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장. 고양이가(4)
낯선 사람이 둘이다.
이 자리에 있는 것부터 이상한 완전히 낯선 사람이 하나, 그보단 조금 덜 낯선데 그래서 더 이상한 사람이 또 하나.
서베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테일란.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가 되어 서 있는 칼리안.
"함구해."
그 둘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소라 껍데기 받던 경험 적은 어린애 말고, 세상 모든 것을 발치에 둔 왕자 말고, 이곳에 모여들었던 군인들의 상관으로서 침묵을 명령했다. 사정을 궁금해하지 말고 머릿속에 담아두지도 말라 했다.
내 사람들의 이해를 구하지 않고 입을 다물리는 일.
그것에서 세레누스 향을 맡을 칼리안은 절대로 하지 않을 일. 하지만 베른과 에일라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플란츠는 할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했다.
"대신, 원하는 것 하나씩 들어 줄 테니까."
다만 실리케에게 명령하는 법을 배운 것처럼 히나로부터 세상에 공짜 없다는 것도 똑같이 잘 배운 터라. 배운 것 잘 써먹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플란츠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 내 선에서 해결 가능한 것으로 말해."
물론 칼리안이 강조했던, 거래를 할 땐 조건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잊지 않았다.
소드마스터와 소드마스터 언저리에 닿은 대단한 검사들의 대련을 공짜로 견학하다가 둘 사이에 끼어든 소드마스터가 큰 사고를 막아내는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더해 또 한 명의 소드마스터가 유성처럼 나타나는 생애 두 번 없을 진귀한 광경이 펼쳐진 자리에 바로 내가 있었던 경험을 하게 된 여든 여섯 명의 발칸 대원들이 환호했다.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보던 키리에는 생각했다.
이 자리에 아르센이 없어 다행이라고.
만약 아르센까지 있었다면 '오늘 겪은 일 딱 한 명한테만 자랑하고 싶습니다' 라는 소원 여든 여섯 개와 '제 소원 아시잖습니까' 라는 한 개의 소원이 접수되었을 테니까.
"다친 곳은 없나."
어느새 키리에의 곁으로 다가온 이가 이렇게 물었다.
시오나보다 오러를 다루는 것에 더 익숙한, 때문에 키리에의 공격을 적당히 분산시키며 둘에게 해가 되지 않을 만큼 오러를 뻗어 되받아치는 것으로 키리에와 시오나를 함께 구해 낸 사람.
테일란 카스트린이었다.
"덕분에 괜찮습니다."
"그래."
"그나저나, 머지않아 검의 길에 오르겠더군."
"그것이 오러가 맞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라면 내가 나설 일이 있었겠나."
이 말에, 키리에는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일란이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기억이 나나?"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 내보낸 것인가?"
"네. 처음입니다."
"처음 겪는 일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담담한 얼굴인데. 칼리안 왕자님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고."
"아닙니다. 기쁩니다. 다만, 조급해하지 않으려 참고 있습니다."
"조급해하다 길을 놓칠까 경계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테일란의 대답이 곧바로 이어졌다.
"오러를 다루는 법은 오로지 스스로 익힐 수밖에 없다. 그런 말은 질리도록 들어봤을 테지."
"네. 들어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검의 길에 오르는 일과 심장의 서클을 늘리는 일이 서로 다르다 하지만 내가 보았을 때 사실 둘은 썩 비슷하네. 마력을 어떻게 다루고 어떤 방법으로 계산을 하고 서클을 어떻게 만드는지는 알려줄 수 있지만, 서클을 늘리기 위한 벽은 스스로 깨우침을 얻지 않으면 넘지 못하거든. 검의 길에 오르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어떻게 검을 잡고 휘두르는지, 팔과 다리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것을 알려 줄 수는 있지만 오러를 만들어 다루는 방법은 스스로 익혀야 하니까. 깨우침을 얻어 서클을 늘리든 아니면 검의 길에 오르든. 그것은 오로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지."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
잠시 수련장을 둘러보던 테일란이 말을 이었다.
"처음으로 오러를 발현한 뒤에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온전히 깨닫게 되기까지, 나는 4년이 걸렸네. 그토록 검을 휘둘러도 깨닫지 못하다가 천둥 번개가 가득하던 어느 밤에 예고없이 불현듯 깨달았네. 돌아가신 내 스승님은 풍랑에 좌초된 배 위에서 죽어가다 검의 길에 오르셨지. 오러를 발현한 뒤 7년 뒤의 일이었다 하셨네."
4년, 7년.
지금의 제 나이에 그 숫자를 더해보는 키리에의 귀에 테일란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물론 다른 경우도 있네. 지그프리드 공은 대련 중 날아오는 창을 막아내다 오러가 발현되어서, 창의 주인을 지키려다 오러 다루는 법을 함께 깨달았다 하였으니까. 오러를 처음으로 발현한 날에 검의 길에 오른 것이네."
"그렇습니까."
"그래. 그리고 또 하나. 그레이 브리센이 죽은 제 조부의 무덤을 파헤쳐 본 뒤 검의 길에 올랐다는 소문이 있었네. 그 안에서 무엇을 보고 검의 길에 오르게 되었는지는 물론이거니와 무덤을 파봤다는 그 말이 사실인지조차 알 수 없는 일이네만. 어쨌건 그런 경우도 있었지."
키리에의 시선이 테일란에게 가 닿았다.
"그러니 조급하면 조급한대로, 아니면 아닌대로, 깨달음을 얻는 방법은 여러가지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야. 결국 언젠가는 자네도 검의 길에 오르게 될 테니 스스로를 지나치게 옭아매지는 말라는 뜻이네. 한 걸음 더 성장을 했으면 기뻐하기도 해야지."
"······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테일란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키리에의 어깨를 살짝 붙들었다.
"칼리안 왕자님이 쓰시는 힘은 나의 것과 달라. 사실 다른 모든 소드마스터와 다르다 해야 맞겠지. 그분의 힘은 오러이기도 하지만 마력이기도 하네. 둘을 융합해 사용하는 바람에 그 색깔 만큼이나 성질도 순수한 오러와는 다르지. 그래서 칼리안 왕자님은 자네에게 이것을 직접 알려주지 못했을 것이네만."
말을 멈춘 테일란의 손 끝에 푸른 빛이 일렁였다. 그 빛이 키리에의 몸 속으로 고요하게 흘러들었다.
한 여름에 찬 비를 맞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곧, 지치고 갈증난 어느 오후에 찬 물을 들이킨 듯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몸 안으로 흘러 들어와 움직이는 힘.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진짜 오러가 그렇게 이곳 저곳으로 밀려가다 돌아오고, 몸 속을 감싸안기도 하고 넓게 펼쳐지다 다시 모여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을 머무르던 힘이 다시 밖으로 나가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러의 기운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어떻게 활용하는지, 그것을 직접 느끼게 해 준 것이다. 검의 길에 오르는 방법을 알려줄 수는 없지만 어딜 보고 걸어야 하는지는 알려줄 수 있으니까.
"이것을 오러라 하네. 이런 기운을 만들고 다스리는 이들을 소드마스터라 부르는 것이네. 그 느낌을 잊지 않고 되새긴다면 자네에게 조금쯤은 도움이 될 걸세."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자신의 오러를 다시 회수하여 흩어낸 테일란이 키리에를 쳐다봤다. 조금 놀란 얼굴을 한 키리에가 잠시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숙였다.
"······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까지야 있겠나. 덕분에 나도 이런 걸 알려주는 일을 해봤으니 서로 좋은 셈이지."
지금의 제자는 어디 가서 쉬이 죽지 않을 만큼만 검을 배워갔다. 기억나지 않는 언젠가의 제자에게는 더 이상 뭔가를 가르칠 것이 없었다. 그러니 옛 제자의 제자에게라도 알려주지 않으면 아마 평생동안 써먹을 일이 없을 듯 하여서.
이런 이유로 키리에에게 대신 가르침을 건넨 테일란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칼리안 왕자님께서 왜 그런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계셨는지, 혹시 나 역시 함구하고 궁금증을 접어 두어야 하나?"
"아닙니다. 칼리안 왕자님께서 카스트린 경에게는 설명을 해 주실 겁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마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은 테일란의 오러를 다시 떠올리면서, 키리에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뒤 수련장 한 쪽에 마련된 휴게실로 테일란을 안내했다.
그리고 듣게 되었다.
"그런 매정한 말을 하면 어떡해, 드미레아."
휴게실 안에서 나온 목소리를.
또한 보게 되었다.
휴게실 창문 너머. 난리통에 어느새 찾아와 있던 드미레아를. 그 앞에 무릎을 모으고 다소곳이 앉아있는 누군가를.
바다빛의 손수건으로 얌전히 머리를 올려묶는 그 누군가를 보던 키리에가 애써 고개를 돌렸다.
- ······ 덜그럭.
키리에는, 사는 동안 이렇게 소리죽여 움직인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아직 창문 안 쪽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카스트린을 향해 말했다.
"왕자님께 개인적인 급한 사정이 생긴 듯 해서······ 제가 대신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긴 침묵이 감돌았다.
* * *
칼리안이 창 밖으로 뛰쳐나갔다.
플란츠가 말없이 뒤따라 나갔다.
"왜 다들 멀쩡한 문 두고 창문으로 뛰어다녀? 이 나라 왕족으로 살려면 그 정도는 해야 돼?"
"아닙니다. 국왕 전하와 첫째 왕자님은 문과 계단 사용하십니다."
혼잣말이었는데, 대답이 돌아왔다.
분명 병문안을 온 것인데 환자와 보호자는 아침을 먹다 나가버렸다. 그 덕에, 환자의 친구이자 환자의 옛 형의 정혼자인 사람과, 환자와 그 환자의 옛 형과 그 옛 형의 정혼자에게 좋지 않은 짓을 했다던 환자의 따까리가 덩그러니 남았다.
피식 웃은 아리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하니 다행이네요. 환자고 환자 형이고 훌쩍훌쩍 나가서 걱정했는데요."
"네. 다행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아르센의 눈이 창 밖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밖이 걱정되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굉음이 있었다 하나 좋지 않은 일이라면 밖의 기사들이 알려 줄 터였다. 그런데 그 이상의 소란도 없었고 보고하러 들어오는 발칸의 대원도 없었으니 별 일 아니겠거니 여겼다.
다만 별 것 아닌 일에 아리안느를 혼자 두고 나갈 수는 없었으니,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빨리 수습을 마친 칼리안이 서둘러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창 밖을 살피는 것이었다.
"루이즈님은 잘 계십니까."
"잘 지내고 계세요. 예전보다 훨씬 더 좋아졌어요."
"네. 다행입니다."
코코라도 데려왔으면 덜 어색했을 텐데.
"왜 갑자기 내 눈치 봐요?"
아리안느와 단 둘이 남아 불편해하는 것을 기가막히게 눈치챈 아리안느가 먼저 말을 건넸다.
"눈치는 쭉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전하랑 연두색 저하랑 밥 먹을 때나 칼리안이랑 같이 있을 때에는 안 그러셨잖아요."
"아닙니다. 눈치는 계속 봤습니다."
"의외네요. 헤르츠 백작님은 안 그럴 줄 알았는데요. 티를 안 내길래 눈치도 안 보고 신경도 안 쓰는 줄 알았어요."
"신경을 안 쓰면 그게 브리센이지, 사람입니까."
아리안느가 웃음을 터뜨렸다.
"칼리안이 신경쓸까봐 신경 안 쓰는 척 하는 거예요?"
칼리안의 이름 뒤에 아무것도 안 붙는 것에 적응하려 애쓰면서,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네요. 주변에서 이렇게 신경을 써 주고. 아무튼 이 자리의 둘 중 한 명을 가해자라 할 수도, 또 다른 한 명을 피해자라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어차피 지금은 양쪽 모두 안 겪었고 앞으로도 안 겪을 일인데.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눈치 보지 말아요. 타박해야 할 것 같잖아요, 내가."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 아르센이 다시 창 밖을 봤다. 그러더니 언제 그렇게 어색했냐는 듯 반가운 얼굴을 만들어보였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칼리안과 플란츠, 그리고 드미레아가 이 곳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왕자님 돌아오고 계십니다."
"그러네요. 그런데 뒤에 저 분은 누구에요?"
"지그프리드 소공작입니다."
"아, 그렇게 멋지다던."
아르센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네. 멋진 분입니다."
기대하는 얼굴이 된 아리안느가 혹시나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살폈다. 그리고 잠시 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세 명이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리안느가 드미레아에게 눈 인사를 보냈다. 이미 이 곳에 누가 있는지 들어 알고 있던 드미레아가 작게 고개를 숙여 화답을 보냈다.
간단한 말로 서로를 소개시킨 칼리안이 아르센을 쳐다봤다.
"헤르츠 경."
"네, 왕자님."
"란델 형님께, 잠시만 와주실 수 있을지 여쭤봐줄 수 있겠습니까."
"란델 왕자님을 빌헬름 관으로 말씀이십니까."
아르센이 얼굴을 살짝 굳혔다.
란델을 꺼려한다는 것을 아는 칼리안이 웃으며 덧붙였다.
"란델 형님이 여기 오시는 것 싫으면 그냥 내가 가고."
"아닙니다. 얘기 전하겠습니다."
살랑거리는 청은발을 나부끼며 체르밀까지 가는 꼴을 보느니 란델이 여길 다시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낫다.
재빨리 대답하는 아르센을 보며 웃은 칼리안이 한 가지 말을 더했다.
"그리고 일주일 쯤 뒤에 며칠 다녀 올 곳이 있으니까. 준비해요."
"일주일 뒤에 말씀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검은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휘트린에."
"휘트린에 가자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다녀올거예요, 내가."
"그럼 저는 무슨 준비를 합니까?"
손수건으로 묶은 탓에 다시 흘러내린 머리를 고쳐 묶던 칼리안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옆에 선 한주먹만한 완두콩을 살짝 내려다보며 말했다.
"형님, 같이 가실 거라서. 형님 사라져도 안 놀라고 혼자 일할 마음의 준비."
아······ 그런 준비.
아르센이 긴 한숨을 쉬었다.
* * *
테일란 카스트린이 찾아왔다.
칼리안을 만나겠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서, 대신 키리에를 먼저 만나겠노라 했다. 빌헬름 관에서 드미레아와 함께 있던 히나가 안내를 자처했다. 그리고 드미레아를 잠시 자신의 집무실에 남겨둔 채 테일란을 데리고 수련장으로 왔다.
키리에와 대련 중이던 시오나가 히나를 봤다.
두 남매의 어머니, 그리고 시오나의 친구이자 그 방울의 주인인 이를 떠올렸다. 착각을 했다. 제 목을 향해 치닫는 키리에의 검을 목전에 둔 채로.
- 괜찮아요?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목소리를 전해주는 신기한 구슬. 그것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꾹 들어가려는 것을 가까스로 멈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 우리 오빠 얌전해보여도 손이 매워요. 기사들이 예전에는 자상한······ 아니. 칼리안 왕자님한테 다쳐서 왔었는데 요즘에는 매일 매일 오빠한테 다쳐서 오거든요. 다친 곳 정말 없어요? 살펴봐주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다시 한 번.
구슬에 힘이 가지 않도록 조심해가며 주먹을 말아 쥔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잊어버린 것 같은데 나도 소드마스터라고, 오러도 안 든 검에 다치면 검의 길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솔직히 마지막엔 조금 위험했지만 아무튼 괜찮다고. 그런 말을 하는 대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시오나의 긴 귀에 매달린 은빛의 링, 그것에 반사된 햇빛이 오트밀 쿠키 색 벽에 작은 빛무리를 만들었다. 자신의 끄덕임에 따라 함께 움직이는 빛을 보던 시오나가 문득 히나의 귀를 바라봤다.
어린 키리에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던, 키리에보다도 더 어린 생명의 모습이 떠오른다. 순수하리만치 깨끗한 빛의 백은발과 그 사이로 삐죽이 튀어나와 쫑긋거리던 뾰족하고 긴 귀를 떠올린다.
그래.
분명 귀가 길었었는데.
- 귀를······.
상대방에게 입이 아닌 머릿속으로 목소리를 전해주는 물건을 써 보았던 적이 없던 탓에, 저도 모르게 흘러나간 말이 히나에게로 전해졌다.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을 자신의 귀에 손을 가져갔다.
- 제 귀요?
그것을 본 시오나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던 자신의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다시 재빨리 열어 말을 전했다.
"미안하다. 생각한 것이 나도 모르게 나와서."
무뚝뚝한 말투. 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다만 그 말을 하는 얼굴은 무뚝뚝하지도 않았고 건조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시오나가 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잘 알아들은 히나가 미소를 보였다.
- 속상해하지 않아도 돼요. 아쉽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다시 끄덕끄덕.
시오나가 고개를 움직였다.
- 잠시만요.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히나가 집무실 구석으로 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작은 쟁반에 차 두 잔을 올려 가지고 왔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시오나의 머리 색을 많이 닮은 차가 담긴 잔이 시오나의 앞에 놓였다.
- 아마란스 꽃으로 만든 차에요. 마나실 군단장님이 주신 건데, 햇빛 받은 바위에 앉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포근한 맛이 나거든요.
시오나의 금빛 눈이 찻잔을 향했다.
햇빛 받은 바위에 앉아있는 듯한 맛이 무엇일지, 포근한 맛이 무엇일지, 그것을 궁금해하는 대신 잠시 눈을 감았다.
'시오나, 이거 엄청 좋은 소리가 나.'
'딸랑딸랑. 그냥 방울이잖아.'
'아니야. 새끼 여우들이 장난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 모르겠는데.'
'그래?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
'어리기는.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농담이야. 하나 가져가서 들어봐. 잘 들어보면 들릴 거야.'
'이걸 어디다 써. 난 됐어.'
'프레이야가 너랑 하나씩 나눠 가지라고 준 거야. 그러니까 쓸데없어도 버리지 말아.'
딸랑딸랑.
아무리 들어도 새끼 여우들이 장난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진 않아서. 늘상 듣다 보면 혹시나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을까. 그런 생각에 매일매일 하루에도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들어왔지만 아직도 모르겠어서. 그래서 여전히 떼어놓지 못하는, 어디에도 쓸데없는 방울 소리.
분홍 빛의 차에서 그 방울 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 들어서 잠시 그렇게 눈을 감았다.
차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고개를 조금 숙인 시오나를 보던 히나가 작은 웃음을 지었다.
- 차 그렇게 안 뜨거워요. 드셔보세요.
"그래."
조용히 대답한 시오나가 찻잔을 들어 맛을 봤다.
햇빛 받은 바위에 앉아있는 듯한 맛은 나지 않았다. 포근한 맛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맛도 나지 않았다.
대신 호밀빵을 입안 가득 집어넣고 씹어 삼킨 뒤의 맛.
그런 맛이 났다.
- 마음에 드세요?
"······ 그래."
그리 즐겨하지도 않는 차를 한 입에 쭉 마시고 내려놓은 시오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히나의 얼굴을 쳐다봤다. 반갑고 미안하고 그립고 서글픈 마음이 한꺼번에 다 밀려오는 것 같아서 다른 말은 하나도 못하고 그저 보기만 했다.
히나의 웃음 끝에 방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서툰 말도 더 못 하고 그 소리를 눈으로 좇듯 계속 그렇게 쳐다보기만 했다.
그런 시오나를 바라보던 히나가 잠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굳은살 가득한 시오나의 손을 쳐다봤다. 편지를 전해줬다던 그 손을, 어린 키리에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던 그 손을, 히나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던 그 손을, 먼지 가득한 제 옷 속에서 가진 돈을 전부 꺼내 건네줬다던 그 손을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히나를 보는 것인지, 그 너머에 살았던 누군가를 보고싶어하는 것인지 모를 시오나를 마주 바라봤다.
- 히나라고 해요.
길 잃은 밤을 지새우고 비로소 맞이한 새벽 여명같은 목소리. 어떤 걱정도 다 내려놓게 만드는 편안한 목소리. 무지개 한 웅큼을 설탕물에 풀어낸 것 같은 예쁜 목소리.
그 목소리가 시오나를 불렀다. 제 이름을 알렸다.
- 히나 베른. 그게 제 이름이에요. 덕분에 알게 된 이름이에요. 엄마 편지 전해주시지 않았으면, 오빠에게 한 달치 빵 값을 주시지 않았으면, 그런 이름은 세상에 없었을 거예요.
시오나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뚝 떨군 채 가만히 끄덕였다.
히나의 말이 이어졌다.
- 저희는 잘 지냈어요.
휘트린.
휘트린······.
그 방울에서는 새끼 여우가 장난치는 소리 같은 건 안 나.
아무리 들어봐도 그런 소리는 안 나. 나는 이제 너보다도 훨씬 더 나이가 많아졌는데. 그렇게 오래도록 들어봐도 여전히 그 소리는 안 나.
- 고맙습니다.
호밀빵 냄새 같은 소리만 나.
내 귀에는 그런 소리만 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