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장. 고양이가(2)
칼리안의 입에서 흥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고기다.
고기 냄새가 난다.
갓 구운 빵 냄새, 싱그럽지만 별로 관심없는 풀 냄새, 고소한 내음 가득 머금은 스프 냄새, 몽글몽글 구운 양파 냄새, 잘 익은 감자와 버섯 냄새, 토마토가 든 듯한 스튜 냄새, 그리고······ 고기.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냄새. 굽고 삶고 쪄냈을 그것들이 풍겨내는 실로 감미로운 냄새. 그런 냄새들이 난다.
"맛있겠다."
커튼 너머.
아침 식사를 옮겨다 둔 시종들이 나간 것을 확인한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흥얼흥얼 신나는 소리를 냈다.
숨기는 것 못하는 남다른 재주 덕에 귀한 얼굴까지 홀랑홀랑 다 들켜버린 탓에, 더 거리낄 것 없어진 플란츠는 알아서 올 테고 플란츠 올 때 아르센도 분명 따라올 터였다. 거기에 더해 무엇보다 내 배가 매우 고프니 먹을 것 많이 있어야 된다고. 많이 먹을 거라고, 엄청 많이 먹을 거라고. 그러니까 고기 많이많이 달라고.
그렇게 주문하여 차려진 성대한 테이블이 저 커튼 밖에 놓였는데 신이 안 날 리가 있나.
"많이 먹어야지. 많이많이 먹고 빨리 나아서 완두콩 다시 내려다 볼 때까지 쑥쑥 커야지. 쑥쑥 커서 우리 아버지도 열심히 업고 다녀야지이."
매우 배고픈 칼리안이 반, 잘 돈 베른이 반.
복잡한 인성이 보기 좋게 섞이는 바람에 흘러나온, 실재하는 음율이긴 한지도 알 수 없고 지금의 그 덩치로 이런 짓을 해도 과연 괜찮은지 생각해보기는 했을까 싶은 노랫가락이 침대 위를 둥실둥실 맴돌았다.
하기사. 어떻게 여겨지든 상관없는 일이다. 맛 좋은 냄새 가득한 빈 방에 든 사람이라곤 칼리안 뿐이었으니까.
침대 옆에 놓인 물 컵을 들어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은 칼리안이 기지개를 쭉 켰다.
- 달칵.
때마침 문이 열렸다.
씩 웃은 칼리안이 무릎을 덮고 있던 담요를 살짝 걷어냈다. 그리고 '오셨습니까' 정도의 말을 꺼내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 차르륵! 차륵!
커튼을 열고 닫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예상하고 있던 희멀건하고 파릇파릇한 색 대신, 포근하고 달지만 한 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한 초콜릿과 같은 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칼리안의 입가에 머무르던 보기좋은 미소에 당혹과 난처함이 들어앉았다.
"······ 아리안느?"
"깜짝이야. 우리 전하인 줄 알고 안아 줄 뻔했잖아."
아무렇지 않게 첫 감상을 내어 둔 아리안느가 침대 옆에 놓인 의자 말고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풀썩 하고, 푹신한 침대의 한쪽 모서리가 조금 기울었다.
"다쳤다 해서 왔어. 마나실 경이 이 앞까지 데려다줬는데 놀라지 말라 하더라고."
칼리안의 발치에 앉은 아리안느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체이스와 닮았으나 체이스의 것일 리 없을 얼음칼같은 눈을 들여다봤다.
그 속에 홀로 담긴 시간들을 그렇게 한참 쳐다보던 아리안느가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이렇게 생겼구나, 내 친구가."
그저 반갑다면서.
- 스륵.
베른이 고개를 숙였다.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에일라가 묶어두고 간 긴 머리가 어깨 앞으로 흘러내렸다.
"응."
새로 얻은 것들을 지켜내느라.
이미 잃은 것들을 묻기로해서.
그것이 아무래도 조금쯤 쓸쓸하여서.
"그랬었어. 아리안느."
긴 숨이 섞인 베른의 나지막한 대답이 아리안느에게 닿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아리안느가 치우려다 만 담요에 덮인 칼리안의 다리를 툭툭 두드렸다.
"마나실 경 덕에 빨리 오게 된 바람에 카이리시스에 있을 시간만 더 늘어났어. 카스트린 경은 별 재미도 없는 사람이라 나 심심해. 나랑 놀아 줄 사람도 여기 별로 없어. 그러니까 이번에도 나랑 계속 놀아줘. 네 그 멋진 정혼자도 소개시켜주고, 그렇게나 넓다는 왕궁도 보여주고, 너 사고쳤다던 그 거리에도 데려가주고. 자랑했던 숲에 가서 술도 마시고. 그렇게 해."
그것이 아리안느의 대답이었다.
지나간 일들을 이야기해달라 하지 않았다. 아리안느는 모르고 베른만 기억하는 일들을 말해달라 하지 않았다.
대신 기껏 그렇게 해 가며 새로 얻은 것들을 알려달라 했다. 함께 지내고 더 많이 친해지자 했다.
"같이 놀아, 나랑. 칼리안."
"그래. 그렇게 해."
작게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밤이 다 지나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
달이 기울고 어둠이 흩어지고 해가 떠오르도록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한밤에 따라 두었던 술이 고스란히 남아 쏟아져 드는 햇살을 받아내기 시작한다.
- 당신 동생. 당신 동생이 오늘 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 우리, 아니.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 그것까지 내가 알아야 하나?
- 그 여자가 나한테 시녀 노릇을 하라고 했어. 그렇게 하면 나 하나만은 수도에 머무르게 해주겠다면서. 나한테, 감히 나한테.
- 왕궁엔 이미 내가 다녀왔다고 말했는데도 애까지 데리고 멋대로 찾아간 건 당신이야. 왜, 왕자 또래 아이를 데려가면 애가 불쌍해서라도 우리를 카이리시스에 다시 불러들여 줄 거라고 생각했어? 실리케에게 그런 온정을 바라고 갔어?
- 온정! 그런 말을 알고 있기는 할까? 아니. 적어도 나는 그 여자가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리라 여겼어. 그런데 그런 말을 했어. 그리곤 그 왕자를 불러오더니 그 앞에 내 아들을 세웠어. 인형처럼 만들어 놓은 그 왕자를 향해 예를 갖추라면서. 내 아들에게, 눈을 내리깔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예를 보이라고 했어. 네 아비도 언젠가 그리 할 테니 너부터 먼저 허리를 굽히라고. 발 밑에 엎드려 연명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그딴 소리를 지껄였어. 그 여자가!
졸음이 온 까닭일지 머릿속이 비워진 탓일지.
이유 모르게 떠오른 회상이 몽상처럼 번진다.
- 어머니한테 돌아갈 거야. 그런 여자 손아귀에 든 이런 나라에 단 한 순간도 더 있고 싶지 않아. 라시드는 내가 데리고 떠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어차피 관심도 없겠지만.
- ······ 셀레나.
- 가서, 그 여자. 당신 동생이 전 왕비를 어떻게 했는지. 후궁에게 무엇을 줬는지. 전부 다 밝힐 거야. 전부 다, 낱낱이 알릴 거야.
- 셀레나.
- 그러니까 기다려. 그 여자도, 하등 쓸모없는 당신도, 아니. 브리센 전부를 내가 모조리 다 끌어내려 줄 테니까.
긴 회상의 끝에 결국 인상을 찌푸린 그레이가 몸을 일으켰다.
"생각이 많으셨나 봅니다, 후작. 밤새 이곳을 떠나지 못하신 걸 보니."
그런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레이의 시선을 끌었다.
안그래도 찌푸려져 있던 얼굴이 조금 더 구겨졌다. 불쾌해하는 얼굴을 분명히 보았을 테지만 조금도 신경쓰지 않은 이, 라시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나 많아서 제가 여기까지 오도록 모르고 계셨습니까?"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답을 기다렸을 리 없을 라시드는 상관없다는 듯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레이가 밤을 지새웠던 서재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돌아가라 하지 않았더냐. 왜 아직도 이 곳에 있는 것이냐."
"잊으셨나본데."
뚜벅, 뚜벅.
"여긴 브리센 후작저고······ 우연찮게도 제 성 역시 브리센입니다, 후작."
뚜벅, 뚜벅.
"이 나라에서는요."
조용한 말을 덧붙인 라시드가 방금 전 몸을 일으킨 그레이의 맞은편에 와 앉았다. 그러더니 그레이와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툭 쳤다.
마치, 다시 앉으라 명령하듯이.
- 드르륵!
그 모습을 마뜩찮게 보던 그레이가 무릎 뒤에 닿아있던 의자를 뒤로 쭉 밀어냈다. 그리고는 라시드와 나눌 말이 없다는 듯 테이블을 지나쳐 서재 밖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자 라시드는 그레이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후작 따라다니는 귀족들 만나 무슨 얘기 나누셨습니까. 나에랑샤에서."
"그런 것까지 내가 네게 보고해야 할 이유는 이제 없다."
"보고라뇨. 우리 사이에 왜 그런 서먹한 말을 하십니까. 상의라 생각하십시오."
"아비를 잡을 덫을 만들어두는 아들과의 사이가 서먹하지 않을 수는 있느냐?"
"이 정도면 이 브리센에 딱 맞을 만큼 좋은 사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대꾸한 라시드가 제 물음이 꽤 마음에 든다는 듯 흡족한 웃음소리를 냈다.
서재 밖으로 나가려던 발을 멈춘 그레이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꾹 다문 잇새로 대답을 꺼내 전했다.
"결국 내 목을 노리고 나를 찾아 온 것이 아니더냐."
"얼토당토 않은 말씀 마십시오."
나풀거리기라도 할 것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대꾸한 라시드가 허리를 길게 비틀었다. 그리고 자신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던 그레이를 쳐다보며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내가 고작 후작의 목 하나 얻자고 이 먼 길을 돌아왔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저보다 어린 놈들의 말 몇 마디에 부들거리던 주제에 내 목보다 큰 것을 퍽이나 잘 얻어내겠구나."
"부들부들! 네. 그건 맞습니다. 나를 당신과 같은 족속으로 엮어 보는데 그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겠어서, 제가 그만 솔직해지고 말았습니다. 허나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따져본다면 세상 그 누가 그것을 참겠습니까?"
그레이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렸다.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다시 허리를 돌린 라시드가, 지난 밤 그레이가 따라 둔 뒤 입도 대지 않은 술잔을 집어들었다.
찰랑, 찰랑.
라시드의 머리 색과 썩 닮은 갈색 술이 잔 속에서 어지러이 흔들린다. 그 모습을 한동안 쳐다보고 있던 라시드의 입에서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난 일이야 어찌됐든. 잠든 사이에 내 검이 후작의 심장을 가를까, 목을 가를까. 그런 걱정 때문에 밤을 허비하지는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미 한 번을 들킨 탓에 당분간은 후작 목숨 못 노리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찰랑, 찰랑.
가라앉던 움직임의 술을 일부러 한 번 더 휘저어 둔 라시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와 똑같은 냄새를 풍기며 똑같은 눈으로 내려다보던 뱀 같은 놈이 생각나 웃음을 감추질 못했다.
"어디 가서 후작이 죽은 채로 발견되면······ 그 왕자와, 그 왕자 품 속에 고이고이 모셔져 있던 왕세자는 어떻게 해서든 나를 범인으로 만들려 들 테니. 내 안위 지키려면 내가 당분간 후작 안위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번거롭고 귀찮고 쓸모없는 일이겠으나 살다보면 피하지 못할 일이 계속 생기는 법이라 했으니."
아아, 내가 어쩌다 그런 실수를 했는지.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한 라시드가 손에 든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레이가 차마 마시지 못했던 그것을 한 입에 쭉 들이켰다.
알싸하고 독한 것이 목구멍을 데운다.
기껍기 짝이 없는 느낌에, 라시드가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목을 타고 넘어가는 히몰리카의 드센 기운을 한껏 즐겼다.
"허튼 소리 말고 당장 네 어미에게 돌아가거라. 필요없으니까."
"사양 말고 사이 좋게 지내봅시다. 아무 탈 없이 잘, 지켜드릴 테니까요."
- 타악!
- 드르륵!
빈 잔을 내리치듯 내려놓은 라시드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로 돌아 뚜벅 뚜벅, 그레이가 향하던 곳으로 걸어갔다. 그레이를 지나쳐 걸어갔다. 서재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 아버지."
비아냥 가득 담긴 말을 내버리듯 전한 라시드가 문 밖으로 발을 디뎠다.
- 쾅!
거세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긴 복도를 걸어 당분간 머물게 될 자신의 방을 향해 계속 발을 옮겼다.
흥에 겨운 콧노래 소리가 복도를 울리다 사라져갔다.
* * *
많이많이 먹겠다 했다더니.
정말로 많이많이 차려놨다.
마법도 다루고 검도 잘 쓰는데 몸집까지 산만해진 아우님이 어찌나 잘 처드시는지. 보기만 해도 이미 배가 부른 플란츠가 질린 얼굴을 한 채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더 드세요, 연두색 저하."
조용히 다시 들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아르센이 삶은 계란 한 스푼을 떠 입에 넣었다. 그리고 낯설지만 싫지 않은 외견의 칼리안을 잠시 봤다.
그 사이, 곁에 앉아있던 동종업자의 말이 방을 울린다.
"옆 나라 영애께서는 왜 이렇게 빨리 오셨는지."
"싫어요? 저하 나 불편해요?"
"······ 말고.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와, 저하. 궁금한 것 물을 줄도 알아요?"
입을 괜히 열었다.
고기를 더 입에 넣을 수가 없어서 대신 말을 뱉었을 뿐인데 산 넘어 산이다. 말을 괜히 걸었다.
"저는 다쳤고 제온은 다시 수도에 나타났고. 제가 누굴 닮았을지 세크리티아 정세 좀 안다 싶은 사람이면 모를 리 없으니 브리센 남작도 알 테니까요. 혹시나 제가 왜 세크리티아의 국왕과 닮은 얼굴로 변했는지 궁금해하게 될 까봐, 그럼 카이리시스로 찾아오고 있을 국왕의 정혼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 까봐. 카스트린 경의 검도 빌릴 겸 아리안느 안위도 챙길 겸 스승님께서 곧장 데려오셨다 하네요."
아리안느의 질문 공세에 빠진 플란츠를 칼리안이 건져냈다. 그 덕에 잠시 숨을 돌린 플란츠가 딸기 주스가 가득 든 잔에 손을 가져갔다.
"그나저나, 형님. 궁금한 것도 이제 참지 않고 잘 물으시네요. 지켜보는 제 마음이 어찌나 뿌듯한지 형님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속에 든 뱀이 아무래도 독뱀이 아니라 능구렁이인가보다.
행여 바뀐 얼굴에 적응 못하고 딴 생각할까 더 짖는 중이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달갑게 여길 수는 없어서, 플란츠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이 와중에 보는 눈들이 많아 내 동생 또 짖는다 말할 수도 없어서 평소보다 더 많이 찌푸려졌다.
"질문만 하신다 뿐입니까. 같이 있으면 하루종일 얼마나 말씀을 많이 하시는지, 요즘은 내내 집무실이 소란스럽습니다."
"파란 머리 마법사 너 대신 마법사들 불러다 혼내는 거잖아."
"어쨌든 그것도 말씀은 말씀 아닙니까?"
늘그막에 내 새끼 잘 자란 것 새삼스레 지켜보는 눈을 한 칼리안이 저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지만 플란츠와 아르센은 늘 사이가 좋다 싶어서였다.
하긴 그랬으니 세크리티아에도 손잡고 같이 왔겠지.
이렇게 진심 가득 담긴 보람찬 얼굴을 하고 있던 칼리안을 보면서, 아르센이 조심스런 목소리를 꺼냈다.
"그런데, 왕자님."
"네. 얘기해요. 헤르츠 경."
"지금 모습 잘 간직해뒀다 꿈에서 뵈어도 잘 알아 뵐 수 있도록 제가 멋진 동,"
"응. 안돼요."
"저 아직 부탁드릴 말 안 꺼냈습니다."
"안 꺼내서 다행이니까 집어넣어요. 꿈에서 봐도 안 까먹고 무서워하게 만들어놓기 전에."
"네. 집어넣겠습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이의 연보랏빛 눈이 아리안느를 향했다. 눈빛 뿐 아니라 목소리도 부드러워진 말이 함께 건네졌다.
"전하께는, 인사 드렸어?"
"잠깐 인사만. 낮에 다시 만나뵙기로 했어."
"그래. 그럼 카스트린 경은?"
"지금 마나실 경이랑 같이 있을 거야."
이런 이야기에, 플란츠는 별다른 반응 없이 딸기 주스로 목을 축였다. 대신 아르센이 의문 가득한 눈으로 플란츠를 쳐다봤다.
"왔어, 그 기사도."
"저는 몰랐습니다만."
"마법사 너 있을 때 얘기했는데."
"그런데 왜 저는 모릅니까?"
그야.
그 얘기 나눌 때 지그프리드 공작령의 대구 구이 가게에서 맥주 네 잔 처마시고 새우 얼리고 있었으니까.
이런 말을 어떻게 전해줄까.
플란츠가 잠시 고민을 했다.
"그야, 그 날 헤르츠 경이."
칼리안 쪽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아르센을 쳐다봤다. 그리고 뒷말을 잇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드르르륵, 하고. 테이블에 올려진 식기가 요란하게 울린다. 창문이 진동하다 흔들린다.
아르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안느가 깜짝 놀란 눈을 했다.
폭음의 진원지가 있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플란츠가 날 선 눈을 하며 앞을 쳐다봤다. 이미 진작에 일어나 있던 칼리안을 향해서였다.
"칼리안."
"키리에입니다. 가 보겠습니다."
창문이 열린다.
팔랑팔랑, 잔 바람이 흰 방 안으로 불어든다.
- 툭!
방금 전까지 칼리안이 앉아있던 자리에 얇은 팔찌 하나가 던져지듯 놓였다.
플란츠가 칼리안을 말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칼리안은 이미 열린 창 밖으로 사라진 뒤였다.
손을 뻗어 팔찌를 집어 든 플란츠가 눈매를 굳혔다.
"······ 도대체."
도대체 내 동생 따까리들은 왜 다들 이렇게 하나같이 요란을 떨며 내 동생을 불러내느냐고. 내 동생 너무 급해서 변장용 마법 팔찌인 줄 알고 통신 팔찌 풀어놓고 나가셨다고.
그건 둘째 치고 뭣보다.
내 동생 아직, 아침 밥 다 안 드셨다고.
그런 의미가 진득하게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