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장. 고양이가(1)
달이 저물고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을 때.
나에랑샤와 아스트리샤에서 가장 이른 아침을 맞이하는 빵집과 소식지 상점이 이제 막 불을 켜고, 부지런한 이들이 일어나 침대 위를 정리하고, 웅크린 새들이 날개를 펴 지저귀는 시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과 대부분의 동물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을 무렵.
- ······ 달칵.
아주 작은 소리가 창문에서 들려왔다.
물기를 머금은 듯한 새벽 바람이 가만가만 불어든다.
가장 깊은 잠에 빠져있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듣지도, 느끼지도 못할 그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챈 이가 소리없이 눈을 떴다. 어둠 한 가운데 놓인 옅은 자수정같은 눈동자가 방금 전 열린 창을 향해 스르륵 움직였다.
"나예요. 칼 던지지 말아요."
내용은 살벌하나 목소리만은 평온한 말이 들려온다.
아무리 소리를 죽이고 들어온다 해도 곧바로 들킬 것임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알아. 에일라."
짧은 대답을 마친 칼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 목소리가 평소와 많이 다른 것을 안 에일라가 잠시 발을 멈췄다. 그러나 곧 조용한 걸음으로 다시 다가와 칼리안이 누워있던 침대 옆에 앉았다.
에일라를 보던 칼리안의 시선이 움직인다. 밤이 지났으나 오히려 더 어둡다는 모순에 빠진 때를 지나고 있는 창 밖을 봤다. 긴 머리카락이 가는 바람을 따라 잠시 흔들린다.
사방이 막힌 이런 새하얀 방 말고 밤의 하늘 위에 길게 늘어뜨려야 할 것 같은 청은발을, 서늘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한 연보라색의 눈을 한동안 쳐다보던 에일라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왕자님 맞으신지 물어봐야 하나요? 생각보다 많이 바뀌셨는데 같은 사람 아니면 어떡하지."
"그럼 무슨 대답을 해 줄까. 비녀 아직 못 샀다 하면 되려나."
자연스레 되돌아오는 말에, 에일라가 한 여름의 바람을 닮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왕자님 맞네."
에일라의 목을 여민 옷깃 안쪽으로 붕대가 감겨있는 모습이 보인다. 고개를 돌려 그것을 본 칼리안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멀쩡한 문 놔두고 왜 창문으로 왔어."
"왜요. 이렇게 오면 설레서?"
"설레지. 당연히."
아무튼 거짓말을 너무 못한다.
겉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것 하나는 안 바뀌는 모양이라, 칼리안의 뻔뻔한 거짓말에 실소한 에일라가 가벼운 목소리를 냈다.
"여기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다 들어서요. 왕자님의 그 기사가 막고 서 있을까봐. 없는 줄 알았으면 그냥 문으로 올 걸."
"있어도 그냥 문으로 와. 창문 잡는 순간 어차피 들킬 테니까 그 팔로 괜히 벽 붙들지 말고."
"알았어요. 그런데 그 기사는 왜 없어요?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키리에야. 똑같이 내 밑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이름 정도는 불러줘야지. 아무튼, 쉬라고 들여보냈어."
둘의 말마따나 키리에는 없었다.
나흘 내내 제대로 쉬지 않고 돌아다닌 사람이 비단 플란츠 뿐만은 아니었던 까닭에 명령이라 해 가며 강제로 들여보냈다.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내가 이렇게 된 바람에 마음까지 시끄러워진 것 같아서."
"왕자님 원래 모습 보게 돼서?"
"응."
체이스 전하랑 정말 많이 닮긴 했네,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에일라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지금의 이름과 참 안 어울린다 여겨지는 날카로운 얼굴선과 눈매를, 옅은 빛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넓은 어깨를 쳐다봤다. 그 누구도 왕족의 것이라 생각지 못할 손을 쳐다봤다.
"그러라고 빌려드린 팔찌 아니었는데 마음 시끄러워진 건 왕자님도 마찬가지인 것 같네요."
"내 속도 시끄러운 것 티나?"
"네. 빤히 보여요."
칼리안의 입에서 한숨인지 웃음일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낯설어서. 반가운 게 낯설고, 익숙한 게 낯설고, 낯선 게 낯설어서. 그래서 그래."
"왕자님은 낯설 것 모르고서 굳이 그렇게 바꿀 사람 아닌 줄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나도."
"그 정도일 줄도 모르고 왜 바꿨어요, 그럼."
오늘따라 에일라의 질문이 많았다.
말 많은 것 싫어하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자신 때문에 칼리안이 이렇게 다쳤다 여겨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덕분에 이런 모습을 하게 된 칼리안을 위로해주려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냥 치료 받느라 갇혀있으려니 심심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서, 본래 칼리안의 것만큼이나 붉은 입술이 작은 호선을 그렸다.
"그냥. 어쩌다보니."
"돌아가고 싶어 그렇게 한 건 아니고요?"
"돌아가고 싶어 이렇게 했으면 안 되나?"
"안 된다 하기보다는요. 쓸쓸하잖아. 아무래도."
"하긴 그렇지."
그 미소가 조금 짙어진다 싶은 생각이 들었을 즈음,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돌아가고 싶어 그런 건 아니었어. 예전이었으면 몰라도 이제는 안 그래. 이제는······ 돌아가면 잃어버릴 것들이 되려 생겨버려서."
"나 잃어버리나?"
"레이븐. 소중한 내 레이븐. 잃어버리면 큰일나지."
끝끝내 에일라가 그 때의 베른보다 먼저 떠났음을,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똑바로 알려주질 않는다.
다시 얻은 삶에서 무엇을 새로 가지게 되었는지, 이번 삶을 되돌리면 무엇을 새로 잃게 될지, 그 역시 알려 줄 생각을 않는다.
피식 웃고 넘긴 에일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이 사는데, 그럼. 당연히 얻는 게 생기죠. 원했든 아니든."
"응······ 그렇더라."
"어쨌든 내가 생각했던 그런 이유 아니라 하시니 다행이네요."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거리는 움직임 탓에, 청은빛 머리카락이 흩어지듯 흘러내렸다. 그것을 보던 에일라가 조용히 물었다.
"팔 쓰기 불편해서 못 묶는 거면 묶어드려요? 나 구해주려다 이렇게까지 된 거니까 그 정도는 해드릴 수 있는데."
팔을 쓰기가 불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묶는 법을 잊은 것도 아니었다.
묶으면, 아무래도 쓸쓸해질까봐.
그래서 그랬다.
잠시 에일라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부탁할게, 에일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에일라가 저 닮은 바다색의 손수건 하나를 꺼냈다. 어찌할 줄 모르고 내버려 둔 머리카락을 가만히 한 데 모았다.
"머리 진짜 기네요."
"잘 어울리잖아."
"이 정도로 길면 칼 쓸 때 많이 불편하지 않나."
"대신 많이 멋있지."
"그럼 지금도 길러보지. 왜 안 길러요."
"내가 너무 잘나서. 지금보다 더 예뻐지면 메를린이 또 프릴 가져 올 거라 안 돼."
"아······ 재수없다."
칼리안의 입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다 조금 다른 대답을 다시 꺼냈다.
"까만 머리, 원래는 지금보다 조금 더 길었었는데. 앞머리만이긴 했지만. 그걸 보면 나 말고 다른 사람 떠올릴 기억력 좋은 분이 있어서, 지금은 아직. 나중에. 그래도 괜찮겠을 때 길러볼까······ 그런 생각은 해."
대답 대신, 에일라는 계속 손을 움직였다. 어떻게 맞춰냈는지 몰라도 베른이 했던 것처럼 긴 머리를 높이 묶어 올렸다. 그리고 다시 본래 있던 곳으로 와 앉았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예전 모습은 그냥. 나랑 비슷한 부류를 만나서. 그 놈 마주 대하려면 똑같은 놈 불러와야 되겠구나 싶어서. 그래서 그랬어."
왜 하필 라시드의 앞에서 베른의 얼굴을 꺼내들었는지. 그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을 뒤늦게 전했다.
"라시드 브리센?"
'어쩌다보니' 라는 말 안에 숨겨뒀던 것을 이제야 들은 에일라가 곧바로 물었다.
"응. 마주치고 나니 손에는 향기를 쥐고 입에는 독을 문 뱀이라. 어떻게 상대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
"데블란 상대할 때에는 그렇게 안 했으면서."
"그 사람은 내 머리 꼭대기에 있었으니까."
"그래도요."
어느새 조금 밝아진 창 덕에 더 밝아진 칼리안의 연보랏빛 눈을 마주 보면서 에일라가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칼리안의 무릎 위에 내려놨다.
은근히 휘갈겨 쓴 모양새의 가는 필기체.
에일라가 직접 써내려간 종이 뭉치.
"이거 주려고 왔던 거야?"
"아니었으면 안 왔죠. 벽 타는 거 쉬운 일 아니에요. 게다가 난 아픈 것도 싫어해요."
"······ 아픈 것 싫어하는 놈이 쇄골 부러지고 옆구리에 구멍 난 채로 검도 잡고 벽도 타고 글씨도 썼네. 아무튼 너나 나나 우리 히나가 참 싫어할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어요. 말했잖아요, 라시드 브리센 죽여달라고. 그런 부탁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라시드 브리센.
그에 대한 정보가 빼곡히 적혀있는 것을 보며 살짝 웃은 칼리안이 서류를 집어들었다.
"밖에 나가지도 못했을 텐데. 그새 어떻게 조사한거야."
"전서구도 새니까. 부탁했어요. 탄산수 사 주면서."
아, 맞다. 전서구.
"아직 있었지, 참."
"아직 있어요. 체이스 전하께서 불러들이는 것 잊어버렸다 해서 왕자님까지 잊지는 말아요."
"그래. 안 까먹을게."
"그리고······ 뱀 잡는 건 뱀이 아니라는 것도 잊지 말아요. 뱀을 뱀이 잡나. 뱀은 쥐나 잡지."
"그럼 뱀은 누가 잡나."
"뱀은."
에일라가 칼리안을 응시했다.
연보랏빛 눈 말고, 그 속에 잠시 감아 둔 붉은 눈을 바라봤다.
"고양이가 잡아야죠."
연보랏빛 눈이 선득한 빛을 내다 가는 곡선을 만들었다.
"그렇네······. 그렇구나."
뱀은 고양이가 잡는다니.
그것 참 맞는 말이다.
고양이가 뱀 잡는 것도 모르고 이제껏 계속 뱀을 불렀다. 서로의 몸에 이를 박아 넣으려고 서로 엉겨붙어 숨통을 죄여댔으니 쉬이 이길 리가 있나. 내 숨이 같이 막힐 수밖에.
이제서야 한 가지를 깨달은 칼리안이 자조하듯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 고개를 들고 에일라를 바라봤다.
"에일라."
"네."
부름에 대답하는 에일라에게, 칼리안은 말 대신 무언가를 건넸다. 짙은 어둠에 방해받지 않도록 훈련된 푸른 눈이 제 손에 올려진 것을 내려다봤다.
가느다란 반지.
검은 빛을 담은 어두운 은색의 반지였다.
그것을 손에 들고 몇 번을 매만져 본 에일라는 설마 왕자님 나 때문에 소공작님과 파혼했느냐는 등의 빈 소리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조금 놀라며 입을 열었다.
"이건 돈 있어도 못 구하는 건데."
"뭐야. 알아보네?"
"드래곤 뼈로 신물 만드는 이상한 취미 가진 사람이 있었는지. 신물 구해다 팔던 때에 봤던 적 있어요."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통신용이야. 당연하겠지만 그건 마력 못 다뤄도 쓸 수 있어. 그러니까 무슨 일 생기면 마력탄 말고 그걸로 불러. 안 시끄럽게."
"부르면, 또 구해주시려고요?"
"구해줘야지."
"많이 부르면?"
"많이 불러도."
"계속 부르면?"
"계속 불러도."
빌헬름 관에 돌아오자마자 앨런이 칼리안에게 전해주었던 통신 용품. 그 중 하나는 앨런에게 건네고 남은 둘 중 하나를 에일라에게 건넸다. 에일라는 앞으로도 계속 위험한 일을 하게 될 것이라서, 고민 없이 에일라를 떠올렸었다.
"좋네요. 든든하고."
"에일라."
"네."
"기사 할래?"
그럴싸한 장식 하나 없는 그 반지가 마음에 든다는 듯 곧바로 손에 끼워보던 에일라가, 뜻밖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정보 모아오라더니."
"그 전서구도 기사잖아. 너도 겸사겸사 둘 다 하면 되지."
"기사 된 뒤에 남한테 잡히면 왕자님 곤란할 텐데."
"그런 걸로 곤란할 사람인가, 내가."
"나 기사까지 하면 감당 안 되게 멋있을텐데요. 나도 너무 잘나서."
"감당 못할 것 같아?"
"하긴. 감당 못할 것 가질 사람 아니지, 왕자님은."
"잘 아네."
"하면. 왕자님 기사? 아니면 발칸 기사?"
"너는 형님한테 안 드릴 건데, 난."
"왜요?"
"몇 번을 말해. 내 거라니까."
"그러면서 싸구려 비녀 사 주고."
"비싼 것 사 줄까?"
"싫어요."
"거 봐. 그럴 거면서."
"할게요."
툭, 하고.
에일라가 대답을 전했다.
"왕자님 기사."
"비싼 비녀 싫다더니. 기사는 한다 그러네."
"하라더니. 한다니까 그런 말을 해요, 왜."
"좋아서."
에일라가 살짝 웃었다.
조금 전의 칼리안처럼 한가득 흘러내려와 있던 자신의 바다빛 머리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들면, 새 비녀 사는 김에 새 주인 찾으면 되니까요. 겸사겸사."
"그래. 그러면 되니까."
싱긋 웃은 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해. 에일라."
이번에는.
에일라.
* * *
대체로는 놀라지 않았다.
무언가를 보고 놀랍다는 감정을 꺼내들기도 전에 생각 빠른 머리가 먼저 움직이는 탓에, 놀랄 겨를도 없이 당면한 상황의 원인을 찾아 건네는 그 머리 덕에 크게 놀랄 일 없이 살아왔다.
언젠가 니들렌이 물은 적 있었다. 불편하지 않은지.
그래서 대답했었다. 기억이 시작 된 이래 언제나 있어 온 일이라서 그것이 왜 불편한지를 알지 못한다고. 솔직한 대답이었다.
아르센이었다면 그런 말에 분명 한 소리를 했겠으나 니들렌은 그렇지 않았다.
'가끔씩은 아무 생각 없이 쉬실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서 여쭤봤습니다. 그래도 불편하지 않다 하시니 다행입니다, 부군단장님.'
다행이라 했었다.
그것이 주제 넘은 참견이 아니라 걱정임을 이제는 안다.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동안 놀란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그 '놀라움'을 겪었던 일들과 함께 놀라움에 대해 니들렌과 대화를 나누었던 일까지 세심하게 추려 동시에 떠올려내는 머릿속을 잘 가다듬은 플란츠가 앞을 쳐다봤다.
머릿속에 그런 사고가 떠오른 이유는 하나다.
놀랄 일이 생겼으니까.
- 우다다닷!
- 투다닥!
보기 좋은 필체로 반려 사유를 빼곡히 적어 둔 서류 위에 분홍색 발바닥이 흙발자국을 내며 지나갔다. 그보다 조금 작은 짙은 보라색 발바닥이 그보다 진한 흙발자국을 하나 더 냈다.
······ 괜찮다.
익숙한 일이다.
- 푸드드득!
- 타악!
- 철푸덕······!
책상 아래에서 요란하게 떠오른, 루시보다 더 크고 둥그런 놈의 샛노랗고 큼지막하고 넓적한 발이 두 고양이의 발자국 위에 거대한 발자취를 하나 더 남겼다.
이건 그리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놀랄 것은 아니다. 저 오리의 공동 양육자인 마법사 협회장이 자리를 비우는 날이면 종종 벌어지곤 하는 일이니까.
그게 아니라, 놀라운 것은.
"꽤액, 꽥!"
- 푸드덕!
"애옹!"
"니아옹······!"
이 상황이 과연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이끄는 수뇌부의 집무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 맞는지. 이 좋은 머리로도 아직까지 그에 대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하."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플란츠가, 세 동물의 즐거운 한 때가 고스란히 기록된 종이를 한 쪽으로 치웠다. 어쨌거나 서류를 반려시키는 사유를 적기는 했으니까.
예전 같았으면 아르센이나 니들렌에게 발자국만 지워내도록 클린을 부탁했을 테지만 그런 서류가 하도 많아져서 이젠 그냥 포기했다.
고양이와 오리 발자국이 담긴 서류를 싫어하기는 커녕 그것을 종류별로 모으기 위해 일부러 반려될 만한 서류를 보내오는 놈들이 모인 곳이 아닌가.
그 좋은 머리로 누가 몇 번째 반려 대상 서류를 보내오는지 하나하나 다 기억하는 플란츠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번까지는 그 짓을 봐주는 플란츠라서, 각자 딱 세 번까지만 그런 짓을 하는 놈들임을 모르지 않지만 그래도 아무튼 세 번까지는 봐 주고 있다.
- 저벅.
그렇게 어찌저찌 급한 일을 마친 플란츠가 발을 옮겼다.
"이러다 정말 카밀론 가실 것 같은 부군단장님 어디 가십니까."
"안 가. 밖."
일 하는 머리보다 호칭 생각하는 머리가 더 큰 듯한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플란츠의 외출을 방해하고 들었다.
"왕자님 만나러 가십니까?"
"식사."
"우리 왕자님이랑 식사하러 가십니까?"
"왜."
"저도 가고 싶습니다."
"왜."
"마나실 군단장님께서 그 위대하신 등에 직접 들춰업고 옮겨두신 분 머리카락이 하도 살랑거려서, 3왕자님이 대체 누구 모습으로 변장하고 계시다 실려온 건지 궁금해 죽겠다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런데."
"제가 바로 그 놈들 중 하나입니다."
저 따위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그 위대하신 분의 발에 밟혔던 일은 싹 잊어버렸나보다.
망각의 축복을 가득 받은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를 느리게 내려다 본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방금 들려온 개소리와 고양이 울음과 오리의 퍼덕임을 뒤로 한 채 문을 향해 곧게 걸었다.
"저도 지그프리드 공자님만큼 우리 왕자님 걱정돼서 그럽니다."
"내 아우님 시종도 아직 내 아우님 못 만났는데."
"압니다. 지그프리드 공자님에게 왕자님이 그 모습 절대 안 보여주시려는 이유도 압니다만. 그래도 저는 뵈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봐서 뭐 하게."
"뵙고, 꿈 빨리 꾸고, 모실 분 잘못 만나서 전쟁까지 일으키게 된 능력 좋고 인생 굴곡 많은 파란 머리 마법사 대신 반성 한 번 한 뒤에 칭찬 받으려고 그럽니다."
미친놈.
치미는 험한 말을 간신히 삼킨 플란츠가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것을 거절로 듣고 아쉬운 얼굴을 해 보이는 아르센에게, 짜증 가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리 두고 가."
씩 웃어 보인 아르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도, 아우님이 싫다 하시면."
"왕자님께서 싫다 하시면 두 말 없이 돌아오겠습니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르센과 함께 빌헬름 관의 건물 안에 마련된 단거리 이동 마법진으로 간 뒤, 세 층 아래로 내려갔다. 크고 작게 다치는 일이 하도 많아 따로 마련된 치료실들이 있는 곳이었다.
치유술을 쓸 수는 없으나 간단한 진단과 처치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치료사들 서넛의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칼리안을 잠들게 했던 수면제 성분을 확인하고자 분주히 움직이는 베로니카와 약제사들을 지나쳐 한참을 더 걸어갔다.
가장 깊은 곳, 두 명의 기사가 입구를 막고 아무도 안으로 들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는 가장 큰 치료실까지.
- 달칵.
걸어가 직접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방금 전 차려놓기를 마친 듯한,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 보인다. 그것이 결코 두 명을 위한 양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칼리안이 결코 한 명 치의 식사로 배를 채운 적은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놀라지 않았다.
치료실에 들어오는 다른 이들이 모습을 볼 수 없도록, 치료실의 한 쪽에 두껍게 내려진 하얀 커튼이 보인다. 방금 전 이 곳에 음식을 날랐을 시종들로부터 모습을 가리기 위해 저리 해둔 것일 테니 그것에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 저벅.
시선을 뗀 플란츠가 아르센을 뒤에 세웠다.
"칼리안."
그리고 아르센이 왔음을 알려주려 칼리안을 불렀다.
그러다 문득 후회가 들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하필 플란츠와 아르센이 함께 이 자리에 '베른'을 찾아온 것이 좋은 결정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 탁.
때문에 플란츠가 다시 뒤로 발을 돌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으니 돌아가라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아, 오셨어요?"
밝고, 유쾌하고, 언제나와 같이 올곧은 목소리.
단 한 번도 휘어질 일 없었을 것 같은 목소리가 커튼 안쪽에서 들려왔다.
- 차라락!
그리고 그 목소리처럼 조금도 머뭇거림없는 손길이 커튼을 확 걷어냈다.
초콜릿 색의 고불고불한 머리카락, 석양의 금빛을 옮겨 둔 눈, 사라진 적 없었을 것 같은 자신만만한 미소까지.
"오랜만이에요. 아니지. 오랜만은 아닌가? 내가 너무 빨리 왔나?"
생긋 웃으며 악수를 건네오는 사람.
아리안느 린의 모습을 발견하고서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그런 플란츠를 보며, 예정보다 일찍 이곳을 찾아온 뒤 기억에도 없는 옛 친구의 얼굴이 내 정혼자와 많이 닮은 것을 신기해하던 아리안느가 다시 한 번 웃음을 지었다.
"반가워요, 연두색 저하."
자신의 앞에 선 아리안느와, 그 뒤에 보이는 침대에 앉은 청은발의 내 동생과, 아리안느가 악수하자며 건네오는 손과, 조용히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내 동생의 큰 손을 한 번씩 쳐다본 플란츠가 긴 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