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01화 (402/527)

제71장. 다시(3)

체르밀 궁의 아침은 빠르게 시작됐다.

시종들보다 먼저 일어나 있는 날이 태반이라던 란델, 안 그래도 짧은 말이 아침이면 유난히 더 짧아지는 플란츠, 쉬이 잠들지 못하는 만큼 아침잠이 많은 칼리안. 이렇듯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세 형제가 머무는 곳이 아니던가.

그러니 셋의 시종들은 각각 란델이 일어나기 전에 아침 시중을 들 준비를 마쳐야 했고, 말이 하도 없던 탓에 그 날의 옷이 좋아서 입는 것인지 억지로 입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플란츠 뿐 아니라 고양이들까지 제대로 입히고 꾸며둬야 했으며, 다 필요없이 칼리안을 일단 좀 깨워놔야 했다. 귓가에 종을 울린 것이 누구였든 상관없이 '얀, 나 5분만 더'를 연발하는 막내 왕자의 귀에 하루 일정을 알리고, 느릿하게 꿈뻑거리다 어느새 스르륵 감겨드는 그 큰 눈을 어떻게든 다시 열어놓으려 아침마다 애를 먹었다.

이렇듯 각자의 이유 덕에 체르밀 궁의 아침은 언제나 빠르고 분주하게 시작되곤 했다. 그 부지런함이 당연한 일상인 곳이었다.

그런 모습에 어느새 익숙해졌나보다.

- 쿵, 쿵!

'하나, 둘!'

바삐 걸어가면서도 발소리를 내지 않던 사람들. 작은 소리로 빠르게 대화를 주고 받는 사람들. 세안을 마친 빈 대야를 들고 내려오는 사람들. 한아름의 옷을 곱게 포장하여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빗과 장신구가 가지런히 놓인 은 쟁반을 받쳐들고 뒤를 따르는 사람들.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굉장히 고요한, 소란 대신 구운 빵 냄새와 말간 차 향기가 가득한 그런 아침의 모습에 그렇게나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 타닥, 탁!

'핫!'

'하아앗!'

서로가 다 다른 이유로 빠르고 바쁘게 시작되는 체르밀 궁의 아침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했는데, 모두가 다 같은 이유로 빠르고 바쁘게 시작되는 지그프리드 공작저의 아침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시끄러워 놀랐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열을 맞춰 달리는 기사들의 큼지막한 발소리, 뒤이어 합을 겨루는 소리가 닫아 둔 창문 안으로 고스란히 들려왔다. 훈련을 시작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뜬 참이었다.

그 소음이 생소하고 그것을 생소해하는 자신의 모습에 또 생소함을 느껴버려서, 히나는 결국 원하는 만큼 머물러도 좋았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론 불만스러운 기분은 아니었다. 잠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세크리티아로 가던 길에서도 언제나 단잠을 자던 히나였으니까.

그곳이 메를린의 옆 침대든, 세크리티아의 왕궁이나 별장이든, 혹은 추운 바위 산 위에 쳐 두었던 텐트 안이든. 히나에게 있어서는 모두 카이리스 왕궁에 오기 전까지 전전해왔던 곳들에 비할 바 없을 안락한 휴식처가 아니던가.

그랬으니,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기사들의 수련 때문에 생겨난 소란 역시 나쁠 것이 없었다. 오히려 힘찬 하루를 시작하도록 응원해주는 즐거운 소리처럼 들렸다. 게다가.

"멍멍이 얀이랑 세리에 엄마랑 산책할 거예요."

노크를 하고 조금 뒤에 조심스레 문을 열고, 수줍은 발 대신 고개만 빼꼼히 들여놓은 녹빛 머리의 아이가 아침 인사를 건네오는 이런 예쁜 아침에 불만이 생길 리 만무했다.

"그런데 드미레아는 바쁘대요. 시오나랑 일찍 왕궁에 가야 한댔어요. 자작님도 같이 산책가실래요?"

생각나는 것이 순서없이 이어지는 아이들의 말.

그런 말을 듣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히나 스스로가 아이보다 어른에 가까워진 나이로 자란 이후로는 거의 처음이었다.

밤새 들어가 있던 침구를 제 손으로 가지런히 정리하다 말고 문을 보던 히나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곱이 있는지 없는지 아직 살피지 못한 얼굴을 삭삭 쓸어내려 보였다. 자신의 머리와 조금 구겨진 잠옷도 가리켜보였다.

'갈게. 대신 세수도 하고 밖에 나갈 준비도 해야 해.'

소리 대신 전해진 말을 잘 알아들은 리리에가 해맑은 웃음을 짓는다. 가득한 얼음이 다 녹고 찾아든 나비처럼 팔랑팔랑 웃는다. 그리고는 그제야 얻은 용기로 히나의 방에 한 발을 들여놓았다. 분홍색 토끼 그림이 수놓인, 발치까지 내려오는 하늘색의 원피스. 여전히 입고 있던 자신의 잠옷을 보여줬다.

"저도 준비를 해야 해요. 옷 갈아입고 멍멍이 얀도 데리고 올게요.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히나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창 밖에서 들려오는 기사들의 묵직한 발소리. 문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나풀거리는 발소리. 그것을 들은 히나가 천장을 향해 팔을 쭉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흥얼거림이 나올 듯한 얼굴로 얼른 샤워를 한 뒤 옷을 갈아입었다.

늘 단정하게 올려 묶던 백은발을 잠시 쳐다보다 괜한 변덕이 들었다. 그래서 서툰 손으로 긴 머리를 굵게 땋아 한쪽으로 내려 묶었다. 세 갈래가 고르게 분배되지 않아 굵기가 제각각인 머리를 한참 쳐다보던 히나가 그것을 다시 묶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즈음.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는 소리 대신 몸을 일으킨 히나가 문을 열었다.

익숙한 손님을 알아 본 갈색 푸들 '얀'이 칼리안의 달리기 만큼이나 빠르게 꼬리를 흔드는 것이 먼저 보였다.

- 착한 멍멍이, 안녕?

얀에게 인사를 건넨 히나가 얀의 뒤에 서 있는 리리에를 보고 살짝 웃었다. 무릎까지 오는 보라색 원피스 위에 빌헬름 관이나 체르밀 궁에 있을 때의 플란츠가 종종 걸치고 있는 것과 퍽 비슷한 베이지 색 가디건을 덧입은 모습을 본 까닭이다. 물론 플란츠가 입는 것에 보라색 제비꽃 모양의 자수나 하얀 레이스는 없었지만.

문득 신기하리만치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둘의 얼굴도, 둘의 가디건도, 그리고.

"후원에 꽃이 피었대요. 구경하러 가요."

낯설지도 모를 이에게 스스럼없이 손을 내미는 모습도.

"혹시 후원이 싫으면 다른 곳에 가도 괜찮아요."

하지만 돌아올 거절에 익숙한 듯한 모습도.

그리 내밀어진 작은 손이 괜스레 소중하여서, 얼른 후원 쪽을 가리켜보인 히나가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리리에에게 이끌리듯 함께 걸어 저택 본관의 뒤에 마련된 작은 정원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리리에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나 많은 말을 하면서도 리리에는 히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무언가를 묻지도 않았다. 생각나는 것들을 순서없이 입에 담는 어린아이였어도 히나를 불편하지 않게 해 줄 만큼은 자랐으니, 히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여주면 되었다.

어제 먹은 쿠키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새로 맞춘 옷에는 어떤 장식이 들었는지, 얼마 전에 보게 된 생소한 과일이 무슨 모양이었는지, 며칠 전 기사들로부터 선물받은 오르골에서 어떤 노래가 나오는지, 드미레아가 읽어 준 이야기책이 얼마나 재밌는지.

"신나는 일이 계속 생겨요. 그러니까······."

손바닥만한 접시 모양의 노랗고 빨간 꽃이 피어난 정원으로 가는 길. 꽃을 살피다 둘을 보고 손짓해오는 세리에에게 큼지막하게 팔을 흔들며 인사한 리리에가, 잠시 발을 멈추고 히나를 올려다봤다.

"제가 왕궁에 간 일을 저하께서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더니 이런 말을 했다.

사라진 칼리안을 찾기 위해 드미레아가 리리에를 데리고 왕궁에 왔던 일에 대해 히나도 들어 알고 있었다. 지그프리드 공작령에서 여전히 보호 중인 외팔이 검사, 노튼이라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고자 다시 찾아온 드미레아에게 들었었다. 그 때 리리에를 왕궁에 데려 온 것을 플란츠가 마음에 들지 않아 했었다는 말도 함께 들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나, 하고. 드미레아가 조언을 구하듯 의견을 묻듯 히나에게 이야기를 풀어놨었다.

그런 걱정들이 리리에에게도 보였나보다.

그래서 왕세자의 정혼자라 했던 히나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왕궁에서 있던 일로 시무룩해 하지 않는다고. 왕궁이 아니어도 신나는 일이 계속 생긴다고.

리리에의 손을 잡고 있던 히나가 조심스레 그 손을 놓았다. 그리고 언제나 들고 다니던 수첩을 얼른 꺼내들고 몇 글자를 써서 보여줬다.

- 저하께서 걱정하셔도 괜찮아.

천천히 글자를 읽은 리리에가 히나를 올려다봤다.

생긋 웃은 히나가 다시 몇 글자를 더 써서 보여주었다.

- 걱정받는 건 당연한 일이야. 그건 나쁜 게 아니야.

처음으로 찾아간 왕궁에서 마음껏 구경도 못 하고 고양이들과 오래 놀지도 못하고, 오리도 보지 못하고 호수도 가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플란츠와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어떻게 실망이 없었을까.

리리에가 플란츠를 생각하는 사이 플란츠는 리리에를 잠시 미뤄두고 지내야 했다. 칼리안을 찾아 데려온 그 날 이후로 왕궁은 정말 정신없이 굴러갔으니까. 이제껏 빌헬름 관에 매여 있느라 체르밀 궁에도 제대로 가지 못했으니까. 다만 그것은 리리에가 이해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 그러니까 실망했다고 해도 괜찮아. 서운했다고 말해도 돼.

그래서 히나는 플란츠가 너무 바빠서 리리에를 신경쓰지 못했다 설명해주는 대신 이렇게만 말했다. 어리광을 부려도 된다고 알려줬다.

곧 리리에의 머리를 쓰다듬은 히나가 다시 그 작은 손을 잡은 채 세리에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무리 바빴다지만 리리에를 챙기지 못한 플란츠에게 꼭 잔소리를 해 줘야 하겠다 생각하면서.

엉망진창 땋아내린 히나의 은발을 본 세리에가, 산책이고 뭐고 일단 저 머리부터 다시 제대로 땋아줘야 되겠다 생각하는 중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

* * *

이길 리가 만무하다.

플란츠도 잘 안다.

날아오는 화살을 잡아선 제 사람 어깨에다 내리꽂는 저런 놈을 무슨 수로 이기겠나. 차라리 이번에 안 져 주면 앞으로 너랑 같이 밥 안 먹을거다 하는 게 승산있는 일이라는 걸 플란츠도 안다.

다만 그렇다 해서 포기할 리가 있나.

생각이 앞서서 검을 놓지는 말라 했던 건.

- 부웅!

다름아닌 내 동생 저 놈이었다.

길게 뻗어나간 검격을 피하려 칼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그 빠른 움직임의 끝이 살짝 흔들리는 것을 플란츠는 놓치지 않았다.

뚝, 뚝, 뚝.

온 몸에 스몄을 수면제가 이제야 힘을 발하게 된 것이다.

칼리안이 잠기운에 취했든 말든.

그나마도 없으면 정말로 승산이 없음을 알아서.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동생 한 마리 포획하러 온 길임을 잊지 않아서.

- 카앙, 카가강!

- 카아아앙!

수면제나 마취제를 만들 땐 반드시 해약을 함께 만드는 베로니카 덕에 수면향의 영향을 받지 않는 플란츠가 발을 박찼다.

그러고보니 해약이 있는데 아르센이 그 마법사를 그냥 재워두고 대신 온 이유에 대해서는 굳이 궁금해하지 않은 채였다.

잿빛 시나스타를 횡으로 막은 칼리안이 왼팔을 휘둘렀다. 그 손에 들린 검이 플란츠의 목을 향해 치닫다 살짝 어긋났다.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린 플란츠가 청은빛 시나스타를 휘둘러 칼리안의 공격을 쳐냈다. 그리고 두 검을 일순간 겹쳐든 뒤 크게 베어들어갔다.

- 카앙!

한 팔로 플란츠의 검을 막아 흘려보낸 칼리안이 평소보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얀이나 메를린이 아침마다 볼 법한 속도다.

희뿌옇게 보이던 시나스타를 잠시 보던 칼리안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제 입술 안 쪽을 콱 씹었다. 비릿한 향이 입 안을 맴돈다. 그제야 시나스타가 제대로 보인다.

- 우우웅!

칼리안의 손에 들린 두 자루의 검이 밝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높이 도약한 칼리안이 플란츠를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양 손에 꽉 쥔 시나스타를 든 플란츠가 내리떨어지는 칼리안의 검을 막아섰다.

- 콰아앙!

으득, 하고.

플란츠의 왼쪽 팔꿈치가 살짝 어긋나는 소리가 들린다. 플란츠의 발이 뒤로 밀려나며 디디고 선 땅에 긴 발자국이 생겨났다.

플란츠가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시나스타를 둘로 나누며 재빨리 몸을 뺐다. 플란츠에게 무게를 싣고 있던 칼리안이 반대 방향으로 힘을 주며 다시 도약했다. 힘의 방향 따위는 완전히 무시한 듯한 공격이 이어진다.

- 카가각! 카앙!

- 부우웅, 캉!

공격은 커녕 막기에 급급하다.

오러까지 쓴 채 달려드는 동생 놈에게 공격을 계속 보낼 틈이 없었다. 졸음 기운에 플란츠의 목을 진짜 베어낼까 조심하고 있지 않다면 이미 진작에 끝났을 승부가 아닌가.

이미 막힌 왼손의 검을 그대로 둔 칼리안이 오른쪽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플란츠가 그것을 피하고자 몸을 트는 사이, 어느새 뒤로 돌아간 칼리안이 심장을 노리고 달려든다.

옆으로 빙글, 플란츠의 몸이 재빨리 회전했다. 그리고 몸을 낮춰 칼리안의 발목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 카앙!

검격을 쳐낸 칼리안이 플란츠의 검 끝을 밟고 뛰어 올랐다. 그리고 플란츠의 옆에서 검을 내질렀다.

- 캉, 카아앙, 카강!

- 카아아앙! 캉!

공방이 이어진다. 칼리안에게서 일순간 피 냄새가 확 퍼져나온다. 제 입 속을 또 씹은 것임을 안 플란츠가, 욱신거리기 시작한 왼쪽 팔꿈치를 한 번 폈다 접으며 달려들었다.

그것을 가볍게 피한 칼리안이 검을 거꾸로 쥐었다. 그리고 옆을 스치듯 지나가게 된 플란츠의 허리를 그대로 베어냈다.

- 서걱!

무언가 갈라지는 기분나쁜 소리가 머릿속으로 들린다.

예리한 통증이 찾아든다.

허리를 베였음을 안 플란츠가 칼리안으로부터 한 발을 물리며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열외'였다.

칼리안의 것과 또 다른 피 냄새가 풍긴다.

뚝뚝, 칼리안의 손 끝에서 떨어지던 물 말고 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플란츠의 허리에서 흐른 피가 땅 위에 점점이 떨어진다.

- 타앗!

이전의 대원들은 그 정도의 부상을 입은 뒤 분명 밖으로 빠져나갔었다. 훈련이 아니었다면 상처 대신 죽음을 내렸을 칼리안임을 알기 때문에.

- 부우웅! 카아앙! 캉!

그러나 플란츠는 멈추지 않았다.

얕게 베인 상처 쯤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 칼리안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미간을 찌푸린 칼리안이 팔을 움직였다. 그리고 서로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시나스타를 하나의 검으로 붙들어 막은 뒤 남은 검을 내찔렀다.

양손이 다 막힌 플란츠가 빠르게 손을 비틀었다.

- 철컥!

두 개로 나뉘어 있던 시나스타의 손잡이를 서로 엮었다. 긴 창의 모양으로 바꾸어 잡았다.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짓쳐들던 칼리안의 검을 튕겨내며 휘둘렀다.

- 카아앙!

마치 불티처럼, 붉은 오러가 공기 중으로 퍼져나가다 흩어진다.

체크메이트도 열외도 거절한 채 고집스레 달려드는 형을 보면서, 칼리안이 이번에는 긴 숨을 들이쉬었다. 크게 회전하며 들이닥치는 시나스타를 막고 올려쳤다. 그 첨예한 끝이 가물거리지 않도록 한 번 더 입 속에 상처를 냈다.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시나스타의 손잡이 쪽으로 검을 내질렀다.

- 카가각!

금속과 금속이 맞닿는 기분 나쁜 소리가 퍼져나온다.

그보다 더 기분 나쁜, 아무 표정 없는 칼리안의 선득한 눈이 플란츠를 직시한다.

"이미 다치셨습니다."

"알아."

"아시면, 물리셔야죠."

"물리게 하고 싶으셨으면. 더 찌르셨어야지."

서로의 검을 맞댄 채로, 네 자루의 검을 죄 얽혀둔 채로, 낮은 목소리 둘이 빠르게 오고 갔다.

"고집 정말 안 접으실 겁니까."

"안 접어."

"왜."

"반말."

- 카앙, 카아앙!

말을 정정하는 대신 대답 듣기를 포기한 칼리안이, 플란츠의 두 검을 힘주어 쳐냈다. 긴 오러의 잔상이 허공에 두 줄의 금을 새기다 이내 흩어진다. 어지러이 수를 놓다 흩어진다. 긴 청은발이 계속하여 흔들린다.

- 카앙, 카아앙, 카앙!

그것을 막는다.

길게 잡아 든 시나스타의 윗날로 막아 쳐낸 뒤 옆에서 날아드는 검을 아래쪽 날로 막는다.

검보다 서늘한 연보랏빛 눈이 다시 플란츠를 향한다.

"형님 그렇게 고집부리면. 죽을 텐데. 나한테."

"우습게보시면······."

칼리안의 검을 막아내느라 밀려난 힘이, 길어진 시나스타의 위쪽 날로 이동했다. 한 쪽이 뒤로 밀려난 만큼 앞으로 뻗어진 시나스타의 반대편 날이 칼리안의 목으로 쇄도했다.

- 카아앙!

허리를 비튼 칼리안의 검이 플란츠의 공격을 쳐냈다. 그리고 거듭 이어지는 플란츠의 공격을 받아냈다.

- 카가각, 카각!

두 검이 다시 맞닿는다.

둘의 눈이 다시 맞닿는다.

"지실 텐데. 나한테."

"질 것 같습니까. 내가 형님한테."

"그래."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플란츠가 허리를 확 숙였다. 그리고 이어져 있던 시나스타를 휘두르며 다시 공격을 보냈다.

- 깜빡.

감겨드는 눈을 애써 들어올린 칼리안이 몸을 띄웠다. 플란츠의 검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곧 칼리안이 다시 발을 박찼다. 양 손에 들었던 검 중 한 자루를 흐트러뜨려 없앴다. 그만큼의 오러를 남은 한 자루에 모두 담았다. 그리고 플란츠에게로 달려들었다.

긴 공격 끝에 만들어진 빈자리, 시나스타의 정중앙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이제껏 무리한 탓에 비명을 질러대는 '가짜 근육'들의 통증을 무시한채로, 당장이라도 놓칠 것 같은 정신의 끄트머리를 붙든 채로.

"내가. 아무리 그래도. 당신한테."

포식을 목전에 둔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들렸다.

죽을 때까지 익숙해지지 않을 베른의 목소리가 들렸다.

- 덜컥!

시나스타의 연결부에 칼리안의 검 끝이 닿았다. 오러를 담아도 부서지지 않고 오러가 담긴 검을 쳐내도 부러지지 않던 별의 잔재. 그 검의 유일한 틈으로 파고들었다. 강하게 비틀었다.

"당신한테. 내 형한테. 내가 했던 짓 고스란히 시킬 만큼."

드센 진동이 플란츠의 손으로 전해진다.

- 카가가각!

잘라내려는 칼리안의 검과 버텨내려는 플란츠의 검이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 깎여나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 길이 편하니까 다 됐다 생각할 만큼."

플란츠가 몸을 틀었다.

칼리안이 따라붙었다.

한 걸음 더 다가온 칼리안의 시선이 플란츠를 내리눌렀다.

"······ 속 빈 뱀 새끼는 아니야."

- 콰직!

시나스타의 틈이 벌어졌다. 균열이 생겼다.

시나스타는, 칼리안의 오러를 버티지 못했다.

- 카아아아앙!

둘을 연결해주던 고리가 날카롭게 깨져나갔다. 미친왕의 기억을 새긴 검과 지금의 플란츠가 선물받은 검이 결국 나뉘었다.

칼리안의 검이 플란츠의 목을 향해 치닫는다.

깨져나간 시나스타의 연결고리가 튕겨나갔다.

- 사아악!

칼리안의 검이 플란츠의 목 끝을 스치듯 베어내고 지나갔다.

시나스타 조각이 칼리안의 손등 위를, 손목 위를, 스치듯 베어냈다.

플란츠의 목에 가느다란 자상이 생겼다.

그리고.

- ······ 툭!

칼리안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가 끊어졌다.

뚝. 뚝. 뚝.

플란츠의 목에서, 칼리안의 손목 위에서, 가는 핏물이 흘러내렸다.

플란츠가 정말로 열외되었다.

베른의 모습을 잃은 칼리안이 싸움에 참여할 자격을 잃었다.

무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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