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장. 한 마리 대 여든일곱 명(1)
새까맣고 둥글고 커다란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오늘따라 유난스레 검은 듯한 갈기가 흩날렸다.
"나 아직 다 안 나았어."
푸르륵.
"키 커진 것 안 신기해?"
푸륵.
"그래도 알아보네. 기특하게."
칼리안을 보자마자 날듯이 다가왔던 레이븐이 고개를 움직였다.
예전 같았으면 칼리안이 양 팔로 한가득 제 머리를 껴안도록 고개를 숙여줬을 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다 낫지 않았다 한 말을 알아들은 것일지 아니면 오래도록 보지 못했던 주인이 어느때보다 더 반가운 것일지 몰라도, 레이븐은 커다란 머리를 치켜들더니 긴 목을 칼리안의 어깨 위에 살짝 가져다 댔다.
꼭 앨런이 칼리안을 안아주었던 것을 보고 배운 것처럼.
"······ 괜찮아. 레이븐."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에 잠시 놀란 칼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나 힘들다 칭얼거리던 날에 헤어지게 되어서.
길을 잃듯 멈춰 선 주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볼 뻔했으니, 영특한 놈이 말도 못하고 혼자서 얼마나 걱정을 했을지 안다.
칼리안은 어리광부리듯 안겨드는 큰 짐승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가만가만 두드렸다. 별을 닮은 긴 머리도 가만가만 흔들렸다.
"그래도 넌 안 굶고 잘 지냈나보네. 착하다."
소드마스터를 재운 독한 수면향을 맡고도 큰 탈이 없어 다행이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털도, 단단한 다리도, 커다란 덩치도 모두 다 그대로다. 칼리안이 없는 동안 얀이 얼마나 잘 챙겼었는지 한 눈에 보인다.
"내가 너 오는 것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넌 아마 모를 걸."
푸륵, 푸르륵.
대답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작은 웃음을 터뜨린 칼리안이, 힘들게 레이븐의 허락을 받은 누군가가 조심스레 빗어두었을 갈기를 잔뜩 헝클어뜨렸다.
새로 짓기 시작한지 오래 되지 않은 옛 헤이시아 궁의 터. 빌헬름 관의 건물들이 들어서게 될 넓은 공터 한 구석으로 천천히 걸어간 칼리안이 발을 멈췄다. 그리고는 버릇처럼 레이븐의 다리 앞에 앉았다. 그 바람에 상체가 크게 움직이며 잠시 몰려온 통증을 버릇처럼 참아 넘겼다.
- 다각.
그것을 알아챘는지, 완전히 검은 다리와 하얀 털을 발목에 두른 다리가 칼리안의 등을 받치고 섰다. 단단한 레이븐의 다리가 등에 닿은 것을 느낀 칼리안은 지금의 자신이 예전보다 훨씬 더 무거울 것을 걱정하는 대신 낮게 웃었다.
등이 배긴다 싶을 만큼 딱딱하기만 한 두 다리가 지나치게 포근하여서.
"얀도 너만큼 내 걱정 많겠다. 불러다 괜찮다는 말이라도 해 주면 좋을텐데······ 그러지를 못하겠네."
앨런과 히나, 키리에, 그리고 플란츠.
칼리안이 머무는 방에 출입이 허락된 사람들이다. 아르센과 드미레아, 아리안느, 란델이 찾아왔던 것은 비밀에 부쳐졌다. 얀과 르메인 때문이었다. 그 넷을 만날 수 있을 정도라면 자신들이 출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여길까봐 그렇게 했다.
물론 치료실 안에서 자유로이 거동할 수 있을 만큼은 나았다는 말로 안심을 시켜 두기는 했다. 그러나 만나지는 못했다. 커튼을 치고 목소리만 들려줘도 안심을 할 텐데 그조차도 하지 못했다. 그 둘에게만은, 특히 얀에게만은, 잠시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으로 분해있는 동안의 사소한 일면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얀은 좀 어때."
레이븐의 다리에 완전히 기대고 앉은 칼리안이 곁을 보며 물었다.
칼리안이 무사히 잘 치료받는 중인 것을 안 얀은 다 나을 때까지 잘 기다려주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과는 달리 잘 기다리지 못할 다른 한 놈을 키리에의 편에 보내오는 것으로 배려를 보였다.
"무사하시다는 것 안 뒤로는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빌헬름 관에 레이븐을 데리고 와 이제껏 아무 말없이 곁을 지키던 키리에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다행이라는 얼굴을 한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빨리 나아야겠네."
"아시면, 대련은 물리십시오."
"그 대련은 놈들 말고 나한테 좋은 거야, 키리에. 나라고 언제까지 지지부진 멈춰있을 순 없지. 놈들 상대하다보면 몸이 바뀌어서 하지 못하던 것, 잊고 지냈던 것, 다시 다 제대로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
"카스트린 경이 있고 힐 경이 있습니다. 저도 있고 마나실 후작도 있습니다. 그렇게 다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겁니다."
"일대 일은 조금 뒤에. 제온 놈들 머릿수가 하도 많아서 일대 일 대련 여러 번 해봐야 별로야."
"하지만,"
"왜. 여든 여섯 명 상대 못 할까봐?"
"에반을 상대하지 못해 다치셨던 것 아니었지 않습니까."
칼을 든 채 생각에 빠지면 죽는다.
에반과 싸우던 중 제 밑바닥을 봤던 칼리안이 그랬다. 키리에와 대련하던 중 과거로 돌아가버린 시오나가 그랬다. 정말로, 죽을 뻔했다.
"키리에."
"네, 왕자님."
지금껏 들어본 적 없던 낮은 목소리. 본래의 미성과는 완전히 다른 그 낮은 목소리에도 키리에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대답을 보냈다.
"오늘 아침에 있던 일. 네가 오러를 냈다고 하던데."
"네. 맞습니다."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 제 검 보아 주신다면서 무리하실 것 같아 미뤘습니다."
혼자 앉아있게 된 탓에 한 눈에 들어오게 된 잿빛 검을 보면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검을 참 잘 썼어."
오러를 발현하게 된 것을 왜 전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말이 아닌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그랬어. 검이 되겠다 하더니 정말로 그렇게 될 것처럼 검을 썼어."
"예전의 저 말씀이십니까."
"응."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굳이 키리에의 얼굴을 올려다보지 않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나도 참 열심히 검을 배웠거든. 너보다도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정말 열심히 배웠었거든. 그런데 금세 따라잡더라. 너랑 대련을 하면 어떻게 해도 내가 지는 날이 하루 이틀 늘어나더라."
베른이 아직 검의 길에 오르지 않았을 때. 그 때의 기억이 옛 이야기처럼 하나 더 풀려나와 발치를 타고 흘러내려갔다. 그것을 좀 더 가까이에서 듣고 싶어하는 것처럼, 검을 풀어 내려놓은 키리에가 바닥에 풀썩 앉았다.
"그러다 아버지가 죽고, 나는 잠깐 미쳐있었고. 깨닫고 보니 어느새 넌 나보다 내 스승님의 검에서 더 많은 걸 배워가고 있었어. 그러더니 기어코 네가 먼저 오러를 냈어. 솔직히 조금 억울했지만 싫진 않았어."
"안 싫으셨습니까."
"당연하지. 노력해서 얻어가는 놈만 있으면 재미가 있나. 재능있어 얻어가는 놈도 있어야지. 게다가 재능있는 놈이 내 기사라는데. 싫었을 리가."
키리에가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다 내가 혼자서 왕궁을 일 년 남짓 떠나게 되어서. 그 일 년 동안 이런 저런 것들을 보고, 배우고, 생각도 많이 하고. 검의 길에 오르게 됐어. 그 길로 왕궁에 돌아와 형님과 스승님께 자랑을 하고 네 축하를 받고. 너와 계속 대련을 하고. 그렇게 또 얼마를 지냈는데 어느 날 네가 그러더라. 알 것 같다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이제 알 것 같다고. 오래지 않아 일곱 번째 소드마스터가 나오게 될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정말 기뻤어, 나는."
눈에 한가득 들어오는 레이븐의 목덜미를 지나 그 위로, 쏟아지는 듯한 흰 별들을 올려다봤다. 그 많은 별을 하나 하나 셀 것처럼 눈으로 더듬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오래지 않아 검의 길에 오르게 될 거라던 그 말이 정말 기뻤어. 내가 그 길에 올랐을 때에도 나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었는데. 네 말에는 기뻤어. 앞으로의 언젠가를 기대해보는 건 처음이었어서······ 절대 잊지 못할 기쁜 날이었어. 나한테는."
같은 곳을 올려다보던 키리에가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내려 둔 검 끝을 바라봤다. 칼리안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검만 내려다봤다.
그 끝을 안다.
처음이었다던, 가장 반짝였을 그 어느 날을 지나간 이야기가 어떤 종막을 맞이했는지 안다.
베른이 기쁘게 간직한 그 이야기는 결국, 비극이었음을.
"그러니까 괜찮아."
키리에 쪽으로 시선을 돌린 칼리안이 말했다.
"지금 이런 모습일 때 네가 오러를 쓰게 됐단 얘기 들어도. 내 속 안 썩어, 키리에. 괜한 핑계 대면서 안 숨겨도 돼."
속내를 들킨 키리에가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키리에만큼은 될 손으로 키리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칼리안이 걱정 말라는 듯 평온한 목소리를 냈다.
"이 모습으로 그 놈들 여든 여섯 상대하는 것도. 괜찮아.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걱정 안해도 돼."
"······ 네."
비극을 바꿀 기회를 얻어 살게 된 이가 가만히.
자신의 이야기책을 다시 덮었다.
* * *
잘못 골랐다.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봐도 잘못 골랐다.
루시와 안네만 봐도 그렇지 않나.
세상에서 그만큼 얌전하고 사랑스러운 생명이 또 있을까.
돌아다니다 여기저기 털을 묻힌다거나 뿜어낸다거나 발도장을 찍는 것은 루시와 안네가 얌전하지 않은 까닭이 아니다. 궁금하면 가 보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그러다보면 발자국이 찍히게 마련이고 털은 제멋대로 빠지는 것이니 그것을 두고 예쁜 루시와 안네 탓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애옹, 우에옹!"
"니아앙······!"
"여든 여섯 상대하는 것 정도야. 어려울 것 있겠습니까."
첫째 고양이, 둘째 고양이.
그 뒤를 이은 칼리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삶아 으깬 밤과 크림이 잘 어우러진 수프에서 스푼을 내려놓은 칼리안이 태평한 얼굴을 했다. 전날에 이미 키리에와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하면서 제 고집 꺾을 생각이 없다 말했다.
그건 됐다.
전날 보여 준 표정만으로 플란츠는 이미 포기를 했다. 대신, 이제 좁을 것 분명한 자신의 허벅지 위에 사이좋게 몸을 구겨 누운 루시와 안네의 묵직함을 느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잘못 골랐다고.
"재밌을 겁니다. 형님 보시기에도."
놈은 고양이가 아니다.
저를 나타낼 상징으로 검은 고양이를 고른 것은 명백한 놈의 실수다.
도대체 앨런 마나실은 저런 놈을 왜 하필 고양이라 말했는지. 아스트리샤 거리에서 검은 고양이 장식을 사는 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다들 눈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내 아우님께서 발칸의 숫자가 과하다 여기셨는지."
"제가 뭐하러 형님 군대 수를 줄입니까."
"아무래도 줄여두실 것 같은데."
"안 죽입니다. 잠깐 요양들은 하겠지만요."
그래.
저 웃음.
저런 사나운 웃음을 짓는 놈이 고양이를 닮았을 리 없지 않나.
"동생 다칠까 걱정해주실 줄 알았더니 대원들 걱정을 그리 하십니까. 벌써부터 이러려고 애지중지 키워놓은 것은 아니었는데. 무럭무럭 자라신 모습 보는 게 물론 좋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생판 남인 놈들을 그렇게 챙겨주시면 지켜보는 동생 입장에서 아무래도 서운하기는 하네요."
게다가 이렇게 짖어대는데.
고양이일 리가.
"······ 잘 짖으시는 것을 보니 식사 상대를 더 안 해드려도 알아서 잘 드시겠군."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플란츠를 향해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다.
"새벽에 레이븐도 돌려보냈습니다. 형님 가시면 이 많은 풀 누가 다 먹습니까."
- 달칵!
불편한 마음 가득 담은 소리가 치료실 안을 울렸다.
식기를 내려놓고 정말 일어나려는 플란츠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 칼리안이 손사래를 쳤다.
"저 심심해요. 마저 드시고 가세요."
또, 생글생글.
안 어울린다는 것을 모르는 게 분명하다.
······ 하기사. 거울도 안 보고 있으니.
결국은 칼리안을 이기지 못해 다시 포크를 든 플란츠가, 레몬 드레싱이 올려진 샐러드를 집으려다 말고 손을 옮겼다. 그리고는 참나무 숯에 훈연해두었다가 구워냈다는 돼지 바베큐를 가져다 입에 넣었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로즈마리로 향을 내고 질 좋은 암염으로 맛을 낸 스테이크를 양껏 먹은 칼리안이, 배와 포도를 졸여 만든 소스에 잠긴 닭다리 살에 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형님."
"왜."
"모의 전투, 자주 하시죠."
"그래."
"어디에서 하십니까."
"그것을 몰라 질문하실 아우님이 아닌데."
"그래도. 궁금해서요."
"빌헬름. 왕실 숲. 수도 외곽."
"사냥은 얼마나 하십니까."
"별로."
입에 넣은 것을 다 삼킨 칼리안이 레몬 조각이 든 탄산수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냅킨으로 입을 닦은 뒤 목소리를 냈다.
"대원들끼리 진행하는 모의 전투도 물론 중요합니다. 작전을 세우고 대형을 짜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가며 동태를 파악하고 공격과 방어를 주고 받고. 필요한 훈련이 맞습니다만."
"그럼. 사냥은 왜."
"모의 전투는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어디로 움직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반격을 할지, 예측이 가능합니다."
플란츠가 대답없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런데 짐승은, 아니거든요. 본능만 남은 놈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디로 달려가고 누구를 공격할지. 사람보다 더 예측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사냥도 중요합니다."
"사냥대회라도 열자는 말씀이신지."
"네."
"그건 전하께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뇨. 그럴 것 없이 이번에는 그냥."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켜보였다.
"여든 여섯 대 하나. 그렇게 사냥 대회를 열어보시죠."
방금 전까지 저 놈이 고양이인지 다른 짐승인지 가늠해보던 것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한 말. 저 스스로를 사냥감으로 치부한 그 말에 플란츠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련 말고, 아우님을 사냥감 삼아서 사냥을 해보자는 말인가."
"맞습니다."
"이유는."
"지금 제 모습을 아는 사람이 또 있지 않습니까. 왕궁 밖에요."
"그레이 브리센과 라시드 브리센."
"네. 맞습니다."
"그게 왜."
"고양이 한 마리가 미친 놈 여든 여섯 명도 잡고. 잡는 김에 뭣좀 더 잡아보려고요."
"뭘 잡을 건데."
"형님 살 자리."
띄엄띄엄 흘러나온 설명에, 똑똑한 머리로도 칼리안의 생각을 가늠하지 못한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브리센 후작에게 화 냈던 일. 기억하십니까."
"기억해."
"그 일로 형님이 브리센 후작 편이 되어 줄 것처럼 이야기하셨을 것 같은데. 혹시 맞습니까."
플란츠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노리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숨을 죽이고 칼리안의 손을 잡고 있는 것처럼, 그레이 브리센에게 그렇게 말을 했었다.
"얘기 안 했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후작저에 있을 때, 브리센 후작이 형님 말에 맞장구 치는 것을 봤습니다. 그 뒤로 브리센 후작 눈이 형님한테서 떨어지질 않던데요. 숨긴 것을 뜯어다 살펴보려는 사람처럼. 평소였으면 브리센 후작은 저를 봤을 텐데도."
도저히 무엇 하나 숨기지 못하게 하는 칼리안의 말에 플란츠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저를 대상으로 모의 사냥대회가 열린다는 것을 그레이 브리센에게 얘기해주십시오. 좋은 기회라는 것처럼."
"그렇다 해서 브리센 후작이 당장 아우님께 칼을 대려 들진 않을 텐데."
"안 할 겁니다. 아무것도. 대신 형님 속내를 가늠하겠죠. 나중에 저에게 칼을 들이대도 괜찮겠다 싶을 때 형님을 찾아갈 테고요."
칼리안을 배신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살짝 비춰주라는 뜻이었다.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플란츠의 속마음을 그레이가 알 수 있도록.
잠시 생각하던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때가 되어 브리센 후작이 형님을 찾아가게 되면, 그것을 붙들고 브리센 후작을 쳐내면 됩니다. 어떻게든 라시드를 없애두고. 그 후에 형님이 가지십시오. 브리센을."
"그 때가 되면, 아우님께서는 내 위로 올라서시겠군."
"그래야죠. 형님은 왕관 싫다 하셨으니."
"방법은. 이제는 생각해 둔 게 있나."
"아직 없는데요."
"내 목숨 부지하면서 아우님이 왕관 쓰는 일. 나를 그대로 두고 아우님이 더 높은 곳으로 오르는 것보다 더 쉬운 방법이 없지는 않을 텐데."
탄산수 잔에 손을 가져가려던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흔들림 없는 표정의 플란츠가 벽에 세워 둔 자신의 검을 가리켜보였다.
"잘 아시지 않나. 내가 뭘 하면 되는지."
기사 서약.
베른이 체이스에게 했던 것과 같은 일.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만 하면 된다. 브리센의 힘까지 얻은 플란츠가 그렇게 하면, 섣불리 반기를 들거나 플란츠를 공격하려 들 귀족은 없을 테니까.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리고 조금 전 나락에 들었다 나온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싫습니다."
"왜."
"형님 너무 약하셔서."
"짖지 말고."
"아직 오지도 않은 일에 대해 벌써부터 고민할 생각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보다 약한 기사 필요 없습니다. 평생을 가도 저 못 이길 것 분명한 사람 기사로 두는 취미도 없습니다."
"내 고집, 못 꺾으실 텐데."
일어나서, 무릎꿇고, 말 한 마디.
그것이면 된다.
세렌티의 가호를 받는 기사 서약은 누구도 도중에 끊을 수 없다.
기사가 됨을 허락해달라는 말에 그것을 불허할 수는 있다. 그리 되면 기사를 청했던 이는 평생 두 번 다시 검을 들지 못한다. 그러니 칼리안은 그것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칼리안이라 하더라도.
"쉬운 길을 두고 왜 돌아가려 하시는지."
"돌아가는 데 취미 많은 사람이라."
낮고, 또 낮은 목소리를 낸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럼. 내기하시죠. 똑똑한 머리가 이길지, 제 검이 이길지. 이 참에 같이 확인해보면 되겠네요."
서늘한 눈으로 고스란히 플란츠를 응시하던 칼리안의 입이 열렸다.
"그 여든 여섯 명, 형님이 통솔하십시오."
하나 대 여든일곱.
여든일곱 대 하나.
"쓸모있는 것 같으면, 제 기사노릇 하게 해 드릴 테니까."
"버릇 없는 건 여전하시군. 내 아우님께서는."
"형님 무모한 만큼."
연보랏빛 눈을 또렷이 마주한 연두색 눈에 날이 섰다.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린 플란츠가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해."
"네."
그리하여, 사냥을 하기로 했다.
칼리안의 붉은 입에 분명한 기대감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