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07화 (408/527)

제72장. 아무래도 아쉬워서(5)

하루 전.

그러니까 정확히는, 멋드러진 옷을 입고 나타난 칼리안이 세뉴관의 회의장을 휩쓸어놓기 하루 전의 저녁. 빌헬름 관에서 앨런의 것 다음으로 큰 부군단장의 집무실.

두 부군단장의 책상을 멀찍이 떨어뜨려 놓겠다는 듯 집무실의 한가운데에 길쭉하게 자리한 소파에 두 왕족이 마주앉았다. 간단한 몇 가지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였다.

"형님."

"왜."

사실 칼리안과 플란츠가 식사를 함께 한다 하여 정말로 식사만 한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연하겠지만 대화가 오갔다.

"브리센 후작에게 형님과 제가 사냥 내기를 할 것이라는 얘기, 전하셨습니까."

"했어."

"네. 잘 하셨습니다."

사소한 이야기 혹은 짖는 소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둘이 따로 시간을 내어 의견을 주고받아야 할 일이 참 많았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을 만큼 서로 바쁘지 않나. 때문에 식사를 겸해 중요한 대화와 의견을 나누는 날이 상당히 많았다.

칼리안을 찾아왔던 플란츠가 얀에게 팔찌를 건네고 돌아가다 란델을 만난 날.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간 칼리안이 하얀 수리의 목숨을 끊어낸 날. 그 날의 저녁도 마찬가지였다. 식사를 했고 대화가 오갔다.

"란델 형님께서 텐실의 국왕이 된 이후 벌어지는 일. 가지치기를 하듯이 사라진 귀족 가문들에 대한 정보. 아직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억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기억하십니까."

"그래."

체이스가 칼리안에게 전했던, 책 한 권 분량은 될 법한 자료를 칼리안이 모두 외우고 태웠던 일이 있었다. 그것을 플란츠가 알려달라 했다. 고집을 꺾지 못한 칼리안이 결국 제 손에 오러까지 둘러가며 자료를 다시 써서 건네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식사를 하던 칼리안이 뜬금없이 그 일을 입에 올렸다. 그 자료의 내용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느냐면서 말이다.

"다행이네요. 옮겨 적기 힘들었는데 다시 쓸 필요는 없다 하시니. 그럼, 이번 해에 텐실의 국왕과 왕세자가 마차 사고로 사망한다 했던 얘기도 기억하고 계십니까."

"굳이 질문하실 필요가 있는지."

"네. 잊는 것 모르시는 분이니 기억하고 계시리라 생각은 하지만요. 혹시 모르잖습니까. 그 이후로 벌어진 일이 너무 많아서 잊으셨을지도."

"그럴 일 없어."

"······ 형님."

머릿속에 한 번 집어넣은 정보를 잊는 일 같은 건 겪어본 적 없는 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조금 찌푸린 칼리안이 진지한 얼굴로 플란츠를 쳐다봤다.

"왜."

"딱 한 대만 맞아보시면 형님 그 머리 조금 덜 똑똑하게 바뀌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저는 가끔 듭니다만. 형님 의견은 어떠십니까."

"앞으로 아우님께서 드실 음식에는 소금을 넣지 말라 전해둬야 할 것 같은데. 아우님 의견은 어떠신지."

"아닙니다. 그만 짖고 사람 밥 먹을게요."

아무리 진지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이었다 하더라도, 간혹 이렇게 고양이 짖는 소리가 끼어들곤 했다. 짖는 소리가 없어도 매끄러운 대화가 가능할 만큼 사이좋은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텐실은 이제까지 저와 크게 연관이 없던 곳이니만큼, '과거'에도 진짜 세르제인은 진작에 죽고 없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올해 생길 마차 사고에서 죽는 것은 텐실의 국왕과 가짜 왕세자 세르제인일 것이라고요."

"그래."

"그런데 이번에 에일라가 체이스 형님의 전서구를 통해 재밌는 정보를 전해줬습니다. 형님과 사냥 내기를 하느라 바로 알려드리지 못했습니다만."

"뭔데."

"괴한들이 세르제인의 암살을 도모했으나 실패한 일······ 결국 왕세자가 죽었다 하니 사실은 실패가 아니라 제대로 성공했고 그 덕에 세르제인의 호위기사가 세르제인 노릇을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만.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실패했다 여길 테니. 어찌됐건 그런 일이 있었는데. 재밌는 것은."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풀어야 할 때. 흥미가 동하는 상대의 머릿속을 가늠할 때.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앞을 가로막은 적을 마주했을 때. 혹은 체스 도중 플란츠가 '체크'를 입에 담았을 때.

딱 그럴 때 나타나곤 하던 웃음이 동생 놈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 일이 있고 한 달이 지난 뒤, 그 때부터 브리센 후작령에 라시드 브리센이 모습을 보였다 하더군요."

"텐실 수도에서 브리센 후작령에 가려면 그 정도가 걸릴 텐데."

"네. 맞습니다."

"라시드 브리센이 세르제인을 습격한 후 텐실 수도를 떠나 브리센 후작령으로 갔다는 말인가."

"진짜 세르제인을 노린 것이 라시드 브리센이 맞다, 라는 전제가 붙어야 하겠지만. 시기 상으로 보면 서로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암살이 실패했다 여겨 도망을 한 것인가."

"세르제인을 죽이지 못했다 해서 도망을 칠 놈은 아니지 않습니까. 재밌다며 다시 덤벼든다면 모를까."

"······ 그럼."

"진짜 왕세자는 치유사들도 회복시키지 못할 치명상을 입었고 지금의 왕세자는 가짜다. 그것을 눈치챘다면. 그래서 가짜를 일단 놔 두고 다음 목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면. 그럼 조금 더 말이 될 것 같은데요. 라시드 브리센은 변장용 마법 도구가 있다는 것도 알고 머리가 나쁜 편도 아니니까요."

플란츠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당시에는 에반이 살아있었고 그레이 브리센은 변경백이었으니 카이리스로 오고자 했다면 분명 브리센 변경백령을 거쳤을 겁니다. 그런데 놈이 카이리스로 와 후작령에 도착한 것을, 저희는."

"몰랐었지."

"네. 라시드 브리센 정도의 인사가 국경을 넘어왔다는 내용이 보고되지 않았으니까요. 어느새 후작령에서 모습을 보이고 있었죠."

"카이리스에 몰래 들어오도록 그레이 브리센이 도왔다는 건가."

"거래를 했든 도움을 요청했든 그레이 브리센이 라시드 브리센을 숨겨주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여깁니다."

진짜 세르제인이 습격을 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일.

그런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라시드가 카이리스로 왔다. 그레이는 제 아들이 온 것을 왕실에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라시드는 에반의 영지였던 브리센 후작령으로 갔다.

"에반이 제 영지에 그런 놈을 잘도 두게 했군."

"라시드 브리센이 얼마나 순진하게 굴 수 있는지 형님 아시잖습니까. 세상물정은 모르면서 제 아비와는 척을 진 것처럼. 에반 정도는 쉽게 속였을 겁니다."

"그럼. 라시드 브리센이 카이리스로 언제 돌아왔는지. 전서구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에반이 관리했던 당시의 왕궁 기사단 파벨 말입니다. 파벨에 소속됐던 기사들 중 형님을 따르기로 마음을 바꾼 이들이 발칸에 남아있지 않습니까. 전서구가 그들에게서 알아낸 정보입니다."

갖은 야채와 함께 삶아낸 고기가 든 그릇에서 잘 익은 당근을 골라 제 접시로 옮겨 둔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됐건. 라시드 브리센이 세르제인 암살에 연관이 있다 가정했을 때. 그런 그가 카이리스를 찾아왔다면 누구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까."

가짜 세르제인이 그렇게나 만나보고 텐실의 왕위에 올라달라 부탁하고 싶어하는 사람. 가짜 세르제인마저 죽은 뒤 텐실의 국왕이 되었던 사람. 그렇게 누군가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던 사람. 르메인을 그토록 증오했으면서 결국 르메인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게 된 사람.

"······ 형님이겠군."

"네. 당장은 란델 형님에게 관심이 가장 많을 겁니다. 물론 제일 큰 관심은 우리에게 두었을 테고요. 정확히는 형님께."

플란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물렁물렁한 당근을 맛있게 먹은 칼리안이, 일상을 언급하는 듯한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놈은 왕관에 욕심 없습니다. 그 정도의 것에 욕심이 있었으면 이제껏 텐실에 있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럼."

"브리센. 그리고 카이리스 왕가 전체."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일부러 내던 가벼움을 던지고 플란츠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브리센을 몰락시키고. 란델 형님을 왕위에 올려 멋대로 주무르고. 저를 죽이고."

칼리안이 라시드의 검을 막지 않은 그 순간.

라시드는 플란츠를 죽이지 않았다. 굳이 살려뒀다. 죽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죽일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 뒤 이곳에 홀로 남겨지는 형님이······ 어떻게 될지. 그것을 잘 아는 놈인 것 같습니다."

"······ 그렇군."

"우리 셋이 각각 어떤 결말을 가장 꺼려할지 아는 놈이라고. 그렇게 느꼈습니다, 저는. 그것을 왜 알아냈는지, 그렇게 할 마음을 먹은 이유도 모르겠고 거기까지 해 두는 것이 목표일지 다른 더 큰 것이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우선 제가 겪은 바로는 그렇습니다. 놈이 카이리스 왕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요."

"아니."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닐 텐데."

"그리 싫어할 만한, 제가 모르는 일이 있었습니까."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 예를 보이렴. 바닥을 짚고, 무릎을 대고, 고개를 숙여야지.

"있었어."

- 아직 배우지 못해 그리 하기가 어렵다면 네 어미가 먼저 방법을 알려주는 것도 좋겠구나. 어떻게 하라 알려주는 것이 좋겠니? 플란츠, 내 아가. 대답해주렴.

한 번 든 것을 잊는 일 같은 건 겪어본 적 없는 이의 머릿속에, 실로 향기로운 기억의 편린이 다시 떠오른다.

- ······ 제가······ 알려줄게요.

향이 든다.

- 제가 바닥을 짚고 무릎을 대고 어머니의 앞에 고개를 숙여 보이면. 저들도 배울 테니까요.

- ······ 아!

향이 든다.

- 그건 정말······ 정말 좋은 방법이구나. 플란츠.

옅어졌다 하나 쉬이 잊히지는 않을.

르니에리 향이 든다.

"그리 싫어할 만한 일······ 있었어."

"네."

- 챙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기억에 잠겨들던 연두색 눈이 앞을 향했다.

자신을 곧게 마주쳐오는 붉은 눈을 보았다.

테이블 아래로 떨어진 유리잔이 보인다.

어느새 사라진 향기 대신 피 냄새가 다시 든다. 산산이 깨진 유리잔이 보인다. 온통 흩어진 유리조각이 보인다. 그 속에 담겨있던 투명한 물이 잔을 벗어나 속박없이 흐른 것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칼리안이 사과를 건넸다.

들려있던 유리잔을 놓아버린 손을 천천히 제 자리로 되돌리면서. 부서진 채 바닥에 흩어진 것들을 향해서는 일말의 시선도 두지 않은 채로.

* * *

나비가 날아올랐다.

"미양······."

있는 힘껏 뛰어올랐으나 나비 날개에도 스치지 못한 잿빛 고양이가 시무룩한 소리를 냈다. 축 쳐진 그 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은 플란츠의 품 속에서 하얀 고양이가 머리를 부볐다. 루시를 한 번 쓰다듬은 손을 내려 안네의 등을 쓸어내린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안네."

"니아앙."

"너는 아직 못 잡아. 짧아서."

루시보다 팔도 짧고 다리도 짧고 배도 둥그래서.

"니앙!"

안네의 입에서 불만 가득한 소리가 났다. 하루가 멀다하고 고양이 짖는 소리를 에피타이저 삼아 식사를 하고 한시가 아깝다는 듯 개짖는 소리를 내는 동종업자와 일을 하다 그렇게 됐는지, 사실 서로 의미를 알고 대화하는게 맞기는 한지 알 수는 없었으나, 아무튼 루시와 안네를 앞에 둔 채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그 모습을 신기한 듯 보던 리리에가, 나비를 잡으려던 안네의 발에 밟혀 바닥에 누운 긴 풀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플란츠가 안네의 털에 묻은 풀조각을 하나하나 손으로 떼어주는 사이 꼬물꼬물 무언가를 만들었다.

"저하."

안네의 턱밑에 붙은 풀씨를 떼어냈을 즈음, 리리에가 플란츠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작은 손바닥에 더 작은 무언가가 올려져 있었다.

서툰 솜씨였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은 아니었던 까닭에,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배인가."

닻도 없고 돛도 없고 거창한 선실도 없고 호사스러운 난간도 없는 풀잎 배. 플란츠가 딱 한 번 타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녹빛의 배가 같은 색의 눈을 가진 리리에의 손바닥에 올라 있었다.

"네. 맞아요."

알아봐주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는 듯 리리에가 신나하며 대답했다. 루시를 잠시 내려놓고 그것을 받아든 플란츠가 한동안 고민을 했다. 이런 것을 보면 무어라 답해야 하는지에 대해 칼리안이 가르쳐 준 적이 없던 까닭에. 그래서 한참동안 말을 고르다 물었다.

"소공작이 알려줬나."

"아니에요, 저하."

그렇다면 세리에거나, 슬레이만이거나, 혹은 얀이거나. 지그프리드의 다른 기사들일 수도 있겠다. 오르골을 선물해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무등을 태워주고. 많이 아껴준다 하였으니.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리리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드미레아를 만나기 전에, 아저씨가 알려줬어요."

그런데 리리에는 이렇게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다.

드미레아를 만나기 전이라면 에반의 저택에 있을 때였다. 혹은 그 전, 친모와 지낼 때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너무 어려 기억이 남아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를 물어야 하는지 물어도 괜찮은지를 다시 고민하는데 리리에의 말이 들려왔다.

"드미레아랑 비슷한 갈색머리 아저씨가 알려줬어요."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작은 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 그렇게 하려 했다.

"그런데 그 아저씨, 저랑 눈 색이 똑같아서 신기했어요."

우뚝.

플란츠의 손이 멈췄다. 눈길이 멈췄다.

'······ 라시드 브리센. 설마.'

플란츠의 머릿속에 떠오른 모습은 보지 못할 리리에가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제 손에 들린 배를 호수 위에 띄웠다.

바람이 불었다.

용케도 물에 뜬 작은 배가 찰랑찰랑, 은빛 물결을 타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것을 보는 리리에는 웃었고 플란츠는 웃지 못했다.

"저하."

그런 플란츠의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채 갈무리되지 않은 생각을 잠시 접어둔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레릭과 드미레아가 함께 서 있었다. 플란츠를 불렀던 레릭이 용건을 입에 올렸다.

"귀족들이 왕궁에 찾아와 있습니다. 알현을 요청했다 합니다."

잠시 드미레아를, 그리고 리리에를 보던 플란츠가 답했다.

"소문 때문에."

"네. 아침에 말씀드린 그 일로, 전하께서 부재하신 것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습니다."

"알았어."

"그런데 방금전에······ 칼리안 왕자님이 회의장으로 갔다 합니다."

"아우님이, 왜."

그건 저도 몰라요.

이런 얼굴이 된 레릭이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그리고 체르밀 궁 앞에서 칼리안을 마주치고 깜짝 놀란 플란츠의 다른 시종이 전해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보다······ 칼리안 왕자님의 의복이······ 그것이."

잠시 말을 고르던 레릭이 플란츠 쪽으로 고개를 가까이 가져갔다. 문제의 그 옷이 어땠는지 알렸다.

"하."

웃음일지 한숨일지 재미일지 짜증일지 모를 짧은 소리가 플란츠의 입에서 나왔다.

르니에리 향기.

그것을 떠올렸다. 실리케와의 일을 회상했다. 잠깐이나마 향기에 질려있던 어제의 일을 생각해냈다.

그래. 그걸 봤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목줄이 풀렸다. 유리잔 하나 깨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차서 아예 목줄을 풀었다. 왕세자 플란츠의 위에 자신이 올라갈 때, 조용히 가늠해보고 있었을 그 때를 지금으로 정했다.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갑작스럽게.

"······ 미친 새끼."

리리에는 듣지 못할, 그러나 레릭과 드미레아에게는 참 잘 들릴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에 많이 놀란 레릭을 지나쳐 드미레아를 쳐다본 플란츠가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호숫가에 뜬 작은 배를 지켜보는 리리에를 가리켜보였다.

"소공작. 리리에를."

"알겠습니다."

플란츠의 험한 말에 살짝 웃던 드미레아가 의미를 알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리리에에게 걸어가 저녁에 다시 보자는 인사를 건넨 플란츠가 체르밀 궁을 향해 발을 옮겼다.

내 동생이 또 멋대로 풀고 나간 목줄 붙들러.

* * *

- 뚜벅, 뚜벅.

회의실의 가장 앞.

귀족들보다 무릎 하나 정도는 높은 곳. 어떻게 하여도 귀족들을 내려다보는 곳. 어떻게 하여도 국왕을 올려다보게 하는 곳.

그곳의 가장 가운데에 놓인 르메인의 자리, 바로 옆에 마련된 플란츠의 자리. 두 자리의 앞에 칼리안이 잠시 멈춰 섰다. 길고 붉은 망토의 끝이 가장 거대한 의자에 살짝 걸쳐졌다. 그 곁에 놓인, 왕세자를 위한 의자의 팔걸이를 톡톡톡 건드린 칼리안이 자신의 자리로 갔다. 그리고 그 어느때보다 편안한 얼굴로 의자에 앉은 뒤 귀족들을 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숨소리 하나 크게 들리지 않는 회의장에 아주 잠시 사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보다 더 조심할 수 없을 움직임으로 자리에 앉은 이들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올려다봤다.

"궁금한 것들이 많아 이렇게 찾아온 듯 한데."

알현을 요청했고 칼리안이 왔다.

그러니 그것은 알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칼리안은 멋대로 입을 열었다. 귀족들은 들었다.

"사실 전하께서 지금 슈린츠에 계십니다."

칼리안이 말했다. 술렁이는 소리가 아주 잠시 이어지다 금세 가라앉는다. 그 긴장이 마음에 든다는 듯 미세하게 끌어올려졌던 붉은 입술 사이에서 고운 미성이 흘러나왔다.

"짐을 진 노새도 나흘에 하루는 쉼을 가지는데. 이 나라를 진 분께서도 쉬어가는 날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여 잠시 편안히 계시도록, 그리 하였습니다."

제 아비를, 일국의 국왕을, 한낱 노새에 가져다댔다.

또 한 번 술렁임이 인다.

르메인을 슈린츠에 보낸 것이 나라고 말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거짓말을 못했으니까. 그럼에도 귀족들은 그것이 칼리안이 한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터였다. 그런 칼리안이 왕세자위에서 얌전히 물러나리라 생각지 않을 터였다. 어서 플란츠를 세자위에 올리라 주장하지도, 결국 정해진대로 플란츠가 세자위에 오르리라 자신하지도 못할 터였다.

"해서 이번에 있을 귀족 회의는 잠시 미뤄둘까. 전하께서 돌아오신 이후로 날을 다시 잡을까. 그리 생각을 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톡, 톡, 톡.

칼리안의 손 끝이 팔걸이에 닿아 작은 소리를 냈다. 꼿꼿이 세운 등을 의자에 대고 팔걸이에 한 팔을 올린 채 잠시 생각을 이어나가던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귀족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폈다. 왕세자의 정복이 아니었으나 분명 왕세자의 정복이 맞는,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그런 옷을 입은 채로.

"아무래도······ 아쉬워서."

웃음을 보였다.

칼리안을 따르던 이든 그렇지 않던 이든. 누구도 거절하기 어려울 웃음을 지었다. 격식도 득실도 왕실의 법도도 모두 다 잠시 잊게 만들 웃음을 지었다.

"급한 건이 있다면 이대로 약식으로나마 회의를 진행하고 나머지 일은 전하께서 오신 뒤에,"

- 벌컥!

그런데 그때.

조용한 가운데 오로지 한 사람의 목소리만 울리던 회의실 문이 열렸다. 직접 제 손으로 회의실 문을 연 이가 발을 내딛었다.

- 저벅.

- 저벅.

칼리안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새로 든 이에게로 향했다.

- 저벅, 저벅.

검은색의 긴 망토가 걸음걸이마다 이는 바람에 부풀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칼리안의 것과 똑같은 금장으로 장식된 짙은 감청색의 재킷이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다 감추기를 계속했다. 그보다 더 짙은 베스트와 검은 바지가 함께 보였다. 검은 셔츠가 보였다.

왕세자의 정복.

칼리안의 것과 색만 다른, 왕세자의 정복. 그것이 보였다.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동생에게 시위를 하듯이, 진짜 자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듯이, 그렇게 자신의 정복을 입고 회의장에 찾아온 플란츠가 발을 멈췄다. 입을 열었다.

"함께 들자 하였더니. 내 아우님께서는 무엇이 바빠 이렇게 먼저 걸음을 하셨는지."

팔걸이 위에 놓여있던 칼리안의 손 끝이 긴 호선을 그리다 우뚝 멈췄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난 뒤, 한 단 아래 서 있는 플란츠를 내려다 본 칼리안이 답을 전했다.

"함께 들고자 하셨습니까."

"아니었나. 나는 그런 줄로 알았는데."

플란츠가 칼리안을 마주 쳐다봤다.

자신을 배신하지 않겠노라 했던 형제를 기어코 밟고 올라서려는 이의 붉은 눈을 쳐다봤다. 그것이 큰 왕관이든 작은 왕관이든, 제 형제를 절대로 왕관 앞에 무릎 꿇리지 않겠노라 마음 먹은 이의 붉은 눈을 쳐다봤다. 동생을 믿다 배신당한 어리석은 형으로 남을지언정 저를 도와준 동생의 손을 놓고 홀로 핀 꽃처럼 여겨지도록 만들지는 않겠노라 작정한 이의 붉은 눈을 쳐다봤다.

"착각을 하였다 하시니."

이렇게 말한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탁.

그리고 손을 움직였다.

망토를 여미던 에메랄드 장식을 풀었다. 그것을 놓았다.

- ······ 스륵.

작은 브로치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지지할 곳을 잃은 검은 망토가 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이번에는 그것을 붙들어 줄 손이 없었으니 그렇게 떨어진 망토가 고스란히 바닥에 닿았다.

그것을 보던 칼리안의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플란츠의 손이 멈추지 않는 것을 본 까닭에. 뼈가 툭툭 불거진 그 손이 긴 재킷의 첫 단추에 가 닿는 것을 본 까닭에. 이 자리에서 왕세자의 정복을 다 벗어두려는 형의 검은 셔츠 소매에, 붉은 루비 커프스가 매달린 것을 본 까닭에.

"······ 하."

내가.

오랜만에 혼자 좀 멋있게 나서볼까 했더니.

"미친 새끼."

칼리안의 입에서 아주 작은 감상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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