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장. 한 마리 대 여든일곱 명(4)
나락이다.
그래.
이건 분명 나락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 이 새끼가······ 아니."
한낱 구덩이 따위가 이렇게 깊을 리가 있나.
"내 형님 저하께서 땅을 좀 파시려다 내친김에 그냥 나락을 만드셨네. 그것 참 유능하기도 하셔라."
소드마스터 한 마리를 추락사시킬 요량으로 만들어 둔 것이 분명하다. 발칸에 많지도 않은 대지 속성 마법사를 죄 끌어왔거나. 아니면 레이첼이라도 동원했거나.
아니지.
어떻게 한 건지 알 게 뭐람. 더럽게 깊다는 게 중요하지.
바위벽에 잿빛 검을 깊숙이 박아넣고 매달린 채, 밑바닥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아니 사실 바닥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지 혹시 이대로 내려가다보면 사람 키만한 꼬리가 몇 개씩 달린 몬스터가 산다던 대륙 반대편도 좀 구경하고 오게 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지는 깊디깊은 구덩이를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애써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떡잎부터 어찌나 남다르신지. 누가 키웠는지 진짜 잘 키웠네. 어떤 돌은 새끼가 시들시들한 새싹 주워다 저렇게 쑥쑥 키워놨을까."
누구긴 누구겠나.
그 정도로 돌은 새끼가 하나밖에 더 있을까.
"······ 하."
슬레이만을 곁에 둔 르메인이 그랬다.
내 아들들은 소공작만큼의 과감한 행동력이 없다고.
아마 그 말을 칼리안이 들었다면 억울한 마음에 서클 하나가 슉 늘어났을 거다. 둘째아드님의 행동력이 조금만 더 과감했다가는 시스파니안께서 보우하신 이 왕궁에 용암이 터지든 유전이 터지든 전하 속이 터지든 뭐든 하나는 터졌을 거란 사실을 알기는 하시느냐면서. 뭐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라 동생 한 마리 포획해서 그 동생 놈의 기사노릇을 하고야 말겠다는,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인간으로서 이해해주기 좀 많이 어려운 일념때문에 카이리스 수도가 바뀔 판이라는 걸 아시냐면서.
대롱대롱.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매끈하게 깎아 둔 완벽한 수직 구덩이 속. 그 안에서 검 손잡이 하나에 의지해 대롱대롱 매달린 채 힘겨운 신음 대신 푸념만 잔뜩 내뱉은 칼리안이 이번에는 위를 쳐다봤다.
"······ 저건 대체······."
둥실둥실.
거대하게 펼쳐낸 바람의 구체가 미스릴 그물이 더 내려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촘촘하게 엮었다지만 그물을 이룬 미스릴 하나하나는 굉장히 가늘다. 그러니 오러를 발현한다면 어렵긴 해도 잘라낼 수는 있을 것이다. 대신 귀찮다. 기껏 잘 정돈해 둔 머리도 엉망이 될 것이 분명하여 그냥 아예 그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마법으로 받쳐뒀다.
"어디서 저런 걸 구한 거야? 얼마 짜리야, 저게?"
돈 많으셨네, 내 형님.
구운 대구 말고 생굴 사달라 할 걸 그랬지.
다이아몬드도 서걱서걱 잘라낼 듯한 강도의 황금색 희귀 미스릴로 정원 가위 만든 놈이 미스릴로 만든 그물을 사흘 만에 떡하니 구해다 둔 형제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툴툴거렸다.
- 타악!
발 밑이 사라지는 순간에 벽 쪽으로 달려들어 검을 박아넣고, 그물이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마법을 구현하고. 나름대로 바쁘게 움직여 잘 대처한 칼리안이 큰 숨을 한 번 들이쉰 뒤 몸을 움직였다.
- 스르릉!
- 턱, 타아앗!
디딜 곳 하나 없는 벽에 박혀있던 잿빛 검이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몸이 대지 위로 솟구쳤다. 허공에 잡아 둔 미스릴 그물을 되려 손잡이처럼 붙들고는 다시 힘을 주어 몸을 날렸다.
그리 어렵지 않게 멀쩡한 땅 위로 소리없이 착지한 칼리안이 그물을 받치고 있던 마력을 해제했다.
- 차르륵.
- 쉬이이익, 타앙!
지지할 곳을 잃은 거대한 그물이 다시 아래로 내리꽂힌다.
한참을 떨어지던 그물이 바닥에 부딪히는 굉음이 구덩이 위로 퍼져나왔다. 덕분에 구덩이의 말도 안 되는 깊이를 다시 확인한 칼리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환장하겠다, 내가 진짜."
뭐. 이 시간에 미리 나와 먼저 공격을 시작하고 발칸의 마법사들과 검사들의 몸에 칼자국을 내주고 있는 칼리안이라 해서 다를 바 있겠냐만은.
어찌됐건 형님의 진심을 잘 알아들은 칼리안이 고개를 몇 번 움직이며 몸을 풀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어둠 속에 든 채 다시 몸을 날렸다.
검은 로브로 덮어두지 않아 숨겨지지도 않을 은빛으로 그렇게 숲을 가로지를 때.
- 달칵.
무언가 좋지 않은 것을 밟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땅이 또 꺼지나 싶어 검을 다잡은 칼리안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닥은 가라앉지 않았다.
미스릴 그물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 드르륵, 철컥.
대신 방금 밟은 것과 연결된 무언가가 움직일 준비를 마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평소 칼리안이 어둠 속에 스며 걷는 놈임을 아는 사람이 그 어둠 속에 심어 둔 또 다른 덫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본능만 남은 짐승이 되었다 하기에는 아직 생각이란 것이 남아있던 탓에. 아직은 칼리안에게 습관이란 것이 남아있던 탓에.
두 번째 덫에 걸려들게 되었다.
- 쌔애애액!
- 쌔액, 쌔애액!
마력탄이 날아들었다.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비가 내리듯이, 함박눈이 내리듯이. 그 언젠가의 성벽 앞으로 쏟아져내리는 화살비라도 된다는 듯이.
"······ 진짜 생굴을 사달라 할 걸."
미스릴 그물과 저 많은 마력탄들을 전부 다 발칸 금고에서 꺼낸 돈으로 사지는 않았을 테니까.
- 콰아아앙!
사실 베른은 특별한 기호 없이 살아왔었다.
물론 고기와 생굴을 좋아했지만 그렇다 해서 지금만큼 유난스레 반겨했던 것은 아니었다. 술은 그저 버릇이었고. 그러니 불호한다 할 것도 딱히 없었다. 데블란은 불호라는 말로 평가할 관계의 사람이 아니었고 가지치기는······ 뭐. 됐다.
그런데 이번 생에는 달랐다. 불호하는 것이 참 많이도 생겼다. 그 중 으뜸을 고른다면 바로 저 마력탄일 것이다.
- 우우웅!
별의 잔재를 담은 잿빛의 검 끝에 새카만 오러가 맺힌다.
- 사아악!
베른. 기사 서약. 플란츠. 발칸. 나락. 화살비.
지금과 대비되는 과거의 기억에 잠겨들어 감성적인 시간을 가져 볼 겨를이 있느냐 플란츠가 묻고 있지 않나. 계속 그렇게 정신 놓고 다니면 죽는다 경고하고 있지 않나.
- ······ 서걱!
- 투둑!
그에 대한 대답을 보냈다.
새빨간 입술처럼 사납고 날카로운 검격이 쏟아지듯 펼쳐졌다. 불호하는 것 1순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마력탄을 쳐냈다. 혹은 베어냈다.
바람조차 일으키지 않으며 휘둘러진 엄청난 속도의 검에, 날아오던 마력탄이 두 동강 나 떨어졌다.
- 콰아아앙!
동강내지 않고 쳐내기만 한 마력탄이 먼 곳으로 날아가 폭발한다. 가벼운 실드와 오러로 몸을 보호한 칼리안이 계속하여 검을 휘둘렀다.
- 서걱!
- 콰앙, 콰아아앙!
수면향을 보내고 나락같은 구덩이를 파 놓고 미스릴 그물을 던지고 최상급 마력탄을 날려대는 덫을 놓고. 내기가 아니라 형제간의 피튀기는 전쟁이었구나 싶은 그 전장의 초입에서, 칼리안이 꼿꼿이 몸을 세웠다. 그리고 발 끝을 바닥에 톡톡 두드렸다.
톡.
눈을 감았다.
톡.
깊은 숨을 한 번 더 들이쉬었다.
토옥.
감았던 눈을 떠올렸다.
- 타앗!
힘주어 대지를 박찬다.
몸을 띄운다. 단 번에 나무 위로 올라선다. 그리고 달린다.
플란츠의 진짜 수가 준비되어 있을 숲의 정중앙을 향해서.
플란츠가 전부 다 외워 둔, '칼리안'의 모습을 내버린 채로.
* * *
정말 대단하셨습니다.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하나도 못 봤습니다."
잠시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한 기사가 엄지를 척 내밀어 보이고는 다시 졸도했다. 벌써 다섯 번째로 비슷한 말을 듣게 되니 걱정되던 마음은 싹 사라지고 짜증만 치민 플란츠가 나지막이 말했다.
"환자 옮겨."
"네, 부군단장님."
이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대원들과 치료사들이 환자를 옮기는 사이, 에스티나의 안장에 다시 오른 플란츠가 칼리안이 향한 곳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소용 없으리라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었다는 듯 내버려진 구덩이, 그 안쪽의 곧은 벽에 깊이 새겨진 검흔을 내려다보게 된 기분이 썩 개운하지만은 않다.
힘이라도 좀 빼 둘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 정도의 효과도 없던 것 같아서였다.
"덫으로는 못 잡는군."
도대체 얼마나 잽싸고 눈치가 빠른지.
육포 넣어 둔 포획 우리가 차라리 더 유용했으려나.
······ 아니면 수면제에 적신 생굴이라거나.
무심코 든 생각에 피식 웃은 플란츠가 그럭저럭 반반하게 난 길 위에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수풀이 우거진 숲 속으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칼리안의 이동 속도가 빨랐던 탓에 이대로 칼리안의 뒤만 쫓아 달렸다가는 지금처럼 계속 중환자만 구경하다 끝날 것 같아서였다.
- 콰아아앙!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나무 뿌리를 에스티나가 훌쩍 뛰어넘었을 즈음, 숲을 뒤흔드는 굉음이 울렸다. 귀를 한 번 쫑긋거린 에스티나는 주인의 새 명령이 없음을 알고 가던 방향으로 계속 발을 움직였다.
플란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굉음이 들린 것에 대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 콰앙, 콰아앙!
수도의 다른 사람들이 이 난리를 듣고 혼란에 빠질 일도 걱정하지 않았다. 앨런에게 부탁해 왕궁 숲 주변에 사일런트 막을 쳐 달라 부탁해 두었으니까. 때문에 쓸데없이 동요하지 않고 계속하여 숲 중앙을 향해 달려갔다.
- 접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대형 유지해. 겁 먹지 말고.
- 겁 먹을 일 없습니다, 부군단장님. 재밌습니다.
- ······ 흥분하지도 말고.
- 넵.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러겠다는 말도 아니고 노력하겠다는 말도 아니고 노력해 보겠단다.
앨런에게 잠시 빌린 통신용 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 우유 못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에게 다시 한 번 주의를 준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밝아오는 하늘 아래.
솟아올랐던 검은 연기가 조금씩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 * *
언젠가 칼리안이 앉아 앨런을 기다렸던 커다란 바위.
그 앞에 선 칼리안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 스물 다섯."
방금 전.
스무 명의 발칸 대원들이 저마다의 새하얀 제복을 갖춰입고 칼리안의 앞을 막아섰다. 아니, 막아섰었다.
순식간에 치닫고 끝난 공격에 제각각의 상처 하나씩을 끌어안게 된 이들을 내려다 본 칼리안이 긴 숨을 내쉬었다. 4서클 마법사의 슬립이 통하지 않을 놈들이라 일일이 기절시켜 둔 뒤였다.
차라리 여든 명을 다 내보내지.
이런 생각을 해보다 웃고 말았다. 굳이 왜 소수로 나눠두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훈련임을 잊지는 않으셨군."
제온의 전사들 때문이다. 그 많은 이들 하나하나의 무력이 칼리안과 비슷하다. 그들 한 명을 잡는 데 발칸 여든 명을 쓸 수는 없지 않겠나. 그러니 많아 봐야 스무 명 남짓. 그 인원으로 칼리안을 붙들어 잡을 수 있어야 실전에서도 싸움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을 터였다.
- 우웅, 우우웅······.
세 겹으로 중첩된 실드를 종잇장처럼 갈라냈던 잿빛의 검이 묵직한 울음을 냈다. 실드를 가름과 동시에 베어버린 네 명의 마법사, 재빨리 텔레포트하여 자리를 피했으나 칼리안의 도약 한 번에 발목을 꿰뚫리고 기절한 또 한 명의 마법사.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겹겹이 둘러싼 진을 짜고 달려들던 다섯 명의 기사, 그들이 쓰러지자 곧바로 빈 자리를 채워가며 계속 덤벼들던 남은 열 명의 기사.
그 모두의 피가 묻은 검을 다시 한 번 털어냈다.
번지지 않고 방울방울 붙어있던 더운 것이 칼리안의 검에서 바닥으로 떨어졌을 그 때.
- 파지직······!
- 쾅!
시전과 동시에 목적지에 닿은 번개 한 줄기가 칼리안의 검에 막혔다.
쓰러져 잠들어 있는 놈들에게 번개의 기운이 가지 않도록, 번개에 담긴 전류가 손으로 타고 올라오지 않도록, 넓은 실드를 함께 펼치며 쳐낸 검에 튕겨난 짙푸른 빛의 번개가 하늘로 뻗어올라가 사라졌다.
평소 칼리안의 움직임보다도 더 빠른 듯한 공격에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가라앉았다.
- 콰악!
익숙한 마력이다.
그러나 그 마력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며 반가움을 드러내진 않았다. 디디고 선 땅이 깊이 패일 만큼 힘을 준 도약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 ······ 피잉!
이제껏 본 적 없던 범위의 넓은 도약.
수십 미터의 거리를 한 번의 발디딤으로 줄여버리겠다는 듯 드높이 뛰어오른 이가 어둑한 하늘을 등졌다. 하늘에 은빛 선을 냈다. 스스로가 한 자루의 검이 된 것처럼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 우웅!
- 우웅, 우웅!
- 우우웅!
방금 전과 똑같은 수를 지닌 세 개의 실드가 펼쳐진다.
- 파지직, 파직!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실드를 뒤덮은 날선 스파크가 강한 피어를 머금은 채 칼리안을 위협하고 있었다.
'스물 다섯.'
다섯이 늘어난 수.
땅에 솟아난 둥근 구체를 향해 추락하던 검이 상대의 수를 헤아렸다. 검을 내뻗었다. 검 끝에 오러를 싣는다.
- 휘익!
- 쌔애액! 쿠아아앙!
- 콰앙, 콰과광!
제대로 눈을 뜨기 힘들 듯한 밝은 빛의 번개가 칼리안을 향해 계속 뻗어나왔다. 검을 타고 손으로, 그 속의 근육으로, 더 깊은 곳의 모든 조직을 전부 다 태워버리겠다는 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짓쳐든다.
칼리안이 스스로를 보호하던 실드가 번개의 힘에 타올라 사라졌다. 칼리안은 실드를 다시 펼치는 대신 칼날같은 바람의 회오리를 만들어 몸을 감쌌다. 그리고는 떨어지던 속도 그대로, 상대의 앞에 착지했다.
- 쿠우웅!
주변의 대지가 들썩인다. 기다렸다는 듯한 공격이 이어진다. 바람의 회오리를 뚫지 못할 기사들 대신, 일곱으로 늘어난 마법사들의 온갖 공격이 칼리안을 향했다.
칼리안이 검을 들었다.
저를 향해 쏟아지는 물을 전부 날려보냈다. 화염의 회오리를 뛰어넘어 반대편에 선 마법사의 손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마법사가 텔레포트한다. 대신 그 사이로 끼어든 다섯 명의 기사가 칼리안을 둘러싼다. 칼리안의 검이 기사들의 앞에 씌워진 세 겹의 실드를 갈랐다. 칼리안의 등으로 다시 한 번 번개가 내리꽂힌다. 새로 펼쳐진 칼리안의 실드가 그것을 막아냈다.
바람의 기운을 응축했다.
기사들의 발 밑에서 폭발시켰다. 쓰러진 기사 셋의 목에 긴 자상들을 만들어 둔 칼리안이 폭발의 여파에 밀려 멀리 나가떨어진 마법사 한 명을 뒤따라갔다. 그리고는 그대로 마법사의 목을 밟아 기절시켰다.
- 쉬익!
- 쌔애애액! 카가강!
- 콰광, 콰아아앙!
다시 도약한다. 쏟아지듯 뻗어나오는 검격을 흘려보내며 오러를 내뻗었다. 실드를 부수고 그 속에 든 기사의 가슴을 길게 벴다. 빈 자리를 채우려 달려드는 기사를 그대로 둔 채 다시 만들어지는 실드를 한 번 더 갈랐다. 뻗어나오는 검을 막는다. 발을 움직인다. 기사들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그들의 사이에서 보호받던 마법사의 어깨에 긴 검을 내리꽂는다.
- 콰직!
죽지도 않고 후유증도 남지 않을, 다만 아프기는 할 곳에 깊은 상처를 낸 칼리안이 검을 뽑았다.
- 파지직!
번개가 뻗어나온다.
칼리안의 검에 드디어 번개가 닿았다. 번개 줄기가 별의 검을 타고 칼리안의 손을 향해 뻗어올라간다.
순식간에 손잡이를 거꾸로 틀어잡은 칼리안이 앞을 막아서는 기사 둘을 향해 번개 맞은 검을 집어던졌다.
- 쉬이이익!
- 콰직!
눈 하나 깜빡이지 못할 찰나의 순간에, 두 명의 기사가 다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칼리안의 근육을 강직시킬 의도로 조절된 번개의 힘. 검에 닿은 그 힘이 두 기사를 차례로 감전시켰다.
- 저벅, 저벅.
천천히, 기사를 향해 걸어간 칼리안이 검을 뽑아들었다.
한 번의 충돌.
숨 한 번 내쉬는 것이 고작일 그 시간동안 여덟 명이 줄었다. 그나마도 이전의 무리보다 오래 버틴 것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 자박, 자박.
칼리안의 것보다 가벼운 발소리가 남은 대원들의 앞으로 나와 섰다. 모두를 막아서듯 앞으로 나선 마법사가 양손을 늘어뜨렸다. 바닥을 향한 마법사의 양손에 깊은 바다보다 더 짙푸른 번개의 기운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그것을 기다려 줄 리 없을 칼리안이 다시 발을 박찼다. 그와 동시에 마법사의 손에서 뻗어나간 번개자락이 칼리안의 잔상을 매섭게 뒤쫓았다.
- 콰아아앙!
칼리안이 검을 휘둘렀다.
강하고 빠른 타격에 검에 얽히지 못하고 튕겨나간 번개가, 기사들을 보호하던 실드 위로 뚝 떨어졌다.
자신이 쏘아낸 번개가 일행의 실드를 없애버린 것을 안 마법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계산을 마친 마법사가 다시 한 번 번개의 구체를 쏘아보냈다.
기사들에게로 향하던 칼리안의 발이 멈췄다.
기사들에게서 눈을 뗀 뒤 계속하여 거슬리는 공격을 보내오는 마법사를 향해 방향을 바꿔 섰다.
"······ 제이아 경."
낮은 울림을 내는 낯선 목소리.
그에 대한 대답 대신 마법사가 다시 한 번 마력을 모았다.
아니.
그리 하려 했다.
새하얀 송곳니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길게 갈라진 웃음을 지어 보인 칼리안이 검을 들었다.
"느려."
니들렌의 머리 위로, 청은빛의 짐승이 내리꽂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