지."
"그럼 그냥 이것 주러 오신 겁니까?"
"그것도. 온 김에 보고서 넘긴 거지."
"아, 그럼······."
코코도 온 김에, 보고서도 온 김에.
어깨에는 작은 구멍이 나고 뒷목에는 엄청 큰 혹이 생긴 마법사가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하나를 더 물었다.
"저 보러 오신 겁니까?"
"어."
"저 많이 다쳤다 해서 보러 오신 겁니까, 협회장님?"
대답을 했는데 또 묻는다.
에우리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빌헬름 관까지 왜 굳이 오나."
망설임없는 대답을 들은 아르센이 기껍다는 표정을 지었다. 쿡쿡 쑤시던 어깨도 잊고 하마터면 스스로에게 아브턴던트를 걸어야 하나 고민하게 만들던 목의 통증도 잊은 채로.
"바빠서 못 뵈는데 이렇게 뵈니까 좋습니다, 협회장님."
"바쁜데 굳이 오게 만들어서 나는 별로 안 좋아."
"걱정해주시는 것도 기분 좋습니다."
"걱정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
아르센이 싱긋 웃었다.
속으로는 그래도 가끔씩은 다칠만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저 약 잘 먹고 금방 낫겠습니다, 협회장님."
"어. 그래."
"걱정하는 것 싫다 하셨으니까 또 이만큼 다칠 일도 안 생기게 하겠습니다."
그것이 동상 만들 생각을 버리기 전에는 절대 지켜지지 못할 빈 약속임을 잘 알면서도, 에우리아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 * *
후에 뵙겠다 하더니.
그 '후'가 30년 후, 혹은 50년 후를 말하는 것이었나.
"칼리안."
"네."
대답은 한다.
다만 발을 멈추지도, 뒤로 돌아서지도, 눈을 마주쳐오지도 않는 것은 그대로다.
망토는 형에게 둘러놓고 재킷은 벗어던져 태웠다. 루비가 매달린 칼라 핀을 채워 둔 붉은 셔츠에 검은 베스트만 덧입은, 남들의 앞에 절대로 내보이지 않던 가벼운 차림새가 되었음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말을 하지도 않았다.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뚜벅거리는 발소리가 어느새 다 사라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그냥 그렇게 세뉴 관에서 나가고 있었다.
'얀. 루비아 관에 가서 이 팔찌 돌려주고, 카스트린 경에게 오늘 밤에 숲으로 와줄 수 있는지 물어봐줘.'
'네. 알겠습니다.'
칼리안을 보자마자 놀란 얼굴로 따라붙은 얀에게 심부름을 보내 멀리 떨어뜨려 두고서.
르메인이 형제들의 싸움에서 몸을 피한 것이 아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다. 왕궁에서 피어오른 불은 단순한 사고였고 지그프리드에서 기사들을 보낸 것은 발칸의 기사를 추가로 영입한 것일 뿐이다. 모든 것이 전부 다 각자 일어난 일들이니 서로간의 연관성을 억지로 만들고 혼란해하지 말라.
세뉴 관에 들어간 레릭이 플란츠를 대신해 설명을 하는 사이, 왕궁을 수비하는 몇몇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긴 정원을 계속 그렇게 말없이 걸어갔다.
그런 동생 놈의 등을 잠시 쳐다보던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분명 들었겠으나, 회의장에서 나온 칼리안은 아무 소리 없이 발을 옮기기만 했다.
"어디 가는데."
"체르밀 궁 갑니다."
"왜."
"창문 잠그러."
"왜."
"제 침실에 누가 멋대로 들어왔던 것 같아서요."
금고 옆 검은 콘솔 위에 두었던 장신구 진열함.
응접실도 아니고 테라스도 아닌 침실 안에 있던 물건. 누가 또 침실에 들어와 마음대로 손 대지 않도록 이제 그냥 잠궈버리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작 귀족들은 보지도 못하고 칼리안에게만 들킨 커프스를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대답했다.
"아끼는 물건인 줄 몰랐는데."
"손 안에 들어온 건 다 아낍니다. 죽기 전까지 잃어버리지 않고 가졌던 게 아무것도 없었어서. 물건이든 짐승이든. 사람이든."
"그렇게 아끼는 것 많으신 분께서. 왜 자꾸 내버리려고 하시는지."
"뭐가 더 아까운지 따질 줄 아니까. 내버리고 나서도 얼마든지 다시 주워들 수 있는 건지, 뭘 포기하고 대신 내어주든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건지. 그 정도는 구분할 줄 아니까."
"칼리안."
"듣고 있습니다."
"서."
"왜요."
"대화하기로 했잖아."
우뚝.
칼리안의 발이 멈췄다. 그제야 뒤로 돌아서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와 동시에 생겨난 사일런트 막이 시야를 설핏 가린다.
"대화요."
"그래."
"제가 왕세자위를 노린다는 걸 귀족들에게 알릴까 하는데 형님 저하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그럼 형님 뭐라고 하실 건데요."
"하지 말라고."
"그럼 형님께서 반대하실 것 알지만 미리 얘기를 해라, 이런 말씀이십니까. 말씀드리면 반대하실 거고요."
"그래."
길게 드리워진 나무 그늘에 가려 어두워진 붉은 눈이 반, 형의 소매에 달린 커프스보다 더 붉은 눈이 반. 화가 난 것이 반, 걱정이 반. 플란츠의 행동을 이해한 것이 반,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반. 그런 눈으로 플란츠를 쳐다봤다.
"란델 형님에게 또 무슨 말을 들었는지.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그렇게 정신이 팔린 채로 있었는지. 그러고도 그걸 '대화했다' 여기는 건 또 무엇 때문인지. 아무것도 얘기 안 하시면서 또, 대화요."
"칼리안."
"정말 그렇게 보고 계시기는 합니까."
무언가를 말하려던 플란츠의 입이 도로 닫혔다.
"브리센 후작이 그 입에 누구를 올려가며 비아냥거렸을지 압니다. 브리센 남작이 누구 때문에 형님에게 칼을 겨눴을지 압니다. 란델 형님이 매번 누구를 떠올려가며 형님을 보는지 압니다. 아는데.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어서. 얘기해주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이라서. 모르겠습니다, 저는."
"굳이. 왜."
"굳이 말할 필요 없다 여기신 분께서, 제가 체이스 형님과 무슨 관계였는지, 시간의 축이 무엇인지, 저는 어떻게 살았는지, 데블란이 무슨 짓을 했었는지, 그래서 제가 숨을 쉬는지 목이 졸려 있는지. 그렇게 꼬치꼬치 물으셨습니까. 신 귤 받아주고 비맞으러 나가고 바다에 뛰어들고 왕궁 숲에 나락을 파고 마법사들을 보내고 발칸 군단장을 보내가며 그렇게, 꼬박꼬박 손을 내미셨습니까. 속에 든 것들을 안 꺼내두면 어떻게 되는지 저는 가르쳐드린 적 없는데도요. 스스로 그걸 그렇게 잘 알고 계셨으면서요."
플란츠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나왔다.
칼리안의 입에서는 숨겨두려 했던 말이 나왔다.
"에반이 건넨 브로치를 그냥 받고, 브리센 남작이 형님에게 고개를 치드는 꼴을 그냥 넘기고서, 브리센 후작이 형님의 앞에 꼿꼿이 서있는 것을 그냥 두고서. 그 먼 지그프리드 땅에서 술 만들던 사람조차 형님이 술에 빠져 살았다 여기는데도, 편한대로 형제의 손을 잡았다 놓았다 태도를 바꾸는 건 형님이나 저나 다를 바 없지만 언제나 사람들의 손가락 끝은 형님을 향하는데도. 습관처럼 버릇처럼 그것도 전부 다 형님 몫이다 여기면서, 당연하다 생각하면서. 속상하다 억울하다 말 한 마디 안 하시면서. 그러면서. 칼리안이라고요. 대화를 하자고요."
플란츠의 시선이 옮겨갔다.
제 손목에 매달린 루비 커프스에서 칼리안의 손으로. 바닥에 내버린 것을 기어코 집어들고 여전히 꽉 쥐고 있던 에메랄드 브로치로. 그것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괜찮아졌었는데. 다시 잠겨서."
알아들었으면 대답을 했을 테고 못 알아들었으면 되물었을 텐데 칼리안은 말을 하지 않았다. 계속 플란츠를 쳐다봤다. 결국 플란츠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향기가. 역하고 싫고 끔찍했는데. 익숙해지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괜찮아지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을 알았으니까 더 괜찮아졌다고 여겨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다시 잠겨서."
"향수 말씀이십니까."
"그래."
"향수를 들이붓고 났는데 의외로 나쁘지 않아서. 그래서 형님은 결국 그런 사람인가보다, 또 그런 생각을 하셨다는 겁니까. 그래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제 앞에 나락을 파고 헤르츠 경을 보내고 화살도 쏘고 마법도 부리고. 그러신 겁니까."
"그랬어."
"그래서 제가 칼 집어던졌을 때 그냥 눈감으셨던 거고요. 저는 드디어 형님이 목숨 아까운 줄 아나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요."
"······ 그래."
르니에리 향에 익숙해지면 실리케의 그림자에서도 벗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향수 냄새에 질식되지 않는 모습을 깨닫고 보니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 버렸단다. 본래부터 싫지 않았던 것을 일부러 피해왔던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했단다.
나아졌다 여겨야 했는데.
차마 그렇게 여기지를 못하고.
플란츠의 시선을 따라가 제 손에 들린 에메랄드를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새끼를 제가 하나 압니다."
"나."
"아뇨."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마주 서 있는 플란츠를 쳐다봤다.
"······ 베른이라고."
'있었다' 해야 할 그 이름이 꺼내질 때마다 이미 사라진 생임을 되 깨우쳐줄 뿐인 미련한 이름을 꺼내놨다.
마음을 다잡지도 못했던 어느 날에, 제 편이라 여겼던 앨런을 혹시라도 놓칠까봐. 그마저도 잃어버리면 정말로 혼자 남을까봐. 그것이 무서워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입에 올렸던 이름.
그 때와 또 많이 다른 기분일지 혹은 같은 기분일지. 스스로도 알지 못할 속내를 접어두고 그 이름을 누군가의 앞에 다시 꺼내놨다.
"그런 이름 가진 놈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디 하나 다치고도 아무데도 말도 안 하고 숨겨놓고, 그렇게 하면 남들이 신경 안 쓸 테니 그게 제일 좋은 것인 줄 알고. 성문 앞에 나서는 길이 생의 끝인 걸 알면서도 그 날조차 의연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하고싶던 말 한마디 끝내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려서. 제일 소중했던 사람한테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 거짓말이 되어버린. 그게 거짓말이었다 해명도 사과도 못하게 된 그런 미련한 새끼. 베른이라고······ 그런 놈이 하나 있었습니다."
플란츠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머릿속의 빈 자리를 이제야 채우게 된 이름. 그 좋은 머리로 이미 다 알아낸 퍼즐 조각이었으나 그럼에도 이제야 확인하게 된 이름. 그것을 다시 한 번 기억 속에 꾹꾹 담아두듯이.
"그런데 하나 더 늘었습니다."
"누구."
"플란츠. 형님 너."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리려다 말았다.
칼리안의 말이 계속 이어진 까닭이다.
"형님 제 이름 아십니까."
"칼리안."
"진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래."
"그럼 형님 원망은 저 혼자 할 테니까 형님은 미련한 짓 그만하시죠. 형님 원망하면서 이해도 하고 정말 원수같은데 그래도 아까워하는 욕심은 제가 알아서 부릴 테니까. 오늘처럼 멋대로 나서지도 않고 형님 원하시는 대화도 해 드릴 테니까."
이제서야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귀족들을 흘긋 쳐다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향수 냄새가 괜찮아져서 걱정된다 얘기해주면. 형님한테 꽃 향기가 처음부터 괜찮았던 게 아니라 진짜로 동생 삼은 놈 앞에 서려고 그 독한 냄새도 잊어버렸던 것뿐이라는 정답을 제가 알려드리고. 형님이 브리센이라서가 아니라 동생 아까운 줄 아는 형이라서 그런 거라는 말씀도 해 드리고. 그런 대화. 해 드릴 테니까."
귀족들 대신 칼리안의 얼굴을 보고 서 있던 플란츠가 가만히 눈을 내리떴다. 제 발 끝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들고 칼리안을 바라봤다.
"······ 알았어."
"뭘 아셨는데요."
"대화. 한다고."
칼리안의 주머니에 에메랄드 브로치가 들어갔다.
바닥에 떨어졌든 말든 손에 든 건 다 아까운 거니까. 루비 커프스도, 블랙 다이아몬드 브로치도 다 줘버렸으니 이거라도 챙겨둬야지.
"진짜 대화요."
"그래."
"혼자 또 숨기고 미련한 짓 안 하고요."
"알았다고."
"네."
이제야 피식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플란츠와의 대화도 일단락되었지 않나. 그랬으니 이곳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제대로 챙겨입지도 못한 모습을 귀족들에게 더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제가 그만 늦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뵙게 되니 실로 다행입니다."
칼리안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에 그려졌던 웃음이 조금 더 짙게 변했다.
다섯 걸음 남짓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이.
"또. 처음 뵙겠습니다. 남작, 라시드 브리센입니다."
그렇게 다가오도록 눈치채지 못한 놈.
결코 달갑지 않은 놈의 목소리를 듣게 된 탓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