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92화 (393/527)

제69장. 고양이가(7)

영원할 듯한 침묵이 흐른다.

바람은 잔잔하고 하늘에는 새털같은 구름이 수놓였는데, 더는 땅에 스미지 못한 오랜 빗물이 고여 흐르듯 침묵이 함께 흘렀다. 그 비가 다 스미고 그 구름을 다 떠안고 그 바람에 다 깎여 결국은 침묵만 남은 듯한 이의 눈을, 란델이 마주 봤다.

"닮았구나."

불어든 바람이 장미꽃잎을 흐트리던 날.

장미 정원에 찾아 든 이의 보랏빛 눈을 떠올렸다.

"······ 네가, 그 이방인을."

꽃을 다루다 가시에 다칠까 걱정된다 했던 그 말이, 섣불리 칼리안을 다루려 들다가는 다치고 말 것이라는 경고였을지.

아니면 고이고이 피어난 붉은 꽃을 살피느라 그만 꽃 지켜낼 가시를 잊지는 말아달라는 부탁이었을지.

오로지 그 날의 체이스만 알 수 있을 말의 의미를 잠시 새겨보던 란델에게 낯설지만 분명한 칼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닮았습니다. 세크리티아의 국왕 전하를, 제가."

"텐실을 두고 그리 낮추어 얘기하더니. 그런 이유였더냐."

"사이 안 좋으니까요. 예전에도, 지금도."

"그 사이, 앞으로는 어떻겠느냐."

"제가 손대기에 따라 다를 겁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아질 수도 있겠고, 아니라면 그저 각자의 길을 갈 수도 있겠고."

란델의 결정이나 세르제인의 속내나 라시드의 행보는 하나도 신경쓰지 않는 듯한 말이었다. 가만히 침묵한 채 그것을 보고 있던 란델이 입을 열었다.

"자신이 넘치는구나."

"그저 가늠하는 겁니다."

가능성의 문제는 이미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자신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 모습이 자신만만하다 말하는 것이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제가 칼리안인데."

"내가 어찌 할 줄 알고."

"도와주시겠죠."

"내 말을 그리 믿느냐."

"이번에는 동생 믿겠다 하셨으니."

이 말을 들은 란델이 비맞아 떨어진 장미를 앞에 둔 얼굴을 했다. 그것을 짐짓 못본 척,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커튼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알지만 알아보기는 겁나고, 돌이키지 못할 일을 했으면서 그것을 덮겠다는 듯 되돌리지 못할 일을 계속 저지르고, 눈을 돌리고, 눈을 감고, 외면하고, 침묵하고. 세상에 오로지 장미 뿐인 것처럼, 오로지 란델 형님 손에서만 나고 자라다 아무 말 없이 잘려나가 줄 것처럼, 그 장미들이 형님 생의 전부인 것처럼. 이제껏 그리 사셨는데."

커튼을 놓고 란델에게로 한 발을 더 다가선 칼리안의 손 끝이 란델의 발치를 향했다.

"저는 형님이 아니라서 세 번 못 참습니다. 란델 형님 사정도 썩 좋지는 않았으니 한 번 참았고, 란델 형님보다 형님이 먼저 나서는 바람에 발을 물리신 것이니 한 번 참았습니다."

옛 칼리안은 거절만 받았다. 언제나 어디서나 늘 그렇게 거절만 당했다. 온 생이 이어지는 내내 부정받고 외면되었다. 기어코 그 죽음마저도.

그것을 한 번으로 쳤다. 수를 세어보면 이토록 넓은 왕궁 안에서 얀의 손길 말고는 기댈 곳이 없어질 것 같아 그 모든 거절을 전부 다 한 번으로 쳤다.

란델 역시 거절만 받아왔던 생임을 알았으니까. 용서하지는 못해도 이해는 했다.

실리케의 독을 삼켜가며 도와달라 전했던 말에 발을 물린 것을 한 번으로 쳤다. 나서주고 싶었으나 실리케를 살리려 먼저 나선 플란츠 때문에 침묵하게 되었으리라는 이유는 굳이 듣지 않아도 눈에 선해서, 그 이유를 핑계 삼아 한 번을 더 참았다. 이해하지는 못하고 용서만 했다.

이해하여서, 용서하여서.

그렇게 두 번을 참았다.

"제 속 녹여가며 내민 손에 거절당한 것은 두 번이면 족합니다. 저는 더 못 참습니다."

그렇게 참아왔던 것을 결국 터뜨렸다.

터질 것 같아서.

정말, 속이 터질 것 같아서.

그 심연에 가득찬 것들이 흘러 넘쳐 란델의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칼리안이 먼저 터뜨려버렸다.

"세 번 참는 사람 못 된다는 사실은 란델 형님도 아실 테니. 이번에는 도와주시겠죠. 그러니 저도 믿겠습니다."

이제껏 란델이 보여왔고 플란츠가 이미 한 번을 깨뜨린 것. 그래서 칼리안은 끝내 넘어서지 않으려 했던 벽을 결국 넘었다. 란델은 플란츠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서 그냥 두려 했던 곳에 결국 발을 들였다.

그 발을 바라보면서, 그 손을 새겨보면서, 그 입을 지켜보면서, 그 눈을 마주보면서.

"더는 물리지도 못하겠구나."

란델이 대답했다.

"네 인내심이 그리 부족하다 하니."

"게다가 한 번 쥔 것은 안 놓는 사람이라. 못 물리십니다."

"이제 그럼. 어느 쪽으로 발을 내면 좋겠느냐. 그것은 알려주거라. 참고할 테니."

"그렇게 살다 탑에 가는 것은 꺼려지고, 풍광 좋은 영지에 갇히는 것은 마음에 안 들고, 근본없는 나라의 왕관을 쓰는 것도 마뜩지 않고. 그렇다 해서 광장에 서기도 싫고. 전부 다 싫다 하신 건 란델 형님이시니······."

칼리안도 대답했다.

방금 전 란델이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입에 담았다. 그 뒤에는 흐트러진 청은빛의 머리에 손을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장미가 좋은지 고양이가 좋은지, 직접 정하십시오."

엉킨 것을 풀어내듯 머리카락을 쓸어내린다.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손 끝에 감겨들어 빠져나온다.

"쉬이 집어들기 어려운 선택지구나."

"시간 많습니다. 30년이고 50년이고 오래오래 쭉 살 거라서."

칼리안이 제 손 끝에 감겨들어 떨어진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봤다. 몸에서 벗어나게 된 탓에 마법이 풀려 길이가 줄어들고 검게 변해가는 그 머리카락을 잠시 지켜보다가, 그대로 툭툭. 바닥에 툭툭 털어냈다.

"그러니까. 저 그렇게 사는 동안 조용히 지내며 도와주실 건지, 온갖 곳에다 발자국 남겨가며 도와주실 건지. 이제는 형님께서 직접 정하십시오. 어느쪽이 낫다 하시든, 다른 무언가가 좋다 하시든, 뭐든 상관없이."

청은빛이든 검은빛이든 신경쓸 바 있겠나.

무슨 모습을 하고 있든.

"하고 싶은 것 하게 해 드릴 테니까. 제가."

능력 좋은 칼리안이라는 사실만은 바뀌지 않을 텐데.

* * *

금세 사라질 침묵이 흐른다.

빌헬름 관 2층 창을 잠시 올려다 본 플란츠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쯤 이보다 더한 침묵을 견뎌내는 중일 사람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소라 껍데기 속을 데구르르 굴러다니는 모래알보다 더 통제하기 힘든 여든 여섯 명이 제각각의 색을 지닌 눈에 다 똑같은 한 가지 염원을 담은 채 플란츠를 보고 있었다. 그 수많은 빛의 눈을 하나하나 마주보아 준 플란츠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내 아우님께서 만들어주신 군대라 그런가······."

그 여든 여섯 명의 이름이 무엇인지, 머리색은 어떻고 눈은 무슨 색이며 목소리는 어떤지, 무엇을 잘 하고 무슨 버릇을 가졌는지, 각자의 말버릇은 어떠하고 무엇을 어려워하며 어떤 필체로 글을 쓰는지.

그것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플란츠의 말이 이어졌다.

"다들 잘 짖네."

사람이란 당연히 천편일률적으로 전부 다 다른 법일진대, 여기 모인 여든 여섯 명이 어떻게 하나같이 한 소리로 짖을 수 있는지.

그것을 습관처럼 궁금해하는 중이었다.

"칼리안 왕자님이 만든 군대답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다른 놈들 앞에서 내 동생 짖는다 소리는 안 하는 플란츠라서, 칼리안이 만든 군대인 것과 그 군대의 대원들이 잘 짖는다는 것의 상관관계는 이해 못했지만 어쨌거나 칼리안이 연상된다는 말임은 찰떡같이 잘 알아들은 놈들이 매우 뿌듯해하는 얼굴을 했다.

"칭찬 아니야."

"넵. 압니다, 부군단장님. 그래도 좋습니다."

"······ 하."

어지간한 향수보다 갑절은 비싸다던 최고급 잉크를 루시가 쏟고 안네가 밟고 코코가 휘저어두었던 날. 평소의 흙 발바닥 말고 잉크 발바닥 세 종류가 정갈하게 찍힌 서류가 저들만의 경매에 올라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리려다 앨런의 눈웃음 한 번에 재가 되어 흩어진 적 있음을 안다.

하라는 마법 연구는 안 하고 히나의 목소리를 귀로 듣게 할 마법 물품을 만들겠다며 보름 넘게 밤을 새다가 바로 그 히나의 손에 검시되기 직전까지 갔던 일을 안다.

어떻게 해야 야근하지 않을지를 토론하다 사흘 밤낮동안 퇴근 안하고 결론을 못 짓는 바람에, 그 말 들은 칼리안 손에 영원토록 퇴근하지 못하게 될 뻔했던 놈들임을 안다.

여러 말 필요없다.

놈들은 그냥 전부 다 또라이다.

예전에는 마법사만 그랬는데 이젠 다 그런다. 기사고 마법사고 할 것 없이 삶에 대한 만족도가 하늘을 찌르는 또라이들이 됐다. 오죽하면 전서구가 아직도 여기 남아있을까.

"그런데 부군단장님."

"왜."

"저희 입 다무는 대신 소원 하나씩 얘기하라 하셨잖습니까. 다른 사람한테 자랑하는 소원은 안된다 하셨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카이리스에서 제일 잘 나가는 또라이들만 모아놓은 것 같긴 해도 어쨌거나 명색이 군인인지라. 놈들은 베른의 모습을 보았던 일에 대해 함구하라는 플란츠의 명을 잘 듣기는 했다.

"오늘 일 수련장 벽에 그림 그려 남겨두는 것도 안되고 적어두는 것도 안된다고 그러셨지 않습니까."

"될 걸 말해."

"세뉴강 바닥에 새겨놔도 안되고 불꽃 만들어서 하늘로 쏴도 안되고······."

"우유 못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

"열 바퀴 달리고 오겠습니다, 부군단장님."

듣기만 잘했다는 문제가 좀 있었다.

니들렌 말고 하나 더 있는 분홍 머리 마법사가 곧바로 수련장 안을 달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던 플란츠가 인상을 가득 찌푸렸다.

"그래서 저희가 생각을 해봤습니다, 부군단장님."

마법사 놈 보내고 났더니 기사 놈이 나와 자연스레 이어 짖기 시작한 까닭이다. 마치 처음부터 한 놈이었다는 것처럼.

그리하여 잠시 뒤.

마법사 둘에 기사 넷이 마치 한 몸처럼 발맞춰 뜀박질하는 꼴을 지켜보던 플란츠가 말했다.

"돌리지 말고. 그냥 말 해."

이상한 소원들 들고 나와 괜히 저 사이에 껴서 달리기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 하라고.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해."

제발 그냥 말 해.

이런 간절한 뜻이 가득 담긴 무표정한 연두색 눈을 보던 여든 명이 슬그머니 웃었다. 그리고 진짜 소원 하나를 말했다.

"칼리안 왕자님 다 낫고 나서, 저 모습일 때 저희와 대련 한 번 해 주시면 안 됩니까."

"하필 왜."

대체 어떻게 여기 날아들었는지 제대로 본 사람은 없었어도 아무튼 좀 많이 멋있었단다. 그래서 한 판 붙어보고 싶어졌단다.

"아, 당연하겠지만 하나 대 하나의 싸움 여든 여섯 번 해봐야 방법 없을 것 압니다. 그래서 칼리안 왕자님 한 분께 저희 여든 여섯 명 전부 다 한꺼번에 덤비면 어떻게든 상대가 되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비겁한데 당당하네."

"각자의 수준을 잘 아는 겁니다, 부군단장님. 그래봐야 못 이길 것도 압니다, 부군단장님. 그래도 한 번 덤벼보고 싶습니다, 부군단장님."

의외로 군인답고 생각보다 용감하고 익히 알던대로 미쳐있는 놈들의 말에, 플란츠가 느릿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각양각색의 눈들을 다시 한 번 하나하나 쳐다봤다.

"못 이기는 게 아니라. 죽을 텐데."

진심이었다.

법이 있어서 사람 못 죽이는 것 같은 놈의 그 눈을 마주보고 싸울 마음이 든다니 신기하긴 한데 싸웠다가는 쟤들 죽을 것 같다. 키리에는 본래 나이라 말해줬지만 내 눈에는 도무지 내 동생 나이로 안 보이는 놈의 그 등짝을 보고도 호승심이 든다니 대단하긴 한데 싸웠다가는 쟤들 죽을 것 같다. 맨주먹으로 사람 자를 것 같은 놈 손에 칼까지 들려 줄 생각이 든다니 존경스럽기는 한데 싸웠다가는 쟤들 전부 다 죽을 것 같다.

"안 죽는 건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부군단장님."

"치료실 모자라."

"안 모자라게 숫자 맞춰 다치겠습니다."

그랬다가는 내 동생 히나 앞에서 정말 무릎꿇고 손 들고 있어야 될 지도 모른다.

"부군단장님. 아니, 저하."

"안돼."

무엇보다.

베른의 모습으로 발칸을 상대한다니.

그랬다가는 문드러진 그 속이 또 썩을 거다.

"다른 것 생각해 와."

단호하게 거절한 플란츠가 등을 돌렸다. 사람 말이 계속 안 들리니 이곳에 더 있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탓이다.

"재밌겠는데, 왜요."

그런데 낮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올려다봤던 곳. 란델의 방문 덕에 이제껏 침묵에 빠져있었을 곳. 그런 곳의 창문가에 누군가 서 있었다.

백금 도료로 칠해진 호사스런 창틀에 팔을 대고 기대 있던, 검은 후드를 푹 눌러 쓴 동생 놈이 플란츠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 너, 지금."

"제가 벌인 일이니까 저 소원도 제가 들어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형님이 아니라."

후드로 얼굴을 다 가린 바람에 더 도드라지는 붉은 입이 긴 호선을 그린다. 이미 풀린 목줄을 슬그머니 감춘 채 철창 안에 앉아있던 맹수가, 삐걱거리며 열리는 철창 문을 보며 지을 법한 그런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다 나으면. 하겠습니다."

사납게 그르렁댔다.

* * *

완두콩 키우던 땅 옆에 옥수수 하나를 더 심었다.

이번에는 대체 어떻게 자라는지 한 번 보자 하는 마음으로 심었다.

그렇게 길러낸 옥수수수염도 뻣뻣하면 내가 진짜 두 번 다시 농사 안 지을 거라고. 다 집어던지고 스승님 따라 남쪽 가서 레이븐 키우면서 살 거라고. 루시는 아무래도 형님 옆을 제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루시는 루시 좋은대로 하라 하고 형님 옆에 계속 두면 내 애가 다 끊어질 것 같아서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은 생때같은 우리 히나 데리고 같이 내려가서 맨날맨날 딸기 아이스크림 사 주고 키리에랑 에일라랑 같이 코코넛 속이나 빨아먹다가 얀한테 하모니카 가르쳐주고 드미레아네 집 뒷마당에서 일도 열심히 하면서 살 거라고.

그런 마음으로 부득부득 심었다.

그렇게 해 놓고 나니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것도 같고 오히려 시원한 것도 같은 생각이 들어 창가에 섰다. 완두콩 목소리가 들리기에 내려다봤더니 흥미진진한 도전장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이 어느때인가.

오는 싸움 안 막고 안 오려던 싸움 먼저 걸고 없던 싸움 만들어 치르던, 떠올려보면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내 생애 가장 화려했던 질풍노도의 시기 아니던가.

그래서 거절않고 그 도전장 잘 받았다.

지닌 바 얼굴 값을 해야 올바른 사람이자 건실한 어른이라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그러니 나는 정말 다 컸구나 그런 환경에서도 참 잘 컸다 대견하다 해 가며 스스로를 매우 칭찬해주고 있었다.

"아주 그냥 무덤자리 여든 일곱 개를 파 두시지요."

그러다 이렇게, 등짝 맞는 것 같은 말을 들었다.

반가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니 세상 어느 때 만나도 그저 기쁘고 좋기만 할 사람이 서 있었다.

"스승님!"

"저 놈들 여든 여섯 명 묻어두고 저도 같이 옆에 누우면 딱 맞겠습니다."

"와, 이렇게 반겨드리는데 안 좋아하십니까. 얼굴 바뀌었다고 사람 차별하고 그러시면 저 서럽습니다."

너스레 가득한 말에 슬쩍 웃은 앨런이 침대를 가리켜보였다.

"이리 와 눕기나 하시지요. 그러다 영영 그 모습으로 지내셔야 될 판이니."

상처 더 벌어질까 걱정하여 하는 소리임을, 익숙하지 않을 예전 몸으로 싸운다며 나서다 또 다칠까봐 하는 소리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로 와 걸터앉은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아델리아는, 만나보셨습니까?"

"그보다. 란델 왕자가 이곳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이렇게 물어오는 앨런의 얼굴에 또 걱정이 한가득이라.

"괜찮습니다. 가려뒀던 커튼 잘 들춰내고 마주보고 얘기했으니 걱정하실 일 아닙니다."

"······ 그래요."

들키는 것은 일상이라 이제 더 할 말도 없다. 그냥 그러려니 한다. 더 들킬 곳이 이제 거의 다 사라지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진 것도 같다.

그 덕에 차분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앨런에게, 칼리안이 란델과 있던 이야기를 전해줬다. 무슨 말을 나누었고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대답을 들었는지. 하나하나 전부 다 일러주었다.

오래 전 언젠가의 앨런은 그리 들어 보았을, 하지만 언젠가의 칼리안도 해본 적 없던 그런 일. 부모의 눈이 닿지 않는 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려주는 그 소소한 일. 그런 일을 이제야 했다.

앨런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더는 흔들리지 않는 연보랏빛 눈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제 하나 더 얻게 되셨다 하니 축하드릴 일이겠지요."

"네. 축하 받을 일 맞을 겁니다. 형제도 생기고, 잘 하면 도움도 크게 될 테니까요."

이 말에 앨런의 날카로운 눈이 잠시 가늘게 변했다. 그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어렵다는 듯 입을 열었다.

"텐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허나 텐실은, 아무리 대사막과 손을 잡았다 한들······."

이렇게 이야기하던 앨런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창 밖의 하늘을 보다 다시 칼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말 뜻을 알아들은 앨런에게 씩 웃어보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텐실.

세렌티의 힘을 얻지 못해 추락하기만 하던 그 나라가.

"세렌티가 깨어납니다, 스승님."

과연 앞으로도 여전히 나약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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