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장. 아무래도 아쉬워서(2)
직접 할 필요 없는 일들이 많다.
이를테면 멀리 놓인 음식을 집어들기 위해 팔을 길게 뻗는다거나, 실수로 떨군 포크나 물잔을 좇아 시선을 돌린다거나, 옷을 갈아입기 위해 단추를 푼다거나, 누군가 건네는 것을 받기 위해 손을 내민다거나, 사과와 감사를 입에 담는다거나, 상대방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소개한다거나. 뭐 그런 일들을 말함이다.
노크를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르메인이나 란델이 안에 있는 곳이 아니라면 들어가겠노라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허락을 구하는 것은 그의 시종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그저 갈 곳을 정해 발을 옮길 뿐이다.
그는 왕족이니까.
- 저벅, 저벅.
그러니 들어가겠다는 허락조차 불필요한 곳의 문을 여는 일도 당연히 직접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친히 손을 뻗어 문 손잡이를 잡았다. 직접 할 필요가 없을 뿐이지 원한다면 얼마든지 손을 뻗을 수 있지 않겠나.
말했지만 그는, 왕족이니까.
- 벌컥!
손잡이를 돌렸다.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방문을 열어젖히고 혼자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러자 테라스 쪽에 쳐진 검은색의 쉬폰 커튼을 조금 더 걷어두던 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이곳에 허락없이 들어와도 괜찮을 몇 안 되는 이들 중 한 명의 방문이 결코 반갑지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플란츠 왕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담긴 것은 형식 뿐인 인사말이 들려왔다.
물론 플란츠는 신경쓰지 않았다.
익숙했고,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칼리안은."
"외출했습니다."
"어디."
"지그프리드 공작저입니다."
"왜."
"노튼 라미레즈를 직접 만나겠다 했습니다."
"언제."
"두 시간 전입니다."
거창한 싸움을 치르다 잠든 것이 바로 전날이다.
전날 점심 무렵 칼리안에게 변장용 팔찌를 전해주기 위해 내려갔을 땐 아직 잠들어있다 했었다. 그래서 문 앞을 지키던 키리에에게 팔찌를 넘겨주다 팔꿈치가 아직 탈골된 채인 것을 들켰다. 그것을 안 과묵한 키리에는 여러 설명 없이 '잠시 실례하겠다' 하더니 플란츠의 팔을 붙들고 어긋난 뼈를 그 자리에서 예쁘게 맞춰줬다. 덕분에 플란츠는 칼리안에게 뺏어두었던 통신 용품들도 돌려줘야 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아파서.
한밤이 되어 잊었던 것을 되떠올린 똑똑한 플란츠가 긴 복도 걷기를 생략하고 동생 방의 테라스로 찾아갔다. 그러나 텅텅 빈 침대만 확인했다. 어쩐지 돌아오는 길에 앨런의 집무실 불이 꺼져있더라니, 앨런에게 부탁해 바다 소금내가 그득한 곳에 찾아갔을 것이 뻔해서 더 기다리지 않고 도로 올라왔다.
그런데 이번에 또 없다.
그 새를 못 참고 또 나갔단다.
"······ 내 아우님께서는 참 바삐도 움직이시는군."
다소의 불만이 섞인 음색이 흘러나왔다.
누가보면 칼리안 혼자 바쁜 줄 알겠지만 지금 시간에 더 쫓기고 있는 이는 엄연히 플란츠 쪽이었다. 누구를 만나는 것에 허락을 구할 필요조차 없고 엄청 바쁘기까지 한 사람이 벌써 세 번째 빈 걸음을 한 셈이다.
어찌나 뽈뽈거리고 돌아다니는지.
이럴 때 보면 영락없이 봄 만난 멍멍이다.
"그러게요."
그런데 얀으로부터 이렇게, 동조하는 말이 되돌아왔다. 물론 바쁘다는 말에 대한 동조겠으나 플란츠에게는 그것이 내 동생 멍멍이같다는 생각에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그것을 모르는 채 잠시 침묵하던 얀이 시간을 확인한 뒤 말했다.
"저녁 전에는 오겠다 하셨고 이후에는 다른 일정이 없습니다. 돌아오면 곧바로 저하께 찾아가보시라 전해두겠습니다."
대답을 미룬 플란츠가 얀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기운이 쑥 빠진 얼굴을 하고 있다.
칼리안이 사라진 동안 애를 태우고, 다쳤다는 말에 하늘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고, 그런 와중에도 얼굴 한 번을 보지 못하다 간신히 만나게 되었는데 그새 또 외출을 했으니. 물론 칼리안이 알아서 잘 달래주기야 했겠으나 그렇다 해서 마음 앓은 것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 걱정이 어느 정도일지를 이제 잘 알게 된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고."
그리고 가져왔던 칼리안의 통신용품들 중 팔찌 하나를 꺼내 얀에게 건넸다. 아직 칼리안이 주인을 찾아주지 못한, 그래서 이건 내가 쓰겠노라 선언하려 했던 빈 팔찌. 그것을 멋대로 얀에게 건넸다.
따로 필요한 데가 있었으면 뭐. 능력 좋으신 만큼 금고 사정도 평탄하신 칼리안이 알아서 하겠지.
대충 그런 생각을 하는 채였다.
"통신용 팔찌입니까?"
"맞아."
"찾아가보시라 안 하고 이것만 전해드리면 돼요?"
"말고. 쓰라고. 너. 그거랑 연결된 반지는 내가 아우님 만나서 드릴 테니까."
플란츠의 말 뜻을 알아들은 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플란츠에게 팔찌를 도로 건네며 말했다.
"이걸 제가 어떻게 씁니까."
"마력 없어도 쓸 수 있는 건데."
"그게 아니라 저 말고 차라리 기사 베른 경에게······."
"걱정했잖아. 답답해하고."
플란츠가 얀의 말을 잘랐다.
"내 아우님께서 워낙 다사다난하셔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바쁘실 텐데. 거짓말도 못하시고 약속 어기는 것도 참 싫어하시니 이번같은 일 또 없을 거라고 너한테 장담하지도 못하셨을 것 아냐."
"······ 네."
"내 아우님이 그렇게 계속 도망가고 연락 안 되고 다쳐 올 때마다 익숙해지지도 않고 계속 걱정할거잖아, 넌."
"걱정을 어떻게 안 합니까."
"그러니까. 너 쓰라고."
얀이 입을 꾹 다물었다.
"네가 그걸로 뭔 소리를 하든 내 아우님은 다 들어주실 분 아닌가. 그러니 걱정을 하든 빨리 오라 조르든 잔소리를 하든. 네 마음대로 하라는 건데. 나가서 또 없어지고 안 올까봐 창가에서 멀쩡한 커튼이나 뒤적이고 있지 말고."
얀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에 들린 팔찌만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 꼴을 본 플란츠가 한 번 더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 내 아우님 또 없어지면 내가 또 찾아다 줄 테니까."
그리고 칼리안은 장담하지 못한 일을 대신 약속했다.
그 말이 오래도록 칼리안에게 좋지 않은 짓을 했던 형의 가식으로 보일지 위선으로 보일지.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았다. 다른 이도 아닌 얀이라면 그렇게 여겨도 되니까. 그렇게 여기는 게 당연하니까.
팔찌를 보던 얀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한참동안 말을 고르다 팔찌로 시선을 내렸다. 그것을 힘주어 꽉 쥐었다. 그러고도 또 한참을 보내다 다시 플란츠를 봤다. 청회색의 둥근 눈에 떠오른 온갖 말을 입으로 옮길 수 없어 어찌하지를 못하다가.
"이러실 거면서······ 전에는 왜 그러셨어요."
하고.
그 많은 말을 다 삼키고 한 가지만 물었다.
"이런 것 주시고 그런 말 하실 줄 아는 분이, 그동안에는 대체 왜 그러셨어요······."
플란츠가 가만히 얀을 마주봤다.
투명하게 부풀어오르는 그 눈을 말없이 바라보다 뒤로 돌아섰다. 저벅저벅 걸어 검은색 일색인 방의 문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서있다 잠시 눈을 내리떴다. 어떻게든 대답이 되지 못할 한 마디를 그 자리에 내려놨다.
"미안해."
조용히 문을 열었다. 한 발을 내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왜 그랬는지.
그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무슨 질문을 대하던 원치 않는다면 답하지 않아도 좋을 왕족이라서가 아니라. 30년이 지나고 50년이 지나고 생애 마지막 날이 온다 한들 절대로 답하지 못할 질문이라서. 아무 대답도 안 했다.
사과만, 했다.
* * *
- 티내지 말고 들어주세요.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진주같은 하얀 구슬.
통신용 마석을 통해 전해진 히나의 말.
"알았어."
고개를 끄덕였다.
- 그 사람, 라트란 영지에서 왕자님 손에 팔이 잘렸던 사람. 노튼 라미레즈라는 그 기사요. 만났어요. 어제 아침에 산책하다가요.
"응."
- 저 오빠랑 둘이 지낼 때 팔 다리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당연하게 가지고 있던 팔이나 다리가 사라진 것을 잊고 지내기까지, 사람들은 시간이 걸려요. 한 팔에 적응을 하기 전까지는 자꾸 잃어버린 쪽 어깨를 움직이곤 해요. 없는 팔을 쓰려는 것처럼요.
"응."
- 다들 그래요.
"그래, 히나."
- 그런데 그 사람이 그랬어요. 여전히 양 팔이 다 있는 것처럼, 그 일이 생긴지 벌써 삼 년이 되어가는데요. 그게 이상했고, 또······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서 왕자님이 그 사람을 따라가다 일이 생겼다는 말을 소공작님께 듣기도 했고. 그래서 제가 마음대로 몰래 살펴봤어요. 그런데.
"응."
- ······ 팔이 아문지 오래되지 않았어요. 한 쪽 팔이 없는 건 맞는데 잘려나간 방향도 다른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꼭······ 다른사람처럼요.
까만 눈으로 칼리안을 응시하던 히나가 이런 말을 했다.
그러더니 슬쩍 고개를 돌리며 제 목의 한 곳을 짚어보였다.
- 지그프리드의 기사님들이 수상한 장신구를 그냥 두진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찾아봤어요. 여기, 살갗 밑에. 숨겨놨어요.
그 뒤 히나는 생긋 웃는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어를 알아 볼 사람 많은 이 곳에서 수어조차 쓰지 않고 말을 전해온 것을 알아서, 그러나 그 구슬이 말을 주고받는 통신용품이 아니었던 까닭에, 칼리안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데블란이 얼마나 만들어서 어디에 어떻게 뿌려뒀는지 모를 변장용 마법 용품. 그것이 가짜임을 알아보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내야 되겠다 마음을 먹으면서.
그리고 더 이상의 다른 대답 없이 구슬을 돌려줬다.
마치 혼이 난 사람처럼, 조용히. 그 후 지그프리드의 별관으로 안내받아 걸어가는 내내 생각을 했다.
"하얀 수리."
답을 얻었다.
하얀 수리를 만났다.
제온의 손아귀에 넘어가 세크리티아를 배신했던.
칼리안을 공격하고 체이스와 앨런에게 붙들렸던.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던, 그 놈을 만났다.
"설탕 모양의 독약. 기억 나?"
그 놈이 멀쩡한 귀로 칼리안의 말을 듣고 아무 문제 없는 눈으로 칼리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반대로 뒤틀린 팔을 에일라에게 붙들린 채로.
"기억나지 않을리가 있겠습니까. 왕자님께서 직접 저에게 구해가셨던 물건이 아닙니까."
잘만 굴러가는 혀로 대답을 했다.
"맞아."
실리케를 앞에 두고 커피 속에 넣었던 약.
심장을 잠시 멈추게 하는, 설탕 조각을 닮은 약.
그 약을 떠올렸다.
"그걸 사러 너한테 갔었지. 세크리티아의 세작들이 쓰는 약이라서. 그러고보니 꽤 비싸게 주고 샀었는데 덕분에 내가 이렇게 살아있으니 싸게 산 셈 쳐야지."
추억거리 하나를 되짚어보듯 이야기한 칼리안이 하얀 수리를 쳐다봤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노튼 라미레즈가 가짜일 수도 있겠다는 걸 우연히 알았는데. 그러고 나니 내가 놈한테 그 설탕 조각을 줬던 일이 생각났어. 산골에서 구리광산 지키느라 왕자 얼굴 볼 일이 없어서, 왕자인 줄 모르고 칼 한 번 휘둘렀다는 것 때문에 사형되면 좀 억울하잖아. 그래서 그 약을 줬어. 죽은 걸로 위장해서 빼돌렸거든. 굳이 그렇게 살려내서 휘트린 영지로 보냈었지."
사실 억울해 할 것 같아서 살렸다기 보다는 라트란 영주를 잡아넣으려고 거래를 한 것이지만.
"그 일을 떠올리다가 깨달았어. 세작들이 그 약을 가지고 다니는 건 도망치기 위해서잖아. 죽은 놈을 누가 쫓아다니겠어."
톡, 톡, 톡.
"세작이. 말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면. 그게 죽은 거지. 그렇게 죽은 놈을 세크리티아 국왕께서 쫓을 리가 없지. 내가 널 신경쓸 리 없지. 내 스승님이 뒤를 캘 필요가 없지. 너도 그걸 알았겠지. 그래서 누구든 한 놈을 잡아 너인척, 모습을 바꾸게 했을 것 같은데. 그 놈은 그 말을 할 겨를도 없이 세크리티아 국왕께서 건넨 약을 먹었고. 그 뒤에 죽었을 테고. 라시드 브리센 손에."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하던 이를 죽였다던 라시드의 말을 떠올렸다. 그것이 하얀 수리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런데 아니었다.
체이스에게 약을 받던 그 때 이미 하얀 수리는 도망친 뒤였다. 저를 대신할 다른 놈을 변장시켜 세워 둔 채로.
"세작이 도망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죽은 척하는 거잖아."
에일라를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다시 하얀 수리를 봤다. 그리고 잘려나간지 오래되지 않았다 했던 팔을 쳐다봤다.
"나를 좀 불러내려는 이유로 팔 하나쯤 잃어버려도,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하게 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치."
다시, 톡, 톡, 톡.
어느새 자리에 앉아 테이블을 두드리던 칼리안이 하얀 수리를 향해 생긋 웃어보였다.
그 웃음을 본 하얀수리가 마주 웃었다.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더니.
- 화아악!
강한 힘으로 에일라의 팔을 밀어내며 몸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어디에서 주워다 숨겨놨는지 모를 금속 파편을 빼어 에일라를 향해 휘둘렀다.
칼리안은 일어나지 않았다.
놀라지도 않았다.
여전히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앉아있었다.
- 타앗!
한 팔을 잃은 것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계속 움직이려 드는 놈.
- 터억!
- 카가각!
그따위 놈의 칼날에 에일라가 당할 리가 없으니까.
- 콰앙!
하얀 수리를 도로 밀어내려 애쓰지 않고 손을 놓은 에일라가 한 발을 물리며 날붙이를 피했다. 그리고 다리를 뻗어 하얀 수리의 손을 걷어찼다.
끝내 금속 파편을 놓지 않은 하얀 수리가 에일라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품 속에서 단검을 꺼낸 에일라가 그것을 막았다. 그 뒤 반대편 손으로 하얀 수리의 손목을 잡아채며 몸을 회전시켰다. 에일라의 몸에 멋대로 끌려나가 비틀린 하얀 수리의 팔에서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두꺼운 굽으로 하얀 수리의 허리를 한 번 더 걷어찬 에일라가 하얀 수리를 테이블 위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고서도 놓지 않는 날붙이를 보다가.
- 콰직!
비녀를 뽑았다.
그것으로 하얀 수리의 손등을 내리찍었다.
- ······ 챙강!
손이 꿰뚫린 뒤에야 놓친 칼날이 예리한 음색을 낸다.
그것에는 눈도 돌리지 않은 에일라가 칼리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비싼 비녀라더니. 튼튼하네요."
"장식만 백금이야."
"미스릴이구나. 어쩐지 예쁘더라."
테이블에 푹 박혀들어간 비녀가 꼼짝도 하질 않는 것을 본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안 아껴 쓰겠다더니. 진짜 막 쓰네."
"막 써도 된다면서."
"······ 그래. 내가 그랬지."
"그새 어디서 샀어요, 이런 걸?"
"싼 비녀 사기 전에 맞춰놨던 거야."
고개를 끄덕인 에일라가 하얀 수리의 머리를 다시 한 번 테이블에 꾹 눌렀다.
칼리안이 가만히 입을 열어 하얀 수리를 향해 물었다.
"질문 딱 하나였는데. 계속 시간 낭비 할 거야?"
손등이 꿰뚫렸음에도 신음 한 번을 내지 않던 하얀 수리가 웃음소리를 냈다.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는 노기를 가득 띤 채 칼리안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새들을 참 잘 아시던데. 세크리티아 국왕과는 무슨 사이기에 그 자가 왕자님을 대신해 그렇게 새들을 죽였는지. 그것을 알려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자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한 때는 네 주인이던 분인데."
"인정이 지나쳐 새들에게 이름이나 돌려주는 한심한 이를 주인 삼은 적 없습니다."
"아······."
칼리안이 웃었다.
"이러다 나 또 화 못 참겠다. 빨리 끝내자, 우리."
허리를 똑바로 세운 칼리안이 가만가만 질문을 이어나갔다.
"내가 굳이 살린 놈. 네가 변장하고 있던 놈. 노튼 라미레즈. 죽였어?"
"모릅니다."
"그럼. 라시드 브리센은 알아?"
"누굴 말씀하시는지."
"그렇구나."
세작들에게 거짓말하는 법을 가르친 것은 베른이었다. 스스로 남을 속이지 못할 뿐, 속이는 법을 모르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노튼 라미레즈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진짜 모르고. 라시드 브리센은 알고."
그러니 굳이 진실된 답을 들을 필요 없다.
꺼내놓는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쯤은 알아볼 수 있으니까.
"내가 휘트린 영지로 도망시킨 놈. 그 놈이 나를 찾아왔다 하면 내가 관심을 가지긴 하겠지. 거기에 더해 네 이름도 좀 팔아주면 분명히 내가 꼬일 거라 생각했겠고. 아니야?"
하얀 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 역시 답이었다. 평온한 얼굴이, 조금도 바뀌지 않는 숨소리가,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일부러 만들어 낸 그 모든 '진실'의 표현이 답이 되었다.
톡, 톡, 톡.
잠시 테이블을 두드리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라시드 브리센이 너한테. 날 속여서 휘트린이든 어디든 내가 너를 따라나서게 하라 시켰나 보구나. 그래서 날 찾아왔는데 내가 먼저 널 봐버렸고. 나한테 그렇게 들킨 걸 눈치채서, 그레이 브리센 후작 잡으려던 덫에 나를 데려갔어. 그러다 나는 못 죽이고 웬 흰머리 마법사가 나타나서 네 일행을 다 죽여놓더니 날 데리고 사라졌지. 그래서 원래 계획을 다시 떠올린거야. 나를 다시 만나려고. 그래서 수도 경비대에 일부러 붙들렸어. 그렇게 하면 어떻게든 나에게 끈이 닿을 테니까."
하얀 수리가 웃었다.
칼리안이 웃음을 거뒀다.
"자세히 알려줘서 고맙다고 하고 싶긴 한데. 나는 사람 속 긁으려드는 놈은 별로 안 좋아해서."
- 우우웅!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나타난 검의 울음이 들렸다.
에일라가 하얀 수리로부터 손을 뗐다. 그 손에 박혀있던 비녀를 뽑았다. 그리고 한 발을 물러났다.
"그 말은 못 하겠네."
칼리안의 말이 하얀 수리의 귀에 들어갔다.
그리고.
- 콰직!
테이블 밑에서 생성된 단검이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하얀 수리를 향했다. 심장을 꿰뚫었다.
투둑, 투둑, 투둑.
이제는 정말로 생을 잃은 몸에서 짙은 향이 퍼저나간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에일라."
"네."
"이러고서 리리에를 또 볼 순 없으니 먼저 갈게. 드미레아한테 방 더럽혀서 미안하다고 전해줘."
"네. 왕자님."
"형님한테 가 있을 테니까. 끝나면 와."
"알겠어요."
수고 많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뒤처리를 맡긴다는 말도 안 했다.
그 비싼 비녀에 이미 다 담겨있는 말이었으니까.
"고생했어요."
대신 에일라가 이렇게 말을 건넸다.
뒤처리만 하기에는 너무 비싼 비녀였던 까닭에 비녀 준 사람도 함께 챙겼다.
"응."
짧게 답한 칼리안이 뒤로 돌아섰다.
잠시 숨을 참던 사람처럼 잠긴 문을 다시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발을 옮겼다.
고생했으니까.
이제 밥도 좀 먹고 숨도 좀 쉬러.
왕궁으로.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