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08화 (409/527)

제73장. 잠시만요, 형님(1)

옅은 갈색의 차.

별다른 맛은 없으나 몸 속에 든 것을 다 씻어주는 듯한 청량한 향이 나는 차. 민트차를 앞에 두었다.

이제는 아들들의 기호에 대한 정답을 잘 맞히게 된 사람. 르메인을 향해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인 칼리안이, 앞에 놓인 민트차를 한 모금 마셨다.

- 달칵.

그리고 찻잔을 내려 둔 뒤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겹겹이 둘러싸인 산의 모습이 낯설다. 세크리티아에는 산이 많지 않았고 카이리시스 내에도 산이 없었다. 외성 밖에도 이 정도로 높은 산은 없었다. 그래서 낯설었다.

그날, 밤새 아스트리샤 거리에 소문을 낸 칼리안은 간신히 시간 내에 만들어낸 새로운 옷을 받고 아리안느를 만나 오늘은 루비아 관에 드미레아와 리리에도 머물게 되었다는 말을 해줬다. 리리에와 아직은 많이 어색한 인사를 하고 드미레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체르밀 궁을 나섰다.

그리고 귀족들이 모여있을 세뉴 관이 아니라, 아르피아 궁으로 갔다. 앨런에게로 먼저 찾아갔다.

"차를 다 마실 시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 그래. 바쁜 일이 있을 듯 보이는구나."

슈린츠.

르메인이 있는 곳에 오기 위해서.

무례하지 않을 동작으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십 분 남짓, 그 정도의 시간이면 그래도 충분한 대화를 할 수 있으리라.

"전하께 제가, 실망을 하였습니다."

란델의 것과 아주 많이 닮았으나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푸른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다른 말 없이 칼리안을 바라봤다. 설명을 기다리듯이.

"그리 여겨질 겁니다."

"귀족들이 그리 여기도록 만들고자 그런 옷을 입었더냐."

"그렇습니다."

"네가 그렇게 나서면······ 내가 너를 절대로 세자위에 올리지 않으리라고. 귀족들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될 텐데. 염두에 둔 것이더냐."

"예상하고 있습니다."

칼리안이 왕좌에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르메인에게 배신을 당한 것처럼, 그리하여 르메인과의 사이가 틀어진 것처럼, 르메인을 별궁에 몰아넣고 자신의 기사들을 왕궁에 더 들여놓은 것처럼. 그렇게 보이려 했다.

르메인이 슈린츠에 혼자 있지 않았으니까.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가 함께 있으니까.

르메인이 누구와 동행했는지 알게 된다면 귀족들이 떠올릴만한 사람, 현왕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말을 아끼고 묻어두며 그 어디에도 아직 기록해두지 않은 일의 주동자가 있지 않은가.

선왕이 정한 세자위에 반발했던 사람. 때문에 왕실의 기사단들을 회유한 뒤 직접 칼을 들었던 사람. 병든 선왕의 목숨을 제 손으로 직접 끊어내고 르메인에게 칼을 겨눈 사람. 그러나 브리센의 손을 잡은 르메인에게 밀리고 친우였던 슬레이만도 도움을 주지 않아 결국은 하룻밤의 꿈으로 끝난 짧은 반란의 주동자. 그 대가로 사형보다 더 지독한 형벌을 받고 있는, 여전히 탑에 갇혀 있는, 르메인의 하나뿐인 형제.

- 아스난 사일 카이리스.

분명 그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 일을 겪은 르메인이, 이런 '짓'을 벌이는 칼리안을 그대로 둘 리 없다 여길 터였다. 칼리안 덕분에 왕권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하나 그것이 모든 행동의 면죄부가 되지는 않으니 말이다.

게다가 르메인이 플란츠의 손을 들어준다면 발칸의 힘도 르메인에게 가리라 생각할 것이 뻔하다. 칼리안이 고립되리라 여길 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앨런 마나실이 어느 정도의 무력을 지녔는지도 모르지 않나. 지나치게 강한 힘은 현실감이 떨어지는 법이니까.

"제가 세자위를 탐내는 것처럼 굴어 오히려 세자위에서 멀어진 것처럼. 그렇게 보였으면 합니다. 그래서 귀족들이 플란츠 형님에게로 눈을 두게 한 뒤에, 공식적인 책봉식이 없어도 다른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 둔 뒤에. 브리센 후작과 남작을 물리고 나서 제 거처를 카밀론으로 옮기도록 하라 말씀을 해주셨으면, 하고. 그렇게 부탁을 드리려 왔습니다."

"책봉식을 미룰 여지를 주려는 것이더냐."

"네. 이름 뿐인 자리만으로도 이미 충분하여서, 혹시라도 그 이상의 것은 더 건네지지 않도록.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칼리안의 말에 소리없는 한숨을 길게 내쉰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해주마. 어려울 것은 없는 일이니."

"감사합니다."

자식이 부탁한 용돈을 건네주듯, 가지고 싶어 하던 소소한 선물을 약속하듯. 담담한 얼굴로 세자위를 약속했다.

"다만. 이렇게 갑작스레 나선 이유가 궁금하구나."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그래. 모두 함께 슈린츠로 오겠노라, 그저 그 뿐이었지."

"네. 맞습니다."

"그런데, 왜."

생각보다 악몽이 깊은 듯 하여서.

르메인에게 전하지 못할 말을 삼킨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세자위에 대한 귀족의 말도 잠재우고, 브리센 남작의 속도 들여다 볼 수 있을 좋은 기회라 여겨져서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서두르는 것이더냐."

"네. 전하."

라시드 브리센.

"거슬립니다. 저를 공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 없는 이라서 거슬립니다. 그래서 이 정도의 일이 벌어진 김에 그 속도 좀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라시드는 칼리안의 약점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결국 행동의 제약이 더 많은 것도, 언제나 몸을 사려야 하는 것도, 섣불리 칼을 꺼내 들 수 없는 것도, 상대에 대한 정보가 더 적은 것도 모두 다 칼리안이었다.

그런 칼리안은 라시드에 대해 알지 못했다. 라시드가 원하는 것은 예상했으나 확신할 수 없었다. 얻고자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약점이 무엇인지. 브리센을 가질 생각인지 브리센을 완전히 무너뜨릴 생각인지. 만약 무언가를 도모한다면 언제 할 생각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을 모르는 채로 라시드를 상대해야 했다. 불리했다.

그래서 슈린츠로 르메인을 마중나가는 척, 란델이 스무 살이 되고 세자를 제외한 왕자들이 왕궁에서 벗어나기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두 함께 휴가라도 즐기려는 척, 왕궁을 비우려 했다. 그랬을 때 라시드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보고자 했다. 가만히 있을지, 이것을 기회로 삼으라며 그레이를 부추길지, 아니라면.

"어쩌면 브리센 남작이 이것을 기회로 삼아 발칸과 스승님을 치려 들지 않을까. 그런 기대도 조금 하고 있습니다."

라시드 브리센이라면 앨런이 어느 정도의 강자인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앨런을 앞에 둔 채 마음놓고 화를 냈다. 앨런을 대비할 방법이 있다는 뜻이다. 칼리안을 없애기 위해서는 앨런부터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일이니, 모두가 자리를 비운 동안 앨런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꾸며내든 앨런을 직접 공격하든 회유를 하려 들든 어떻게든 앨런에게 접근할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러다 정말 일이 잘못되면 어찌하려고. 그리 쉽게 빈 곳을 만들어 보여도 괜찮은 것인지 모르겠구나."

"브리센 남작이 무엇을 숨겨두었든 실제로 해를 입을 스승님이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살아있는 한 스승님을 이길 수 있을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궁과 발칸과 스승님을 잠시 미끼로 올려둬볼까 했습니다."

"그렇게까지 서둘러 브리센 남작을 경계할 필요가 있겠느냐. 행동을 서두르는 것은 대체로 독이 될 뿐인데."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전하."

라시드 따위에 정신이 팔려 허비할 시간이 없다.

세렌티가 깨어나기 전에 제온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해야 했다. 텐실의 일을 해결해 두어야 했다. 힘을 길러야 했다.

"란델 형님이 곧 스무 살이 됩니다. 세자가 되지 못하면 왕궁을 나서야 하는 때가 옵니다. 플란츠 형님도, 그리고 저도, 머지않아 그럴 나이가 됩니다. 브리센을 저대로 두고 브리센보다 더 아득한 미상의 세력을 밖에 두고, 누군가는 세자위를 받고 누군가는 왕궁 밖으로 나서게 되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더 큰 독은 없습니다."

그것이 독임을 어찌 모를까.

르메인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다만, 칼리안."

"네. 전하."

"시간이 없으니 서두르겠다는 말은 이해를 하였다만. 나는 너희들이 걱정되는구나. 네가 나와 척을 진 것으로 여기면 귀족들이 태도를 어찌 바꿀지."

"누구도 형님에게 칼을 드리우지 못합니다."

칼리안이 장담하듯 말했다.

그리고 슈린츠를 찾아가는 것 말고 한 가지를 더한 계획. 왕세자의 정복을 따라한 가짜 옷을 입은 또 다른 이유를 설명했다.

"제가 세자위에 욕심을 드러낸 것을 알면, 브리센 남작은 브리센 후작으로 하여금 플란츠 형님의 손을 잡도록 알아서 설득시켜 줄 겁니다. 그래야 브리센 후작이 자멸할 테니까요."

"브리센 남작이, 플란츠에게 주어진 세자위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말이더냐."

"네. 다른 귀족들과 달리 브리센 남작만은 알고 있으리라 여깁니다. 나에랑샤 거리에서 저와 싸움을 벌이던 날 알아봤을 것이고, 브리센 후작저에서 마주쳤을 때 확신했을 겁니다. 플란츠 형님은 왕위에 오를 생각이 없으며 그 자리는 결국 제 것이 되리라고. 그렇게 말입니다."

"그렇다면······. 플란츠가 브리센을 등에 업고 안전을 보장받게 하려는 것 같은데."

"모순된 일이지만. 그렇습니다."

라시드의 손을 빌어 브리센의 등에 플란츠를 업힌다.

그렇게 되면 플란츠를 두둔하는 세력은 더 많이 늘어난다. 왕세자위가 확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여길 터였다.

그럼에도 '브리센을 닮아서' 혹은 '브리센 답게' 동생의 도움도 잊고 브리센의 손을 잡아 세자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이다. 칼리안이 세자위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 순간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가 뒤바뀔 테니까.

"플란츠가 브리센의 힘을 얻게 되면 섣부른 술수가 정말 사라지리라 여기느냐. 오히려 너를 따르던 이들이 네 손을 놓아 너를 고립시키거나 혹은 너를 돕겠다며 플란츠에게 칼을 겨눌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가 척을 진 것은 전하 뿐입니다."

"나 뿐이라······ 설명이 필요한 말이구나."

"저는 계속하여 귀족들의 앞에 형님과 함께 나설 생각입니다. 형님의 세자위는 빼앗으려 들면서 우애 좋은 형제 노릇도 계속 하려 드는, 이해하기 어려울 욕심을 부리는 사람 노릇을 해볼까 합니다. 그러니 전하."

칼리안이 웃었다.

"아무도 감히, 형님에게는. 칼을 드리우지 못합니다."

그것이 검 끝에 달린 칼날이든.

혹은 혀 끝에 달린 칼날이든.

"그렇다면 그들이 너에게는······ 어찌 할 것 같으냐."

틱, 톡, 틱, 톡.

대답 대신 꺼낸 금빛의 회중시계가 르메인의 눈에 보였다.

대화의 끝을 알리는 행동이었다.

* * *

블랙 다이아몬드.

생산되는 것의 8할 이상에 흠결이 있는 검은 빛의 다이아몬드. 때문에 흠없는 상품질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귀한 보석. 그것으로 테를 두르고 정중앙에 굵직한 루비를 놓았다. 생을 증명하듯 선연한 붉은 빛이 영롱한, 최상품 중에서도 일등품에 속하는 루비였다. 그것으로 만들어낸 한 쌍의 커프스였다.

한 마디로.

어마어마하게 귀하고 값비싼 장신구라는 소리다.

다시 말해.

형님 소매를 고이 빛내는 저거 내 거라는 뜻이다.

폴룬 상단주 멜피르에게 특별히 부탁해 구한 보석들을 의상 담당자 섀틴에게 맡겨 제작한, 말 그대로 귀하디 귀한 장신구다. 세크리티아에서 동생 생일선물 돌려막기를 해대는 두 형님들을 대신해 내 생일 내가 직접 챙기겠다며 만든 것이다.

보석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으나 저것 하나만은 너무나 마음에 들어 체르밀 궁의 귀중품 보관 창고에도 두지 않았다. 레이븐의 루비 목걸이랑 같이 내 방에 고이 모셔뒀던 거다.

그렇게나 귀한 것이라서 국왕 탄신일 축제의 성대한 연회에도 안 하고 갈 생각이었다. 내 생일 축하연에 짠 하고 처음으로 차고 갈 생각이었다. 이런 날 이런 때, 안 처먹던 낮술이라도 처드셨는지 대낮부터 회의장에 찾아와 일단 옷부터 벗어제끼는 미친놈의 소매 따위를 빛내라고 만든 것이 아니란 말이다.

"망토 여밈이 단단하지 못했나 봅니다."

생긋, 웃는 낯을 한 칼리안이 말을 건넸다. 그리고는 가벼운 움직임으로 발을 옮겨 회의실 아래쪽으로 내려섰다. 눈을 살짝 내리뜬 채 플란츠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귀족들에게 등을 보인 모양새로 그들의 가장 앞에 서 있던 플란츠를 마주봤다.

그리고 플란츠의 몸에 가려 다른 이들에게 잘 보여지지 않을 손을 잠시 놀렸다. 짧은 말을 만들어냈다.

주인 없는 방에 멋대로 들어가 동생의 장신구를 마음대로 꺼내다 쓰고, 이 자리가 무엇을 위한 자리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중간에 들이닥치고, 에메랄드 브로치를 내던져가며 망토를 벗고, 칼리안의 것과 색만 다른 진짜 왕세자의 정복을 굳이 입고 와서는 이 자리에서 벗어 내려두려 하고.

그 모든 행동에 대한 질책을 전했다.

- 미쳤어?

급하니까.

존대를 붙일 새가 어디 있나.

"어디 그뿐일까."

단단하지 못한 것이 망토 여밈 뿐이겠느냐는 말.

그리고, 어디 미치기만 했겠느냐는 말.

플란츠가 입과 손으로 전해진 두 질문에 대해 모두 대답했다. 그 말을 듣던 붉은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올라갔다. 그리고 웃었다.

- 기사.

가만히 안 있으면 이 자리에서 당장 기사 서약을 해버리겠다고. 손으로 전해지는 짧은 말을 기가 찰 만큼 잘 알아들은 탓에 웃고 말았다.

안 그래도 혹시나 그럴까봐, 그러나 슬립같은 마법에 잠들 정신머리가 아닐 것 같아서, 덕분에 이렇게 플란츠의 코앞까지 와서 선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금이나마 무릎을 수그릴 기색이 보이면 '우리 형님 덜 똑똑하게 해드릴' 동생의 손이 먼저 움직이리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단단치 못한 것이 더는 없기를 바랍니다."

"나 역시."

"네."

"그리고 전하께서도."

의미를 알 수 없게 덧붙여진 말. 때문에 칼리안은 하마터면 '네?'라고 할 뻔했다. 가까스로 입을 꾹 다문 칼리안이 플란츠의 얼굴을 쳐다봤다.

태평한 목소리로 르메인을 들먹인 플란츠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여전히 회의장에 선 채 플란츠를, 플란츠의 옷을, 대리석 바닥 위에 볼품없이 나뒹구는 에메랄드 브로치를, 바닥에 떨어진 망토를, 그리고 칼리안을 바라보는 귀족들을 향해 섰다.

그러더니 이곳저곳으로 흩어진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는 것을 마주보며 느릿한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이 단단하리라 믿고 이렇게 자리를 비우셨는데. 애석하게도······ 단단하지 못한 것이 또 있군. 아우님께서 우려하셨던 바와 같이."

칼리안이 눈을 더 내리떴다.

후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술 냄새 안 난다. 술도 안처드시고 대낮에 회의장에 난입해 제 망토를 풀어 내버리더니 내 동생이 뭔가를 우려했다며 뜻모를 소리를 한다.

"안 그런가, 아우님."

"······ 네. 애석하게도."

처음에는 제 심장을 걸더니 이제는 제 무릎 한 번 바닥에 대보겠다 해오는, 참 신선하지만 내가 정말 환장하겠는 대단한 협박범을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도무지 알아들어 처먹을 수 없을 말에 일단 대답을 했다. 내가 깐 판에 형님 저하 네 놈이 멋대로 들어왔으니 에라모르겠다 옷을 벗어제끼든 말을 해제끼든 네 맘대로 해라,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만히 안 있으면 냅다 무릎을 꿇겠다는데 어쩌겠나.

내버려둬야지.

"전하께서는 나를 믿고 휴식을 취하고 계시는데. 왕궁에 찾아 온 이들은 내 아우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도."

아니, 이런 모습이라뇨.

슬레이크 경이 이 옷 만들어서 큰일날까봐 벌벌 떠는 와중에도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메를린이 진짜 예쁘다고 칭찬도 해줬는데요.

형님 정말 너무하시네요.

"다 보았으면서도. 그대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만 있군."

칼리안의 불만에 관심없을 플란츠가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칼리안과 엮이면 말이 많아지니 세상 정말 피곤한 동생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를 세자위에 올려두신 전하의 결정과 나에 대한 믿음이 결코 단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 아우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흘리기만 하였는데······ 내 아우님께서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할 때에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로 무른 모습을 내 눈으로 보게 되니."

- 저벅, 저벅.

플란츠가 귀족들을 향해 한 발을 걸어갔다.

"참담하군."

칼리안의 눈이 조금 더 내리떠졌다.

거의 감다시피 한 눈으로 아래를 쳐다봤다. 바닥을 향해 늘어뜨린 손 끝이 길게 움직인다. 둥근 호선을 하나 그려냈다.

잘 키운 완두콩이 갑작스레 찾아와 귀족들 앞에 나서더니 '내 동생이, 너희들이 전하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겠다며 손수 시험을 마련했는데 너희 전부 다 넘어갔다.'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칼리안이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겠다고. 그렇게 애쓰는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그렸다.

- 뚜벅, 뚜벅.

잠시 뒤, 칼리안이 발을 옮겼다.

할 말 잃은 귀족들의 시선을 느끼며 걸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였다. 팔을 뻗었다.

- 스륵.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은 망토를 주워들었다. 왕족의 것이 바닥에 나뒹굴지 않도록 제 손으로 직접 주워들었다. 눈치를 보다 서둘러 다가온 시종 한 명에게 그것을 건넸다.

함께 떨어져있던 에메랄드 브로치를 집어들었다.

브로치를 손에 쥔 채로 다시 한 발을 옮겼다.

"확인을 하셨으면 그것으로 됐습니다."

르메인도 걱정하던 것을 플란츠가 가늠하지 못했을 리 없어서. 그나마 칼리안의 편에 선 귀족들을 전부 플란츠 쪽으로 몰아주려 했던 성질 급한 동생을 말리러 왔음을 칼리안도 모르지 않아서.

"그러니 더 노여워 마십시오."

세자위에 욕심을 부린 것은 그저 연극이었다 하는 플란츠의 해명을 다시 뒤집지는 않았다. 라시드라면 이 상황을 재밌다 여기고 알아서 잘 판단할 테니, 귀족들에 대해서까지는 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다만.

- 뚜벅, 뚜벅.

귀족들의 신의를 벗어나 충성까지 바랐다는 듯한 왕세자의 말이 저들의 귀에 거슬렸을 것이 분명하여서. 혹시라도 반발심을 가지지는 않도록, 그러지 못하도록.

바닥에 닿은 검은 망토 말고 자신의 망토에 손을 가져다 댔다.

- 툭.

여밈 장식을 풀었다.

붉은 망토를 손에 들었다. 그것을 직접 플란츠의 어깨에 둘렀다.

이미 선물했던 바다를 또 선물한 체이스나, 받은 선물을 되돌려 건넨 플란츠나. 두 형이 그렇게 선물을 돌려막으려 들었던 것처럼 체이스에게 망토를 덮어주었던 일을 되풀이하듯이.

칼리안도 어쩔 수 없는 둘의 동생이니까.

- 찰칵.

바닥에 나뒹군 에메랄드 대신, 자신이 하고 있던 블랙 다이아몬드 브로치로 망토를 고정시켰다.

이왕 가져가신거 그냥 세트인 셈 치고 그것도 그냥 너 쓰시라고. 그런 눈물겨운 마음을 담아서.

칼리안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플란츠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너."

"······ 계시죠. 그냥."

작은 소리로 플란츠의 말을 막은 칼리안이 한 발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다시 손을 놀렸다.

툭, 툭, 툭.

잘 여며두었던 가짜 왕세자의 정복 단추를 풀었다. 아직은 칼리안의 것이 아닌 화려한 재킷을 벗어들었다. 그것을 귀족들의 앞에 던지듯 내려놨다.

- 화르륵!

검은 재킷에 불이 붙는다.

바닥을 뒹굴지 못할 왕족의 물건이 불에 타 사라져갔다. 그 불이 마치 자신들을 삼킬 것 같아서, 귀족들이 큰 숨을 집어삼켰다.

그 모습에서 눈을 뗀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리고.

"후에 뵙겠습니다."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