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장. 아무래도 아쉬워서(1)
조금 전.
그러니까 정확히는······.
내 주인님이 푹 삶은 가지 껍질마냥 늘어져 잠든 것이 하루이틀의 일은 아니지만 늘어진 곳이 하필 내 머리 위였던 적은 처음인 탓에 두 발로 걷는 생물들은 본래 두 발로 서서 잠들기도 하는 건지 내 주인님 진짜 잠든게 맞기는 한지 아니면 이번엔 정말 죽은건지 그나저나 앞은 하나도 안 보이는데 나는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얌전히 버티고 서 있는 레이븐의 목 건강을 위해 얼른 다가온 키리에가 칼리안을 안장 위로 올려 체르밀 궁까지 옮겨다 놓은 때로부터 약 3시간 후.
혹은.
넉넉하게 쓰겠다고 서른 개나 만들어 둔 2인용 치료실에 자리가 모자랄 것 분명하여 미리 마련해 둔 간이 침대 하나씩을 더 놓고 중환자 여든 여섯 명을 다 넣어두긴 했는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너나 할 것 없이 밖으로 뛰쳐나와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서로에게 설명을 하다가 도로 기절한 놈들과 그 와중에 나 혼자 칼 말고 3왕자님의 발에 목이 밟혀 기절했다며 억울함을 토로하는 마법사에게 오늘 쓰고 남은 수면제를 치료약인 양 건네며 무해한 웃음을 짓는 베로니카와 그 수면제 이미 진작에 시원스레 들이켠 뒤 새벽부터 이제까지 숙면중인 또 다른 마법사의 평온한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플란츠가 싸움에 참여 안 한 사단장 둘에게 뒷처리를 맡기고 아르피아 궁으로 피신한 직후.
"많이 다치지는 않으셨는지요."
세상이 멸망하기 딱 하루 전의 혼돈을 체험하고 온 듯한 얼굴의 왕세자에게, 빌헬름 관의 상황에는 조금도 관심없다는 듯한 표정의 앨런이 부드럽게 물어왔다.
그러는 마법사 당신 발칸 군단장 아니었느냐고. 머리쓰고 싸우고 베인 나는 바빴는데 여기는 대체 왜 이렇게 평화로운 거냐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말을 애써 무시한 플란츠가 따뜻해진 날씨만큼이나 안온한 향을 내는 딸기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누구."
그리고 짧게 되물었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이 정도 일에 다치겠습니까. 저대로 한나절 푹 자고 나면 괜찮을 터이니 걱정할 것이 없지요. 당연히 저하께 여쭙는 겁니다."
"괜찮아. 별로."
깊이 파고 든 상처들이 아니었다.
축복의 힘이 있으니 굳이 약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적당히 붕대만 감고 레릭이 가져다 준 옷으로 갈아입은 뒤 빌헬름 관에서 나와 아르피아 궁에 찾아온 참이었다.
"체르밀 궁에 해약 안 보냈어. 내 아우님께서 밤잠을 계속 설치신 듯한데 이 김에 자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잘 하셨습니다. 저도 그리 했으면 좋겠다 여기고 있던 참이니."
"마력탄은 다 썼어. 그물은 꺼내고 있어."
칼리안은 몰랐지만 그 많은 마력탄과 그 대단한 미스릴 그물은 사실 앨런을 통해 얻은 것이었다. 정확히는 앨런의 부탁을 받은 에우리아의 허락을 얻어 마법사 협회의 보물창고에서 빌려왔다.
'저도 궁금하네요. 칼리안 왕자님을 발칸에서 이길 수 있을지.'
'발칸은 내 아우님 못 잡아.'
'네. 사실 저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듭니다. 칼리안 왕자님의 무력이 강하긴 하시죠. 제 벼락도 버티실 분이니까요.'
'강하든 약하든······ 내 아우님 못 잡아. 발칸은.'
'그럼 그렇게 장담하시면서 굳이 내기를 하겠다 하셨습니까. 협회 보물까지 빌려가시면서요.'
'못 잡아도. 필요해서.'
'필요한 싸움이라······ 흥미가 생기네요. 그럼 협회 물건들 빌려드리는 값 대신 잠시 구경이나 하면 안 되겠습니까?'
'안돼.'
물품 대여료도 아낄 겸 에우리아의 참관을 허락한다면 서로 좋은 일이기는 하겠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 아우님께서 아직 파혼하시기에는 곤란한 상황이라.'
놀랍게도 칼리안이 아직 비밀을 들키지 않은 사람이 정말 남아있기는 했고 그게 바로 에우리아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들키면 지그프리드 공작저 앞에 얌전히 무릎 꿇은 3왕자를 보게 되거나 시원하게 파혼서를 받는 동생의 꼬락서니를 보거나 둘 중 하나는 하게 될 것이 아니겠나. 형이 된 입장에서 물건값 아끼자고 동생을 팔아넘길 수는 없는 일이라 거절을 했다.
"그물은 천천히 돌려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협회에서도 당장 쓸 일 없던 것이니."
"알았어."
"마력탄 값은 제가 대신 치렀으니 되었습니다."
"······ 왜. 당신 아들 잡겠다고 쓴 마력탄인데."
앨런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예전보다는 많이 연해진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넣고 삼켰다.
"아들 약값을 아비가 내는 것에 이유가 있겠습니까. 당연한 것을요."
"약값이 되나."
"약값이 되지요. 약이었으니."
"그래."
칼리안은 물론 플란츠 역시 이 대단한 싸움의 이유에 대해 앨런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것이 약임을 알아본 마법사가 손을 내밀었다. 플란츠가 한 쪽에 세워 둔 시나스타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검은 제게 맡기시지요. 당장 왕궁 밖으로 나가기 어려우실 터이니 지그프리드의 공작저에 전해 두겠습니다."
손잡이 끝이 부서진 것을 그새 보았던 모양이다.
앨런을 마주 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직접 얘기하면 돼. 곧 소공작이 오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시나스타 대신 다른 것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칼리안의 주머니에서 나왔다며 키리에가 전해주었던, 에일라의 팔찌였다.
"그보다는 이것부터 부탁하고 싶은데."
"부탁이라는 말씀도 스스럼없이 할 줄 알게 되셨습니까."
내 새끼나 내 새끼 형이나 똑같이 많이 자랐구나.
대충 이런 의미가 담겨있을, 완전히 익숙해지기는 힘들 것 같은 저 눈빛에 짜증을 내는 대신 피식 웃고 넘긴 플란츠가 테이블 위를 가리켜보였다.
"내 검 조각에 맞아서 부러졌는데. 다시 써야 할 것 같아서."
오러의 강한 힘을 버티다 결국은 부러져 튕겨나간 운석 조각.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팔이 관통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잘 먹는 만큼 튼튼한 칼리안이었던 까닭에 베인 상처만 남았다.
다만 칼리안만큼 튼튼하지 못한 팔찌는 부서지고 말았다.
에일라든 칼리안이든 팔찌를 다시 쓰기는 해야 했던 터라, 이럴때 생각 나는 사람은 늘 앨런 뿐이라서 이렇게 찾아온 참이었다.
앨런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진 것을 들고 와 플란츠의 앞에 내려놓았다.
- 달칵.
작은 금속이 놓이는 소리가 났다.
에일라의 것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두꺼운 팔찌였다.
"사실은 먼 곳에서 싸움 구경을 좀 했습니다. 마법을 다시 작동시키려면 고치는 것에도 시간이 걸릴 듯 하여 카스트린 경의 것을 잠시 빌려 두었습니다. 그 동안 카스트린 경은 루비아 관에 박혀 있으면 될 일이니 우선 이것을 쓰라 전해주시지요."
플란츠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마법사의 생각 깊음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기를 접어 둔 채로.
"그럼 그것은 되었고······ 전하는 언제 다시 모셔오는 것이 좋겠습니까."
"나흘 뒤에 귀족 회의가 있는데. 그 때까지만."
"그 정도면 복구가 되겠습니까."
"내 아우님께서 부서뜨린 왕궁 기물들은 충분해. 숲은 천천히."
"그럼 그 때까지는 아르피아 궁을 보수하느라 전하께선 잠시 카밀리아 궁에서 업무를 보신다 둘러대어 놓겠습니다. 그리해야 외부에 얼굴 못 비추시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터이니."
"알았어."
그 동안 가지지 못했던 휴식도 취하고 자식들 싸움 내기에 피폐해진 왕궁도 보지 못하게 하려 르메인을 별궁으로 걸음하게 했었다. 그런데 사정을 모르는 채 상황만 보면 제 아버지 별궁에 유폐시켜 놓고 마음대로 왕궁을 주무르는 꼴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생각이 든 플란츠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겉으로만 본다면 '과거'의 플란츠와 지금의 자신이 결국 같은 모습이 아니겠나. 그러나 실상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웃었다. 그런 사실에 새삼스러운 안도감이 들었으니까.
"그나저나."
앨런이 플란츠를 바라봤다.
칼리안이 종종 짓는 얼굴, 즉 기특해하는 기색이 잔뜩 든 얼굴로 플란츠를 잠시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화살이라도 만들어 쏘시나 하였는데 젖은 옷만 말려주고 끝내셨습니까."
먼 곳에서 구경했다 하더니.
싸움의 끝을 지켜본 발칸 대원들도 눈치채지 못한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아우님 마음 놓았을 때 마법을 쓰려고 했는데. 계획이 바뀌어서.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나서는 바람에."
마법을 배우진 않았다.
마법을 익히기는 했다.
책을 보며 홀로 익혔다. 그 역시 배운 것이라 하면 배운 것일 테니 칼리안이 '거짓말'이라 한 것이겠지만 어찌됐건 플란츠는 마법을 누군가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칼리안에게 물의 화살이라도 날려 보낼 심산으로 익힌 것이었다. 칼리안의 몸에 쏘아서 소용이 없으면 팔찌라도 부수겠노라 생각을 했다.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놓고 내기 기준에 맞지 않으니 내가 이긴거다 우겨보려 했다.
그런데 아르센이 끼어들었고 계획이 바뀌었다. 덕분에 쓰려던 화살은 못 썼다. 괜스런 클린만 썼다. 마법 익힌 것을 고스란히 들키기만 했다.
물론 아쉽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아르센이라는 변수 덕에 생각한 것보다 나은 결과를 얻기는 했으니까.
"마법은 언제 그리 익히셨습니까."
"가끔씩. 책이 많이 있던데."
"주변에 마법사들을 그리 많이 두셨으면서 홀로 익히셨습니까."
"배우는 건······ 나중에. 내 아우님한테."
처음에는 서클이 한 개 쯤 있으면 발칸의 미친놈들 사고방식을 좀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시작했고 최근 며칠 사이에는 칼리안과의 싸움에서 마지막 패로 쓰기 위해 하나를 더 늘렸다. 마력을 다룰 줄 안다면 서클 하나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거기에 더해 두 개의 서클 정도는 마법 재능도 특출나지 않고 마법에 대한 관심마저 없던 베로니카도 성취했던 단계가 아니던가.
옛 칼리안 역시 마법서를 보아가며 몰래 마법을 익혔으니, 똑같은 시스파니안의 후손이며 마법을 숨어서 익힐 필요도 없는 플란츠가 그 정도를 이뤄낸 일이 그리 놀랄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그래요. 아무튼 잘 하셨습니다. 무엇이든 할 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니."
"······ 그래."
"다만 만에 하나라도 크게 다치게 된다면 베른 경 같은 엘프 치유사가 아닌 이들의 손을 빌리지는 마시지요. 신력은 서클의 마력과 충돌을 빚습니다."
"알아."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운 앨런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주종이 물인 듯 한데 맞습니까?"
"아마도."
"담긴 그릇의 모양대로 유순하게 지내는 듯 하다가도 또 어느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내리는 것이 바로 물입니다. 그것이 저하께 참 잘 어울린다 여깁니다."
흡족해하며 건네오는 앨런의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진 않았다. 어차피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다 자신을 닮은 마법을 쓴다. 폭발 좋아하는 미친 마법사 빼고는 다 그렇다.
"칼리안 왕자님도 물론 참 잘 어울리는 마법을 익히셨습니다만."
바람이었다.
옛 칼리안에게든. 지금의 칼리안에게든.
기실 그보다 잘 어울리는 속성이 또 있을까.
"······ 별로."
그러나 플란츠는 이렇게 답하며 남은 차를 다 마시고 내려놨다. 잘 어울린다 해서 좋게 여겨진다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 말을 들은 앨런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감싸안는 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한다는 뜻이리라.
* * *
꿈을 꾸듯 첨탑으로 찾아갔다.
'제가, 이겼습니다.'
돌아오겠노라 했던, 이미 지키지 못한 약속을 그렇게나마 잠시 지켰다. 오랜 꿈을 꾸듯 약속을 지켰다. 이제 와 지켜질 수 없는 약속임을 둘 다 알았으나 그렇게라도 약속을 지켰다.
그렇게라도 믿고 그렇게나마 조금 아물기로 했다.
베른도, 체이스도.
'그래······ 그래. 그래.'
단 한 마디도 더 나누지 못했다.
술을 따라주고 술을 마시고. 그저 그렇게만 하였다.
그리하여 이야기 대신 바람만 불었다.
밤이 지나고 다시 여명이 들도록, 바질리카 한 병이 다 사라지도록, 이야기 대신 바람만 불었다.
꿈을 깨우듯 바람이 불었다.
* * *
봄을 안은 바람에 나비들이 날아들었다.
카이리스 왕궁 뜰 가장자리에는 꽃이 피었다.
화려하지 않아 왕궁에는 굳이 심어둔 이 없던 꽃의 씨앗이 절로 날아와 뿌리를 내고 어느새 싹을 틔운 모양이다. 그것이 빌헬름 관의 뒤뜰에 피어나 고운 흰 빛을 냈다.
가만히 손을 내어 소담스레 맺힌 꽃들을 쓸어내렸다. 불어드는 바람에 실려오는 향기는 없었지만, 이것이 스스로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을 행동이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봄은 반가운 탓에. 잠시 손을 내어 향기 없는 라리시움을 매만졌다.
"꽃이 달린 비녀를 샀어야 했나. 잘 어울리네."
그 손 끝을 이미 멀리서부터 지켜보며 걸어온 칼리안이 이런 말을 건넸다. 칼리안이 지척까지 다가오도록 알아채지 못했던 에일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가장 화려한 봄같은 얼굴에 놓인 붉은 눈을 보며 답했다.
"가짜 꽃은 별로예요."
"그래?"
"안 시들잖아. 꽃은 아쉬워서 예쁜 건데."
"안 아쉬우면. 안 예쁜가."
"안 시들면 안 아쉽고 아쉬운 것 없으면 귀하지도 않으니까."
"나는 그래도 귀하다 해주던데."
"그건 왕자님이라서 그렇고요."
스스럼없이 돌아온 대답에 피식 웃은 칼리안이 손에 들린 것을 건넸다. 검은 로브가 하나, 그리고 작은 상자가 하나였다.
조금 전까지 꽃을 매만지던 손을 상자 쪽으로 먼저 뻗은 에일라가 상자를 받는 대신 뚜껑만 열었다. 여전히 상자를 든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리안이 곧장 입을 열었다.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간신히 보였을 무렵이었다.
"어때."
상자 속의 물건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던 에일라가 말했다.
"비싼 것 안 사주겠다더니."
"사준 거 아니고 팔찌 빌린 값 갚는 거니까. 그럼 비싸도 선물이 아니니 괜찮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는 안 되나?"
푸른 다이아몬드, 그리고 흑진주.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교한 백금 장식이 함께 담긴 은빛의 비녀였다.
"이런 것 받으면 아쉬워서 못 버리는데. 그럼 나는 도망 못가는데. 그럼 안 괜찮은 것 아닌가?"
"비싼 걸 그냥 버리더라도. 싼 비녀 사줬다가 다른 놈 손에 부서지는 꼴을 또 보는 건 역시 좀 별로인 것 같아서. 욕심이 컸나?"
"조금요."
"버리기 아쉬우면 돌려주고 가. 안 붙들 거니까."
"안 붙든다 하니까 그것도 또 아쉽네요."
"아쉬워야지, 당연히. 나만한 주인이 또 어디 있다고."
꽃 말고 온 바다가 다 담긴 듯한 비녀를 보며 피식 웃은 에일라가 대답했다.
"뭐. 아쉬우면 예쁜 거니까. 대신 안 아끼고 쓸 거예요."
"그래. 그렇게 해. 에일라."
에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새 비녀로 머리를 틀어올린 뒤 칼리안의 손에 들려있던 또 다른 것, 검은 로브를 집어들었다.
"나 할 일 생겼어요?"
"생겼어."
"당분간 쉬라 하더니."
"아직 다 안 나았어?"
"다 나았어요."
"그럼 됐네. 지그프리드 공작저. 노튼 라미레즈라는 사람을 보러 갈까 하는데. 너도 같이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 그게 누구더라."
"라트란 영지. 내가 너 잡는 걸 도와줬던 구리광산 경비병. 그 사람 덕에 이번에 나 사라졌을 때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 하셨거든. 내 형님이."
아, 하고 기억을 떠올린 에일라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 그 사람 때문에 고생 많이 했는데."
"그 사람도 너 때문에 고생 많이 했어. 넌 덕분에 지금 새 주인 만나서 좋은 비녀 받았잖아."
"또 못 버릴 것 같은 비녀 받았죠."
"마음에 안 들 때 돌려주면 될 비녀 받은 거지."
"그러니까. 못 버릴 것 같은 비녀지."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이상의 말 없이 후드로 얼굴을 가린 에일라와 함께 지그프리드 공작저를 찾아갔다. 세리에와 드미레아를 만나고 리리에와 인사를 나누고 언제 어디서 보아도 한결같이 반가운 히나를 만났다.
칼리안을 만난 히나가 생긋 웃었다.
그리고 하얀 진주같은 구슬을 칼리안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발칸과의 싸움 때문일 것이다.
수어로는 표현 못할 잔소리가 시작되려는 것 같아서, 자못 비장한 얼굴이 된 칼리안이 그것을 꼭 말아쥐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히나의 말을 들었다.
"······ 알았어. 응. 응. 그래, 히나. 응."
되돌아가는 대꾸 없이 얌전히 답한 칼리안이 히나에게 구슬을 돌려줬다. 그리고 기사 유란의 안내를 받아 외팔이 검사 노튼이 머무르고 있는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죄를 지은 이가 아니었으니 저택을 산책하거나 돌아다니는 것에 제약을 두지는 않았다 했다. 다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암살 위협에 대비해 호위를 맡은 기사들이 방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 달칵.
칼리안이 방에 들어섰다.
방문 소식을 이미 전해들었던지 열린 창 근처에 놓인 테이블 쪽에 서있던 노튼이 예를 보였다.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칼리안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자리에 앉았다.
칼리안을 똑바로 마주볼 수 없는 위치의 노튼이 고개를 돌렸다. 뒤에 선 기사 유란과 지그프리드의 기사들, 그리고 에일라를 한 번씩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런 노튼을 맞은편에 앉게 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반갑다 하기엔 서로 썩 반가울 사이는 아니고. 오랜만이라는 말은 필요없을 것 같고. 잘 지냈냐는 말은 의미가 없겠고······."
이렇게 운을 뗀 칼리안이 노튼을 쳐다봤다.
"아내를 숨겨두고 나를 찾아왔다 하던데."
"네. 그렇습니다, 왕자님."
"굳이 그렇게 해 가며 홀로 찾아 올 이유가 있었나?"
"아내가 몸이 약합니다. 오래 움직이기 어려워 혼자 오게 되었습니다."
말이 많이 정중해졌다.
칼리안은 그에 대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들을 테니. 얘기해. 왜 나를 찾았는지."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잠시만."
- 스윽.
노튼이 입을 열려 했을 때, 살짝 들어올려진 칼리안의 손이 노튼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에일라를 보며 생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에일라. 좀 소란해서."
창이 열려있었다.
기사들의 수련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네. 왕자님."
에일라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뒤로 돌아섰다. 열린 창은 칼리안의 맞은편에 있었는데 반대편의 방문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이곳까지 둘을 안내해 온 지그프리드의 기사들을 향해 문을 가리켜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기사 유란이 다른 기사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 달칵.
에일라가 문을 닫았다.
- 찰칵.
그 뒤에는 문을 잠갔다.
또각, 또각.
에일라가 신고 있던, 무릎까지 올라오는 가죽 부츠의 조금 두꺼운 굽이 방 안을 차분하게 울린다.
또각, 또각.
방문을 잠근 에일라가 칼리안과 노튼을 지나쳐 걸어갔다. 열려있던 창에 손을 올렸다.
- ······ 탁!
- 차륵!
창을 닫았다.
그리고 베이지 색의 두꺼운 커튼을 닫아 창을 가렸다.
또각, 또각.
기사들의 소음 대신 천천히 돌아오는 가벼운 굽 소리만 방을 맴돈다.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노튼의 뒤에서 멈췄다.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에일라를 보며 웃어 준 칼리안이 노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 휘익!
노튼의 뒤에 서 있던 에일라가 팔을 뻗었다.
노튼을 향해, 아주 빠른 속도로.
에일라가 한 손으로는 노튼의 머리카락을, 또 한 손으로는 노튼의 남은 한 팔을 틀어잡았다. 그리고 노튼의 머리를 그대로 테이블 위에 내리찍었다.
- 콰앙!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놀란 노튼이 테이블에 뺨을 짓눌린 채 칼리안에게로 눈을 돌렸다. 숨겨지지 않는 노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 왕자님."
톡, 톡, 톡.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테이블을 잠시 두드리던 칼리안이 노튼을 바라봤다. 생긋, 하고. 온갖 색을 다 가져다 두어도 그보다 화려하지 못할 웃음을 지었다.
- 콰악!
그리고는.
어느새 만들어낸 단도로 노튼의 뒷목을 내리찍었다.
그 누구도 보지 못할 속도로. 본다 한들 막아내지 못할 힘으로.
- 카각, 쩌어엉!
살갗과 뼈를 가르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소리가 났다. 칼리안이 찌른 것은 분명 사람의 목이었으나 예리한 것에 닿은 금속이 깨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굳이 살려놓은 놈 죽였는지 숨겼는지. 그것만 말해."
꿈결같은 미성이 노튼의 귀에 닿는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은 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 사아아아······.
그 몸집이 바뀌었다.
그 눈빛이 바뀌었다.
머리 색이 바뀌었다.
방금 전 칼리안이 깨뜨린 것.
마법 물품을 사용하기 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하얀 수리."
나긋나긋.
달콤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이제껏 노튼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속여온 이의 귀에 와 닿았다.
마치 꿈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