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장. 다시(1)
얼음과 겨울.
그 둘의 맞닥뜨림이라 하면 될는지.
- 쌔애애액!
- 카아앙!
이제 떠오르는 태양의 붉음에도 시린 한기가 든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둘의 기운이 마주치자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선다. 그것이 단순한 한기인지, 서로를 향한 살의와 공포 때문인지.
그조차 구분하지 못한 채 환자를 뒤로 옮긴 발칸의 여러 대원들이 발을 멈췄다. 싸움에 참여했으나 아직 열외되지 않은 이들 중 플란츠와 아르센을 제외한 남은 여덟 명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자신들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중인지를 망각했다. 겨울을 가르려 드는 얼음의 창과 얼음을 짓누르는 겨울의 검을, 둘의 싸움을 지켜봤다.
- 쩌저적, 쩌적, 쩌적!
- 부우우웅. 콰아앙!
혹독한 것을 모두 끌어안은 듯한 잿빛 검이, 푸름을 채 버리기도 전에 얼어버린 대지를 내리찍었다. 지축이 흔들리며 숲이 울었다.
순식간에 발치로 다가오던 얼음의 손아귀에서 쉬이 벗어난 칼리안이 몸을 띄웠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아르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것을 본 아르센의 앞에 실드와 얼음의 방벽이 동시에 떠오른다. 그렇게 만들어진 두터운 얼음 위로 다시 한 번 겨울이 쇄도했다.
- 카가각!
- ······ 쩌엉!
먼 곳에 선 플란츠에게는 시선조차 두지 않았다.
아직 남은 여덟 명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 휘익!
자신을 보호해주던 두터운 벽이 갈라지기 무섭게 아르센의 모습이 사라졌다.
칼리안의 바로 뒤. 높은 나무의 꼭대기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르센의 손 끝에서 거대한 마력이 방출되었다. 아르센이 사라진 것을 알자마자 몸을 틀어 도약하는 칼리안의 발 끝이 깊이 패였다.
- 우웅······.
수십의 얼음쐐기가 허공에 떠올랐다. 제각각 회전하며 제멋대로의 방향에서 나타났다. 어떤 것은 칼리안의 뒤에서, 어떤 것은 아르센의 발치에서, 어떤 것은 칼리안의 정수리 위에서, 또 어떤 것은 아르센의 손 끝에서.
그렇게 만들어진 얼음 쐐기들이 회전 속도를 높여갔다.
"······ 허어."
그 모습을 본 마법사들이 질린 얼굴을 했다.
모두 다른 경로. 모두 다른 크기. 모두 다른 회전 방향. 그것이 다른 만큼 따로따로 이루어져야 하는 마법의 계산식. 그런 마법을 성공하여 칼리안에게 보냈음을 아는 까닭에.
평소였다면 분명 우쭐해했을 아르센은 아무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손 끝에 모인 마력들을 움직여 칼리안을 향해 내쏘는 것에 온 힘을 다했다.
- 쌔애액, 쌕, 쌔액!
생김이 다 다르나 그 끝이 첨예한 것만은 모두 동일한 쐐기들이 공중에 몸을 띄운 칼리안을 향해 치달았다. 사방에서 쇄도한다. 화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속도로, 마치 칼리안이 검을 휘두르는 것과 같은 속도로.
- 우웅······.
칼리안의 손 끝에 붉은 빛이 맺힌다. 그 기운이 검신 위로 몸을 휘감는 뱀처럼 얽혀 올라갔다.
짙은 밤. 어두운 새벽.
그것을 다 담은 듯한 검에 붉은 오러가 얽혀든다.
- 우우웅!
검에 실린 오러를 한층 더 발산한 칼리안이 제 검을 그대로 휘둘렀다. 방향도 시간도 가늠하지 않은 채 그저 휘두른 검 끝에 드센 바람이 일었다. 심장을 꽉 틀어쥔 듯한 둔중한 울림 소리가 사방을 잠식했다.
소리조차 남기지 않던 예전과는 다른 모습에 아르센이 마른침을 삼켰다.
- 콰아아앙!
- 투둑, 투두두둑!
지축을 울려대는 굉음이 온 사방을 뒤흔들었다. 애써 만들어 날려 보낸 얼음 쐐기가 무력하게 막혔다. 모두 다 튕겨나가 땅으로 박혀들었다.
칼리안이 아르센을 향해 몸을 날린 그 짧은 시간동안 벌어진 일이다. 찰나의 순간에 아르센이 때를 보아 만들어 보낸 공격이 무산됐다.
- 타앗!
- 파사삭!
아르센의 몸이 다시 사라졌다.
칼리안의 구두가 홀로 남은 나뭇가지를 스치듯 밟는다. 마른 장작의 가운데 결처럼 바스라진 나뭇가지가 후두둑 떨어져내린다.
칼리안의 바로 뒤에서 나타난 아르센이 쉼없이 마력을 움직였다. 얼음의 창을 다시 보냈다. 순식간에 녹았다 얼기를 반복해 하나하나가 보다 더 날카로운 기운을 가지게 된 얼음의 창을 쏘아보냈다.
- 콰아아앙!
- 후두둑, 후둑!
여지없이 막혀든다.
아니, 그대로 부서졌다. 겨울의 무게에 짓눌려 부서진 얼음이 산산이 조각나 한없이 추락했다.
아르센이 약한 것이 아니라 상대가 칼리안이었던 탓에. 아르센의 얼음도 단단했으나 칼리안이 조금 더 단단했던 탓에. 아르센의 창도 충분히 빨랐으나 칼리안의 검이 조금 더 빨랐던 탓에.
성장한 것이 아르센 혼자만은 아니었던 까닭에.
- 쿠웅.
칼리안의 발이 바닥을 디딘다.
얼어붙은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내린다.
- 사아아······.
서늘한 바람이 불어들었다.
긴 숨을 들이마신 아르센이 쉼없이 마력을 움직였다.
- 쩌저적, 쩌저적!
아르센의 발치에서 시작된 긴 얼음 줄기가, 마치 얼음 강의 균열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닥을 헤집으며 쭉 뻗어나갔다. 줄기줄기 가지를 내어 가며, 한겨울의 서리를 바닥에 만들어가며, 당장 입김이라도 새어나올 듯한 마력의 줄기를 칼리안에게 내뻗었다.
- 카가각!
칼리안의 앞에 당도한 얼음 줄기가 지면 위로 솟아올랐다. 그 뒤를 이어 뻗어나온 얼음이 칼리안의 뒤를, 옆을, 머리 위를, 얼음으로 만든 감옥이라도 되는 양 솟아올라 칼리안을 그 속에 가뒀다.
그 속도가 칼리안의 움직임만큼이나 빨랐던 터라, 순식간에 시야가 차단되고 움직임을 봉쇄당한 칼리안이 고개를 모로 틀었다.
"미스릴 그물이 안 통하니 얼음 감옥을 보내시나."
짧은 평을 마친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붉은 입술이 기꺼이 움직이며 긴 미소를 지었다.
소용없는 짓이겠지만, 순간적으로나마 자신의 움직임을 막아낸 따까리가 기특하여서. 그리고 또 하나.
- 구구구궁······.
얼음 벽 너머.
불과 대지, 그리고 번개의 힘이 얽혀들고 있지 않나.
남은 여덟에 포함되어 있던 세 명의 마법사들의 곁에 마력이 응집되고 있었다. 다섯의 기사들이 언제든 세 앞으로 뛰쳐나가 칼리안 자신으로부터 마법사들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두 속성의 충돌 말고, 칼리안 스스로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여겨지는 그 정도의 폭발 말고, 셋. 세 개의 힘을 충돌시키려는 것이다.
"양 쪽에서 서로 시간을 끌어주려고 하면 어떡하나······ 부군단장들끼리 손발이 이렇게 안맞아서야. 큰일이네."
플란츠와 아르센의 서로 다른 의도를 알게 되었으니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있나.
플란츠 쪽에서는 아르센이 공격할 시간을 주기 위해 마법사들의 커다란 공격으로 칼리안의 이목을 끌려 하고, 아르센은 아르센대로 그런 마법사들이 공격할 때까지 칼리안을 묶어두려 하고.
이렇게 손발이 안맞아서야.
- 우우웅······!
칼리안의 검에 얽힌 오러가 더 짙어졌다.
어쩐지 그 붉음이 마음에 들지 않아 피어의 기운을 밀어넣었다. 어둠을 뚝뚝 흘리는 모양새가 된 검을 흡족하게 내려다 본 칼리안이 팔을 움직였다. 그리고 검 끝으로 아르센의 얼음을 길게 긁어 내려갔다.
- 그그극!
뾰족한 것이 얼음을 갉아내는 소리가 난다.
아르센이 마른 입술을 한 번 더 적셨다.
마법사들이 이번에는 세 속성의 마력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자 하는 것임을 눈치챘다. 그래서 칼리안을 잠시 가뒀다. 덕분에 얼음 벽 너머로 자신을 뜯어먹을 듯 노려보는 연보랏빛 눈을 마주보게 되어 뒷목이 서늘해진 아르센의 머릿속으로 플란츠의 말이 들려왔다.
- ······ 말고. 마법사 네가 할 공격을 하라고. 아우님 시선은 이 쪽에서 끌 테니까.
- 그그그극!
머릿속으로 이어지는 플란츠의 목소리에 집중하지 말라는 듯 소름끼치는 소리가 난다.
그보다 더 소름끼치는 눈이 아르센에게서 떨어지질 않는다. 그것을 고스란히 마주 보게 된 아르센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그리고 그 때.
- 우우웅!
두 부군단장이 대화 마치기를 더 기다리기가 지루해진 맹수가 우리 속에서 움직였다.
- 쌔애애액, 쌔액, 쌔애액!
- 서걱!
정확히 여덟 개의 붉은 검이 얼음 벽 너머로 만들어져 떠올랐다. 이제껏 사용하지 않았던 오러의 단검을 만든 칼리안이, 얼음 벽 안에 일부러 얌전히 가둬진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웃음을 보였다. 아르센을 계속하여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 쌔애액! 쌕!
- ······ 콰직!
어느 한 쪽이 시간을 끌어 줄 필요가 없도록.
손 발이 맞든 안 맞든 아예 소용 없도록.
- 쉬이익!
- ······ 쿵!
신경쓰지 않고 잠시 내버려두려 했던 남은 여덟 명의 대원들에게 오러로 만들어진 단검을 보냈다. 마법에 집중한 마법사들의 쇄골을 부쉈다. 옆구리를 꿰뚫었다. 어깨를 관통했다. 기사들의 정강이를, 발목을, 허리를 베어냈다.
- 카가강, 카앙!
단 두 명의 기사만 공격을 막아냈다.
기사의 검에 막힌 칼리안의 단검들이 저 홀로 힘을 만들어냈다. 검을 꿰뚫고 그 뒤의 목을 베었다. 또 다른 한 명의 검을 쳐낸 뒤 복부 깊숙이 박혀들어갔다.
그런 공격이 있으리라 예상하라 일러두었으나 속도와 힘을 따라잡지 못하고 일순간에 쓰러져 누운 대원들을 본 플란츠가 긴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마치 그것을 신호로 삼기라도 한 것처럼.
- 쿠웅, 쿵!
묵직한 것이 대지 위로 쓰러지는 소리가, 그 와중에도 생명에 지장이 없을 곳만 골라 극심하게 다친 여덟 명의 신음이 동시에 울려퍼졌다.
아르센이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칼리안의 검이 자신에게로 치닫기 전에, 그 뒤의 칼리안이 플란츠의 앞에 서기 전에.
- 촤아악!
온 힘을 다해 굳혀두었던 빙벽을 녹였다.
순식간에 녹아내린 얼음물이 칼리안의 온몸을 적셨다. 검은 재킷과 바지를, 그 속에 빠짐없이 챙겨입은 실크 재질의 베스트를, 다시 그 속에 꼼꼼하게 채워둔 새카만 셔츠를 완전히 적셨다. 청은빛의 긴 머리를, 연보라색의 눈이 전부 다 젖어들어갔다.
저 물이 아무리 차갑다 한들, 감기는 걸리지 않을 것이다.
- 깜빡.
감기는 안 걸린다.
열이 날 일은 없다.
- ······ 깜빡.
다만 졸음은 올 터였다.
"헤르츠 경."
물 속에 스민 수면제 따위, 당연히 소용없다.
당장 픽 쓰러져 잠드는 건 일반인에게나 통하지 칼리안은 아니다. 잠시 졸릴 뿐 아무 타격도 없다. 안다. 잘 알고 있다.
그것을 잘 아는 아르센이.
- 저벅.
칼리안에게로 한 걸음을 걸어갔다.
그리고.
"만나서 반갑네."
졸음 가득한 칼리안에게, 이렇게.
"발칸의 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라 하네."
세상의 그 어떤 얼음보다 더 차갑고 독한 쐐기를, 플란츠의 마지막 한 수를, 칼리안의 밑바닥을 향해 냅다 집어던졌다.
* * *
하얗다.
그림자 하나 맺히지 않을 만큼 새하얀 빛이었다.
그래서일까. 새하얀 그 검에는 핏자국도 남지 않았다.
- 툭툭툭.
검신에 방울방울 맺혀있기만 하던 핏방울이 또르륵 굴러 바닥에 떨어진다. 검신과 손잡이 전체를 감싼 정교한 세공 사이사이에 그 붉은 것이 들어차 말라붙을 법도 한데 좀처럼 얼룩이 지지 않는 것이다.
때때로 그것이 불만이었다.
피얼룩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곤 했지만, 애초부터 피얼룩이 묻지조차 않는 그 하얀 검에 대해서는 이유 모를 거부감이 들곤 했다. 묻은 피를 다 담고 덮어두는 검은 빛도 아니고 고스란히 드러내는 흰 빛도 아니고 그저 새하얗기만 한 모습. 마치 다른 이에게 죽음을 내려본 적 없다는 것처럼, 더운 피를 묻힌 일이 아예 없던 것처럼 깨끗하게 구는 양이 괜스레 거북했다.
- 또르륵.
물론 그렇다 해서 그 검이 싫었다는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오러를 쓸 수 있고 사용하는 검술에 딱 맞는 무게도 지녔으며 이제껏 보아 온 어떤 날붙이보다 예리한 칼날을 자랑하는 그 새하얀 녀석은 분명한 보검이었다. 무엇보다, 하나 뿐인 형제가 건네 준 검이었다. 그러니 꺼려할 이유가 없었다. 충분히 마음에 들었지만 아주 가끔씩 거부감이 들고 거북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날에는, 피가 묻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거부감도 거북함도 없이 그냥 다행이라고만 여겼다.
기억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증오스럽기만 한 놈들이 죽어 사라진 흔적 따위는 검에 남겨 둘 가치조차 없다 여겼으니까.
- 툭툭툭.
- 도르륵.
바닥에 몇 번 두드리는 것으로 검신에 묻어있던 생명들의 온갖 흔적을 다 털어낸 이가 앞을 쳐다봤다. 가물거리는 눈꺼풀을, 이미 다한 생명같은 연보랏빛 눈을 애써 들어올려 멀찍이 선 놈들을 봤다. 이 새하얀 검을 거쳐가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 사라질 놈들을 봤다.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 감상이 입 밖을 맴돈다.
"여전히 많이도 남았군."
팔천.
팔천이 세크레타를 찾았다.
그나마 헤이사드 변경백이 어느만큼을 줄여놓고 스포튼 지역의 영주들과 멘테스 변경백이 어느만큼을, 안타라 지역의 백작과 자작들이 또 어느만큼을, 그리고 테일란. 테일란 카스트린이······ 다시 어느만큼을 줄여놓은 수. 그리하여 수도 세크레타 앞에 도달한 군사의 수. 팔천.
잿빛 사슬 갑옷을 입고 검이나 활을 든 놈들. 그 놈들이 팔천의 대다수다. 허나 놈들은 무서울 것이 없다. 걱정할 것이 없다. 성문을 닫고 마주 활을 쏘고 마법을 보내고 마력탄을 던지고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고. 그렇게 상대해도 된다.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테일란이 반드시 우선하여 없애야 한다 전해왔던 놈들. 테일란이 결국 막아내지 못한 놈들. 팔천 중 겨우 오백 남짓 되는 극소수의, 이 전장에 어울리지도 않을 하얀 로브 차림의 놈들.
마법사단 발칸.
그 악마들 때문에.
그들이 그토록 아름답던 세크리티아를 불태웠다. 부서뜨렸다. 무너뜨렸다. 짓밟았다. 순식간에, 정말 순식간에. 제대로 된 이유조차 말하지 않은 채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은 채로.
- 툭툭툭.
또 한 번 검을 들어 바닥을 두드렸다.
더는 떨어져내리는 핏방울이 없음에도, 괜스레 그냥. 쏟아지는 잠을 쫓아내고 정신을 차리고자. 다시 움직이고자.
고개를 들었다.
뒤늦게 전장에 찾아온 놈. 잿빛 갑주를 두른 놈들과 하얀 로브를 입은 놈들의 가장 앞으로 나선 놈. 그놈을 봤다.
- 다각······.
놈이 말에서 내렸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한 채 피웅덩이를 밟았다. 놈의 발에 티가 묻는다. 새하얀 옷에 새빨간 티가 묻는다. 얼룩이 진다. 핏물이 든다. 그 꼴이 괜스레 기꺼워 웃었다.
- 저벅, 저벅.
놈이 그렇게 딱 두 걸음을 앞으로 나왔다.
여전히 멀찍이 선 채로 고개를 들더니 내려다봤다.
"홀로 버티는 것이 버겁다면. 물러나라."
그래.
내려다봤다. 저보다 더 큰 이를 내려다봤다. 나락 밑바닥에서 연명해 온 이를 관람하듯 그렇게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 살려주지."
이 따위 말을 했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또 났다.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을 알아보지 못한 척 대꾸할 여력도 남지 않아 그냥 웃었다. 전해진 말의 모든 것이 우스울 뿐이라 웃음이 났다.
생을 살았는지 죽음을 미뤘는지도 모를 눈을 한 주제에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것이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같잖을 뿐이라.
"어느 집 개새끼길래 짖는 소리가 내 집 담을 넘나."
한 마디도 사람 소리로 듣지 않았다.
단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대화가 아니었으니 대답이 될 수도 없는 말. 그저 홀로 내뱉은 것이 된 말. 꽤 오랜만에 꺼낸 욕지거리. 그런 것만 돌려줬다.
그 말에 대한 대가라는 듯.
쏴아아아-.
화살의 비가 다시 쏟아진다.
* * *
검을 내뻗던 칼리안의 팔이 고요히 멈췄다.
- 깜빡.
그리 많던 발칸의 단원들도 깊은 구덩이도 일깨우지 못한 기억을 일순간에 되살려 둔 아르센을 향해 고맙다 해야할지.
'기억하마. 이름이 무엇이냐?'
그들은 세크레타에 누가 있는지 몰랐다.
세크리티아의 귀족들조차 베른이 검의 길에 올랐던 사실을 몰랐다. 무력과 인성이 반비례하여 무력은 많은데 인성이 없는 왕제가 검의 길에까지 올랐음을 귀족들이 알게 되어 좋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외부에는 그 사실을 숨겼었다. 세크리티아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니 카이리스 놈들이 그것을 알아냈을 리 만무했다.
덕분에 카이리스의 군인들도 베른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세크리티아의 국왕과 그 동생을 직접 보았던 적도 없었을 뿐더러 한쪽 팔을 잃은 채 오러를 쓰고 살기를 내뿜는 놈이 설마하니 국왕의 동생일 것이라 확신하지 못했다 해야 맞을 일이다.
'잊었다.'
그 아르센조차 처음에는 베른의 이름부터 확인하려 하지 않았나. 세크리티아의 국왕과 똑같은 색의 긴 머리를 숨기지도 않고 성문 앞에 나섰음에도.
- 깜빡······.
'나는 카이리스 마법사단 발칸의 군단장. 아르센 헤르츠다.'
그렇게 하여 이뤄진, 웃기지도 않는 통성명.
그 날의 기억이 칼리안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그대는 충분히 싸웠다.'
- 욱씬!
욱신거린다. 아린다.
멀쩡한 어깨가 욱신거리고 온전한 심장이 아려온다.
환상통이었다.
'그러니 이제 쉬어라.'
그래.
환상통이다.
알고 있었다. 안다.
- 깜빡······ 깜빡.
저벅.
한 걸음을 앞으로 움직였다.
저벅.
다시 한 발을 움직였다.
······ 저벅.
다시 한번 더. 움직였다. 그리고.
검을 들었다.
- 우우웅!
푸른 오러가 잿빛 검을 휘감는다.
거대한 바람이 인다. 숨막히는 피어가 흘러나온다.
지독한 형님 새끼.
파릇하게 잘 가르쳐놨더니 어디서 뱀 같은 것까지 싹싹 긁어다 배운 망할 완두콩.
"······ 빌어먹을."
베른의 입에서 작은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짙은 살기가, 아르센의 목을 옥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