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98화 (399/527)

제70장. 한 마리 대 여든일곱 명(6)

언제나 변수는 있다.

예측하기 어려운 일. 예외적인 상황. 생각지 못한 사고와 같은 것들이 언제 어디서든 나타난다. 예상을 뒤엎고 상황을 바꾸며 잘 짜여진 계획을 바꾸게 만든다.

이제는 플란츠도 변수를 안다.

체스 게임에서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것은 수월한 일이지만, 세상을 사는 것은 그와 다름을 배웠지 않나.

에반을 잡기 위해 잘 만들어두었던 계획이 기사 한 명이 전해주었던 독주머니로 인해 완전히 무산될 수 있음을 배웠다. 라시드의 검을 목전에 둔 칼리안이 반드시 앞을 막아주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준비를 마치고 방문을 나설 때, 두 고양이를 위해 마련된 욕실에서 비누거품을 주렁주렁 매단 채 도망나온 안네가 품으로 뛰어들어와 서럽게 울어대는 날도 있음을 배웠다.

- ······ 호기심.

그리고 오늘도.

언제 어디서나 변수가 생길 수 있음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수면향을 분석해 같은 효과를 내되 향이 없는 것을 만들라 지시하고, 대지 속성을 익힌 발칸의 마법사들을 싹 끌어모아 능력이 되는 만큼의 구덩이를 만들게 하고, 튼튼한 그물과 수많은 마력탄을 준비했다. 여든 여섯 명의 대원들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싸움을 벌일지 모두 결정해 숙지시켰다.

그때까지는 모든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실제 싸움까지 전부 다 계획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수면향과 같은 향기를 방 안에 피울 때 칼리안은 이미 싸움을 시작할 준비를 마친 뒤였다. 계속하여 그림자 속에 스며들어 싸우려 들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숲 전체에 마법 등불을 설치해두었으나 어느새부터인가 모습을 감추지 않고 날뛰는 칼리안 덕에 그것을 쓸 일이 없었다. 숲에 두 개의 덫을 더 놓아 두었으나 칼리안은 걸리지 않았다. 우유 못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에게 숲 중앙 인근의 정찰과 첫 번째 조의 지원을 지시했으나 그는 칼리안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고 첫 조는 칼리안에 의해 순식간에 '열외'되었다.

다만 그것들이 변수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예상에서 다소 벗어났을 뿐, 계획을 수정하고 다시 정해야 할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 호기심 때문에 그랬다고.

- 그렇습니다, 잠시동안은 저하 말고 부군단장만 하실 것 같은 부군단장님.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 잠들었으면. 언제 일어날 것 같은데.

- 글러먹었습니다. 마나실 약제사 얘기로는 내일까지는 푹 잘 것이라 합니다.

여든여섯 명 중에 포함되었던 마법사.

수면향이 완성되는대로 그것을 가지고 숲으로 와 칼리안과 싸우는 척을 하며 향을 퍼뜨리기로 했던 바람 마법사. 바로 그 놈이 수면제의 완성도에 호기심을 느끼고 말았다.

정말로 아무 향이 나지 않도록 잘 만들어졌는지가 궁금해졌단다. 그래서 그만 수면제가 든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아보고 말았단다. 그것이 먹는 용도 뿐 아니라 공기중으로도 퍼지는 약임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군단장이신 부군단장님.

잠들어버린 마법사 대신 소식을 알려오는 아르센의 말에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마법사의 호기심은 아무도 못 고친다. 잘 안다.

마법사가 호기심 접기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내 정혼자의 키가 자랄 때를 기다리는 것이 빠르리라는 사실을 플란츠도 안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싸움을 앞에 둔 마법사가 싸움 말고 수면제 따위에 더 큰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아주 잘 안다.

- 저도 엄연히 왕자님 변한 모습 본 사람인데 제가 대신 가면 안 됩니까? 자주 잊어버리시는 것 같지만 저 부군단장입니다, 부군단장님.

그 마법사 곁에 서 있다가 수면제에 대한 호기심을 살짝 부추겨주었을 것이 분명한 새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의 들뜬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 사실 부군단장이신 부군단장님도 부군단장이고 저도 부군단장은 부군단장이니까 결국 같은 부군단장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부군단장인 제가 같은 부군단장이신 부군단장님께 허락을 받고 전투에 참여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이건 왕자님과 부군단장이신 부군단장님께서 나누신 모종의 내기에 얽힌 싸움이라 하셨으니 굳이 이렇게 부군단장인 제가 부군단장이신 부군단장님 의견을 먼저······.

그냥 좀 꺼졌으면 좋겠다.

제발 좀 꺼졌으면 좋겠다.

- 게다가 저 싸움도 잘 합니다, 부군단장이신 부군단장님.

- 싸움을 잘 해서 문제인 것 아닌가.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이 상황이면 충분히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하는데. 내 아우님 건드리는 것으로는.

- ······ 지금 이게 왕자님께서 기억에 담아두신 일 쿡쿡 쑤시는 상황이라는 걸 알고는 계셨습니까? 저하께서 그 왕제님 모습으로 변해 있는 왕자님 앞에 발칸 제복 싹 다 입혀놓은 대원들 세워두셨다 하기에 저는 저하께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비꼬는 것 분명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눈꼬리를 찌푸린 플란츠가 대답을 보냈다.

- 알고 있어. 칼리안도 알아.

- 그럼 두 분 정말 일부러 이런 짓 벌이신 겁니까?

- 향을 직접 둘러 봐야 기억만큼 독한지 아닌지 알 것 아냐.

르니에리와 썩 비슷한 백합 향의 향수를 들이부은 뒤에야 그것이 기억만큼 독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굳게 잠긴 창문을 깨뜨리고 단단히 쳐 둔 커튼을 치워버린 뒤에야 밖으로 나갈 결심을 하게 된 형제를 보게 되었다.

그러니 때로는, 보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일부러 건드리고 터뜨려야 도움이 된다는 것을 각자 배웠다.

- 그럼 그냥 져 주기나 할 것이지 왜 이렇게 전력을 다해 이기려고 드십니까?

- 이기든 지든. 내 아우님이 더 이상 등 뒤에 둔 것 없는 채로 제대로 싸워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내가 왜 져 줘야 하지. 내기 한 것 안다며. 내가 이겨야 얻을 것 아냐.

- 뭘 걸어두셨는데요.

- 기사 서약.

- 설마. 칼리안 왕자님께서 지면 저하께 기사 서약을······.

- 말고. 반대. 내가 이기면, 내가 칼리안에게.

아르센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입 밖으로 욕지거리를 내뱉는 중이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한 플란츠가 무덤덤한 눈으로 계속 말을 몰았다.

- 저하께서 모르시는 것 같은데. 지금 체이스 전하의 기사인 카스트린 경이 했던 일들을 과거에는 그 왕제께서 하셨다 했습니다. 게다가 과거의 카스트린 경은 전쟁이 생겼을 때 다른 곳으로 가서 발칸을 막았다 하였습니다. 국왕의 기사는 그렇게 먼 곳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때는 카스트린 경이 국왕의 기사가 아니었다는 소립니다. 체이스 전하의 곁을 지킬 다른 기사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카스트린 경 만큼의 무력을 지녔을 소드마스터면서, 마지막······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성문 앞을 지킬 사람 말입니다.

- 그래.

- 그 왕제께서 그런 무력을 가지고도 그 지경이 되어서야 왕궁 밖으로 나섰다는 건, 나라 말고 국왕을 지키는 기사가 맞았다는 소립니다. 기사가 아닌 다른 직책이었다면 최소한 카스트린 경과 같이 출전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그 왕제께서는 분명 체이스 전하의 기사였을 겁니다.

- 알아. 나도.

- ······ 그리고 저하. 체이스 전하의 모친께서는 후궁의 신분입니다. 그 왕제님이 왕비의 소생입니다. 그 왕제께서 지금의 왕자님처럼 같은 왕족으로서 형제의 곁에 있던 것이 아니라 굳이 기사가 된 것이, 그 이유가 말입니다.

- 그것도 알아.

- 그런데 왜 같은 짓을.

말을 멈춘 아르센이 다시 침묵했다.

다시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나보다.

기사 서약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락에 들었다 나왔던 듯한 칼리안의 얼굴을 잠시 떠올려 보던 플란츠가 말을 전했다.

- 안 똑같아. 그 때와 지금은 다르고 그 왕제와 나도 다른 사람 아닌가. 체이스와 그 왕제도, 내 아우님도, 하나도 안 똑같아. 그런데 나도 내 아우님도 계속 혼돈하고 있잖아. 그래서 싸우기로 한 건데. 이기든 지든.

플란츠가 이기면, 이번의 발칸은 누군가를 죽이고 침략하기 위함이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직접 깨닫게 될 터였다.

칼리안은 이번에도 발칸을 막지 못한 셈이겠으나 그 사실이 칼날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칼리안을 꺾을 정도의 무력과 힘을 가진 플란츠가 '충분히 선택할 수 있을 다른 방법들' 대신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서 기사 서약을 택할 뿐임을 알려주는 것이니까. 체이스와 베른이 함께 살 방법이 베른의 기사 서약 뿐이었던 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 말이다.

칼리안이 이기면, 더 이상 칼리안은 그 날의 그 성벽 앞에 쓰러진 베른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발칸을 막은 셈이니까. 그렇게 되면 베른의 기사 서약을 막지 못했던 무력한 체이스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도 깨닫게 될 터였다.

플란츠 역시 이전과 같은 이유로 목을 내어놓고 살지는 않겠지만 혹시 플란츠가 목숨을 걸고 나설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칼리안이 그 모습에서 제가 지키지 못한 체이스를 연관지을 일은 없을 것이다. 발칸을 막았으니 말이다.

그것을 알고 있어서 싸우기로 한 거다.

플란츠도, 칼리안도. 이기든 지든.

- 그럼 저도 부르셔야 맞는 것 아닙니까.

- 마법사. 너는.

- 우리 왕자님 지금 운철로 만든 검 들고 계십니다. 저 운철은 못 부숩니다.

- 그래서.

- 지금 왕자님 등 뒤에 성벽 있는 것도 아니라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 때문에 아슬아슬한 그 경계가 무너져서 왕자님 가슴에 또 구멍뚫릴 일은 없다는 겁니다.

아르센의 말에 플란츠의 눈이 다시 감겨들었다 올려졌다.

- 수면제 가지고. 와.

- 네. 도착했습니다.

"······ 하."

허락받고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도착한 뒤 허락을 구한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플란츠의 앞으로 슬슬 걸어오며 씩 웃고 있었다. 그 꼴을 본 플란츠의 입에서 기나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아르센이 싸움에 참여했다.

단단히 미친 저 놈이 이 싸움에서 어떤 변수를 만들게 될지, 플란츠조차 가늠해내지 못하는 채로.

* * *

아니.

장식품이냐고.

기껏 내 배에 구멍뚫려가며 검술 알아다 가르쳐주고 있는데 쓰라는 검은 안 쓰고 왜 엉뚱하게 화살이나 날리고 앉아있느냐고. 나는 활 못 쓰는 줄 아느냐고. 나도 활 잘 쓴다고. 형님 저하 너 지금 나를 진짜 커다란 멧돼지 쯤으로 보고 있는 거냐고.

에스티나의 안장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않는 플란츠를 살짝 본 칼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헤르츠 경까지 서른 일곱. 한꺼번에 다 덤비시는 겁니까."

"스무 명 안 되기에 스물 다섯 보냈는데 소용 없잖아."

"훈련 삼아 스무 명 정도로 잘라서 보내시는 줄 알았는데요."

"그 인원으로 사냥하는 훈련은 나중에 해도 될 것 같은데."

플란츠의 한쪽 입술이 쭉 올라갔다.

"내 아우님께서 홀로 서른일곱 명 상대하는 것이 아무래도 힘드시다 하면. 줄여드리지."

저 꼴은, 정말, 아직도, 기분 나쁘다.

장난감을 앞에 둔 루시처럼, 느릿하고 맛 좋은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은 칼리안이 잿빛 검을 슬쩍 들어올렸다.

"힘들다뇨."

검 끝이 플란츠를 가리킨다.

칼리안이 플란츠를 바라봤다. 아르센을 쳐다봤다. 그 뒤에 서 있던, 기사단의 사단장 중 한 명인 데미안 스콘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그리고 웃었다.

어쩜 그렇게.

그 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리 모여들 계시는지.

"스콘 경 왼쪽에 제이아 경이 함께 있었으면, 아마도 겁을 좀 먹었겠습니다만."

툭.

진흙으로 범벅이 된 검은 구두의 끝이 바닥을 한 번 두드렸다.

"애석하게도 조금 달라서."

툭.

방금 전 묻은 니들렌의 피를 흩뿌리듯 털어냈다.

"한 마리 대 여든여섯 명이든. 하나 대 팔천이든. 버거울 리가······ 있겠습니까."

- 우우웅!

잿빛 검에 검은 빛무리가 어렸다. 어두운 밤에 들려오는 짐승의 숨소리같은 울림이 검을 감싸안았다.

투욱.

그 검이 바닥에 잠시 닿았다.

- 화아악!

발에 힘을 주었다. 발 끝을 내리찍듯 바닥을 차고 몸을 띄웠다. 날아오를 것처럼 도약했다.

- 우웅, 우우웅······.

- 휘이이잉!

먼지구름이 인다. 바람이 일었다.

주종이 아니었던 탓에 니들렌이 시전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던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친다.

플란츠가 눈을 찌푸렸다.

아르센이 플란츠의 앞에 실드 하나를 만들어 씌웠다. 그리고.

- 카가강, 카앙!

- 카아아아앙!

잔뜩 날을 세운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 카아앙, 캉!

- 카강!

- 캉, 카앙!

뼈에 새겨질 듯한 소름끼치는 타격음이 옆에서 들렸다.

- 캉, 카앙!

반대편에서.

또 반대편에서.

- ······ 풀썩!

동시라 해도 좋을 시간에 수 명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쉰 일곱."

남은 대원들이 신속히 발을 옮긴다.

이 쯤에는 마법사가 서야 하고 그 앞은 나 아닌 다른 기사의 자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습관처럼 버릇처럼 제가 향해야 할 곳을 가늠해 달려갔다. 대열을 맞추고 진을 만들었다. 사방으로 검을 뻗어냈다.

"마법사. 넌."

"네, 부군단장이신 부군단장님. 저는 배치된 곳 없으니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바로 뛰어나갈 줄 알았는데."

"그랬으면 바로 죽었을 겁니다."

"그럼. 부하들 먼저 쓰러지는 것 전부 다 지켜본 뒤에 나가겠다는 소리인가."

"어차피 왕자님한테 입은 상처 자국 평생 자랑으로 삼을 놈들입니다. 지금 나서서 싸움 끝내면 저 원망만 받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책도 못 보셨습니까. 악당 두목이 숨긴 패는 원래 제일 마지막에 나서는 법입니다."

"······ 악당 두목."

마법사 둘과 기사 셋의 호위를 받던 플란츠. 그리고 아르센의 목소리가 먼지구름 속에서 울려퍼졌다.

- 휘이잉!

바람을 쓰는 다른 마법사가 마력을 운용했다.

칼리안이 일으킨 바람을 역으로 불게 하여 시야를 가로막던 부연 먼지를 치워냈다.

- 카가가각!

다시 개이는 시야에, 네 겹의 실드를 가르고 뻗어나온 칼리안의 검이 기사들의 사단장인 데미안의 검에 가로막힌 것이 보인다. 데미안의 검에선 불똥이 튀어오르고 칼리안의 검에서는 뼈를 긁는 소리가 났다.

제법이라는 듯 웃어보인 칼리안이 제 검이 튕김과 동시에 발을 박찼다. 뒤로 튕겨나는 검을 강제로 앞으로 끌어당기며 이제 막 회수되려는 데미안의 검을 내리쳤다.

- 콰아앙!

본래의 칼리안이 내지 못하던 강한 타격이 데미안에게 전해졌다. 타오를 듯한 빛의 붉은 머리카락이 순간적으로 크게 휘청이듯 출렁였다. 손에 꽉 쥔 검이 찰나동안 아래로 튕겨 내려갔다.

- 우웅, 우우웅!

- 카아앙!

칼리안의 검에서 잔뜩 흥분한 쇳소리가 울린다.

칼리안의 옆구리를 노린 불덩이가 날아든다. 그것을 반대로 쳐내고 나니 데미안의 검이 어느새 코앞으로 치닫는다. 쳐냈다. 번개의 화살을 함께 쳐냈다. 얼음의 회오리를 피했다. 다시 한 번 데미안의 검을 막고 튕긴다. 반격하는 칼리안의 검이 네 기사의 검에 막혀든다.

- 피잉······!

그런데 그 때, 소리죽인 날 선 음성이 들려왔다.

마법사들을 향해 달려들던 칼리안이 검을 뻗어냈다.

- 카강, 캉!

날아들던 세 개의 화살을 전부 쳐냈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시위 하나에 세 개의 화살을 걸어 날린 플란츠의 연두색 눈을 잠시 마주봤다.

"내 형님이 나를 부르시나······."

조금 전, 서른 일곱.

아직은 압도적이었던 수.

그랬음에도 등 뒤로 꼭꼭 숨어있어야 할 킹이 벌써 나왔었다. 마치 아르센 한 명을 믿고 곁에 나와 서 있다는 것처럼. 아직 남은 대원들을 보조하고자 멀찍이서 화살을 날리는 것처럼.

"왜 저렇게 채근을 하실까."

생각을 읽어내기 힘들 눈으로 자신을 보는 플란츠를 계속 쳐다봤다. 그러다 플란츠를 향해 살짝 고개 숙여 묵례를 했다. 그 뒤에는 들리지 않을 만큼의 작은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훌륭한 미끼지만. 아직 저는 배가 불러서."

형님 쪽으로 아직 안 갑니다.

하고, 칼리안이 길게 웃었다.

포획될 뻔한 경험은 한 번이면 족하니까.

- 휘이익!

- 카앙, 카가강!

- 타아앗!

한 발을 뒤로 물렸던 칼리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데미안과 기사들의 주변에 다시 네 겹의 실드가 쳐진다. 그 실드를 무시한 칼리안이 발을 움직였다.

자신 대신 데미안에게 실드를 두른 용감한 마법사의 어깨를 검으로 내리찍었다. 그 곁에서 달려들던 기사의 허리를 관통했다. 회수하던 그대로 검을 휘둘러 뒤를 노리던 두 기사를 베어냈다.

치명상은 단 하나도 입히지 않았다.

"······ 윽!"

아프기는 하겠지만.

칼리안이 다시 몸을 날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물의 구체 위로 몸을 띄웠다. 구체를 살짝 밟고 다시 도약한다.

- 쿠웅!

데미안의 앞으로 다시 찾아 온 칼리안이 검을 뻗었다. 여지없는 방해가 이어진다. 쏟아지듯 찾아드는 화염의 화살을 쳐냈다.

끝없는 공격에 대한 칼리안의 답례라는 듯, 허공에 떠오른 바람의 창 네 개가 마법사 둘과 기사 둘의 옆구리를 꿰뚫는다. 곧바로 앞을 가로막고 서는 데미안의 검을 쳐냈다.

- 쉬익!

선득한 소리와 함께 데미안의 검이 날아들었다. 살짝 허리를 틀어 그것을 피한 칼리안의 검이 검게 빛났다. 힘이 잔뜩 들어간 데미안의 어깨를 검 손잡이로 툭 건드렸다. 회수하듯 되찔러드는 데미안의 검을 피한 뒤 팔을 움직였다.

눈에 담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인 칼리안의 검이 데미안을 향했다.

- 서걱!

- 쉬이익!

살이 갈라지는 소리가 몸 속을 타고 먼저 들려왔다.

잿빛 검이 바람을 가르고 달려드는 소리가 오히려 그 뒤에 들렸다.

어떻게 하면 그런 속도가 나느냐고.

그리 묻는 눈으로 씩 웃은 데미안이 풀썩, 엎어져 기절했다. 깨끗하게 관통된 팔뚝을 붙든 채로.

그 후로도 계속 싸움이 이어진다.

검을 보내고 검을 막는다. 마법을 보내고 마법을 막는다. 검을 쳐내고 마법을 피한다. 검을 뻗어내며 마법을 흩뿌린다.

바람이 잦아든다.

화염의 재 냄새가 풍겨온다. 비릿한 피 냄새가 흐트러진다. 또 하나의 검인 듯 그림자인 듯 춤을 추던 청은빛의 머리카락이 바닥을 향해 가라앉는다.

"······ 일흔 일곱."

그리고.

다시 도약한다.

열 명이 남았다.

검에 얽힌 피를 털어낸 칼리안이 시선을 돌렸다. 남은 마법사들을 향해 발을 내뻗었다. 그런데 그 때.

- 쌔애애액!

- 콰직!

그 위압감부터 다른 소리가 칼리안의 앞을 막았다.

- 쩌저적, 쩌적!

칼리안의 발 앞에 깊이 박힌 얼음의 창이 보인다. 그곳에서 갈래갈래 뻗어나온 얼음 줄기가 칼리안을 향해 치달았다.

"저, 왔습니다."

"꽤 늦었는데. 헤르츠 경."

"마음의 준비 하느라 늦었습니다."

"각오는 다 한 겁니까."

"죽을 각오도 하고, 안 보여드렸던 재주 보여드릴 각오도 다 했습니다."

"숨긴 것이 있었습니까."

"그 동안 배운 것이 있었습니다."

흐뭇한 말에, 웃는 얼굴이 된 칼리안이 아르센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깜짝이야. 놀랬잖아!'

'왜 그렇게 놀라? 사람 민망하게.'

'사람 같아야 안 놀라지!'

'말이 심하네. 이젠 사람 취급도 안 해?'

'안 그래도 희끄무레한 게 머리는 풀어헤치고 오밤중에 스르륵 스르륵 다니는데 그걸 사람으로 봐?'

'사람으로 봐야지. 그러는 너는 오밤중에 왜 형님 서재에 있는데?'

'저하가 또 잠을 못 자서. 잠깐 재우고 지켜보다 나오는 거야.'

'너, 설마. 또 수면제 썼어?'

'됐고. 언제 온 거야?'

'방금 전에. 아무튼 형님한테 약 쓴 것 말 안할 테니까 머리 묶을 끈 좀 줘.'

'지난 번에 준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또 달래? 어디서 그렇게 잃어버리고 다니는데?'

'태웠어. 불에.'

'불? 이 여름에 웬 불? 그걸 왜 태워?'

'······ 그럴 일이 있어. 아무튼 좀 줘봐.'

'아, 진짜. 백 개쯤 사다 주던가 해야지. 수면제 먹은 거 저하 이미 눈치채고 자는 거야. 머리 끈 줄 테니까 비밀 지키는 것 말고 소리나 좀 내고 다녀. 나 진짜 놀랐다고.'

'미안. 버릇이라.'

'왜 그런 게 버릇됐어? 누가 보면 왕자 아니라 도둑인 줄 알겠네.'

'그런 소리 말고. 끈이나 줘, 아리안느.'

그래.

"숨긴 것. 좋지."

숨긴 힘은.

쓰지 않던 진짜 검은.

'카스트린 경은 안 그러는데 제자라는 애가 왜 그러나 몰라.'

칼리안에게도 있었다.

침묵만을 좇았던 검 말고.

소리를 죽이기 위해 손에 쥐었던 가벼움 말고.

- ······ 쿠웅.

새 검을 든 칼리안이 발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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