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장. 다시(4)
깜빡, 깜빡.
새까맣고 긴 속눈썹들이 느리게 내려가다 조금 더 느리게 들어올려졌다. 그렇게 닫혔다 열리는 눈꺼풀 아래로, 시스테라 대륙의 그 어떤 보석을 세공하여도 똑같이 모방해내지 못할 붉은 눈이 감춰지다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반짝, 반짝.
태양의 붉음 아래에서도 제 색을 잃지 않는 칠흑의 머리카락 끝에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물이 방울져 맺혔다. 태양의 빛에 물들지 않는 머리카락 대신, 태양보다 더 붉은 눈 대신, 그 작은 물방울에 햇빛이 담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붉은 눈이 다시 한 번 감겨들어가다 뜨여졌다. 달무리의 한 조각을 이어 둔 것처럼 곱게 말려 올라간 긴 속눈썹이 함께 움직였다.
속눈썹에 살짝 닿은 머리카락이 구부러진다. 그 바람에, 잠시나마 햇빛에 반짝이던 물방울이 쥘 곳을 잃고 떨어져내렸다.
- ······ 톡.
온 세상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다.
물방울조차 느릿하게 떨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것이 바닥에 내려앉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리는 듯 하다.
"그러니까······."
그 느린 감각을 치워내려 애쓰던 이의 새빨간 입술 사이로 가는 미성이 흘러나왔다.
아, 당연히 목소리만 그렇다는 의미다.
속에 든 기분까지 곱다는 뜻이 아니다.
불만이 가득 담긴 고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딜 봐서요."
"어디를 봐도."
속눈썹이 길든 짧든. 속에 든 눈이 보석보다 귀해보이든 아니든. 머리카락이 시커멓든 말든.
오랜만에 마주한 동생의 얼굴을 반겨하는 기색이라고는 완두콩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플란츠가 나지막이 대꾸했다.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돌아온 어여쁜 얼굴을 확인할 겨를이 없는 칼리안이 마력을 애써 운용했다. 작은 사일런트 막을 겨우겨우 만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잠기운에 뚝뚝 끊어지는 말이 앞에 선 파릇한 형제를 향했다.
"이게 왜, 무승부입니까. 엄연히 제가, 이긴, 건데요."
"어째서."
"여든일곱 명 전부, 다 잡았잖습니까. 제가."
"발칸 대원들이 싸우고 싶어했던 건 내 아우님의 지금 모습이 아닌데."
깜빡······ 깜빡.
졸린 것인지 억울한 것인지 모를 눈이 다시 길게 닫혔다 올라왔다. 고개를 휘휘 저으며 쏟아지는 잠을 잠시 물린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싸움이 끝난 것이 맞는지를 가늠하지 못하고 여전히 멀찍이 서 있는 발칸의 미친놈들을 가리켜 보였다.
"저 놈들 앞에서는 계속, 예전 모습으로, 있었지 않습니까. 게다가 싸움 끝나고 부서진, 걸. 왜 싸울 자격 잃은 일이라고, 하십니까. 분, 명히. 분명히, 예전 모습으로 형님 목에, 상처 낸 뒤에 팔찌 부서진, 건데요."
"아우님께 내가 졌다는 말 안 했는데. 게다가."
"게다가 뭐요."
"목이 조금 베였다고 해서 더 싸우지 못할 것은 없지 않나."
"······ 못 싸우게 해드리려고 목을 잘라놓을 수는 없잖아."
"너."
플란츠의 눈에 사나운 날이 섰다.
그 버르장머리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반말."
······ 아.
잘라놓는다는 말은 별문제가 안 되나 보다.
기준이 이상한데. 뭐 아무튼.
"아무튼 제가······ 이긴, 겁니다."
"무승부."
"아, 왜."
"반말."
"······ 하."
잠은 밀려오고 완두콩은 말이 안 통하고 축축해 죽겠는데 클린은 고사하고 손 끝 하나 움직일 기력도 없다. 잠시 빌려온 모습으로 무리하게 힘을 쓴 후유증이 고스란히 남았다. 방금 펼친 사일런트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버겁다. 온 몸이 쑤시고 뼈가 시리다. 뭣보다도, 졸립다. 졸려 죽겠다.
그런데 이대로 잠들면 저 완두콩이 이 싸움을 제멋대로 무승부로 종결지어 놓을 것 같아서 잘 수도 없다.
"형님 피곤하지도, 않으십니까. 형님 팔꿈치 어긋나고 목에서 피나고 허리에서 피 많이 나는데요."
"안 죽어."
"그렇겠죠. 제가 어련히, 안 죽였으니까."
플란츠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안 죽여서 살아있는 건 안다는 뜻이다. 그건 또 인정을 한단다. 그런데 진 건 아니란다.
아······ 그것 참 이상하다.
환장할 일이 요즘 왜 이렇게 많은 것 같지.
"형님 말고 제가 좀 죽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요."
"다시 해."
"뭘요."
"내기."
"왜요."
"비겼으니까."
"아니라니까."
"너, 자꾸."
"요."
처음 했던 사냥 내기에서 다누 뿌리 잘랐으니 내가 이긴거다 했던 말에는 순하게 잘 져 주더니 이번에는 도무지 물러날 기색이 없다. 온갖 억지를 다 끌어와서 안 졌다고 우기는 중이다. 그래. 내기에서 막 그렇게 져 주고 그러면 안 된다고 내가 가르치긴 했다. 가르치긴 했는데.
······ 그렇네.
그것도 내가 가르쳤네. 내 입으로 한 말이네. 왜 그렇게 쓸데없이 이것저것 알려줬을까. 어차피 나한테 배워서 맨날 나한테만 써먹는데.
- 찰싹!
인상을 찌푸리다 한숨을 쉬다 미간을 찌그러뜨리다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찰싹찰싹 때려대는 동생 놈의 꼬락서니를 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다시 싸워야 다시 쓰실 것 같아서 그러는 건데. 왜."
"뭘요."
"팔찌."
"······ 제 예전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으셨습니까?"
"말고. 그렇게 바뀌고 나서 거울도 안 보셨잖아, 아우님께서. 그래서 싸우자고 했던 거고."
칼리안이 가만히 플란츠를 쳐다봤다.
"나한테는 아직 꽃 향이 독했어서. 아우님도 아직 안 풀렸을 것 같은데."
한 번을 들이부은 것으로는 향수 냄새가 그래도 여전히 독하게 느껴져서. 칼리안 역시 한 번을 이긴 것으로는 그 성문 앞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다고.
"그럼. 이 싸움 한 번으로는 제 속이 다, 안 풀렸을 것 같으니까. 이번 것은 무승부로 치고. 또 싸워보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이겨보시라고. 계속. 계속 싸워 줄 테니까. 풀리실 때까지."
이번 싸움에 못 끼어서 억울해하는 발칸 놈들은 널리고 깔렸다. 칼리안 한 마리 잡는 연습 많이 하는 건 어차피 놈들한테도 좋은 일이다. 그러니 겸사겸사 그 속이 좀 풀릴 때까지 싸우자는 소리다. 이번 내기는 무승부로 하고, 여전히 둘 다 양보하기 싫은 기사서약을 다시 걸고서.
칼리안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플란츠가 그런 칼리안을 봤다. 무리한 탓인지 하얗게 질려가는 얼굴을, 얼음물에 다 젖은 옷을 한참동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입에서 말이 나오진 않았다.
대신 다른 소리가 나왔다.
[클린]
청량한 기운의 마력이 칼리안을 감싸고 지나간다.
그러자 놀랍게도 젖은 머리가 말랐다. 헐렁하고 차갑던 옷과 구두의 물기가 마른다. 물을 뚝뚝 흘리던 손이 마른다. 흙먼지가 사라지고 진흙이 떨어져나간다.
검은 옷에 배어 든 핏자국이 지워진다.
- ······ 꿈뻑.
이상하다.
완두콩이 방금 마법을 부린 것 같은데.
"내가 꿈을 꾸나······."
갑작스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칼리안이 꿈뻑꿈뻑, 잠꼬대를 하듯 중얼거렸다. 대답 할 생각 없다는 것처럼 몸을 돌린 플란츠가 에스티나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다시 꿈뻑꿈뻑, 감겨들던 눈을 크게 뜬 칼리안이 제 뺨을 몇 번 두드렸다. 그리고 힘겹게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에일라의 팔찌와 시나스타의 조각을 주웠다. 그것들을 주머니에 넣은 뒤 비척비척 발을 옮겨 플란츠를 따라잡았다.
"형님 마법 배우셨습니까."
"안 배웠는데."
"아닌데. 배웠는데. 마법인데. 클린 맞는데. 나 안 썼는데."
"계속 반말하지."
"요. 클린 가르쳐달라 하시더니. 혼자 배우셨습니까."
"배운 적 없어."
"클린은 서클 두 개 있어야 쓰는 마법인데요. 서클은 언제 만드신 겁니까."
당장 드러누워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꼴을 하고는 기어코 따라오며 또 이렇게 귀찮게 군다. 플란츠의 눈꼬리가 살짝 찌푸려졌다.
"알 수 없는 말을 하시는군."
"그럼 지금 쓰신 건 뭔데요."
"아우님께서 많이 피곤하신가. 계속 혼돈을 하시는데."
"시치미."
"말버릇."
"정말 안 배우셨습니까."
"안 배웠어."
"거짓말."
"너."
"그럼 클린은 언제 배우실 건데요."
"30년이나 50년쯤 뒤에."
"······ 그 때까지 고양이 털 떼는 건 계속 저한테 시키실거고요. 저는 그 나이 먹도록 형님 옷에 묻은 고양이 털이나 떼드리고요."
"내 아우님께서 그리 약속하셨으니."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하며 걸어간 플란츠가, 싸움이 일단락 된 것을 알고 다가온 발칸 대원들의 손을 거절했다. 그리고 멀쩡한 오른손을 놀려 에스티나의 위에 올랐다.
그 말똥말똥하고 파릇파릇한 뒷통수를 보며 서 있던 칼리안의 웃음이 터졌다.
클린을 썼는데 안 배웠단다.
30년이나 50년쯤 뒤에 배울 생각이란다.
그때쯤엔 왕 노릇 하기도 바쁠 텐데 형님 옷에 묻은 고양이 털까지 떼야 된단다.
"환장하겠다. 내가 진짜."
그래서 웃음이 났다. 이제껏 펼쳐두었던 사일런트 막을 없애버리곤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을 쳐다보는 미친놈들의 경외감 가득한 시선도 느끼지 못한 채 눈물이 찔끔 나도록 웃어댔다.
한참을 이어진 그 웃음 소리가 간신히 줄어들었을 즈음.
- 다각, 다각!
칼리안의 웃음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이제 다가와도 됨을 안 것처럼, 너무나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바삐 다가오는 레이븐과 그 뒤로 걸어오는 키리에의 모습이 보인다.
반가움을 가득 담아 팔을 흔들어보인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터져 나오려는 하품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형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많이 털어냈습니다. 팔찌 고칠 거고 거울도 볼 겁니다."
에스티나의 안장을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졸음이 밀려든다.
더는 몰아내기 힘들 만큼 밀려든다.
"그래도. 내기는 못 져 드립니다. 다음에 다시, 하죠. 이번은 제가 양보 많이, 해서······ 한 수 무른, 셈 치고. 무승부로, 해 드릴 테니까."
"알았어."
가까이 다가온 레이븐을 향해 선 칼리안이 팔을 벌렸다. 살짝 숙인 레이븐의 머리가 품에 닿았다. 레이븐의 머리를 꼭 껴안았다. 그 위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다음엔······ 절대로 안 물러 드릴 겁니다."
"알았어."
"네."
칼리안이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레이븐의 이마에 얼굴을 푹 묻은 채로.
커다란 머리를 꼭 끌어안은 채로. 긴 몸을 다 기댄 채로.
"내가 이긴 건데······."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 * *
차를 잘 우렸다.
차를 우리는 것은 왕궁에 온 뒤 메를린에게 처음 배우게 되었었는데 곧잘 하게 되었다. 차를 몇 번 직접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그 역시 썩 괜찮았다.
바느질을 잘 했다.
어려서부터 키리에의 옷이 워낙 잘 찢어지고 해어진 탓이 컸다. 사실 두 남매가 다 솜씨가 없었는데 그나마 키리에보다는 나아서 도맡아 했었다. 거기에 더해 키리에의 상처를 여러 번 살피다 보니 바느질은 잘 하게 되었다. 이제는 고양이 목줄에 긴 이름을 수놓거나 가끔씩 고양이 옷을 만드는 일에만 쓰이게 된 솜씨였다.
다른 손재주는 없었다.
요리도 못하고 글씨를 그리 잘 쓰는 편도 아니었다. 칼리안은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글씨라며 늘 좋아했지만 썩 보기 좋은 글씨체는 아니었다. 요리를 할 수 있는 곳에서 살았던 적 없었을 뿐더러 글씨를 잘 쓰기보다는 빨리 쓰는 것이 나았기 때문에 그랬다.
- 그렇게, 엉망이에요?
양쪽으로 얇게 땋아내린 머리를 뒤로 넘겨 주황색의 예쁜 리본으로 고정시킨, 아리안느의 반묶음 머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예쁜 구슬이 달랑거리는 비녀로 보기 좋게 틀어올린 에일라의 머리도 생각이 났다. 그러다보니 늘 한결같이 올려 묶던 머리가 가끔씩은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변덕을 부려봤는데 영 이상했던 모양이다. 멋쩍게 물어오는 히나를 앞에 세운 세리에가 피식 웃었다.
"거울을 보긴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 상냥한, 사단장님이나 단호한 시녀님이, 몇 번, 땋아주셨었는데, 혼자 해본 건, 처음이에요.
이렇게 말한 히나가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는 '니들렌 제이아, 메를린 피아트' 라는 이름을 적어 제 뒤에 선 세리에를 향해 보여줬다.
"그렇습니까."
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칼리안을 따라 로젤리타에 나섰을 때에는 미처 다 눈에 담지 못했던 것들을 새삼스레 떠올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무뚝뚝한 목소리와 말투가 드미레아와 정말 많이 닮았다. 드미레아가 누구를 닮았었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을 만큼 비슷하다.
공작의 아내이자 소공작의 모친인 사람이 아닌가. 그런 위치들은 신경쓰지 않고 칼리안의 시녀였을 때에나 자작이 된 지금이나 상관없이 말을 높여오는 성격만 봐도 그랬다. 드미레아와 얀을 그렇게 가르친 것은 분명 세리에일 터였다.
- 사락, 사락.
제멋대로 나누어 둔 뒤 설렁설렁 땋은 머리를 푼 세리에가 히나의 머리를 손으로 삭삭 빗어내렸다.
남에게 머리를 맡기는 것이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히나가 괜스레 손을 들었다. 머리를 꾸며 본 적도 별로 없어서 더더욱 잘 못했다고, 서툰 솜씨를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세리에가 그 손을 턱 잡더니 셋으로 나눠 둔 히나의 머리카락에 올려놨다. 그리고는 머리카락을 얼만큼씩 나눴는지를 직접 만져보게 했다.
"이 정도로 나눈 머리를 여기에서 이렇게, 땋으면 됩니다. 힘을 세게 주든 약하게 주든 동일하게 하면서요."
끄덕끄덕.
히나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금세 다 땋아 옆으로 내린 머리를 들여다본 뒤 손을 움직였다.
- 훨씬 예쁜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다음에는 더, 잘 해 볼게요.
키리에는 알려주지 못했던 방법 하나를 배운 히나가 생긋 웃었다. 옆에서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던 리리에가 세리에를 쳐다봤다.
"세리에 엄마. 저도, 배우고 싶어요."
묶고 나면 한주먹 만큼의 머리만 남는 짧은 녹빛머리를 본 세리에가 살짝 웃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참새 꼬리같은 그 꽁지머리를 가리켜보이며 대답했다.
"더 자라려무나. 키도 자라고 머리도 자라면 알려주마."
"그럼 드미레아만큼 자라면 돼요?"
"레아만큼 자라도 좋고 더 자라도 좋고 덜 자라도 좋지."
포르르 웃은 리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멍멍이 얀에게 이끌려 정원에 난 작은 길로 앞서 걸어갔다.
머리 묶기를 마친 히나와 세리에도 그 뒤를 따랐다.
"그나저나, 저희 넷째 때문에 쉬지 못하고 나온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 아니에요. 일어나서, 준비하려던, 참이었어요.
"며칠이기는 해도 지내는 동안 편히 쉬게 해달라고, 혹시 기사들이 조금 다쳤다고 찾아가게 하면 안 된다고, 둘째가 그렇게 신신당부를 해 왔습니다."
히나가 봄바람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칼리안도 만나지 못했을 텐데, 칼리안이 신경 쓸 법한 것을 이미 잘 아는 얀이 그렇게 전해 온 모양이다.
- 괜찮아요. 혹시 필요하면, 말씀해주세요. 여기서 지내는, 값은, 저도 해야죠.
"네. 그런데······."
리리에가 멍멍이 얀을 따라 걸음이 빨라지다 종종걸음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세리에가 히나를 봤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우리쪽 기사들의 이야기로는 지난 새벽 내내 왕궁 숲에서 불길이 일었다 합니다. 그 전에는 저하께서 소공작에게 다음 주 중에 증원 예정이었던 기사 백 명을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보내줄 수 있을지 물었다 하시는군요. 힐 경이 하는 말이 칼리안 왕자님의 살기가 이곳까지 느껴졌다 하던데. 혹시 밤새 무슨 일이 있던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칼리안이 연관되면 얀도 얽히니 걱정하는 것일 터였다.
히나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고개를 끄덕인 히나가 세리에를 보며 대답했다.
- 자상한 왕자님, 아니. 셋째 왕자님과, 좋은 왕세자 저하께서, 이상한, 싸움 내기를, 하신 것 같아요. 셋째 왕자님 한 명을 발,칸, 마법사 분들과 기사 분들이 상대했다고, 해요. 그리고 조금 전에 오빠에게, 연락 받았는데, 내기는 다 끝났대요. 아마 지금 쯤, 치료사 분들이, 많이 바쁠 거예요.
세리에가 분홍색 귀걸이를 가리켜보이며 말하는 히나를 쳐다봤다.
"가보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 셋째 왕자님은, 제가 필요할 만큼, 크게 다치게 하실 분, 아니에요. 그리고, 다쳐서 고생해봐야, 그런 내기를, 또 안 하죠.
이렇게 말한 히나가 가벼운 손짓으로 말을 이었다.
- 어차피, 제가 치료하면, 흉터 안 생긴다고, 거절하실 분들이라서. 안 가도, 괜찮아요.
어느새 발칸 치유사가 다 되어버린 히나가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해가 뜨고 하늘이 푸르르다.
하루종일 유난히도 바람이 많이 불었다.
그것이 답답하여서, 혹은 기꺼워서.
- 저벅, 저벅.
한밤이 되도록 마음을 붙들지 못하던 체이스가 결국 홀연한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고른 발자국 소리를 남기며 본궁을 나와 조금을 걸었다. 이 왕궁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발을 옮겼다. 둥근 계단의 입구에 테일란의 모습을 한 서베인을 세워둔 뒤 홀로 올라갔다.
계단의 처음부터 꼭대기까지.
발걸음도 숨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위를 향해 올라갔다.
- 달칵.
근래에 다시 자주 찾아오게 된 곳의 앞에 섰다.
불을 밝혀두지 않은 곳의 문을 거리낄 것 없이 열었다. 발을 내딛고 돌아서 방금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첨탑.
언제나 바람이 부는 곳이었다.
더운 여름 날에는 더운 바람이 불고 서늘한 겨울 날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런 곳이었다.
다만 꿈 속에서 몇 번이고 마주한 그 날은. 그 날에는.
서늘한 날이었으나 뜨거운 바람이 불었다.
뜨거운 날이었으나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체이스에게 첨탑은 그런 바람으로 기억되는 곳이었다.
- 사아아아······.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조금 달랐다.
바람이 불었다.
달빛이 내렸다.
바람이 불었다.
"허락없이 왔다고 기사 부르시면 안 됩니다."
누군가 이미 그 곳에 서 있었다.
그렇게나 아리던. 그렇게나 서럽던. 그렇게나 그립던.
별빛이 흐드러지듯 흩날렸다.
"형님."
나지막한 목소리에, 체이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그리하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하나로 묶고 나서도 제멋대로 부는 바람에 이리저리 흐트러지는 머리를 눈에 담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오래도록 그리하지 못하고 눈을 떴다.
싱긋 웃은 칼리안이 체이스를 향해 손짓했다.
제 손에 들려있던 술잔을 내밀어 보였다.
"혹시나 오실까. 오셔도 좋고 안 오셔도 나쁘지 않겠다. 그런 생각으로 잠시 찾아왔습니다."
체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이번에 발칸 놈들이랑 내기를 했습니다."
체이스 몫의 술잔에 독한 바질리카를 따른 칼리안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베른의 말이 흘러나왔다.
"여든여섯······ 아니. 여든일곱 놈을 상대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멀쩡한데 놈들은 다 드러누웠어요."
온전한 왼쪽 팔을 툭툭 두드린 베른이 체이스를 마주 바라봤다. 한 걸음을 걸어왔다. 그 손에 술잔을 쥐어주었다.
"제가 이겼습니다. 그것이 기분이 좋아서. 이렇게 왔습니다."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대답해 줄 말이 생각나지 않아 다시 입을 닫았다.
"제가 이겼습니다."
베른이 말했다.
"······ 제가. 이겼습니다."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른에게서 술잔을 건네 받았다.
"그래······ 그래. 그래."
낯설고, 생소하고, 그립고, 서러운.
그러나 기꺼운.
그런 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