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400화 (401/527)

제71장. 다시(2)

해가 떠오른다.

온 하늘이 붉게 달아올랐다.

오롯이 푸르렀던 날, 빌어먹게도 드높았던 그 날의 하늘도 그랬다. 그렇게나 맑던 하늘이 붉게 달아올랐었다. 태양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하늘에 비춰질 모든 것이 타올랐던 탓에. 그리하여 하늘마저 푸름을 잊고 목놓아 붉었다.

그 날과 같은 듯한 빛에 깊이 물들어버린 베른의 머리카락 끝에서 찬 물이 뚝뚝 떨어졌다.

"헤르츠 경."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아르센은 답하지 않았다.

"헤르츠 경."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 아르센 헤르츠."

베른이 아르센을 불렀다.

"네. 여기 있습니다."

아르센이 대답했다.

칼리안이 잠시 웃음을 터뜨렸다.

베른이 고개를 돌렸다. 캄캄하던 하늘이 붉게 물든 모습을 보았다.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연보랏빛 눈에 태양이 잠겼다. 그것이 그다지도 눈이 부셔서, 베른의 눈이 잠시 감겨들었다.

- 깜빡.

다시 들어올려진 애섧은 눈동자가 아르센을 향했다.

"사실 가끔 궁금했습니다."

검 대신 말이 흘러나왔다.

졸음을 쫓으려는 것처럼. 졸음보다 더 강하게 흘러내리는 살의를 잠시 밀어두려는 것처럼. 스스로를 만류해보려는 것처럼.

"궁금했던 적 없다 하고 싶지만 나는 거짓말을 정말 못 하니까. 그래서 말해주자면, 가끔씩······ 민트차 말고 다디단 꿀차가 생각나는 그런 날이 오듯이. 그렇게 가끔 궁금한 날이 있었습니다."

여전한 살기 속에서, 네 개의 서클을 지닌 이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공포 속에서, 숨쉴 곳을 간신히 찾아냈다는 듯 숨을 몰아쉰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그리 궁금했는지 얘기해보라는 말이 차마 입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대답 대신 둘을 덮을 작은 크기의 사일런트 막만 만들었다. 그런 모습에 신경쓰지 않은 베른의 말이 이어졌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하고. 왜냐면."

베른의 손가락이 자신의 얼굴을 툭, 건드리고 지나갔다.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거든. 마법사들이 전부 다."

그 손가락이 멀찍이 떨어진 흰 말 위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이를 가리켜보였다.

"저기 계신 저 빌어먹게 편견 없는 내 형님 저 새끼. 형님 새끼 저 분 하나만 빼고 나머지 하얀 놈들은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가면을 쓰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표정이 하나도 안 보였거든. 그래서 궁금했어요."

깜빡. 깜빡.

수면향이 잔뜩 묻은 물기를 클린으로 지워내는 것도 잊은 채 뚝뚝뚝. 계속 흘러내리는 깊은 잠의 손길을 오러로 밀어내면서 칼리안이, 혹은 베른이, 말을 이어나갔다.

"무슨 표정이었을까. 나를 지나쳐 형님을 만나러 갔을 때에도 가면을 썼을까.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 계속 쓰고 있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닌가. 그래도 형님은 일국의 국왕인데. 아무리 이제 마지막이라 해도, 끝나는 그 순간까지 형님은 국왕인데. 그래야 하는데. 국왕의 앞에 나서는 새끼들이 감히 얼굴을 가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러니 얼굴을 드러낸 채로 형님한테 찾아가는 게 나았을까. 하지만. 역시 아닌가. 그래서 아무튼 그 하얀 가면 속에 무슨 표정이 있었을까······ 했는데."

뚝······ 뚝뚝.

"알겠네. 이제야."

이제야 알겠어.

한 번을 더 중얼거린 베른이 고개를 틀었다.

아르센을 쳐다봤다. 아마도 그 날 그 때 그 가면 속에 들어있던 것과 똑같을 얼굴을 쳐다봤다.

"헤르츠 경."

"······."

"아르센 헤르츠."

"네."

내 따까리 고집 참 세네, 하고. 베른이 피식 웃었다.

옷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뚝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툭툭툭. 잿빛 검을 바닥에 두드렸다. 그러다 깊이 삼켜낼 것이 있는 사람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봤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시선을 내렸다.

"그래. 그런 얼굴을 하고도 발을 안 물리겠다 하면. 내 나락을 일부러 불러낸 게 맞다 하면. 기어코 그리 해야 되겠다 하면······ 따라줘야지, 내가."

아무것에도 얼룩지지 않은 순백의 검 말고, 아무것도 비춰내지 않는 잿빛의 검을 한참동안 지켜보듯 바라보듯 내려다봤다.

뚝뚝뚝.

툭툭툭.

뚝뚝뚝.

툭툭툭.

뚝, 뚝······.

투욱. 툭.

- 탁!

그러다 갑작스레 검 손잡이를 틀어잡았다.

얼룩지지 않는 검도, 비춰내지 않는 검도, 사실은 모조리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듯이 검 손잡이를 거꾸로 잡았다. 그리고 누가 막아 설 새도 없이.

- 화아악!

잿빛의 검을 집어던졌다.

아르센의 새하얀 옷자락이 검이 일으킨 바람에 흐트러졌다. 그러나 그 뿐. 푸른 오러를 가득 머금은 검이 아르센을 지나쳐 계속 뻗어나갔다. 누구도 막거나 피하지 못할 속도로, 감히 그 어느 누구도 가로막지 못할 힘을 담고서. 그렇게 뻗어나갔다.

플란츠를 향해.

- 쌔애애액!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그 검을 플란츠가 보았다.

기실 피할 수 있을 공격도 아니었으나 굳이 피하려 하지도 않았다. 살기를 그득히 머금은 채 날아드는 검을 온전히 다 제 눈에 담았다. 끝까지 바라봤다.

아니, 그리 하려 했다.

그러나 하지 못했다.

결국은 눈을 감았다.

- 콰직!

옅은 에메랄드 빛의 머리가 바람결에 흐트러졌다. 그리고 다시 가라앉는다. 감은 눈꺼풀 위를 지나 콧등을 스쳐 내려갔다. 목과 어깨를 감싼 하얀 갑옷을 지나쳐 손등으로.

- ······ 사락.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내려앉았다.

제 앞으로 날아드는 검 앞에서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눈을 감았던 플란츠가 눈을 떴다. 손등 위에 떨어진, 고작해야 손가락 한 마디도 못 될 머리카락들을 잠시 내려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지나쳐 등 뒤의 나무에 깊이 박혀있을 검 말고, 칼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칼리안의 붉은 입술이 흠결 없는 미소를 짓는다.

베른의 새빨간 입술이 보기 좋은 곡선을 그린다.

그리고 살짝 벌어져 낮디 낮은 목소리를 내보냈다.

"체크."

이제 나는 너희들의 왕을 공격할 테니.

- ······ 우웅!

- 우우웅!

붉고 푸른 검이 베른의 오른손에 들렸다.

붉고 푸른 검이 칼리안의 왼손에 들렸다.

순백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두 자루의 검. 명징한 색을 지닌 두 자루의 검을 쥔 이가 아르센을 보며 입을 열었다.

"······ 막아."

지켜내 봐.

너도.

어디 한 번.

뚝뚝뚝.

성벽을 등지지 않은 채 불려나온 베른이, 왕을 등진 아르센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 억울하다 생각되었던 날은 없었는지요.

- 왜 없었겠습니까. 있었습니다.

- 아쉽다 여겨진 날도 있었는지요.

- 네. 그런 날도 있었습니다.

- 억울하고 아쉬워 서러운 날도 지내보셨는지요.

- 많았습니다. 억울하고 아쉬워서, 그런 것이 많아 아무래도 서러운 마음이 들어서. 밤이 다 지나고도 서러운 것이 많아서. 그리 지새운 날이 많았습니다.

- 그리 사셨습니까.

- 그리 살았습니다. 저는, 베른은, 그렇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 그래요.

앨런은 웃었다.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설령 무엇 하나 문제가 된다 하여도 무조건 다 괜찮다는 듯. 그저 웃었다.

- 그리 살았으면 되었습니다. 참 잘 사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었다.

* * *

그리 살아온 이가 그리 살아갈 이를 향해 한 걸음을 걸었다.

그리 사는 것 역시 사는 것이니 그런 날도 겪어가며 결국 다시 살아갈 이를 향해 한 걸음을 걸었다.

악몽에서 깨워내 나락 밖으로 밀어올려 놓으면, 여지없이 바닥에 엎드려 나락 속으로 팔을 뻗어대는 놈. 돌을 던지고 가시를 던지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죄 던져가며 악몽 속에 잠든 사람을 흔들어 깨워내고는 멱살을 붙들어 잡고서라도 저 있는 곳으로 끌어올려 두려는 놈. 무엇 하나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는 원수같은 놈.

그 놈을 향해 한 걸음을 걸었다.

- 쌔애액!

해묵은 것이 하도 많아 스쳐 붙들기만 해도 바스라질 것 같던 이의 젖은 구두 앞에 얼음의 화살이 날아왔다.

- 카앙!

양 손에 하나씩 잡은 두 자루의 검을 놀릴 것도 없다는 듯, 여전히 허공을 맴돌던 단검들 중 하나가 날아와 화살을 쳐냈다.

여든 여섯.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여든 여섯에서 마법사 한 놈이 빠졌다. 그 자리에 아르센이 들어앉았다. 그러니 지금 아르센이 베른을 불러낸 것은 예정되어 있지 않은 일이란 소리다. 원수같은 형님 새끼가 애초부터 베른을 끄집어 낼 계획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르센의 '첫인사'를 선사해 줄 생각은 없었을 터였다.

그 역할을 아르센이 자처하여 가져갔든.

아니라면 플란츠가 시켰든. 계획된 일이었든 아니든.

- 쿠웅······!

이제 와 베른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굳이 그렇게 불러냈으니 굳이 이렇게 보답할 수밖에.

- 위잉, 위이이잉!

아르센이 만들어낸 하얀 서리가 가득한 땅에 바람이 불었다. 청은빛의 긴 머리가 갈래갈래 춤을 췄다. 바닥을 뒤섞던 가는 바람이 드세게 변했다. 그리고 곧 회오리가 되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가는 얼음의 창들을 회오리 속에 가두어 분쇄한 베른의 등 뒤에 아르센이 섰다. 그 손에 마력이 응집되는 것이, 베른의 고개가 뒤로 돌려지는 것보다 빨랐다.

- 쩌저적, 쩌적!

- 드드드득!

아르센의 발 밑에서 얼음 줄기 하나가 뻗어나왔다. 땅을 뚫고 뻗어나온 가시 가득한 얼음 줄기가 베른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닥에서 솟구친 얼음 산맥처럼, 대지를 가르고 튀어나온 깊은 흉터처럼.

베른이 손에 쥔 두 검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얼음 줄기 앞에 검을 박아넣었다. 검을 타고 쏟아진 푸른 오러가 얼음 줄기를 가로막았다.

- 콰과광!

오러의 힘에 맞아 산산이 조각난 얼음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살짝 고개를 치켜 든 아르센의 로브자락이 바람없이 휘날렸다. 마력이 모여든다.

- 쩌적, 쩌적!

- 쩌저적!

- 쿠구구궁······!

수를 세기 어려울 작은 얼음 조각 하나하나가 땅 속의 물을 불러낸다. 얼린다. 쏟아지듯 뻗어나간다. 직전까지는 두꺼운 한 줄기 뿐이었던 얼음이 수십, 수백 갈래의 얼음이 되어 대지 위를 달렸다. 사방에서 나타나 베른을 향해 모여들었다.

하나의 검을 여전히 땅에 박아넣은 베른의 몸이 그대로 한 바퀴 회전했다. 언 땅에 둥근 원이 그려진다. 그 둥근 균열에서부터 뻗어나간 바람, 서늘한 칼날이 가득 담긴 붉은 오러를 담은 바람이 베른을 중심으로 넓게 휘몰아쳤다.

- 콰과과과······!

- 쾅, 콰아앙!

가는 얼음 줄기와 날 선 바람이 서로를 부숴대는 소리가 온 숲을 울린다. 발을 멈춘 베른이 바닥을 박찼다. 그 순간 아르센의 중심으로 바람의 회오리가 인다. 아르센의 팔과 다리를 타고 회오리쳐 올라오는 작은 바람들이 아르센의 움직임을 막는다.

바람의 손아귀에 붙들린 아르센의 푸른 눈에,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짐승의 눈이 보였다. 짐승의 손에 들린 두 개의 날붙이가 보였다.

- 부웅!

- 카가가각!

바람을 뚫고 나온 얼음의 장벽에 베른의 검이 막혀들었다.

얼음 속으로 붉은 오러가 파고든다. 서늘한 얼음이 검의 표면을 타고 올라간다.

검과 마법의, 오러와 마력의 힘겨루기가 찰나동안 이뤄졌다.

두 개의 검을 얼음 벽에 박아넣고 있던 베른이 오른쪽 검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오러가 잔뜩 담긴 검날을 횡으로 그었다.

- 서걱!

두터운 얼음이 그대로 잘려나간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왼쪽 검이 아르센의 목을 향해 내리꽂힌다.

- 파앗!

- ······ 콰직!

아르센 대신 아르센의 뒤에 있던 나무 기둥에 깊은 상흔을 낸 베른이, 뒤를 돌아 볼 것도 없이 곧장 몸을 날렸다.

- 콰직!

그와 동시에 조금 전 베른의 검이 박혀있던 나무에 얼음의 창이 꽂혀든다.

- 우지끈······ 쿠궁!

검과 얼음에 중심을 잃은 아름드리 나무 하나가 서서히 기울더니 거대한 소음을 내며 쓰러졌다. 조각난 나무 파편이 어지러이 흐트러진다. 그러나 아르센은 그 장관을 지켜 볼 여유가 없었다.

베른이 사라졌다.

얼음의 창에서 몸을 피함과 동시에 사라졌다.

아르센이 서둘러 마나를 풀었다. 빛이 들기 시작한 숲에서 제멋대로 몸을 숨긴 베른의 기운을 찾으려 했다.

"여기."

그런 수고를 덜어주겠다는 듯.

- 쉬이익!

바로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보다 빠른 검이 아르센의 머리와 심장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새끼 사슴을 뒤쫓으면서도 전력으로 달려드는 맹수처럼. 조금도 느려지지 않은 속도로.

- 파앗!

생각보다 몸이 빠르게 움직인다.

아르센의 모습이 사라졌다. 베른의 머리 꼭대기에서 나타났다. 가는 나뭇가지를 밟고 섰다.

- 화르륵!

- 콰아아앙!

그리고 머리통만한 불덩이 하나를 보냈다.

표적이었던 베른이 몸을 띄웠다.

언 땅 위로 내리꽂힌 불꽃이 새하얀 연기를 내며 식어갔다.

- 휘이잉!

- 쌔애애액!

그 연기를 품은 바람이 아르센을 향했다.

시야가 가로막힌 아르센의 귀에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바람의 창이다.

아르센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텔레포트하려 마력을 움직였다. 그런데.

- 서걱!

밟고 서 있던 나뭇가지가 베른의 단검에 의해 잘려나갔다.

제복을 챙길 새 없이 그대로 달려온 탓에 걸치고 있던 옅은 회색의 로브가 하릴없이 바람을 품었다.

바닥을 한 바퀴 뒹굴다 재빨리 몸을 일으킨 아르센이 앞을 봤다.

- 쉬이익!

칼날이 날아든다.

양 손에 들린 칼날이 피할 곳 없이 날아든다. 뒤에서 불어드는 강한 바람이 아르센의 시야를 다시 막는다.

텔레포트보다 빨리 도달할 것 분명한 검격 앞에 선 아르센이 베른의 눈을 봤다. 그리고 마지막 일격을 위해 마력을 모았을 때.

- 숙여.

낮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 정도의 짧은 말마저 해석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던 아르센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 사이로,

- 쌔애애액!

세 발의 화살이 날아와 아르센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고개 못 숙였으면 저쪽 부군단장이 쏘아 낸 화살 세 발이 정확히 어디에 꽂혀들었을지 생각하고 기분 나빠 할 틈도 없이.

- 카강, 캉!

베른이 두 발의 화살을 튕겨냈다. 그러더니 제 손에 들린 칼을 주저않고 없앴다. 동시에 자신의 미간으로 치닫는 화살을 향해 팔을 뻗었다.

- 타악!

전광석화처럼 뻗어나간 손에 나머지 한 발의 화살이 틀어잡혔다. 맨 손으로 화살을 잡아챈 베른이 그것을 거꾸로 쥐었다. 그리고.

- ······ 콰직!

검 말고, 마법 말고.

플란츠가 쏘아낸 화살로 아르센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 큭!"

"내가 그렇게 속이 넓진 않은 사람이라."

그리고는 첨예한 화살을 머뭇거림 없는 손길로 확 뽑아냈다.

아르센의 더운 피가 베른의 옷에 묻는다.

흘러내린 피가 베른의 구두에 젖어든다.

아량 넓지 않은 이의 복수를 맺었다. 그리고 다시 검을 만들었다. 아르센을 겨눴다.

"······ 안네루시아 건네주십니까."

언젠가 다쳤던 어깨를 똑같이 다친 아르센이 베른을 올려다봤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네줘야지. 안네루시아."

대답을 건넸다.

그리고, 칼날 대신 해묵은 감정만 가득 담은 검으로 아르센의 목을 내리쳤다.

- 빠악!

날 없는 붉은 검 말고 붉은 안네루시아를 주고 싶은 솔직한 마음을 모조리 싣고서.

- 풀썩!

배려를 담아 받쳐 줄 손길 없이 정신을 잃은 아르센의 몸이 큰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뒤로 한 채, 베른이 고개를 들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플란츠에게로 발을 옮겼다. 열 걸음에서 아홉 걸음, 일곱 걸음, 세 걸음, 한 걸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움직임으로 그렇게 플란츠의 앞까지 다가섰다.

- 우웅······.

검을 들어올렸다.

세우지 않던 날을 세웠다.

플란츠는 피하지 않았다.

붉은 검이 플란츠의 목을 겨눴다.

푸른 검이 플란츠의 목을 겨눴다.

낮은 목소리가 플란츠를 향했다.

베른이 비로소.

과거의 플란츠로부터 일방적인 전쟁을 받게 되었던 베른이 비로소. 그 끝을 보지 못했던 베른이. 비로소.

"체크메이트."

비로소 전쟁의 끝을 고했다.

그런 베른을 보던 플란츠가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이 계절의 어디에서나 볼 법한, 다 자라지 않은 생명을 한가득 담은 눈을 떴다. 입을 열었다.

"아닌데."

"무엇이 아닙니까."

"내 아우님의 혼돈이 깊으셨나."

내려다보지 않고 마주 부딪혀오는 연두색 눈 아래로, 멀쩡히 잘 붙어있던 입술의 한쪽 끄트머리가 비뚜름히 말아올려졌다.

"불가능한 말씀을 꺼내시는군."

나지막이 답한 플란츠가 칼리안을 똑바로 마주봤다.

그리고 칼리안의 오류를 정정했다.

"왕이 없는데."

"······ 그렇습니까."

애초부터 이 판에 왕은 없었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지켜지기만 하는 왕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그런 말임을 알아들었다.

선선히 대답한 이의 웃음소리가 숲을 맴돌았다.

그 웃음이 끝나기를 기다려주지 않은 채, 플란츠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어울리지 않을 활을 내버려둔 채 시나스타를 뽑아들었다. 그것을 곧바로 나누어 잡았다.

- 타앗!

플란츠가 제 동생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대로 된 형제 싸움을 걸어왔다.

웃음을 멈춘 칼리안의 눈이 빛났다.

"그리 여기신다면······ 기꺼이."

대답을 전했다.

- 카강, 카아아앙!

칼리안의 신형이 쏘아지듯 뻗어나갔다.

네 개의 칼날이 서로 얽혀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