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장. 한 마리 대 여든일곱 명(3)
아무도 없는 발칸 숙소와 텅 빈 수련장을 확인했다.
빌헬름 관의 회의실 불이 전부 꺼진 것을 확인했다.
"왕실 숲에서 싸우자 하시더니. 마음을 바꾸셨나······."
- 다각.
필요하다면 타라는 것처럼, 빌헬름 관 앞에 불려나와 있던 레이븐이 작은 발굽 소리를 냈다. 마법사들과 기사들은 알아내지 못한 주인의 냄새를 저 홀로 맡은 까닭이다.
멀찍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그 모습을 확인한 칼리안의 입술이 길고 가늘게 벌어졌다. 그 사이로 새하얀 이가 살짝 드러나다 이내 사라졌다.
지울 생각 없다는 듯 남겨진, 왕궁의 숲으로 향한 여러 필의 말 발굽 자국.
그것이 칼리안에게는 '왕실 숲에 가 봐야 온갖 덫만 있을 테니 나가지 말아라' 라는 전언으로 보인다. 둘의 싸움에 어차피 끼어들지 않을 그레이가 혹시나 찾아왔다 헛걸음을 하든 말든. 왕궁 밖의 숲에서 시끄럽게 놀 것 없이 왕궁 안에 있는 숲에서 붙자는 그런 메시지 말이다.
"그러시다면."
살짝 웃은 칼리안이 가볍게 걸치고 있던 로브를 잡았다.
이곳부터 왕궁 북쪽 숲까지는 어차피 아무도 없을 것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후드를 들어 얼굴을 가리는 대신 로브를 고정해두었던 끈을 풀었다. 그리고 미련없이 손을 뗐다.
- 툭.
걸쳐있을 곳을 잃은 새카만 후드가 나풀나풀 바닥으로 흘러 떨어졌다.
그것이 바닥에 완전히 닿았을 때, 로브의 주인이었던 이의 발은 이미 빌헬름 관을 벗어나 있었다.
- ······ 타앗!
굳이 레이븐을 이용하지 않은 채로 발을 박찬 칼리안의 그림자가 소리없이 움직였다. 빌헬름 관을 지나 옛 헤이시아 궁의 터를 지나쳤다. 아르피아 궁을 등 뒤에 놓은 채 세뉴 관과 루비아 관을 지나 계속 달렸다.
잘 손질된 나뭇가지를 밟기도 하고 멋진 세공이 된 담장이나 조각상을 디디기도 하고, 왕세자를 위한 카밀론 궁의 담벼락을 발 아래 두며 달렸다. 카밀리아 궁을 지나 칼리안조차 용도를 알지 못할 여러 관을, 왕궁 내 마련된 감옥을 지나쳤다.
한겨울의 세뉴 강 같기도, 혹은 소리없이 뚝 떨어져내리는 별똥별 같기도 한 긴 청은발이 계속하여 잔상을 남겼다.
그렇게 도착했다.
- ······ 콰직!
왕궁의 북쪽.
넓디 넓은 숲에.
* * *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다.
시스테라 대륙의 어느 곳이라 한들 다르겠냐만은 유난히 더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랬으니 이 넓은 카이리스 땅에서 휴양지 한 곳을 꼽으라 하면 누구나 입에 올릴 만큼의 명성을 얻었으리라.
슈린츠.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지만 그보다는 물이 좋기로 유명한 곳. 빼어난 경관도 물론이지만 화산 없는 카이리스에서 제대로 된 온천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곳. 바위산 하나와 네 개의 울창한 산림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탓에 세상과 단절된 여유로움까지 만끽할 수 있는 유유한 곳.
그리하여 언제나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곳이 바로 슈린츠였다.
물론 슈린츠에도 고요한 때는 있었다. 밤이라 할 수도 없고 새벽이라 할 수도 없을, 누구나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에는 슈린츠에도 어쩔 수 없는 고요함이 머물렀다.
- 쿠구구구······!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밤짐승과 이른 새들만 움직이고 있을 시간이었으나, 짙고 깊은 숲 덕에 그 길이를 가늠하기 힘든 슈린츠의 두터운 성벽을 매듭짓는 거대한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이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아니, 드물다 하기에도 어려울 만큼 이례적인 일이었다. 슈린츠 영지의 영주인 에밀리아 슈린츠 변경백은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이였기 때문이다.
이곳의 영주는 매일 아침 7시가 넘어서야 성문을 열고 저녁 7시에는 반드시 닫았다. 영지 밖의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지역인 만큼 이방인의 출입에 관대하리라 여길지 모르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영주 에밀리아가 환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관광객이었지 인파 속에 숨어들고자 하는 의심스런 이방인이나 범죄자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보다 더 큰 이유도 있었다.
카이리스 왕실의 별궁이 그것이다.
양위를 통해 왕관을 넘긴 전대 국왕, 혹은 사망한 국왕의 배우자가 머물게 되는 별궁이 바로 슈린츠에 있지 않나. 별궁의 수비를 역임해야 한다는 이유로 국경도 아닌 땅의 주인에게 변경백이라는 작위를 예외적으로 내렸을 정도니 그 성문이 무거울 수밖에.
- 쿠구궁!
그런데 그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7시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음에도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변경백, 에밀리아 슈린츠입니다."
양위라는, 카이리스 역사상 유래를 찾기 매우 어려운 그 일이 생기기 전에는 걸음할 일 없으리라 여겼던 르메인이 찾아왔으니까. 르메인을 성 밖에 둘 수는 없지 않겠나.
"오랜만에 보게 되는군. 6년 쯤 되었나."
"맞습니다. 기억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전하."
사전의 연락도 없이 갑작스럽게, 채 열 명도 되지 않는 조촐하기 짝이 없는 인원을 데리고 슈린츠에 들이닥친 르메인이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 르메인을 제대로 올려다보지도 못한 영주 에밀리아가 방문 사유에 대한 의문을 서둘러 감춰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별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아니, 되었네. 우리가 모실 것이니 성문을 닫고 영주성으로 돌아가게."
누군가가 에밀리아를 만류했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목소리에 에밀리아가 곧장 대답을 전했다.
"그렇다면 지금 즉시 별궁에 호위 병력을 보내겠습니다."
"그것도 되었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입단속만 부탁하네, 슈린츠 변경백."
굳이 별궁까지 안내해 줄 필요가 없다.
국왕을 호위해 줄 병력도 필요치 않다.
오로지 국왕의 방문에 대한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만 하면 된다는 말. 열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꺼내기 어려운 소리였으나 에밀리아는 그것이 무모하다 여기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지그프리드 공. 이에 대해서는 함구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혹시나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사람을 보내주십시오."
"고맙네."
이 지역의 단골 손님이기도 한 대륙 두 번째의 검이 직접 국왕을 모시고 찾아왔는데 호위 병력이 필요할 리가.
르메인이 이곳을 갑자기 찾아온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을 물어볼 수 없는 에밀리아가 고개를 숙여 다시 한 번 예를 보였다. 혹시나 수도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수도와 수도 인근에 거주중인 식솔들로부터 연락이 올 테니 그것을 기다려 보기로 하면서.
"왕궁이 시끄러워 피한 것이 아니네. 조용히 쉬고자 찾아오셨을 뿐이니 걱정 말게."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는 듯 슬레이만이 말했다.
내란이라도 난 것이 아닌지를 잠시 생각했던 에밀리아가 일단 다행이라는 얼굴을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편안히 보내십시오, 전하."
"그래."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은 르메인이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시종장 라울이 안내하는대로 별궁을 향해 갔다.
그렇게 얼마 뒤, 인적 없는 곳에 도달한 슬레이만이 르메인의 옆으로 말을 몰아 왔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참 오랜만에 수도 밖으로 나오게 된 소감이 어떠신가?"
"아직은 모르겠군. 갑작스러운 걸음이니."
라울과 세 명의 시종, 호위기사 렌, 지그프리드의 수석 기사단장 로난시테까지. 조촐하기 짝이 없는 일행을 슈린츠의 성문 앞에 옮겨 두고 왕궁으로 돌아간 것은 물론 앨런이었다.
별궁으로 곧바로 이동하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인적에 에밀리아를 당혹하게 할 마음도 없었거니와 국왕이 일순간에 아무 곳에나 방문할 수 있다는 불필요한 경각심을 상기시킬 필요가 없던 까닭이다.
"마나실 후작 덕에 발이 편해졌으니 자주 나오게. 저하나 다른 두 왕자님들이 왕궁 문을 닫아 걸면 그 길로 그냥 이곳에서 쭉 지내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하긴 그건 또 그것대로 나쁠 것 없지 않겠나?"
"내 아들들에게 소공작만큼의 과감한 행동력은 없으니 왕궁 문이 닫힐 일도 없을 듯 한데. 어쨌거나 가능하다면 자주 나오도록 하지."
괜히 르메인을 한 번 놀려 보려다 본전도 못 찾은, 진짜 쫓겨난 전적이 있는 슬레이만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앞에 보이는 갈래길 중 오른쪽 길을 가리켜보였다. 그대로 방향을 트는 르메인을 향해 슬레이만이 다시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는 왜 오자고 한 건가? 마나실 후작이 대뜸 우리집에 베른 자작을 데려다 놓더니 나는 잠깐 놀다 오라 그래서 일단 무턱대고 따라 나오기는 했네만."
"왕세자가 잠시 쉬다 오라 하기에."
"······ 르메인. 설마 진짜 쫓겨났나? 쫓겨났으면서 왕궁 문 닫힐 일 없다는 말을 한 건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르메인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슬레이만의 얼굴에 안쓰럽다는 표정을 넘어 내 너 언젠가 그럴 줄 알았다 하는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더 참지 못하고 설명을 더했다.
"칼리안의 일로 많이 놀랐을 테니 휴식을 가지라 청해왔네. 잠시 벗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나왔고."
"아들 두 번 믿으면 왕관도 넘겨주시겠군."
"못 넘길 것 없지."
할 말 잃은 얼굴을 해보인 슬레이만이 입을 열었다.
"울타리 밖에 내어 두기에는 세 분 다 아직 많이들 어리지 않나. 르메인 자네가 그 즈음에 왕위에 올랐다가 다 말아드실 뻔한 것을 칼리안 왕자님과 마나실 후작이 간신히 살려둔 것인데."
"······ 슬레이만."
르메인의 불편한 목소리에 한쪽 눈을 찡긋거린 슬레이만이 계속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당장 왕관 건네주고는 내 할 도리 다 했다 여기지 말고, 같은 일 반복되지 않게 자네 머리 위에 묵직한 것 올린 채로 아드님들에게 도움되는 일도 좀 하신 뒤에 넘겨주게."
"그대가 왕관에 대해 말할 줄은 몰랐는데. 관심없던 것 아니었나."
"내새끼 둘에 사윗감 하나까지 왕실에 엮여있는데 관심 안 두면 그게 사람인가. 어느 큰 나라 왕이나 되면 그리 굴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네."
그렇게 관심을 둘 것이었으면 20년 넘게 잘못해오던 것이나 진작 지적해주지 왜 이제 와서 난리를 피우느냐 말을 할까 하다가.
누가 누굴 탓하랴 싶어진 르메인이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별 일이군. 자네가 쉬라는 말에 곱게 쉴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집무실에 엉덩이 박고 늙어 죽을 줄 알았지."
"아무래도 내가 몰라야 할 일을 벌이려는 것 같기에."
"플란츠 왕세자님이?"
"칼리안, 그 아이와 발칸도."
"이런. 괜히 따라왔군. 수도에 있었으면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을 텐데."
놀리는 것이 다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한 슬레이만이 팔을 뻗었다. 그리고 말 위에 앉은 채 큼지막하게 기지개를 켠 뒤 다시 목소리를 냈다.
"마나실 후작이 굳이 나를 국왕 옆에 붙여 둔 걸 보면, 수도 뿐 아니라 슈린츠까지 꽤나 시끌벅적하게 돌아갈 지도 모르겠는데."
"어쩌면 그럴 지도."
"왕궁 안에서 싸움 나는 것이야 관심 없네만. 왕세자위 저대로 둔 채로 자네 목이 후딱 떨어져서 내새끼가 벌써부터 칼리안 왕자와 결혼이라도 해버리면 내가 좀 많이 서운할 테니······ 걱정 말고 푹 쉬게. 이번만은 도와주지."
"······ 그것 참 감사할 일이군."
"당연히 감사히 여겨야지. 코끼리가 방패를 든다는데."
르메인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조그맣게 보이기 시작한 카이리스 왕실의 별궁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정말 언젠가는 카이리스 왕궁이 아닌 슈린츠의 별궁으로 거취를 옮길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해보면서.
* * *
르메인을 잠시 수도에서 벗어나 있게 했다.
여러 이유가 있긴 했지만 가장 크게는 플란츠 스스로를 위해서였다.
칼리안은 셋이나 가졌다지만 나는 하나밖에 안 가진 젊은 아버지의 혈압이 치솟아버려서 이대로 내가 왕위에 오르면 어쩌나 걱정했던 탓에 권한 일이니까.
- 파사삭!
칼 잘 쓰는 내 동생이 소리없이 빠져나간 흔적이라는 듯, 빌헬름 관의 창틀이 손을 가져다 대기 무섭게 바스라지며 후두둑 떨어졌다. 일반적이라고는 절대 볼 수 없을 만큼의 힘을 주어 박차고 뛰어오르는 바람에 생긴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플란츠는 일단 르메인을 나가있게 하길 잘 했다는 생각부터 했다. 시시각각 왕궁이 부서져 나가는 이런 꼴을 르메인이 안 봐서 참 다행이라고.
방 안을 가득 채운 짙은 향에 잠시 미간을 찌푸린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수면향은."
"거의 다 완성되었습니다만, 특유의 향을 완전히 없애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합니다."
사실 칼리안을 재워버릴 수면향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같은 향을 내는 수면제를 만들어 보내봐야 안 통할 것이 분명하지 않나. 그 냄새를 곱게 맡고 있으면 그게 진짜 짐승이지 내 동생일 리가.
아니지.
"······ 간혹 사람 같지 않기는 한데."
"잘 못 들었습니다, 부군단장님. 다시 말씀해주십시오."
"아니야."
아무튼 그 깊은 바다 밑바닥에서 수면으로 떠오를 때까지 숨을 참고 나서도 큰 숨만 한 차례 쉬었을 뿐 잔 호흡은 전혀 하지 않았던 괴물같은 놈이다. 그랬으니 한 번 당했던 향기를 맡는 순간 숨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선 이들을 싹 다 쓸어버린 뒤 유유히 벗어날 수 있을 놈임을 안다.
그래서 일단은 칼리안이 설명했던 그 향기까지만 구현을 했다. 놈이 잠든 사이 향기를 보내 창 밖으로 내쫓고 정신없는 와중에 잡아볼까 했던 첫 계획 때문이었다.
"덫은."
"멀쩡합니다. 아예 건너 뛰어 나간 것 같습니다."
"왕궁 정문은."
"누군가 빠져나갔다는 보고는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알았어."
그 정도의 쉬운 수가 통할 리 없으리라 여겼던 만큼 첫 실패를 가볍게 인정한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빌헬름 관의 밖으로 발을 옮겼다.
칼리안에게서 뺏어두었던,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통신용품 중 반지를 꺼내 상대 마법사에게 건넨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수면제 완성되는대로 말해."
"부군단장님. 칼리안 왕자님을 정말 약으로 상대하실 겁니까?"
"아니."
짧게 답한 플란츠가 에스티나에 훌쩍 뛰어 올랐다.
시나스타가 담긴 검집이 안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안장에 매어 둔 긴 활과 화살통이 살짝 흔들렸다.
"전부 다, 쓸 건데."
당연하다는 말투에 마법사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그 때. 완연히 밝아지지 않은 먼 하늘에, 마법사들의 신호를 담은 가느다란 불꽃이 빛나다 오래지 않아 사그라드는 것이 보였다. 신호탄이다.
왕궁의 북쪽 끝.
숲이 있는 곳에서 솟아오른 불꽃.
"더 빨라지셨군."
벌써 도착했나.
빌헬름 관의 입구에 멀뚱히 서 있는 레이븐을 쳐다본 플란츠가 한쪽 입술을 끌어올렸다.
* * *
- 사아아아······.
마치 새로 찾아든 방문객을 환영하듯 나뭇잎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녹빛을 담기 시작한 나뭇가지 아래, 시린 빛을 가득 머금은 연보라색 눈이 잠시 빛났다.
허벅지를 관통당한 채 비명을 참던 기사 한 명을 기절시켰다. 칼리안과 대련을 청하다 수련장을 달리던 놈들 중 하나였음을 기억해 낸 칼리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검 끝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셋."
기사 둘, 마법사 하나.
숫자를 센다.
발칸의 기사단 제복, 마법사단 로브, 그 새하얀 옷이 검붉게 물드는 것을 바라보던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느리게 떴다.
- 샤악······!
가느다랗고 날 선 무언가가 귓가를 스치는 것이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손에서 뻗어나간 바람의 구체가 대기를 갈랐다.
- 쌔애애액!
- 터어엉!
옅은 오러까지 담은 채 벼락같이 날아간 구체가 어딘가에 막히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소리의 원인을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듯, 칼리안이 구체를 던진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방금 전 자신에게 암기를 던진 기사 말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사에게 실드를 씌운 마법사가 있을 곳을 향해서.
- 휘익!
바람의 마력을 담은 팔뚝만한 창날이 마법사를 향해 날아든다. 기사에게 씌웠던 실드를 보강하려던 마법사 한 놈이 재빨리 자신의 앞을 막았다.
칼리안이 웃는 것이 보인다.
"정찰조. 끝."
자신들의 역할을 들킨 마법사가 무어라 말을 더하기도 전에 칼리안의 모습이 다시 사라졌다. 그러더니.
- 쿠과광!
- 콰악······!
마법사의 앞과 기사가 있는 곳에서 동시에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사의 시선이 닿지 않던 발 밑에서 거대한 바람의 기운이 폭발했다. 거의 동시에 멀찍이 서 있던 기사의 옆구리에 서늘한 칼날이 박혔다. 칼리안을 보고 대응하기는 커녕 검이 날아오는 것조차 보지 못한 기사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의 표정없는 눈을 올려다보다 곧 정신을 잃었다.
기사를 바닥에 눕힌 칼리안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다섯."
소수의 정찰조.
제대로 된 진영을 짤 수도 없을 이들.
이들과는 다른 진짜 병력이 숲 속에 있음을 안다. 그들의 방향을 가늠한 칼리안이 지체없이 몸을 날렸다. 그러자 그 때.
- 우르릉!
쓰러진 기사의 앞, 칼리안이 밟고 서 있던 곳에서 발을 떼자마자 땅이 푹 꺼져들었다.
그 기사를 공격할 칼리안이 어디에 서 있을지 가늠했다는 듯이. 어디를 밟고 언제 발을 떼고 숨을 돌릴지 알고 있다는 듯이.
- 촤아아악!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하늘에서 거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내렸다. 그것을 발견한 칼리안이 중심 잡는 것도 잊은 채 실소했다.
미스릴 그물.
쉬이 끊어낼 수도 없을 거미줄같은 그것이 온 하늘을 뒤덮으며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 내 형님이 나를 진짜 한 마리로 보시나."
잡으라 했더니 자꾸 포획하려 드시네.
짧은 감상을 마친 칼리안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