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94화 (395/527)

제70장. 한 마리 대 여든일곱 명(2)

바삭바삭.

얇게 썰어 말린 사과에서 경쾌한 소리가 난다.

씹을수록 더 진한 단맛이 나는 그것을 목 너머로 넘겼을 즈음, 앞에 놓여있던 투명한 판에 밝은 빛이 들어왔다. 그 덕에 하나 더 집어들던 간식거리를 얼른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살피던 수정판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전하, 오랜만이야."

새벽 네 시에 말을 걸든, 하루이틀 밤을 새워가며 해오던 일을 끝마친 직후에 말을 걸든,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귀족들과의 회의 자리에서 벗어난 뒤에 말을 걸든, 혹은.

칼리안의 일로 깊이 가라앉아 있을 때 말을 걸든.

"아리안느."

언제 어느때고 한결같이 자상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그것이 반갑고 기꺼웠던 아리안느의 입에서도 말린 사과가 바삭거리는 듯한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나왔다.

"집무실이네. 혹시 계속 일만 했어?"

"아니야. 아침에 어머니와 잠시 산책 다녀왔어."

"그래. 잘했어."

카이리시스에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는 사실을 직접 알려주고 싶기도 하고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아리안느는 칼리안에게 부탁해 수정판을 빌렸다.

어차피 당장은 쓰지 못할 그것을 칼리안은 선뜻 내주었다.

물론 플란츠에게 잠시 건넨 반지를 통해 체이스에게 미리 언질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베른의 모습을 기다리고 있을까봐서였다. 수정판으로 연락이 가더라도 그 상대가 칼리안이 아니리라는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으니까.

"지금은 뭐해?"

"보고서 확인하고 있어."

"보고서?"

"동북부 지역에 지진이 생겨서 오후에 그 일로 회의가 있을 거야. 그 전에 보고된 내용 다시 살펴보고 있었어."

"지진? 지진이 생겼어?"

"이 시기에는 자주 있던 일이니까."

"자주 있던 일이라 해서 생겨도 괜찮은 건 아니잖아. 피해는?"

"사실 이미 알고 있던 일이라서. 대비를 해 두라고 말했었어. 인명피해 없이 지나갔고."

"다행이네······. 혹시라도 앞으로 벌어질 일들 당신이 다 알고 있다는 티 낸 건 아니지?"

"적당히 잘 얘기했어. 티 날 일 없어."

"그래도 항상 조심해."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걱정하지 마, 아리안느."

"응. 그럼 점심은? 안 먹었어?"

"아니. 스포튼 지역 귀족들이랑 오찬 가졌어."

"아, 그 지역 귀족들 마음에 들더라."

"유쾌하지."

"얘기는 잘 했어?"

"잘 했어."

"맛있는 것 먹었어?"

"그럼. 맛있는 것 먹었지. 오찬인데."

"많이 먹었어?"

"많이 먹었어."

"나 보고 싶었어?"

끊임없는 질문세례 끝에 튀어나온 말에, 체이스가 소리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피로해 보이던 얼굴에 그제야 제대로 된 웃음이 생긴 것을 본 아리안느가 마주 웃었다.

체이스가 아리안느의 석양빛 눈을 아로새기듯 바라보다 답했다.

"보고 싶어, 아리안느. 언제든."

"응. 나도."

세크레타를 벗어난 날부터 이미 보고 싶었던 얼굴을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지난 해 체이스가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이런 것조차 없이 무턱대고 기다리기만 했었으니까.

잠시 입을 다문 아리안느가, 아주 조금 힘들고 조금 피로하고 조금 많이 지친 정혼자의 얼굴을 살폈다. 할 일이 많을 텐데도 바쁜 내색 않는 체이스가 아리안느를 가만히 바라봤다.

"전하."

"응."

"카스트린 경 데려온 것 여기 전하께 알렸어. 계속 쳄버만 경 얼굴로 지내긴 하겠지만 그래도 알려드리기는 했어."

"얘기 들었어. 카이리스 국왕 쪽에 아무래도 양해 서신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 생각하는 중이야."

"맞아. 안 들켰으면 몰라도 들켰으면 미안하다 사과해야지."

"그래. 들킨 셈이니까 그렇게 할게."

고개를 끄덕인 아리안느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여기 왕궁 진짜 넓더라. 왕궁에서 마차 타고 다녀. 누가 보면 여기 건국왕이 시스파니안 본신이랑 결혼하고 지은 왕궁인 줄 알겠어. 정말로 드래곤도 살 것처럼 넓어."

"그렇더라. 정말 넓었어."

"응. 왕궁 안에 작은 강도 있고 언덕도 있고 분수도 많고 나무 회랑도 있어. 아, 나 묵게 된 루비아 관 앞에 가문비나무가 있는데 얼마 전에 당신이 심은 거랑 정말 똑같이 생겨서 신기했어. 그리고 세뉴 관 주변 산책로가 정말 좋았어. 체르밀 궁에는 큰 호수도 있다는데 거기는 못 가 봤어."

"호수도 크지만 그 뒤에 장미 정원도 넓어. 물론 보기 좋고. 지내기 좋은 곳이야, 체르밀 궁."

"그렇구나. 나중에 기회 되면 가보고 싶다고 해야 되겠다."

"그래. 그렇게 해, 아리안느."

"응. 그리고, 연두색 저하랑 헤르츠 경 만나서 같이 밥도 먹었어. 치유사 베른 경이랑 여기 소공작도 만났어. 아직 제대로 얘기는 못 했지만 인사는 했어."

"벌써 그렇게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

"만났지."

"그래. 잘 했네."

왕궁에 온 소감과 근황을 모두 알린 아리안느가 말린 사과 하나를 가져다 입에 넣었다. 바삭바삭 부서지는 소리를 듣던 체이스가 말했다.

"린 후작이 당신 걱정을 많이 해."

"엄마가 나 걱정해?"

의외라는 듯 아리안느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러다 곧 이유를 알았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레이지안 린이 타국에 간 딸을 걱정할 일은 딱 하나 아니겠나. 어머니의 마음을 잘 헤아린 아리안느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나 술 많이 마실까봐 그러는구나."

"······ 아는구나. 무슨 걱정일지."

"우리 엄마 뻔하지. 알았어. 조금만 마실게. 염려 안해도 돼."

"그래."

지켜지기 힘들 약속임을 아는 체이스가 실소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아리안느의 입이 작게 열렸다.

"전하."

"응."

"칼리안 얼굴 바뀐 것 당신이 눈치챘다고 연두색 저하가 말해줬어. 내가 말 실수할까봐 걱정했나봐."

"······ 그래."

"칼리안 만난 얘기도 들려주면 쓸쓸해 할 거야?"

수정판 건너의 보랏빛 눈이 잠시 감겨들었다 드러났다.

"궁금하고, 반갑고, 기분 좋고, 미안하고, 낯설고······ 아주 조금 쓸쓸할거야."

"그래도 괜찮을거야?"

"응. 그래도 괜찮을거야."

"나 있어서?"

"그래. 당신 있어서."

눈보라 그친 겨울 숲 같은 체이스의 미소를 눈에 담은 아리안느가 입을 열었다.

"당신 동생 정말로 당신이랑 많이 닮았어. 그런데 당신이랑 다르게 여기저기 보이는 데마다 흉터가 많아. 얼굴에는 없었지만. 그리고······ 당신보다 눈이 날카롭고, 눈 색은 훨씬 더 연했고, 당신보다 머리가 길고, 당신이랑 비슷하게 웃어. 그런데 목소리는 당신이 더 좋아. 키는 지금 당신이랑 비슷한 것 같은데 얼굴은 더 어려."

등을 토닥이는 듯한 아리안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도 칼리안이야. 말투도 행동도 생긴 것도, 전부 다 당신이랑 비슷한데. 그래도 내가 볼 땐 그랬어."

"그래 보였어?"

"응. 칼리안이었어."

"다행이네······."

"그러니까 전하도 그만 걱정해. 쓸쓸해하지 말아."

체이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응."

짧게 답한 아리안느가 잠시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봤다. 그리고는 다시 수정판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갈 데가 있어서 얘기 여기까지 해야겠다. 이따 다시 연락할게."

"일정이라도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얼마전에 칼리안이 수면제 향기 맡고 뻗는 바람에 죽을 뻔 했대. 그것 때문에 지금 저런 모습이라고 들었어. 당신도 알고 있다던데?"

"응. 플란츠 왕세자에게 들었어."

"그래서 이쪽 담당자들이 그 수면제 재료 알아내려고 하는데, 수면제 쓴 사람이 텐실이랑도 연관이 있나 보더라고. 그런데 텐실에서 나는 풀은 세크리티아에서도 나잖아. 세크리티아 수면제 재료는 내가 조금 알고 있고. 그래서 할 일도 별로 없는 김에 내가 아는 것들 가르쳐주겠다고 했어."

조금 안다 하였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는 좋아졌다지만, 칼리안에 대한 꿈을 꾸기 전부터 이미 오래도록 불면증을 앓아왔던 체이스가 아니던가. 마치 데블란의 불면증이 유전되기라도 한 것처럼. 덕분에 아리안느는 다른 약은 몰라도 수면제에 대해서만은 세크리티아의 법만큼이나 잘 아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아무튼 이제 진짜 가봐야 해. 잘 쉬고 회의 잘 하고 계속 괜찮은 채로 있어. 알았지?"

"알았어. 괜찮은 채로 있을게, 아리안느."

"응."

착하다는 듯 생글 웃은 아리안느가 수정판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 뒤 고개를 끄덕이는 체이스의 모습을 보며 마력을 흩어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안느의 가벼운 걸음이 밖으로 이어졌다.

* * *

쫓겨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격리됐다.

본래 지냈던, 볕도 잘 들고 쾌활한 미친 놈들 노는 것도 잘 보이는 시끌시끌한 곳 말고 다른 방으로 치료실을 옮겼다. 옮겨졌다.

덕분에 이제는 창 밖 저 멀리 르메인의 거처인 카밀리아 궁과, 그 곁에 건축되기 시작한 새로운 헤이시아 궁만 어렴풋이 보인다. 쉽게 말해 지금의 칼리안에게 있어 아무 의미도 없고 흥미도 없는 것만 간신히 보이게 됐다는 소리다.

뿐만 아니라 키리에와 아르센의 치료실 출입이 금지됐다. 칼리안이 치료실 밖으로 나가는 것도, 창으로 뛰어내리는 것도 금지됐다. 주렁주렁 채워져있던 통신용 팔찌들은 전부 다 플란츠의 팔로 옮겨갔다. 싹 다 뺏겼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다는 말씀은 집어넣지."

"아니, 형님. 히나도 치료 끝나자마자 바로 나가게 하셨는데.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이 정도는 해야 공정한 내기 아닌가. 져 주지 말라며."

"져 주지 마시라 했지 이기는 데 혈안이 되어서 동생 가둬두라고 말씀 드린 적은 없는데요. 치료실까지 옮기게 하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아니면. 대원들 훈련하는 것 전부 다 보고 들을 그 대단한 사냥감을 내가 어떻게 잡는데."

격리된 것이 맞다.

다 나아서 사냥대회에 나서기 전까지 완전히 격리되어 버렸다. 바깥 일을 하나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말이 좋아 격리였지 완전히 가둬진 꼴이다.

"브리센 후작저에 갇혀 있을 땐 아델리아라도 있었습니다만."

"그게, 뭐."

날 선 눈꼬리를 애써 둥글게 만든 뒤 축 늘어뜨리는 것에 성공한 칼리안이 시무룩한 목소리를 냈다.

"이 넓은 방에 혼자 앉아서 멀뚱멀뚱 있으면 하루가 얼마나 길지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몸 다친 것도 모자라 심심하기까지 하면 그게 얼마나 서러운데요."

"참아."

안 통한다.

저 새끼, 아니.

고아하신 저 형님 저하 지금 진심이시다. 동생 이겨먹을 의지가 참으로 높고도 곧아 진심으로 지독해지셨다.

"형님 진짜 너무하시네요. 이렇게까지 하실 줄 몰랐습니다."

"그 내기 먼저 제안하셨던 건 아우님인데."

"그래도요. 말 상대가 다 없어졌잖습니까."

"왔잖아. 그래서."

"······ 아니. 말 상대요, 형님. 형님이랑 대화하면 재미는 안 생기고 독해술만 느는데요. 독해술 말고 독심술이 생기는 것도 같은데요. 저는 그런 배움 말고 말 상대 필요한데요."

"그럼 혼자 계속 지내시던가."

"아닙니다. 계십시오. 독해술 느는 것도 재밌는 일이죠. 네, 뭐. 사람이 뭐라도 발전하면 그게 재미죠."

그래. 어쩌겠냐.

형님 너라도 있어야지.

우는 소리 계속하기를 포기한 칼리안이 손에 쥔 포크를 툭툭 놀렸다. 그 손짓에, 고구마 퓌레를 넣고 둥글린 뒤 블루베리 시럽 위에 얹어두었던 카스텔라가 접시 위를 굴러다녔다.

플란츠가 괜한 화풀이 대상이 된 것이 분명한 애먼 디저트를 내려다보다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싫으면. 이만 물리셔도 되는데."

"물리면. 말도 안 되는 그 말씀 또 하시려고요."

"왜 말이 안 되는데."

"제가 지금 모습으로 발칸 상대하다 속 깎일 것은 걱정하시면서 예전의 저와 똑같은 짓을 하겠다 드시는데. 그럼 그걸 말로 듣습니까. 짖는 소리로 듣지."

"너. 말버릇."

"당분간 없습니다. 저도 사춘기라."

보랏빛 시럽 위에서 이리저리 구르던 카스텔라가 결국은 녹아내리듯 부서졌다. 노란 속을 드러낸 그것을 한참동안 내려다보던 연보랏빛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칼리안이 실리케를 상대했던 방법을 고스란히 따라 썼던 플란츠가 아니던가. 데블란을 잡기 위해서 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과거 기억에 묻힐 것을 염려해 굳이 먼 길 돌아가려다 칼리안이 더 크게 다치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이라 여기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대신 실리케의 손길 아래 있었다면 평생 굽힐 일 없었을 무릎을 바닥에 대겠다면서.

칼리안은 잠깐 비에 젖고, 플란츠는 르니에리 향을 새기고. 그렇게 사이좋게 하나씩 감내하면 될 일이라고.

"아무튼 됐습니다."

비에 젖는 것도 질색이고 완두콩 절여지는 꼴 보는 것도 지겨운 칼리안이 툴툴대듯 말했다.

"빨리 나아서 나가고 말지."

아침에 히나가 다녀간 뒤 아주 많이 좋아졌다.

새벽까지만 해도 움직일 때마다 몰려오던 통증이 싹 사라졌다. 하루 정도만 더 지나면 완전히 괜찮아질 터였다. 그 하루의 심심함을 참지 못해 이러고 있다지만 오래 걸릴 일이 아님은 칼리안도 잘 알고 있었다.

"금요일. 왕실 숲."

칼리안의 상태를 참 잘 아는 플란츠가 이렇게 말했다.

금요일까지는 사흘이 남았다.

다 낫는 데에 하루 이틀, 푹 쉬고 나름대로 준비를 하는 데에 다시 하루 쯤. 그 뒤 왕실 숲에서 내기를 벌이자는 말이었다.

칼리안과 앨런이 대련을 했던 왕궁 북쪽 숲에서 진행해도 나쁠 것은 없었지만 그렇게 하면 그곳에 출입할 수 없는 그레이 브리센을 떠보지 못하니까. 때문에 사냥 대회가 열리면 늘 찾곤 했던 왕궁 밖의 거대한 숲을 골랐으리라.

"네. 알겠습니다."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해."

"키리에의 검이요. 그게 필요합니다."

플란츠가 잠시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러자 칼리안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몸에 익숙한 건 오러로 만든 검이 아니라서. 키리에의 검이 제가 예전에 사용했던 것과 가장 비슷하니 그것을 빌려다 주시고······ 치료실 싹 비워두십시오."

오러로 이루어진 검으로 베는 척만 하는 짓을 안 하겠다는 말이었다. 어디 하나 잘라 두지는 않겠지만 진짜 물기는 하겠다는 소리다.

발칸의 여든 여섯 명이야 이미 다들 각오하고 있을 테니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기실 놈들은 칼리안 손에 죽어도 여한 없을 족속들임을 안다.

다만 그들 대신 이번 싸움의 여파에 아주 많이 상관있을 사람 한 명을 떠올린 플란츠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히나가 고생하겠군."

"아뇨. 이번에는 히나가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치료실을 전부 다 비워 두라 경고를 하더니 히나는 안 나서게 해달란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플란츠가 칼리안을 멀뚱히 쳐다봤다. 그러자 칼리안이 창문이 나 있지 않은 쪽 벽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치유사 손 안 탄 환자 돌봐 본 경험은 거의 없는 치료사들이 여럿, 약 쓸 일 적어 빈둥빈둥 놀고 있는 약제사도 여럿. 새로운 상황에 대한 훈련은 싸움 하는 놈들한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목숨 책임져야 할 놈들한테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싸움은, 전쟁은, 군인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훈련하다 다쳐 오는 한 두 명을 히나가 치료하고 끝내는 건 어디까지나 평상시의 일이다. 수많은 부상자가 갑작스레 생겼을 때, 히나가 미처 손을 댈 수 없을 때, 치료사들과 약제사들 만으로도 부상자들을 감당해 낼 필요가 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 군대에 들여놓은 인력 아니던가.

"동의하지만. 한계가 분명 있을 텐데. 아우님께서 치료사 사정 봐 가며 손 쓰실 분이 아니지 않나."

"정 안되면 한가한 치유사도 하나 있고, 동생 돕기로 하신 더 한가한 치유사도 한 분 있습니다. 히나 아니어도 치유사 많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텐실에서 온 왕실 담당 치유사가 있다.

그리고 란델이 있다.

"······ 그럼. 히나는 마나실 후작저나 지그프리드 공작저에서 며칠 쉬고 오도록 전해두지."

"네."

가볍게 답한 칼리안이 싱긋 웃었다.

누굴 어떻게 불러와 쓰든 이런 내기 때문에 엉뚱하게 우리 히나만 고생할 일은 안 만들 것이란 각오를 가득 담은 채였다.

* * *

수요일이 되었다.

칼리안의 상처가 모두 아물었다. 검을 들어도 충분할 만큼 회복되었다.

목요일이 되었다.

다음 날 있을 '사냥 대회'를 위해 키리에의 검이 전해졌다. 치료실 안에서 그것을 몇 번 휘둘러 본 칼리안이 손에 꼭 맞는 검의 익숙함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자정이 지났다.

금요일이 되었다.

그리고, 새벽.

- 스르륵.

달은 저물고 마법 등불만 홀로 빛나는 시간.

깊은 어둠에 잠겨들어 있던 연보랏빛의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없이 몸을 일으킨 칼리안이 길고 긴 청은빛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빗었다. 그리고 잘 풀려버리는 에일라의 손수건 대신, 수정판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아리안느에게 받은 뒤 리본만 떼어내 둔 머리끈을 집어들었다.

천천히, 서두를 것 없다는 듯이 머리를 높이 묶었다.

오래지 않아 간단한 준비를 마친 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마치 거울을 살피듯, 마법 등불의 빛에 비춰진 자신의 긴 그림자를 한동안 내려다봤다. 그 뒤에는 하루종일 열어두었던 창가로 걸어갔다.

발을 움직였다.

자신을 둘러싼 공기를 다 삼킬 것처럼 깊은 숨을 머금었다.

세상의 그 어떤 짐승도 공격 시기와 장소를 약속하고 달려들지는 않는 까닭에. 세상의 그 어떤 실전에서도 선공을 예고하고 칼을 들지는 않는 까닭에.

창 밖으로 아주 조용히 몸을 날렸다.

아니.

그렇게 하려 했다.

- 사아아아······!

달이 저문 시간. 곧잘 밤잠을 설치는 칼리안도 뒤늦은 숙면에 들었을 시간. 그 시간을 틈탄 무언가가 방문 틈으로 새어들어왔다.

뱀, 그리고. 꽃.

뱀의 피를 말려 꽃잎 위에 흩뿌린 듯한 향기가 스민다.

"······ 하."

생각지도 못한 익숙한 향기에 당황하는 대신 감탄과 흥미가 적절히 섞인 얼굴이 된 칼리안이 낮고 작은 소리로 탄성을 냈다.

동생 한 마리 잡으려는 완두콩이 소드마스터 재웠다던 그 수면향을 어느새 만들었나보다. 약속된 시간도 장소도 아닌 이런 곳에 그 수면제를 흘려보내는 모양이다.

"잘 키운 건지 잘못 키운 건지. 알 수가 없네."

세상의 그 어떤 사냥꾼도 포획 시기와 장소를 약속하고 덫을 놓지는 않는 까닭에. 세상의 그 어떤 실전에서도 선공을 예고하고 수면제를 풀지는 않는 까닭에.

잠든 김에 내기에서 질 때까지 아예 그냥 푹 자라는 형님의 진심어린 배려에 망극할 따름이라. 잠시 발을 멈췄던 칼리안의 붉은 입이 긴 호선을 그렸다.

- ······ 타앗!

수면향의 기운이 발치에 닿았을 즈음.

창 밖을 향해 도약했다.

푸른 은빛의 긴 잔상이 어둠을 나눈다.

대지를 밟는다.

그림자 속에 스민다.

서로를 향한 사냥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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