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장. 아무래도 아쉬워서(3)
칼리안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차게 식은 목소리가 검은 방을 울린다.
"말해."
클린을 열 번 쓰든 백 번 쓰든 죽은 이의 피 냄새는 지워지질 않는다. 그런데 머리가 좋으면 후각도 좋아지는 건지 그럴 거면 입맛이나 좋아지지 왜 하필 후각만 좋아서 피 냄새를 유난스레 잘 맡아내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파릇하신 분을 찾아갈 예정이 아닌가.
그래서 간단히라도 씻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빌헬름 관에 가려고 일단 체르밀로 왔다.
"메를린이 옷 준비하러 갔습니다. 차 드시는 동안 준비 마칠게요. 혹시 샤워도 하실 거예요?"
"네 말 듣고 할 거니까. 말해."
그런데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계속 고개만 푹 숙이고 있던 얀이, 무어라 말을 건네기도 전에 방 밖으로 나갔다. 얼마 뒤 돌아오더니 차를 내려놓고 곧바로 다시 나가려고 했다. 그것을 붙들어 잡은 참이었다.
전날. 잠에서 깨어나 드디어 얀을 만나게 된 뒤 할 수 있는 만큼 달래주고 사과도 했다. 세크리티아로 가기 전에 그동안 못 챙겼던 하모니카도 가르쳐줬다. 앨런과 밤새 다녀올 곳이 있다 미리 허락도 받았다. 오늘 아침에는 얀과 함께 식사를 하고 차도 마시고 마찬가지로 지그프리드에 다녀오겠다 이야기한 뒤에 나갔고 예정보다 일찍 왕궁에 돌아왔다.
그랬으니 화가 난 것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
"어떤 새끼가,"
"험한 말 쓰지 마세요."
"응. 미안. 안 쓸게."
"네."
"누가 그랬어. 형님이랑 싸웠어? 란델 형님 오셨었어? 다른 시종이 뭐라 그랬어? 괜찮으니까 말해봐, 얀."
아니, 대체.
내 새끼 코끼리 눈 어디갔냐고.
내 셔츠 단추구멍이 지금 쟤 눈보다 크겠다고. 저 덩치도 귀여워보이게 해주던 마법같은 멍멍이 눈이 반나절만에 홀랑 사라졌다고. 얼굴이 죄 팅팅 부어버려서, 구우려고 화덕 옆에 뒀다가 까먹는 바람에 익지는 않고 밤새도록 부풀어오르기만 한 검은보리빵처럼 됐다고.
그러니까 대체 어떤 새끼가 내 새끼 코끼리······.
"왕자님이요."
"나?"
"네."
"또? 내가 또 울렸어?"
"······ 네."
자리에 앉아 얀을 올려다보던 칼리안이 눈꼬리를 늘어뜨리며 말했다.
"얘기를 해줘야 알아, 나는. 그러니까 내가 뭘 했는지 얘기해줘. 다 들을게."
얀의 손목을 잡아 옆에 놓인 의자로 끌어내렸다. 안 그래도 도로 줄어든 키가 섭섭한 마당에 고개까지 치켜드는게 썩 편치는 않았던 탓이다. 일단 얀을 좀 앉혀놔야 대화가 될 것 같기도 했고.
칼리안이 끌어내리는대로 자리에 앉은 얀이 반쯤 까다 포기하고 물에 불려놓은 밤톨처럼 바뀐 얼굴을 들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좀처럼 입을 열지는 않았다.
조금 전에 얀이 건네준 뒤 딱 한 모금을 마신, 귤보다 꿀이 더 많이 든 차를 얀에게 내민 칼리안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칼리안을 앞에 둔 앨런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또 못 올까봐 걱정했어?"
"······ 네."
"그래서 울었어?"
"아뇨."
"그럼 왜 울었어."
칼리안이 주는 귤차를 보던 얀의 눈이 또 그렁그렁하게 바뀌었다. 깜짝 놀라서 차를 도로 내려놓은 칼리안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양 손바닥으로 얀의 눈을 덮었다. 언젠가 퉁퉁 부은 눈을 한 칼리안에게 히나가 그리해줬던 것처럼.
곧 칼리안의 손에 작은 마력이 감돈다.
차지 않은 냉기로 손을 식혔다.
불러낸 것은 분명 찬 기운이었는데 손바닥 사이로는 온기가 번졌다. 물기가 잔뜩 묻은 온기가 온 손바닥에 고였다.
"왕자님 예전에는 이런 것 안 해주셨어요."
얀의 입이 열렸다.
눈을 덮어주어 다행이라고, 아니었으면 할 말 잃은 지금의 얼굴을 다 들켰을 거라고. 그런 생각에 소리없는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대답했다.
"그래. 예전에는 안 했었어."
"왕자님께서 드시던 차 주신 적도 없었어요. 옆에 앉혀놓고 얘기하셨던 적 없었어요."
"맞아. 예전에는 안 그랬어."
"마법 쓰는 것도 안 보여주셨고 검도 못 쓰셨고 창 밖으로 뛰어내려가시는 적도 없었고 말도 무서워하셨어요."
"응. 알아."
"꿀 향기도 싫어하셨고 생굴 같은 것도 못 드셨고 민트차도 안 좋아하셨어요. 신 것은 입에도 못 대셨어요."
"그래. 기억 나."
"미안하다고 사과하신 적도 없었고 고맙다는 말 하신 적도 없었어요."
"응······ 그랬었어."
"험한 말도 안 하셨어요. 귀족들 앞에서, 전하 앞에서, 말 한 마디도 못하셨어요. 플란츠 왕세자 저하랑 란델 왕자님 앞에서는 제대로 고개도 못 드셨었어요."
"그래. 알아."
"그런데 하루아침에 달라지셨어요."
칼리안이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독차. 그것 때문에 이렇게 바뀌신 거죠. 저 다 알아요."
아.
눈을 덮어두어 정말 다행이다.
칼리안이 또 한 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칼리안이 바뀐 것을 다 알았다는 저 말에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이 되었을지. 그걸 안 보여줘서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래, 라고 대답하려 했다. 거짓말은 하기 싫었다.
"그 차."
그런데 얀이 먼저 말을 이었다.
"그 차에 독이 든 걸 제가 먼저 알아보지 못해서, 그런 일 또 안 겪으려고 왕자님이 이렇게 달라지신 것 맞죠. 싫어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다 바뀔 만큼 달라지신 것 맞죠."
"······ 응?"
칼리안이 잠시 멍한 얼굴이 됐다.
새끼 코끼리.
또 제멋대로 생각을 했다.
칼리안이 달라진 것을 두고 제 탓을 하고 있었다. 얀을 믿고 지내다 죽을 뻔해서 다른 사람에게 더 기대지 못하고 혼자 바뀌었다고.
베른이 칼리안의 몸에 든 것을 눈치챈 것이 아니라, 그냥 칼리안이 새 사람이 된 것이라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만큼 완전히 달라졌다고. 얀이 지켜주질 못해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제대로 잘못 짚었다는 소리다.
"······ 얀."
그래.
얀은 얀이지.
칼리안이 따뜻한 욕조에 가득 채워진 거품같은 목소리를 냈다.
"내가 달라진 게 속상했어?"
"당연하죠."
"왜 속상했어. 다들 좋아하잖아."
"왕자님이 바뀌고 싶어서 바뀐 것 아니잖아요. 억지로 그렇게 되신 거잖아요. 달라졌든 아니든 왕자님 얼굴이 편한 날을 찾기 어려운 건 마찬가진데 어떻게 좋아해요."
"하나도 안 좋고 싫기만 했어?"
후둑, 후둑.
더 운다.
뚝뚝 떨어지던 것이 후둑 후둑 떨어진다.
깜짝 놀란 칼리안이 서둘러 말했다.
"아니야. 미안해. 울지 마. 싫어도 되니까."
"어떻게 싫다고 해요. 싫은 게 없는데."
"······ 그런데 왜 더 울어?"
"지금이 더 좋다고 하면 왕자님의 예전 시간은 뭐가 돼요. 그때가 낫다 하면 지금 왕자님은 또 뭐가 되는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왕자님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지내시는지 제가 다 아는데. 안 드시던 것 먹고 안 하시던 것 하고, 고작 그런 것 좀 바뀌었다고 해서 지금이 좋은지 그 때가 좋은지 언제가 더 나은지, 그걸 제가 어떻게 골라요?"
후두둑, 후두둑.
"속상하게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알았어. 미안해. 안 물어볼게."
평생 할 사과 지금 다 한다.
덩달아 울고 싶은 얼굴이 된 칼리안이 손바닥 새로 바람을 흘려보냈다. 누구를 달래본 적이 없어서. 손이 더 시원해지면 나아질까, 바람이 불면 나아질까, 어떻게 해야할까. 손바닥 틈새로 새어나오는 것들에 온통 데여버릴 것 같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찌 할 줄을 모르고 얀의 말을 들었다.
"오늘 플란츠 왕세자 저하께서 들렀다 가셨어요. 왕자님이랑 얘기할 수 있는 팔찌 주시면서, 왕자님 어디 가도 계속 그걸로 얘기하라고 그러셨어요. 왕자님이 또 없어지면 저하께서 또 찾아다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 아······ 그러셨구나······."
칼리안이 애써 침착해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드래곤의 뼛조각이나 이빨로만 가공할 수 있는 드래곤의 가죽. 아델리아도 절대 훼손할 수 없는 재료. 거기에 더해 드래곤의 심장 조각까지 넣어서 만든 귀하디 귀한 통신용품.
그게 아까워서 그런 얼굴을 한 것은 아니었다.
칼리안도 얀에게 주려고 했다. 진짜로 거짓말 안하고 그건 얀한테 주려고 했다. 며칠 새에 새끼 코끼리 얼굴이 할아버지 코끼리가 됐기에, 그대로 두면 슬레이만보다 더 늙을 것 같아서 얀에게 주려고 했다. 그러니 팔찌가 아까운 것은 정말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완두콩이 멋대로 멋지게 건네 준 그거.
······ 내 팔찌다.
내가 받아서 멋지게 주려고 했던 거다. 뭐라고 하면서 멋지게 줄지도 이미 다 생각해 뒀었다. 그걸 완두콩이 홀라당 채갔다.
"그래서 저하한테 물어봤어요."
"뭘 물어봤어?"
"예전에는 왜 그랬냐고. 걱정하는 것도 알고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 왜 그랬냐고 물어봤어요. 제가 저하에게 화를 냈어요."
얀의 눈에서 손을 뗄 뻔한 칼리안이 눈을 내려감았다.
"형님이. 미안하다고 하셨어?"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서 울었어요. 저하께서······ 걱정하는 것도 알고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혹시 제가 진작에 나섰으면, 왕자님 대신 제가 따지고 싸우고 나섰으면. 그랬으면 어땠을까. 그랬으면. 저하께서도 도와주셨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그랬으면.
누군가는 더 이르게 독을 받고 누군가는 또 무너지고 누군가는 완전히 망가졌겠지.
······ 그렇게 전부 다 르니에리 향에 잠겼겠지.
"그게 아쉬워서 그렇게 서럽게 울었어?"
"네."
칼리안이 시원하게 식혀 둔 손을 떼고 얀을 봤다.
"내 새끼 코끼리 엄청 못생겼네."
엉망진창이 된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지 않고자 애쓰면서 클린을 써 눈물 콧물을 닦아줬다.
"아쉬운 건 예쁜 거라고 에일라가 그랬는데. 다 예쁘지만은 않은가보다."
가만가만, 평온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래. 아무래도 아쉬워서. 그래서 더 예쁜 것도 있고. 더 애달픈 것도 있고. 예뻐서 애달프고 애달파서 예쁘고. 그러다 다시 아쉽고. 그런가보다."
이렇게 살짝 웃은 칼리안이 도로 내려두었던 차를 다시 건넸다.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내려다보던 얀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팔찌 잘 가지고 있어. 아무때나 연락해서 아무 말이나 해도 되니까. 다 들어 줄 테니까, 내가."
"네······."
"아쉬워해줘서 고마워. 형님한테 그렇게 얘기해줘서 고마워. 예전보다 지금이 더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지금보다 예전이 나았다고 여기지 않아줘서, 똑같이 봐줘서. 그래줘서 고마워."
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마움의 무게를 다 알지도 못할 거면서.
"너 때문에 바뀐게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마. 그럼 '내'가 너무 속상하잖아."
"······ 네."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 아니야. 걱정해주는 것도 좋아. 하나도 안 싫어. 싫은 적 없어. 언제나 늘 좋았어. 대신 잠도 자고 밥 먹으면서 걱정해. 그 이상으로 걱정할 일은 안 하고 다닐 테니까, 내가. 그 정도만 걱정해."
조금만 속썩이겠다며 생글거리는 왕자를 향해 뭐라 답해야 할지 찾지 못한 얀이 피식거리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지금은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얀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칼리안이 주었던, 다 식은데다 달기만 한 차를 마셨다. 아직까지도 매일 맛이 다르고 그 플란츠도 한 모금 이상을 안 마시지만 칼리안은 늘 맛있게 다 마셔주는 차를 마셨다.
맛없었다.
맛있었다.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노튼 라미레즈인 줄 알았는데 노튼으로 변장했던 하얀 수리였어."
"하얀 수리······ 예전에 왕자님 습격했던 그 새끼,"
"시로이안. 험한 말 쓰지 말아야지."
"네. 안 쓸게요. 아무튼 그 놈들 중 한 명 아니에요?"
"맞아. 그 때 세크리티아 국왕 전하 손에 벌을 받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완전히 다른 놈을 자기 모습으로 변장시켜놓고 진작에 도망갔던 것 같아. 그러고선 이번엔 자기가 노튼으로 변장해서 나를 찾아왔어."
"놀랄 일이네요. 왜 그랬대요?"
"이유는 라시드를 캐보면 알게 될 것 같아. 하얀 수리가 굳이 팔까지 잘라가며 노튼으로 변할 이유가 있었는지. 그럴 놈이 아닌데 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일로 팔이 잘려서 때마침 비슷하던 노튼으로 변했던 건지. 그것도."
"라시드 브리센이요? 이번에 왕자님 습격했던 그······ 놈이요?"
"응. 맞아."
"그 하얀 수리라는 놈한테 안 물으시고 왜 라시드 브리센을 캐요?"
"죽었어."
"하얀 수리가 죽었어요? 저희 기사들이 있었을 텐데, 어쩌다가요?"
"더 물어볼까 했는데. 진짜 중요한 건 모르고 있던데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절대로 입 안 열 놈이라서. 게다가 나도 좀 화가 났고. 참다가는 듣기 싫은 말을 듣게 될까봐 못 참았어, 내가."
"왕자님이 화가 나서 놈이 죽었어요? 설마 왕자님 지금 직접 칼 쓰고 오셨어요? 그래서 옷 갈아입겠다 하신 거예요? 피 냄새 날까봐?"
"······ 응."
얀이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리고 칼리안을 발딱 일으켜 세웠다.
왕족 몸에 허락도 없이 손을 대면 안 되는 건 이미 다 까먹었다. 이리저리 칼리안을 돌려가며 어디 또 흠이 난 곳은 없는지 살피느라 여념이 없다. 손가락으로 툭 건드린 복어같은 눈을 한 채로, 그렇게 쪼그라든 눈에 뭐가 보이기는 하는지. 아무튼 열심히 이곳저곳을 살폈다.
"이래놓고 걱정 조금만 하라고 하시죠. 기사들도 잔뜩 있고 레아도 있고 어머니까지 있는 곳에 가셔서 직접 칼 들고 싸우다 오셔놓고 밥 먹고 잠 자면서 걱정하라고. 그런 말이 나오시죠?"
"······ 얀.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세."
"제일 세면 뭐해요. 제일 세다면서 제일 많이 다치시잖아요. 그러면서 제일 세기는 뭐가 제일 세요."
"그게 나도 좀 억울한데. 내가 제대로 된 정신머리로 싸운 적이 없어서 그렇지 제일 세기는 해."
"저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왕자님 이러시니까 제가 마음을 못 놓잖아요."
"알았어. 미안해."
"진짜 괜찮으세요? 다치신 곳 없어요?"
"응. 진짜 없어. 진짜 괜찮아."
"진짜요?"
"응. 괜찮아졌어. 정말로."
칼리안이 웃었다.
"그만하고 다시 앉아. 팔찌나 이리 줘봐. 쓰는 법 알려줄게."
"······ 네."
아무튼.
얀은 얀이다.
* * *
'바쁜 듯 보이는구나, 요즘.'
'아시는 것 같으니. 먼저 가겠습니다.'
'전하까지 별궁에 모셔놓고. 왕관 아래에 고개숙일 연습이라도 하는 것이냐.'
'대답이 필요한 질문입니까.'
'질문이라면 응당 대답이 돌아와야 하겠지.'
'그렇다 답하면 역시 너답다 하실 것이고, 아니다 답하면 네가 몰라 그렇지 형님 말이 결국은 맞으리라 하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 차라리 무슨 말을 들려주고 싶은지 알려주시면. 그렇다 아니다, 원하시는대로 골라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팔락.
완벽에 가까울 만큼 규칙적인 속도로 서류를 넘겼다.
눈으로는 그 안의 글자를 보고 머릿속으로는 우연히 마주친 형제와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손으로는 서명을 남기거나 반려 사유를 적거나 혹은 의견을 추가해 넣었다.
'나를 제법 아는듯이 말하는구나.'
'제법이 아니라. 잘 압니다. 저는 형님이 아니라서. 꺼려하고 증오했을지언정 눈을 돌린 적은 없던 까닭에.'
- 팔락.
그 뒤에는 예정보다 빠르게 왕궁으로 들어오게 된 기사 백 명의 정보를 살폈다. 그들의 이름과 출신지, 각자의 성향과 검술 특징을 정리해 머리에 담았다.
기억속에 보관된 기존 기사들의 정보를 토대로 새로운 이들이 보완이 될 수 있을 최적의 위치와 역할을 하나하나 따져본다. 기존의 기사들이 이번 싸움의 참여자인지, 부상을 입었는지, 언제 회복이 될 것인지. 그것을 함께 떠올려가며 새로운 기사들을 가장 먼저 배치해야 할 곳을 정한다.
그들이 각각 어떤 훈련부터 시작하면 될지에 대해 생각해두는 것도, 회복중인 기사들이 돌아왔을 때 배치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염두해두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그렇게 결정한 내용을 빈 종이에 옮겨 적었다.
'의외로구나. 네가.'
'무의한 일이었습니다만.'
'무의하지 않길 바란 적 있더냐.'
'무상한 질문을. 형님께서도 하십니까.'
- 팔락.
그 순간에도 형제와의 대화는 계속하여 귓가를 맴돈다.
오갔던 대화, 눈빛, 시선, 얼굴 표정. 그 어떤 것도 퇴색되거나 희미해지지 않고 고스란히 떠오른다.
'······ 그래. 무상한 질문이었구나.'
시종의 손에 들려있던 금빛의 정원가위.
그것이 무엇인지, 누가 준 것인지, 형제가 그것을 들고 정원에 나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그 역시 잊지 않고 따져본 머리는 충실하게 답을 알려온다.
그 답을 무시한 채 계속하여 서류를 넘겼다.
안도하지도, 애석해하지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기 위해 새로운 서류를 작성하고 올라온 보고서를 검토하여 반려하거나 수락한다. 의견을 적고 서명을 남긴다.
- 팔락.
- 팔락, 팔락.
"아무리 똑똑하셔도, 그렇게 쓰면 형님 머리 못 버팁니다."
- ······ 뚝.
플란츠의 손이 멈췄다.
다른 곳으로 돌려지지 않던 시선이 책상을 벗어났다.
"아니면 왼쪽 말고 오른쪽 팔까지 탈골되거나요. 워낙 이곳저곳 다 연약하신 분이라서."
"오자마자 짖으시는군."
"그렇게 혹사시키지는 마시죠. 그렇게 증명 안하셔도 형님 똑똑하신 것 잘 압니다. 흑말 잡고 진 뒤에 흰말을 잡고도 계속 져 봐서."
주저함없이 서류 위에 써내려가는 내용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얼마나 많은 것을 한번에 떠올리고 교차시켜가며 얻어낸 답인지, 플란츠를 제외한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칼리안이 어느새 찾아와 있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뒤에 서서 일하는 양을 보고 있던 것도 몰랐던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일부러 기척을 죽인 게 아니라 칼리안이 들어와 서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임을 안 까닭이다.
그것을 안 이유는 간단했다.
칼리안의 말이 들려옴과 동시에 느껴졌으니까.
"내 아우님께서 죽은 것으로 위장시켜가며 굳이 살려두신 보람이 없게 됐군."
오래되지 않았을 것 분명한 한 사람의 피 냄새가.
"아무튼 눈치는 어찌나 빠르신지."
공작저에 간 칼리안이 피 냄새를 묻혀온 것이 무슨 의미일지, 누구의 피 냄새를 달고 왔을지, 머리를 쓰지 말라 한 것이 무색하게 기어코 머리를 굴린다. 그것이 탐탁지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다만 제가 굳이 살려둔 사람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사람 말고 새 냄새입니다."
"새. 누구."
"하얀 수리. 아십니까."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칼리안이 공작저에 다녀온 일에 대해 빠짐없이 알렸다. 알려주지 않으면 또 혼자 생각을 할 테니 그냥 말해줬다.
"결국 다시 라시드 브리센이로군."
"결국 다시 제온인거죠."
"그래."
"얀이 한 말 때문에 이렇게까지 구시는 건 아닐 테고. 저 찾으러 체르밀 다녀오던 길에 란델 형님이라도 만나셨습니까."
누가 누구더러 눈치 빠르단 소리를 하고 있는지.
탁, 하고.
검토중이던 보고서를 내려놓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긴 설명은 하나도 안 붙인 대답이 이어졌다.
"만났어."
"싸우셨습니까."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주먹 쥔 손을 올려보이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 주먹 참 맵던데, 누구랑 싸우든 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 잔뜩 담겨있었다.
입을 안 열고도 짖는 법을 터득한 동생 놈을 보며 미간을 찌푸린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안 싸웠어."
"그럼 또 소금물같은 란델 형님 말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절여지기만 하신겁니까."
"······ 대화했어."
아마도.
"잘 하셨네요."
그것이 좋은 상대든 싫은 상대든.
대화를 했다 하니.
"기특한 일 하셨으니, 머리 식히러 가시죠."
"어디."
"슈린츠 갑니다. 전하 모시러."
"알았어."
"언제 가는지, 누구랑 가는지 자세한 건 하나도 안 물어보십니까? 형님 그러다 진짜 왕궁에서 나가시면 바로 사기 맞습니다. 미스릴 그물 구하고 마력탄 숨겨놓고 여기저기 마법 등불도 심어두셨던데, 안그래도 허전해진 금고 탈탈 털리면 고양이 밥은 누가 사줍니까."
"오늘도 많이 짖네."
"네. 오랜만이라 신나서요."
바로 전날 새벽에도 짖었다.
으르렁거리는 큰 짐승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튼 짖기는 했다. 그러므로 시커먼 고양이로 돌아와서 짖는 게 오랜만이라는 소리임을 알아듣고 할 말을 잃은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며 물었다.
"언제."
"이틀 뒤에 갑니다."
"누구."
짖는다더니.
알려준 것은 참 순하게 잘 배워서 묻는다.
웃음을 참아넘긴 칼리안이 대답했다.
"저랑 형님이랑 키리에, 에일라. 이렇게요.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지만. 생각은 일단 그렇습니다."
"알았어."
"아. 란델 형님도."
"너."
"요."
"말고."
지금 반말이 문제인가?
그 똑똑한 머리로도 돌아버리지는 않은 탓에 내 동생의 미친 생각을 미처 따라잡지 못한 플란츠가 눈꼬리를 찌푸렸다.
왕궁을 아예 비우겠단다.
아니. 발칸도 있고 앨런도 있으니 비워도 문제는 없을 거다. 왕궁을 비우든 나라를 비우든 개념을 비우든 그건 다 깊은 뜻이 있을 거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동행자가 붙었다. 그게 문제다.
"싫어."
그 이상 단호할 수 없는 대답이 플란츠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5층 창문 깨고 올라가신 뒤로는 란델 형님 보면서 르니에리 향은 안 맡게 되신 것 같던데. 대화도 하셨다면서. 그래도 싫으십니까."
"그래도. 싫어."
"네."
칼리안이 어여쁜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형님 너도 같이 가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를 지닌 웃음이었다.
"일단 저랑 저녁식사나 같이 하시죠."
"싫어."
"혹시······ 피 냄새 나서 싫으십니까."
"아니야."
"그럼 같이 드시죠. 혼자 먹기 심심해요."
"······ 알았어."
"네."
생글생글.
플란츠가 알아봤는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