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06화 (407/527)

제72장. 아무래도 아쉬워서(4)

단 향의 끝에 짭쪼름한 맛이 든다.

소금이 든 캐러멜을 살짝 입힌 아몬드 맛에 매료되어 계속 손이 갔다. 단맛만 강해서는 쉬이 질렸을 텐데 끝에 감도는 짠맛 덕에 끝없이 손을 뻗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또 하나, 잠시 뒤에 다시 하나 더. 약제실 테이블의 맨 끝에 올려져 있던 간식의 절반 쯤이 그렇게 아리안느의 입으로 야금야금 들어가 사라졌다.

벌어진 상처를 아물게 할 약의 재료를 정확히 계량하고 나눠 놓느라 잠시 집중했던 베로니카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확 줄어든 아몬드를 보며 머쓱하게 웃은 아리안느가 입을 열었다.

"어쩌지? 내가 거의 다 먹어버렸어."

"괜찮아. 어차피 할아버지가 또 가져다 놓을 거야."

"마나실 경 단 것 진짜 좋아하시는구나."

"너무 좋아해서 탈이야. 나는 별로던데 우리 할아버지는 어떻게 그런 걸 입에 달고 사는지."

격식 안따지기로는 아리안느나 베로니카나 우열을 가리기가 힘든 사람들 아니던가. 덕분에 둘은, 말을 편히 하자는 합의조차 없이 어느새 자연스레 말을 놓는 사이가 됐다. 베로니카를 포함한 카이리스의 약제사들과 아리안느가 함께 수면제를 만들어내던 그 짧은 날 동안 이뤄진 일이다.

"쓴 약은 또 얼마나 싫어하나 몰라. 이런 것 들어가면 절대 안 먹어, 우리 할아버지는."

"아."

계량을 마친 재료들을 한 쪽에 정리해둔 뒤 쓴 맛으로 이름난 약초의 줄기를 잘게 잘라내던 베로니카가 툴툴거리듯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아리안느가 베로니카의 손에 잘려나가던 것을 가리켜보였다.

"우리 전하도. 쓴 맛 강한 차는 절대 안 마셔. 커피는 잘 마시면서."

"맞아. 할아버지도. 커피는 쓰게 마시는데도 그래. 내가 할아버지한테 만들어주는 약에서 쓴 맛 나는 걸 다 빼버리느라 쓴 약초를 이미 다 외웠다니까."

공감대 하나가 생긴 베로니카가 피식 웃었다.

다만 아리안느는 웃지 못했다. 내 정혼자랑 비슷한 나이로 보이긴 해도 엄연히 연로한 쟤네 할아버지랑 아직 창창한 내 정혼자 입맛이 닮은 것을 반가워해야 할지 착잡하게 여겨야 할지를 잠깐 고민해야 했으니까.

"이게 마른 피 냄새가 아니라 쓴 냄새가 나는 거였으면 진작에 찾아냈을 텐데."

그런 아리안느의 귀에 베로니카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헤르제네스?"

"응. 아빠가 남긴 도감에도 있던 풀인데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바로 떠올리지를 못했어. 언니가 안 알려줬으면 빨라도 지금쯤에나 생각해냈을걸."

헤르제네스.

뿌리를 짓찧으면 독특한 향이 감도는 새하얀 진을 내는 식물이었다.

칼리안이 사라졌던 날, 혼자서 왕궁으로 찾아온 레이븐의 온 몸에 풀조각과 흙이 잔뜩이었다. 험한 곳을 달렸거나 땅을 뒹굴었거나, 혹은 드러누웠었거나. 우선은 그 정도로만 상황을 파악한 뒤 레이븐을 체르밀 궁에 보냈다. 그런데 레이븐을 닦아주던 시종이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얀이 앨런에게 내용을 알렸고 히나가 찾아와 그 시종이 수면제 때문에 잠든 상태임을 확인했으며 이후에는 약제사들이 나서서 수면제의 성분을 파악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을 씨름하던 중 칼리안이 돌아왔다. 그리고 '마른 피 냄새가 났다'는 말을 전했다. 그래서 약제사들은 독주머니 뿐 아니라 혈액 속에도 마비 성분이 있다 알려진 몇몇 독사와 독충들을 후보에 올렸다.

'헤르제네스라는 풀, 혹시 알아? 언젠가 만났던 큰 배의 선원들이 그걸 술에 섞어 마시더라고. 조금씩 먹으면 근육 뭉친 걸 풀어준다길래 나도 먹어봤는데 냄새가 너무 역했어.'

피 냄새를 지닌 약초.

근육을 마비시키는 독초가 아니라 근육을 이완시키는 약초.

그것을 알려 준 사람이 바로 아리안느였다.

그렇게 약제사들은 아리안느의 도움과 레이븐의 털에 남아있었던 약의 반응, 칼리안이 전해왔던 다른 설명들로 말미암아 같은 효과를 내는 약을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물론 베로니카가 필요로 하는 재료들을 바로바로 조달해 준 것은 앨런이었다. 그리고 완성된 약을 선뜻 마셔주며 임상실험을 도와줬던 이는 제온이 관련됐다는 말에 칼리안을 찾아왔다가 베로니카를 만나 '소드마스터가 그런 것에 취해 잠들 리 없다'고 장담하다 깊은 잠에 빠진 뒤 해약을 먹고 개운하게 일어난 시오나였다.

"근데 좀 아쉽네. 우리나라나 텐실 쪽 바닷가 어디에서나 자라는 풀이라서. 경로 추적하기가 쉽지 않을 것 아냐."

"범인 잡거나 증거 찾는 건 우리 일 아니야. 약 재료 알아내고 똑같은 것 만들고 해약까지 줬으면 됐지. 나머지는 전하께서 하실 거야. 아니면 할아버지나."

이렇게 말한 베로니카가 길게 이어진 테이블의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 또 다른 약초를 들고 왔다. 그리고 그 꽃의 술을 조심스레 떼어다 모으며 말했다.

"아무튼 덕분에 시간 내에 약 만들어 보냈어. 고마워, 아리안느."

"새 수면제 배웠으니 나도 이득이지. 전하도 좋아할 거야.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유용하게 쓸 수 있으니까."

이렇게 대답하며 아몬드 하나를 더 가져와 먹은 아리안느가 베로니카를 향해 물었다.

"칼리안 왕자님은 어떠셨어? 약 잘 들었어?"

칼리안과 아리안느가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로 지내기로 했음을 아는 이는 몇 안 된다. 때문에 아리안느는 이름 뒤에 호칭과 존대를 붙였다.

"잘 들었어."

"바로 들었어?"

"아니. 그렇지는 않았대. 그래도 효과가 굉장히 강해."

"보람이 있네. 많이 고생한 것 같던데."

"아직도 고생할 게 많아."

베로니카가 수북이 쌓인 약초들과 다 만들어진 약들, 그리고 약제실을 분주히 오가는 다른 약제사들을 가리켜보였다.

"부군단장님이 우리들도 같이 훈련하게 될 거라 하시더니 진짜 그래. 그나마 나는 여기에서 제일 어리다고 저녁 되면 집에 가는데 다른 약제사들은 그러지도 못해. 아무튼 이번 일 끝나면 다들 쉬게 해준다 하셨으니까 나도 한 일주일 동안 할아버지 집에서 잠만 잘 거야."

"아, 쉬는구나. 잘 됐다."

이렇게 말한 아리안느가 길게 하품하는 베로니카를 향해 말을 이었다.

"그럼 조만간 그레이스 경이랑 세이렌 경이랑 베른 경이랑 같이 놀자. 지그프리드 소공작님도 초대를 하고. 너도 같이, 베로니카. 다 같이 술 마시면 재밌을 것 같아."

아리안느의 목소리가 한껏 들떠있었다. 카이리스에 온 뒤 제대로 마시지 못한 술 생각이 난 탓이다.

"나는 빼줘."

그런데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 같던 베로니카가 딱잘라 거절을 해 왔다. 눈이 동그래진 아리안느를 보면서, 베로니카가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술 안 마셔. 단 것도 별로고, 술도 별로야."

아리안느가 베로니카를 쳐다봤다.

단 것과 술의 연관성을, 그것이 싫은 이유를 눈치챘다. 앨런과 아무 상관 없이 지냈으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았으니까. 앨런과, 그의 아들이자 베로니카의 아버지인 로닐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말 실수를 했음을 깨달은 아리안느가 생긋 웃었다.

"그럼 술 안 마시고 놀면 되지."

그리고는 이렇게, 억지로 공감하거나 섣부른 위로를 하려 들거나 상처만 들출 뿐인 사과는 접어두고 또 다른 제안을 했다.

"소풍 가자. 세뉴 강 구경하고 싶어. 세크레타에는 그렇게 큰 강이 없어. 칼리안 왕자님한테 부탁해서 맛있는 것 잔뜩 싸달라고 할게."

그런 아리안느의 말이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재밌겠다."

"응. 강도 보고 꽃도 구경하고 놀자."

"그래."

고개를 끄덕인 베로니카가 마른 약초 묶음 몇 개를 집어들곤 아리안느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반대편 테이블에 놓인 빈 보울들을 가리켰다.

"빨리 놀러가고 싶으면 도와줘."

"도와?"

아리안느가 얼결에 질문을 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베로니카가 물었다.

"혹시 바빠?"

"아니. 오늘은 일정 없었어. 내일은 이 나라 법무 담당관 만나서 하루종일 지루한 얘기 나눠야 하겠지만."

"그럼 도와줘도 되겠네. 약 만들 줄 알잖아."

"나 이 나라 사람 아닌데? 혹시 몰랐어?"

"언니가 치료제 대신 독약 만들어 둘 사람 아닌 것만 알아. 지금 루시 안네 손이랑 코코 부리에도 도와달라 부탁해야 될 판이야."

아리안느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나라의 사람인데 이곳의 환자를 치료할 약을 만들어도 괜찮은지를, 혹시나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지를 가늠해보는 중이었다.

그러자 잘게 잘린 마른 나뭇잎 쪽으로 손을 뻗던 베로니카가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도와주면 수면제 해약 만드는 법 알려줄게."

아리안느가 안경을 꺼내 썼다.

찰랑, 하고 안경에 매달린 자수정 장식이 반짝였다.

"뭐부터 할까?"

세상에.

내 친구들 나라의 군대 대원들이 아프다는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 * *

타인의 기분을 맞춰 줄 필요가 없다.

눈에 거슬리면 인상을 찌푸리고 기분이 좋으면 웃음을 보이고 마음에 든다면 고개를 끄덕이고.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된다. 물론 가능하다는 것이지 그리 해도 괜찮다는 의미는 아니겠으나 어찌됐건 타인의 기분을 가늠하고 그에 맞추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누구도 그에 대해 불쾌함을 드러내지 못할 테니까.

왕족이 아닌가.

칼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왕의 아들로 나고 자라 왕의 동생으로 살다 죽었다. 다시 눈을 뜨니 다시 왕의 아들이었다. 그리하여, 나고 자라 살다 죽고 다시 눈을 떠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오랜 날을 사는 동안 오로지 왕족이었다. 그런 칼리안이었다.

"혹시 오해할까봐 얘기하는데."

그런데 그 칼리안이 누군가의 기분을 살필 때가 있었다.

편자를 갈아야 하는 레이븐의 곁을 지켜야 할지 장제사에게 그냥 맡겨두어도 사고가 생기지 않을지를 가늠할 때. 히나가 건넬 것이 이 세상을 다 안겨줄 듯한 미소일지 막내 왕자가 저지른 잘못이 적힌 팻말일지를 가늠할 때. 완두콩이 집요하게 풀만 집어드는 이유가 배가 불러서인지 풀이 되게 좋아서인지 고기가 엄청 싫어서인지 고기 사이에 섞인 물렁한 당근 때문인지를 가늠할 때. 눈꼬리가 가늘어진 앨런을 향해 '아버지'라 말해야 할지 '아버지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아끼고 아껴뒀던 비장의 무기 '아빠!'를 처음으로 꺼내 볼 날이 바로 오늘인지를 가늠할 때.

혹은.

"나 때문이기는 하지만 내가 잘못한 건 아니야"

내 시종의 퉁퉁 부은 눈과 나와 자신의 검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던 내 정혼자와 내가 밀폐된 방 안에 오붓이 남게 되었을 때.

"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입으로 꺼내지만 않은 것 같아서."

그것 참 신기하지.

너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배도 부르고 귀도 간지럽고 심지어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아, 드미레아.

"얀이 내 걱정을 많이 해서 그래. 얘기 잘 하고 풀었어."

"그러셨겠죠. 압니다."

"응."

통하지 않으리란 것을 알면서도 습관처럼 생글거리는 낯을 해 보인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바람마저 눈부실 것 같은 화창한 봄날이다.

손을 뻗으면 손가락 끝에 푸름이 감겨들 것 같은 봄날이다.

그런 봄의 햇살을 가득 담아 보석처럼 반짝이는 호수가 보인다. 은빛 물결을 시원하게 가르며 헤엄을 치는, 파란 리본을 목에 맨 오리 한 마리가 보인다. 따뜻한 것에 안겨 기분 좋게 눈을 감고 있는 은백색 고양이 한 마리, 긴 풀 위에 살포시 앉은 나비를 향해 폴짝 뛰어오르는 잿빛 고양이 한 마리가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며 쿠키 속에 든 것이 바나나잼이었음을 알았을 때보다 더 행복해하는 웃음을 짓는 녹빛 머리의 아이 한 명, 은백색 고양이를 품에 안고 말없이 곁을 지키는 파릇한 분 한 포기도 보인다.

그것 참 이상하지.

창 밖은 저렇게 어엿한 봄인데.

"여긴 되게 춥다, 드미레아."

"아버지는 추위 안 타시던데. 담요라도 가져오라 할까요."

"······ 아니. 괜찮아."

고개를 끄덕인 드미레아가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아리안느가 선물해 준, 등나무꽃을 하나하나 따다 만든 꽃청을 넣은 차에서 봄 향기가 났다.

찻잔에 담긴 연보랏빛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알릴까요. 숨길까요."

"무엇을?"

"시신 말입니다. 어제 두고 가신."

칼리안이 눈을 내리뜨며 웃었다.

"에일라가 뒤처리를 한 줄 알았는데."

"네. 브리지트 경이 시신을 처리하기는 했습니다만. 그 일을 알리실 예정인지를 여쭙는 겁니다."

기사 대우.

아직 기사가 되지 않은 에일라였으나 칼리안 주변의 사람들은 에일라를 기사로 대했다. 어지간한 기사 이상의 무력을 이미 지니고 있는 까닭이기도 했고 에일라를 부리는 이가 칼리안이기 때문에 보여주는 예우이기도 했다.

"그 자를 이미 죽인 것을 브리센 측에 숨길 생각이시라면 저희 역시 계속 손님 한 명을 보호 중인 것으로 해 두어야 하니까요."

"슈린츠에 다녀올 거야. 그 때까지만 숨겨줬으면 해."

"휘트린이 아니라 슈린츠에 가십니까."

"응. 슈린츠부터."

이 말을 들은 드미레아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칼리안의 차림새를 살폈다.

"밤 사이 퍼진 소문 때문에 귀족들이 왕궁으로 모여들던데. 그것도 왕자님께서 하신 일입니까."

"그렇지. 여긴 소문이 참 빨라서 좋아. 세크레타는 소문이 잘 안 퍼졌거든."

"지금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실을 마나실 경이 숨긴 것으로 압니다. 굳이 그 일을 퍼뜨려서 좋을 것이 있겠습니까."

"좋은 것이 있을지 없을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지."

"라시드 브리센 때문입니까."

"라시드 브리센과 제온 때문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아."

"귀족들의 혼란이 심할 겁니다. 왕세자위는 정해졌다 하나 플란츠 왕세자 저하께서 아직 작은 왕관을 승계하진 않았습니다. 예식을 치르지도 않았고 카밀론으로 거처를 옮기지도 않았습니다. 호칭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 안그래도 귀족들이 혼란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전하께서 왕궁을 비우신 것이 알려진다면. 그 앞에 왕자님께서 나선다면."

"재밌는 생각들을 하겠지."

드미레아의 시선이 다시 찻잔을 향한다.

찻물의 색과 꼭 닮은, 서리바람 같던 연보랏빛 눈. 사람의 것이라 여기기에는 지나치게 서늘하던 눈빛을 떠올렸다. 세상의 모든 불을 다 집어삼킨 듯한 붉은 눈이 간혹 어떻게 그렇게까지 시릴 수 있었는지를 이해시켰던 그 눈빛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늘 시끄러울지도 몰라."

"시끄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옷을 입으셨는데."

밤새 칼리안의 옷을 다시 꾸며두느라 고생했을 의상 담당자를 잠시 떠올린 드미레아가 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그 말에, 칼리안이 찻잔을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시끄러운데 굳이 나가지 말고. 리리에 데려온 김에 루비아 관에서 하루만 자고 가. 아리안느도 있고 카스트린 경도 있으니까 재밌을 거야."

"네.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다."

"저녁은 나랑 같이 먹자, 정혼자님."

드미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칼리안을, 칼리안의 옷을 바라보다 낮게 물었다.

"정말. 그 차림으로 귀족들을 만나실 생각입니까."

한기를 가득 머금은 붉은 눈이 기대감을 가득 담아 부풀어오른다. 별보다 반짝이고 꽃보다 향기롭고 죽은 심장보다 차가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그려냈다.

다른 대답이 필요치 않은 미소였다.

* * *

칼리안의 사람이 누군가에게 공격을 당했다.

그 자리에 찾아든 칼리안이 직접 나서 검을 겨뤘다. 그런데 그날 밤 칼리안이 사라졌다. 르메인은 그레이 브리센 후작저에 국왕 친위대 엘라자르를 보내 수색했으나 칼리안을 찾지 못했다. 그런데 며칠 뒤, 플란츠 왕세자와 발칸이 같은 곳을 수색한 뒤 칼리안이 돌아왔다.

그레이 브리센은 자신이 발견한 칼리안을 '보호'하고 왕궁까지 호위한 것이라 했다. 칼리안은 그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플란츠 역시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앨런 마나실을 위시한 발칸도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르메인은.

아무것도 해명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일주일 여가 지났을 때, 한밤중에 왕실의 숲에 불길이 일었다. 그리고 칼리안의 세력인 아이즌 에이프린 백작이 보내 온 기사 백 명이 드미레아 지그프리드 소공작의 손을 거쳐 왕궁으로 급히 입궁했다. 그리고 르메인이.

슈린츠의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수도의 귀족들이 거의 다 모였는데. 우리 전부에게 독주를 내리시는 건 아니겠지.'

'누가. 칼리안 왕자님께서?'

사실 확인을 위해 귀족들이 왕궁에 모여들었다.

'누구든. 다만 그런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란델 왕자님 쪽이 아니겠나. 앨런 마나실과 새로운 기사 세력을 손에 쥔 칼리안 왕자님이나, 브리센의 핏줄이면서 실질적으로 발칸을 쥐고 있는 플란츠 왕세자 저하는 가진 힘의 차이가 제법 팽팽한 편인데. 그 상황에서 귀족들에게 등을 돌릴 리가 없지 않나.'

브리센에 의해 제대로 숨조차 쉴 수 없던 르메인에게 왕권이라는 것을 되돌려 준 것이 바로 칼리안이었지 않나. 그럼에도 르메인은 칼리안이 아닌 플란츠에게 세자위를 주었다. 그런데 플란츠에게 정식으로 세자위를 내리는 예식을 언제 치를 예정인지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칼리안은 계속하여 플란츠와 함께 귀족들의 앞에 나섬으로써 르메인의 결정에 불만이 없다는 뜻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이 칼리안의 진심이 맞는지.

혹은 내심 쌓아두던 불만이 있었는지. 때문에 플란츠의 세자 책봉식이 미뤄지는 것인지.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일로 습격을 당한 뒤 행방불명되었던 칼리안과, 르메인이 칼리안을 곧바로 찾아내지 못한 것이 단순한 우연인지. 아니면 플란츠를 세자위에 올려둔 뒤 칼리안과 반목이 생겨 벌어진 일인지. 그것을 알 필요가 있었다.

'그건 그렇지. 란델 왕자님께서도 브리센의 한쪽 손을 쥐고 있다고는 하지만 텐실이나 대사막같은 진짜 세력은 한 걸음 멀리 있기도 하고.'

'그래. 그러니까 란델 왕자가 이 참에 이곳에 모인 귀족들을 다 죽여 없애겠다 마음을 먹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 말이네.'

'그렇게 무서웠으면 영지로 도망이나 가 있지 왕궁에는 왜 왔나?'

'브리센 후작이 안 왔다 하기에 찾아왔지. 왕궁 밖에 브리센을 두고 왕궁에 찾아 온 귀족들을 싹 죽이지는 못할 테니 말일세. 게다가······.'

'게다가?'

본인들의 바쁜 일정과 업무를 전부 다 내버려둔 귀족들이 세뉴 관의 대회의실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알현을 요청했다.

르메인이 별궁에 간 것이 사실이라면 이 자리에 나타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사실이 아니라면 찾아와 얼굴을 비출 터였다.

그렇게 되면 르메인과 칼리안이 등을 돌렸는지, 아니면 여전히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리라.

'플란츠 왕세자와 칼리안 왕자 중 누구의 편에 서야 할지, 나도 이제는 명확히 정해야 하지 않겠나. 그것을 제대로 살펴야 가문이 평안할 테니 이렇게 찾아올 수밖에.'

애석하게도 르메인과 칼리안이 '부자관계'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입에 올리는 셋이 '형제관계'임을 떠올리는 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넷 중에 왕관에 욕심을 내는 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 입장하십니다."

당연한 일이다.

왕족이 아닌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십시오."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르메인이 아닌 칼리안이 찾아왔다는 말에 의문을 떠올릴 새 없이 모두가 몸을 일으켰다.

- 뚜벅, 뚜벅.

고요한 회의장을 울리는 단단한 구두 소리.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섰다.

- 뚜벅.

고개를 숙였다.

- 뚜벅.

양 손을 모은다.

허리를 숙인다.

- 탁.

먼 곳에서 천천히 가까워지다 귀족들을 지나쳐 가장 앞까지 걸어간 이의 구두 소리. 그것이 멈춘 것을 느낀 뒤에 허리를 폈다. 고개를 들었다. 시선을 돌렸다.

칼리안을 바라봤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너나할 것 없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표정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눈빛을 가리기 위해서였다. 절대로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고개를 숙였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붉은 망토. 보란듯한 루비가 달린 장신구. 붉은 셔츠, 검은 타이, 검은 베스트와 검은 바지. 그리고,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재킷.

그래. 왕자의 정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화려한 금장이 더해진 길고 검은 재킷.

정해진 것과 색만 다를 뿐.

그것은 누가 보아도 분명.

"반갑습니다."

분명 왕세자의 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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