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88화 (389/527)

제69장. 고양이가(3)

잠깐만, 드미레아.

내가 설명을 할게.

그래. 여기 칼 꺼내도 괜찮은 수련장인 것 나도 잘 아는데 그래도 우리 잠깐 대화 좀 하자. 지난 번에도 말했지만 나 그런 것 변명하고 그러는 비겁한 사람은 아니잖아.

지금 이건 변명하는 게 아니라 설명을 하는 거야. 변명이랑 설명이랑 둘이 어감은 좀 비슷해도 되게 차이가 크다니까. 그러니까 내가 잠깐만 설명을 할게.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들어 줄 수 있잖아. 혹시 우리 사이 어떤 사이인지 또 까먹었어?

실수로 정혼했던 남보다 못한 사이라니. 그런 매정한 말을 하면 어떡해, 드미레아. 설마 생긴 것 바뀌었다고 마음도 바뀐 거야?

응······ 미안.

머리 많이 거치적거리지.

내가 얼른 다시 묶을게······ 잠깐만.

자. 드미레아. 이것 봐봐.

나 이렇게 보이게 만들어 주는 건 이 팔찌고 내 스승님이랑 연락하려고 나눠 가진 건 이 팔찌고 이 팔찌는 에일라랑 연결된 거야. 지금 내가 차고 다니는 팔찌만 벌써 이렇게 세 개야. 잘 어울리지?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평소에 쓸 때에는 별 문제가 안 되는데 사람이 급하니까 좀 헷갈리고 그러더라고.

창문은 흔들리고 밖에선 난리가 났잖아. 심지어 에일라한테 그런 일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그 일 생긴 뒤로 첫 밥 먹다가 그런건데 그럼 내가 당연히 놀라지 않겠어? 그 상황에 그래도 내가 팔찌를 풀었어. 내가 우리 히나가 절대 풀지 말라고 한 것도 어기고 너랑 했던 약속 안 어기려고 팔찌를 찾아 풀었다니까.

그것 참 대견하지.

아니.

잘했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냥 그랬다고.

아무튼 팔찌를 풀었어. 그러고선 창문 열고 뛰었지, 내가.

내가 빌헬름 관에 안 온지 오래라 여기 치료실이 새로 생긴 것도 몰랐고 거기 위치가 어디인지도 정말 몰랐어. 뛰고 보니 발칸 놈들 바글바글한 수련장 앞인 줄 알았으면 안 뛰고 계단으로 얌전히 갔겠지.

그런데 좀 이상하더라고. 뛰고 났는데 몸도 그대로고 머리도 그대로고 마법사 놈들은 신기해하고 기사 놈들은 칼 빼들려다 참는 것 보니까 뭔가 좀 잘못됐구나 했어. 그런데 어쩌겠어. 이미 늦었잖아.

응······ 알아.

당당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야······.

아무튼 그렇게 된 거야.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그리고 이렇게 발칸 놈들 앞에 다 보였긴 해도 놈들은 내가 왜 이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몰라. 진짜야. 정말 몰라. 여기 놈들 생각보다 입 무겁잖아. 그러니까 이 일에 대해서 막 그렇게 말이 퍼지지도 않을 거고, 혹시나 얀이 안다 해도 이상한 쪽으로 의심하거나 눈치채지는 않을거야. 너도 알잖아. 얀인데.

아니, 아니, 아니.

얀 욕한 것 아니야. 내가 얀 눈치가지고 막 놀리고 욕하고 그럴 사람이야? 그건 아니잖아.

사람이 말을 입으로 해야지 왜 칼로 하려고 그래.

그럼 못 써, 드미레아.

······ 그래. 내가 할 말이 아니긴 하지.

그러게 시오나는 왜 싸우다 말고 한눈을 팔아서 이 사달을······ 그래. 이것도 내가 할 말 아니구나.

알았어, 드미레아.

입 다물고 얌전히 있을게.

* * *

변장한 것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숨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칼리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곳에 대륙의 소드마스터가 전부 모였다는 얘기가 되는데."

대륙의 첫 번째 검, 테일란 카스트린에 대한 말이었다.

에반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안이 새로이 받아들였던 인재. 칼리안이 성인식 로젤리타를 떠나있던 동안 만났다는 세크리티아 세작 출신의 검사. 에일라 브리지트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분을 르메인이 직접 만들어주었던 검사.

"그 검사와 칼리안을 브리센 후작의 아들이 공격했던 일 때문에, 테일란 카스트린이 이곳에 온 사실을 더 숨기지 못하고 나에게 알리는 것인가."

"네. 맞습니다, 전하."

"그런 일이 없었다면 나는 그가 돌아갈 때까지 제대로 된 정체를 몰랐겠군."

"그러셨겠지요."

에일라와 칼리안이 라시드에게 공격을 당했다.

라시드의 배후에 계속하여 칼리안을 공격해오던 모종의 집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때마침 아리안느의 호위로 테일란 카스트린이 왔다. 서베인 쳄버만이라는 체이스의 기사로 변장한 채로 말이다.

상황의 흐름에 따라 테일란의 도움이 필요해질 지도 모르게 되었으니, 앨런은 아리안느의 호위로 온 '서베인 쳄버만'이 사실은 '테일란 카스트린'이었음을 더 숨기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르메인에게 뒤늦게 내용을 알리는 중이었다.

잠시 침음한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이 일을 진작에 알았던 모양이군. 칼리안이 돌아오기가 무섭게 그 자를 왕궁에 데려다 두었으니."

"전하께서는 모르시는 편이 나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렇게 내가 모르는 일이 이미 여럿이겠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만. 없지도 않습니다."

"나보다는, 왕국과 칼리안을 위해서일 테고."

"칼리안 왕자님과 대륙을 위해서라 해야 맞을 일이지요."

"그렇게 나를 속이고 내 눈을 가리는 모습이 일견 브리센이 했던 짓과 다를 바 없이 여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봤는가."

"그리 여겨지십니까."

르메인이 앨런을 쳐다봤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였으나 그 속에 든 것은 조금도 부드럽질 않아서. 무어라 대답을 할까, 그렇게 잠시 생각하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지."

"네. 전하."

"그렇게 숨기고 내어놓지 않는 것은 내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어서인가, 아니라면 알기 위한 자격이 없어서인가."

"둘 다입니다."

칼리안이 바뀐 일, 칼리안과 체이스의 관계, 제온에 대한 일, 소드마스터를 이 땅에 불러 온 진짜 이유,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 그 모든 것에 대해 답을 전했다. 알 필요도 없고 자격도 없다고.

"괜찮겠다 여겨지는 날이 온다면. 그 때에는 낱낱이 알려 줄 생각은 있는가."

"있습니다."

거짓 없이 답한 앨런의 눈이 고요한 빛을 냈다.

다시 한참동안 그런 앨런을 마주보던 르메인이 말했다.

"죽기 전에는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군."

앨런이 소리없이 웃었다.

그리고 설탕에 절인 제비꽃 하나를 손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설탕의 단 맛.

그리고 제비꽃 향이 입에 퍼진다.

번지르르한 생김에 비해 식감도 썩 좋지 않고 그리 맛있지도 않은 값비싼 디저트. 그것을 달게 삼킨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거짓 섞이지 않은 답을 전했다.

* * *

바람이 불었다.

히나가 좋아하던 그 어느 봄 날.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잔뜩 널린 빨래들을 흔들어두던 것과 같은 바람이 사분사분 불었다. 가벼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괴롭히려 들었다.

그 바람에 흐트러지지 않도록, 물빛 머리를 한 데 모아 낮게 묶고 있던 키리에가 앞을 쳐다봤다.

- 딸랑······!

잊지 않고 기억해두었던 소리, 세크리티아 왕궁의 가문비나무 아래에서 한 번을 들었던 소리. 그러나 전부 다 모르고 넘어가기로 했던 방울 소리.

마주 대하고 있던 검의 끝자락에서 그 소리가 났다.

"그 왕자가 생각보다 잘 가르쳐 둔 모양이군."

검고 푸른 눈이 검 끝의 방울에 닿은 것을 안 상대, 시오나로부터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키리에를 향해 내리꽂혔던 검이 떨어져나갔다.

"검 맞대던 중에 한눈을 팔 정신이······ 다 있고!"

- 휘익!

- 카아아앙!

검을 회수하며 몸을 튼 시오나가 키리에의 허리 쪽을 베고 들어왔다. 키리에가 서둘러 몸을 움직여 시오나의 공격을 막는다.

다른 곳에 눈을 두어 미안하다는 사과 대신이라는 듯, 키리에의 검이 날카롭게 뻗어나갔다.

- 채애앵!

- 카가가각!

- 캉! 카아앙!

살짝 구부러진 시오나의 칼 끝이 잿빛의 검 모서리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렇게 방향을 틀어낸 시오나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검을 세워 공격을 막은 키리에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상대적으로 더 가벼운 탓에 살짝 밀려난 검을 옆으로 틀듯이 움직여 공격을 쳐냈다.

- 딸랑!

방울 소리가 어지럽다.

습관처럼 청력에 의지해 검을 휘두르던 키리에가 잠시 한 발을 물렸다. 그리고 살짝 눈을 깜빡이며 다시 집중한 뒤 발을 박찼다.

- 딸랑, 딸랑!

- 쉬이익, 카앙!

- 카가강! 캉, 카앙!

시오나의 얼굴에 웃음이 어린다.

어느새 하나 둘 주변에 모여 든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호기심 가득한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칼리안과 아직도 위 아래를 정하지 못한 자신의 검을 키리에가 잘 막고 있어서 웃는 것이 아니었다. 드미레아와 엇비슷한 수준의 검사가 또 있음을 알게 되어 웃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정말 많이 컸네.

그 어린 것이.

그런 생각이 들어서 웃었다.

- 카아앙, 캉!

테일란이 찾아오고, 앨런이 르메인의 집무실에 들었다. 그래서 시오나는 이제야 비로소 왕궁을 좀 둘러 볼 시간을 얻게 되었다.

왕궁을 구경할까, 아니면 지그프리드 공작저로 돌아갈까 하다 칼리안이 있다던 빌헬름 관으로 발을 옮겼다. 누구도 만나지 못하도록 출입이 제한되었다 하기는 하였으나 그냥 찾아갔다. 혹시 칼리안을 만나보지 못한다면, 이곳보단 '늑대 사냥꾼'으로 대사막에서 더 유명한 얼음 마법사 놈을 붙들고 싸움을 좀 청해볼까 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됐다.

'괜찮으시면. 대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 혹시, 너.'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거절 할 이유가 있나.

그 때 구해주려던 꼬맹이가 이렇게 커져서 다시 왔는데.

- 카아아앙!

시오나가 슈린츠의 별궁에 다녀오느라, 그 후에는 칼리안이 자리를 비우느라, 그 뒤에는 칼리안이 실종되었던 탓에 계속 미뤄졌던 만남. 그것이 이렇게 칼리안 없이 이뤄지고 있었다.

- 부웅!

머금고 있던 웃음을 지운 시오나가 허리를 숙였다.

선득한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지나친 잿빛 검이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어 다시 날아든다. 틀어 쥔 검으로 그것을 막은 뒤 올려친 시오나가 키리에를 향해 한 발을 다가섰다. 어느새 검을 회수한 키리에가 시오나의 앞을 막아선다.

- 딸랑······.

- 타앗!

- 카아아앙!

아래에서 위로 치고 들어오는 시오나의 검이 다시 막혔다. 잿빛 검을 비틀어 굽어있는 검과 제 검을 얽히게 한 키리에가 강한 힘으로 시오나를 밀어냈다. 반 보를 밀린 시오나가 자신의 검에서 힘을 풀었다 다시 내리쳤다.

잠시 중심을 잃은 검에 가해진 충격에, 살짝 밀려난 검날을 뒤로 보낸 키리에가 검 손잡이 끝으로 시오나의 손목을 가격했다.

둔중한 느낌이 든다.

그것을 안 키리에가 아주 작은 미소를 지었다.

시오나가 팔에 오러를 두르고 있었음을 알게 되어서.

- 휘익, 카아앙!

- 캉, 카앙, 카가가강!

훌쩍 뛰어오른 키리에가 시오나의 어깨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손목을 얻어맞고 한 쪽으로 기울었던 검을 들어 그것을 막은 시오나가, 검의 방향을 살짝 바꾸어 공격을 미끄러뜨렸다. 그리고 다시 검을 세워 재차 날아들 공격을 막으려다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조금 전까지 눈 앞에 있던 키리에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 쌔애액!

놀라고만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날붙이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재빨리 고개를 숙인 시오나가 오른쪽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잠깐 사이 시오나의 옆으로 움직여 검을 찔러들어가던 키리에가 다시 도약했다. 그리고 그대로 시오나의 검을 내리쳤다.

- 카아아아앙!

검은 가볍다.

움직임이 빠르다. 날렵하다.

시오나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리고 디디고 있던 발에 힘을 주었다. 얽혀드는 검을 쳐낸다. 다시 뻗어오는 검을 막는다. 공격을 보낸다. 막힌다.

- 카앙, 카아아앙!

키리에에게 막힌 검에 힘을 주어 밀어냈다. 그리고 회수한 검을 틀어 횡으로 가른다. 그 검 끝이 키리에의 잿빛 검에 여지없이 막혀들었다.

- 휘익!

키리에가 다시 검을 보냈다. 굽지 않은, 곧은 면의 검날로 그것을 강하게 쳐낸 시오나가 휘어진 검 끝으로 다시 한 번 키리에의 검을 잡아당겼다 풀어냈다. 꼼짝 않는 듯 보였으나 그것이 향하려던 방향이 미세하게 바뀌었음을 시오나는 안다.

- 카앙, 카아앙!

- 카아아앙!

검을 건네고 돌아오는 검을 막는다.

이제 곧 대련의 끝이 나리라 예상한 발칸의 사람들이 숨을 죽인다.

- 딸랑······!

방울이 흔들린다.

시오나가 검을 뻗었다. 키리에가 막았다.

거세게 내리친다. 키리에가 막았다. 허리와 어깨를 동시에 노리며 달려든다. 키리에가 막았다.

- 자박, 자박.

작은 발소리가 들린다.

조용한 관중 사이로 두 명이 들어오는 것이 시오나의 눈에 보인다. 두 명이 들어온다. 그런데 한 명의 기운만 느껴진다. 다른 한 명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그것이 거슬린다.

방울이 흔들린다.

키리에가 검을 뻗었다. 시오나가 막았다.

높이 도약하여 내리찍듯 검을 보낸다. 시오나가 막았다. 재빨리 방향을 바꾼 키리에가 방어하지 않고 있는 쪽의 급소를 노린다.

그런데 시오나는.

키리에를 따라 움직인 시오나의 시선이 방금 전 들어온 이들에게 아주 잠시 닿았다. 거슬렸던 곳에 가 닿았다. 기척을 내지 않는 한 명을 봤다. 그러다 그 옆에 있던 이에게 눈이 닿았다.

백은발, 까만 눈. 그것을 보았다.

'휘트린!'

시오나의 눈빛이 흔들린다.

키리에의 눈빛이 흔들린다.

키리에가 팔에 힘을 준다.

시오나를 향해 뻗어내던 검을 비튼다. 되돌리기엔 그러나, 키리에의 검이 너무 빠르다.

- 딸랑!

방울이 흔들렸다.

시오나의 시선이 제 목을 향해 치닫는 키리에의 검을 본다. 잠시 잊고 있던 상황을 되떠올린다. 시오나가 고개를 비틀었다. 검을 들었다. 허공을 가른다.

- ······ 우우웅!

칼리안이 키리에가 지금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야기했던 이유. 키리에도 몰랐던 이유.

저도 모르게 발현된 오러.

그것을 다루는 법만 깨우치게 된다면 검의 길에 오를 수 있게 되는 힘. 하지만 아직은 그것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어떻게 해야 다시 풀어낼 수 있는지, 어떻게 조절하는지.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는 힘. 검의 길에 아직 오르지 못한 이의 서툰 오러.

그런 키리에의 오러를, 똑같은 오러를 뻗어내지 않고 막아 낼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이제 와 오러를 쓰면 키리에가 다친다. 크게 다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수많은 생각이 오간 찰나의 시간이 지났다. 생각의 끝에 결정을 마친 시오나가 검에서 손을 놨다. 온 몸에 오러를 둘렀다. 몸을 보호했다.

히나와 함께 수련장을 찾았던 테일란이 시오나를 보았다. 지금의 상황을 모두 보았다. 그리고 시오나 대신 몸을 움직였다.

- ······ 툭.

테일란이 발을 박찼다.

누구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 사이, 테일란의 검이 키리에의 앞을 막아섰다.

- 콰아아아앙!

폭음과도 같은 굉음이 울린다.

키리에의 검이 막혔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지금 일어난 상황을 모두가 채 받아들이기도 전에. 시오나를 공격하던 키리에의 검 끝에 일렁이던 빛을 떠올려보기도 전에.

- 타아악!

하늘에서 푸른 은빛의 별이 뚝, 떨어졌다.

테일란의 검에 막혀 튕겨나온 힘에 뒤로 쭉 밀려나는 키리에를 붙들어 세워놨다. 그렇게 이번에도 늦지 않고 내 따까리 내가 잘 구했다며 씩 웃은 놈이 신중한 손길로 키리에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다 보게 되었다.

아직까지 청은색인 긴 머리를.

놀람 말고 당혹감에 가득 물든 키리에의 얼굴을. 웅성거리다 숨을 삼키고 자신을 보기 시작한 수많은 미친놈들의 눈을. 키리에에게 닿아 있던, 굳은살과 흉터 가득한 자신의 손을.

순간 군신의 예를 보일 뻔 한 테일란의 놀란 표정을.

"음······."

상황 파악 덜 된 칼리안이 제 손목을 내려다봤다.

"······ 음."

분명 팔찌를 풀었는데, 내가.

왜 안 바뀌었지. 왜지.

그러다 조금 뒤늦게 뭐가 문제인지를 알게됐다. 있어야 할 팔찌는 사라지고 없어야 할 팔찌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싱긋, 하고.

낯선 얼굴이 자신을 향해 꽂혀있는 수많은 눈을 향해 멋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내가, 뭐.

뭐라고 해야 하지.

다들 알겠지만 체이스 형님이 한때 머리를 길렀었는데 그게 너무 멋져보여서 이왕 변하는 김에 그렇게 변했다고 말하면 믿어줄까. 그런데 왜 하필 그 모습이었느냐 물으면 뭐라고 하지.

아니, 그 전에. 내가 칼리안이 맞다는 것 먼저 말해야 하나. 다들 알고 있기는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말은 해야 하지 않나.

거짓말 못하는 머리가 가능한 빠르게 거짓말을 생각해보려 노력하기 시작했으나 별반 효과가 없다. 그러게 평소에 거짓말 좀 하고 살아볼걸 하는 후회를 해봐야 늦다.

아.

그냥 되게 아픈 척하면서 기절해버릴까.

- 저벅, 저벅.

그렇게, 후회와 자책과 자괴감에 깊이 빠져들어간 칼리안을 향해 누군가 걸어왔다.

"······ 내 아우님께서."

빠른 걸음으로 수련장을 찾은 이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 펄럭!

그리고 긴 청은발 위로 시커먼 로브 하나를 뒤집어씌웠다.

"마음이 급하셨는지. 겉옷을 내버려두고 나가셨는데."

캄캄해진 시야 밖으로 들려온 느긋한 목소리.

그것을 들은 칼리안의 웃음이 터졌다.

데굴데굴.

완두콩 왔구나.

동생 건져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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