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장. 수면(7)
굳은 살과 흉이 가득한 손.
지금의 것과 극명하게 다른 손을 느릿하게 움직여 흐트러진 긴 머리를 길게 쓸어넘겼다. 차갑고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겨드는 낯선 기분을 버릇처럼 느낀 뒤에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한 손에는 사탕을 들고, 한 손에는 빵을 들고. 사탕을 먹자니 빵이 아쉽고 빵을 먹자니 사탕이 눈에 밟히고. 결국 둘 다 입에 처넣고 서로 어울리지도 않을 것들을 우걱거리는 꼬락서니를 보고 있는 기분이 어떨지. 혹시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욕심을 부리는 이도 본 적이 없고 그런 욕심을 부려 본 적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이상하다. 왜 모르는 척을 하지. 그대의 행동이 그렇다고 말한 건데, 나는."
싱긋 웃어보인 칼리안이 손가락을 뻗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열심히 싸잡혀 욕을 먹고 있는 그레이 브리센을 가리켜보인 뒤 말했다.
"저 눈을 물려받은 것은 싫고, 후작 아들이라는 빈 껍데기는 못 버리겠고. 후작 밀어내려 찾아온 남작 나부랭이가 제 가문 하나 믿고 감히 이 나라의 왕세자 앞에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모습을 욕심이 아니라면 뭐라고 부릅니까. 추함? 기만? 아니면······ 그럴싸한 언변으로는 도저히 가려지지 않는 멍청함?"
살기를 보낼 뻔했다.
라시드가 가장 싫어할 만한 것들을 어찌나 잘 골라내었는지 몰라도 또 참지 못할 뻔했다.
가까스로 웃음을 보인 라시드를 차마 더는 못 보겠다는 듯, 칼리안이 살며시 눈을 감았다. 매우 우아한 움직임으로 감은 눈 위를 몇 번 주무르다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는 방금 전 들은 말을 미처 다 받아들이지 못한 라시드를 다시 쳐다보며 피로감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뭐든 상관없으니 적당히 물러나줬으면 좋겠는데. 피곤해서. 손 뻗어봐야 허공만 휘저을 곳인지 아닌지도 구분 못하고, 똑바로 쳐다보다가는 눈이 멀 곳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채로, 헛되이 팔을 올리고 고개를 치켜드는 어리석은 모습을 얼마나 더 봐야 하나. 내가."
피곤한 것이 거짓은 아니다.
정확히는 딱 죽지 않을 만큼 힘들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다. 축복의 힘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 하나 히나가 없는 이상 한계가 있다.
독과 상처가 겹쳐 생겨난 붉은 흉터가 여전히 선명하지 않나. 만약 히나를 빨리 못 만나면 곱디 고운 몸 어딘가 또 흉이 질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저 놈을 계속 봐야 하는 눈이 피로해서든 몸이 힘들어서든 마음이 어지러워서든. 이런 저런 이유를 다 따져봐도 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다.
"······ 하늘과 태양."
피식 웃은 라시드가 조용히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 체크.
체스판에서 상대의 킹을 공격할 때 내뱉는 말.
얼마 전. 플란츠에게 검을 겨눴을 때 플란츠의 앞을 막아서며 속삭이던 칼리안의 그 말이 떠오른다. 체스판을 떠올린 것이 아니라 단순히 무언가를 확인했다는 뜻이었을지. 아니면 라시드의 목숨을 끊어내고자 꺼낸 말인지. 그도 아니라면.
라시드가 자신의 킹을 공격한다 여겨, 체크메이트를 막고자 플란츠와의 사이로 들어와 라시드를 대신해 그리 말한 것인지.
"하늘과, 태양이라······."
거슬린다. 지금 꺼내놓는 말들도 거슬리고 그 날의 그 말도 거슬린다. 그 날의 붉은 눈도 거슬리고 지금의 저 연보랏빛 눈도 거슬린다. 모든 것이 모조리 다 거슬린다.
"조금 놀랐습니다. 제가 손을 뻗고 눈을 두었다 하는 곳을 그리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놀랄 것 까지야 있겠습니까."
"그 정도로 보고 계셨다 하니 조금 더 흥미가 생깁니다. 잡힌 손을 무엇 때문에 안 놓고 그렇게나 떠받들고 있을까. 조금 더 궁금증이 듭니다. 이것 참,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협박.
칼리안의 약점을 알았다는 협박이다.
그 노골적인 시선이 다시 플란츠에게 가 닿은 것을 보던 칼리안이 여유로운 웃음을 보였다.
옥상에서 플란츠의 앞을 가로막았을 그 때부터 이미 숨길 생각은 다 집어치웠던 약점이 아니던가. 그러니 그것을 이제와 들켰다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떠받드는 게 아니라 키우는 건데. 좀 이상하게 크는 중이긴 하지만 그래도 키우는 재미는 있어서."
거짓말 못하는 동생 놈의 대답에 플란츠가 짜증난다는 듯 인상을 확 찌푸렸다. 플란츠를 쳐다보고 있질 않으니 그 얼굴도 보지 못한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나 역시 놀랐습니다. 내 말을 알아듣고 이해하고 궁금해 할 머리가 달려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래서 아껴뒀나······."
연보랏빛의 시선이 조용히 움직인다.
라시드를 지나쳐 옆으로, 또 옆으로. 녹빛의 눈을 지닌 또 다른 이를 향했다.
그레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스승은 푸릇푸릇한 머리카락을 조롱하고 제자는 같은 색의 눈을 걸고 넘어지고. 아픈 허리도 서러운데 이젠 처신 나쁜 머리까지 입에 담으니 도대체 어떤 것에 대해 화를 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데."
한동안 그레이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커진 발이 구두 속에 꽉 갇혀버린 탓에, 벌어진 상처가 움직여지는 탓에, 썩 편안하지만은 않은 걸음을 천천히 옮겨 라시드의 앞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
라시드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다른 이들은 알고 있으려나. 그렇게나 아끼던 자기 새끼가 날개 꺾인 사자 잡을 덫을 놓더니 잡지도 못한 사자 가죽 뒤집어썼다 착각을 하고서는······ 사자 대신 잡혔다 도망간 검은 고양이 한 마리에 눈이 돌아있는 것을."
그레이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앨런으로부터 숨막히는 피어가 흘러나왔다.
라시드를 향한 그레이와 앨런의 분노를 막아주기라도 할 것처럼, 그들과 라시드의 사이로 한 발을 더 다가간 칼리안이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라시드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댈 것처럼 가까이 다가갔다.
단 한 사람을 향한 살의가, 쏟아지듯 흘러내리는 찬 빛의 머리카락만큼이나 스스럼없이 내리꽂힌다.
"내 앞에 선 뱀 새끼는 알고 있으려나."
사일런트가 펼쳐졌다.
이번에는 키리에도 듣지 못하도록, 이 자리에 선 라시드와 자신을 뺀 그 누구도 듣지 못하도록 작게 펼친 사일런트 안에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다 잡았다 놓친 사냥감에 눈 돌아간 게······ 저 하나만은 아니라는 걸."
라시드의 몸에 밴 수많은 피냄새 만큼이나 역한 피냄새가 확 풍긴다. 그 피냄새보다 더 짙은 살기가 라시드의 머릿속으로 직접 들이친다.
라시드를 향한 칼리안의 검을 라시드가 막고.
플란츠를 향한 라시드의 검을 칼리안이 막고.
서로를 향한 검을 거두지 않은 채 일단락되었던 싸움. 그 아쉬움을 가득 담아 건넨 말에 라시드가 고개를 들었다.
"사냥감이라 하시니. 제가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무엇입니까."
"사람에게 칼을 겨누면 대부분 제일 먼저 무엇을 묻는지 아십니까?"
말을 하라고 괜히 허락했나.
칼리안이 대답 대신 라시드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유. 이유를 묻습니다. 자신을 왜 죽이려 드는지 그것을 묻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대부분 그렇습니다."
모를 리가 없지.
긴 호선이 칼리안의 입가에 그려진다. 그 선득한 미소의 의미를 모를 라시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제가 그것을 묻지 않는 이를 딱 두 번 봤습니다. 보고, 듣고, 말하지 못하던 이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명. 칼리안, 왕자님······ 당신. 당신이 그랬습니다."
"이런. 내가 그렇게 특별했나."
"특별하다 쳐도 좋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궁금해서 잠이 안 왔습니다. 제가 왜 이러는지를 이미 알고 계시는 건지. 사는 데 미련이 없으신 건지. 그도 아니라면."
라시드의 얼굴이 비틀렸다.
비아냥일지, 안쓰러움일지, 애석함일지, 무엇 하나로 가늠하기 힘든 얼굴을 만들어 보이며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죽을 이유가 너무 많다 생각을 하시는 건지."
칼리안이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웃음을 터뜨렸다.
사일런트 막 밖에서 지켜보는 이들에게 그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지는 생각도 하지 않는 것처럼, 키리에가 걸쳐주었던 검은 로브와 흘러내린 청은빛의 머리카락 새로 제 몸과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을 웃었다.
"아······ 그런 게 궁금했습니까."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게 아니라. 아껴두는 겁니다."
"아껴둔다는 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리고 여전한 궁금증을 담은 채 자신을 보는 라시드에게 대답을 전했다.
"그런 질문은 나 죽일 놈한테나 해야지. 너 같은 것 말고."
라시드의 입술이 보기 좋게 올라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웃음을 싹 지워내며, 자신을 향한 것과 똑같은 살기를 흘려보냈다.
"아껴두지 말고 물으십시오. 그러다 영영 못 묻게 되십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일런트 막을 거뒀다. 그리고 대답했다.
"나는 알아서 잘 살 테니까. 아빠 품 속이 좋은지, 싫은지. 그것부터 결정하고 내 걱정을 해요. 그러다 영영 못 벗어날라."
이 말에 라시드가 무어라 대답하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응접실로 달려 들어 온 기사 한 명이 다급한 말을 꺼냈다.
"후작님. 저택 외부를 엘라자르가 포위하였습니다."
칼리안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누구보다 간절하게 엘라자르의 기사들이 오기를 바랐던 그레이가 저도 모르게 칼리안과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것을 본 플란츠가 느긋한 얼굴을 했다.
전하의 기사들이 왔다 하니 이를 어찌할까.
내 동생을 가둬 둔 죄를 물어 이대로 붙잡아 갈까. 말까.
딱 그런 얼굴로 그레이를 쳐다보다가 조용조용 입을 열었다.
"무도한 이들로부터 내 아우님을 구해 보호 중이라 하였던 후작의 말을 믿고 이리 찾아왔는데. 아무래도 헛걸음을 하였나. 내 아우님이 보이지 않는데."
아주 잠시 플란츠를 쳐다보던 그레이가 서둘러 답을 전했다.
"아······ 무래도 길이 엇갈린 듯 합니다, 저하. 칼리안 왕자님은 제가 따로이 기사들을 시켜 안전하게 왕궁으로 모셔드리라 하였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내가 민폐를 끼친 셈이 되었나."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칼리안 왕자님의 안위를 걱정하여 몸소 움직이신 것일 뿐이지 않습니까."
"이해한다 하니 다행이군. 그럼 우리는 이만 돌아가지."
"네, 저하. 마나실 후작도 이만······ 가십시오."
제발 좀 가라는 얼굴이 된 그레이가 앨런을 보며 입을 열었다.
고개를 끄덕인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라시드를 깊숙이 눈에 담으며 그레이를 향해 말했다.
"죽은 에반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이제 아시겠군."
에반이 안쓰럽다거나 그레이가 불쌍하다거나 하는 뜻은 하나도 안 들어간 말. 그것을 들은 그레이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조용한 걸음으로 라시드의 앞으로 간 앨런이 마지막 말을 전했다.
"서로 필요없다 생각되면 누구든 얘기하게. 어느 쪽이 먼저 나설 지는 몰라도 내가 성의껏 도와 줄 터이니."
그리고는 상처 때문에 공간 이동이 불가능한 칼리안을 제 등에 직접 업었다. 칼리안이 한 순간에 훌쩍 자라버렸어도 여전히 자신보다는 작았으니까. 다행한 일이다.
"팔찌는 풀지 말고 계십시오. 상처가 또 움직일까 염려되니."
"······ 네."
앨런의 표정이 사뭇 엄했던 터라 이번에는 거절도 못하고 업힌 칼리안이 얌전히 대답했다.
곧 키리에가 걸어와 검은 로브의 후드를 씌워주었다.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어둠에 든 칼리안이 제 고개를 앨런의 등에 댔다. 그 덕에 손 끝에 닿은 긴 머리가 낯설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해서, 혀를 한 번 찬 앨런이 조용히 발을 옮겼다.
그렇게 돌아갔다.
왕궁으로.
서먹한 대화가 오갈 것 분명한 브리센의 부자를 남겨 둔 채로.
* * *
빌헬름 관의 치료실 한 곳에 조용히 불이 켜졌다.
그 안에 든 이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도 좋을 때까지 히나 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출입이 금지됐다. 아르센은 물론 르메인도, 얀도, 칼리안이 다 나을 때까지는 그 방에 들어서지 못하게 되었다.
서둘러 찾아온 히나는 혼을 내지 않았다.
잘 돌아와 다행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걱정했다는 말도 안 했다.
- 세크리티아 국왕 전하를 닮으셨네요.
낯선 얼굴의 칼리안을 잠시 보다가, 가만히 손을 잡고 몸을 살피며 짧은 말만 했다.
- 많이 닮았어?
- 네. 하지만 똑같진 않아요.
- 내가 더 낫지?
- 아뇨. 세크리티아 국왕 전하가 더 잘생겼어요. 저는 왕자님 본래 모습이 더 좋아요.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 내가 누굴 따라해서 이렇게 변한건지는 안 물어봐, 히나?
- 누굴 따라했든 왕자님 속 엉망인 건 안 바뀌어요. 그러니까 얘기 그만 시켜요. 고쳐놓으려면 또 한참 걸릴 테니까요.
상처 가득한 몸 곳곳에 히나의 빛이 퍼진다.
- 그 마법 도구를 써도 장기는 안 바뀌어요. 몸에 맞춰 늘어나기만 하는 바람에 상처가 움직였어요. 그러니까 내일까지는 그냥 있어요.
- 응. 알았어.
- 머리 귀찮으면 묶어드려요?
- ······ 아니.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괜찮아, 히나. 그냥 둘래.
고개를 끄덕인 히나가 다른 질문 없이 치료를 했다. 그래도 혼자 많이 나은 채로 돌아온 탓에 이번에는 밥을 굶을 필요 없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며 돌아갔다.
그렇게 덩그러니, 새하얀 방에 앉은 칼리안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손을 들어 올렸다.
굳은 살과 흉이 가득한 손.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그리고 무엇을 하다 그리 되었는지 전부 다 기억하고 있는 탓에 완벽할만큼 똑같은 모습이 된 손. 이제서야 자세히 보게 된 그 손을 한참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오랫동안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 탁.
그렇게 펼쳐 둔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탁 하고 올려졌다.
어디서 났는지 분홍색의 큰 상자 하나가 그 손 위에 올랐다.
단 내가 난다.
은색 버클이 달린 베이지 색 구두 끝이 보인다.
그 구두 끝을 따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 뻔 한 칼리안이 손에 들린 것에 눈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사람 간식 주러 오셨습니까."
"소금 든 것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가 놓고 갔던데."
"형님 드시라고 가져온 것을 저 주십니까."
"내 아우님은 이 시간에 먹을 것 가져다 달라 말 못하실 분이니."
니들렌의 머리 색을 꼭 닮은 분홍색 박스.
한참동안 그것을 보던 칼리안이 큰 손을 움직여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 든 것을 한참동안 내려다봤다.
또 한 번 고개를 들 뻔했다.
"뭔지 보고 가져오신 것 맞습니까."
"······ 케이크라고 하기에."
이번에는 정말 고개를 들 뻔했다.
그것.
한 입에 쏙 들어오는 작은 크기들의, 맛 좋은 향을 내고 있는 조각 케이크들.
먹기 아까울 만큼 예쁘게 꾸며진 그것들.
"저 이거 꼭 먹어야 합니까."
자몽 케이크.
그것을 발견한 플란츠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너무 궁금해서 고개를 들 뻔했다.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흰 손이 쑥 내려와 상자 속 케이크 하나를 집어들었다. 시고 떫고 단 향이 가득한 그것을 가져다 먹었다.
"제이아 경이 준 것이라서 드십니까. 피망 드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려도 안 드시더니. 너무 차별하시네요."
"말고. 분홍 머리 마법사 동생이."
"아. 동생이 있다 했었죠. 카페 한다던. 생판 모르는 남이 준 자몽 케이크는 드시면서 피망은 안 드십니까. 너무 차별하시네요."
"너. 짖을 거면."
이렇게 말한 플란츠가 상자 뚜껑을 도로 덮어 가져가려 했다.
"아닙니다. 먹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배는 고팠던 터라, 칼리안이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으며 케이크 하나를 집었다. 이제껏 내려다보던 손을 움직여 케이크를 들었다. 그리고 먹었다.
란델이 준 것이 아니라 그런가.
돌아온 뒤 먹는 것이라 그런가.
"맛있네요, 이건."
맛있다.
맛이 있었다.
먹을 생각 잊은 채로 나흘 기다린 놈과 먹을 생각 못 한 채로 나흘 잠들었던 놈이 그렇게 한참동안 시고 떫고 단 케이크를 먹었다. 아무리 무서워도 누나는 누나라서, 우리 누나 너무 고생시키지 말라는 마음 꾹꾹 담아 만든 케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배를 채우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세크리티아 마법사 협회장을 통해 제온과 연락을 취해 볼 방법을 알았었는데. 더 늦추지 말고 그 쪽을 한 번 불러내볼까 합니다. 라시드 브리센과 제온이 어떻게 얽혔는지 알아내려면 그렇게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세르제인 말인데······."
"금고에."
플란츠의 목소리가 칼리안의 말을 막았다.
"넣어뒀던데. 수정판."
"······ 네."
"나는 그걸 거기 넣어 둔 줄 몰랐어서."
"꺼내둘까. 언제쯤 꺼내둘까. 안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안 되겠고 내일쯤, 팔찌 풀면 꺼내둬야 되겠네요."
칼리안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통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것 하나 못 꺼내놓으면서. 굳이 그런 모습 꺼내들고.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칼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무리하지 말라고. 너도."
놀라지도 않고 그 연보라색 눈을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더 이상의 다른 말 없이 발을 돌렸다.
저벅, 저벅.
거리낌없이 이어진 발 소리가 사라진다.
텅 빈 케이크 상자, 텅 빈 방, 익숙하지 않은 손, 그것을 가만히 보던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 네."
들어 줄 사람 사라진 늦은 대답이 잠시 흘러나왔다.
오래지않아 주인이 돌아온 체르밀 궁의 4층에 잠시 불이 켜지고, 다시 꺼지고. 홀로 밝던 빌헬름 관도 어둠에 잠겨들었다.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오랜만에 돌아온 곳에 편안히 몸을 뉘였다.
그렇게 오랜만에, 둘 모두 깊은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