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84화 (385/527)

제68장. 수면(6)

나뭇잎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난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다 서로 부대끼는 그 소리를 두고 바람 소리라 해야 할지, 아니면 나뭇잎 소리라 해야 할지.

정답 없는 상념을 떠올리던 르메인이 고개를 돌렸다.

칠흑이라 해도 좋을 빛의 머리카락처럼 짙고 짙은 밤하늘 아래로는 제멋대로 나고 자란 장미 가지가 한가득이다. 그 잎이 서로 엉키고 얽혀 여러 소리를 내다 잦아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 사락······ 사락.

- 사아아아······.

르메인의 시선이 조금 더 먼 곳을 향했다. 바람 소리일지 아니면 나뭇잎 소리일지 알 수 없을 그 소리 사이로 공허함과 적막함이 가득한 작은 궁이 보인다.

란델의 방, 플란츠의 방, 그리고 칼리안의 방.

이미 오래 전부터 주인의 마음이 떠나버린 방, 벌써 여러 날 동안 주인이 제대로 걸음하지 않은 방, 그 여러 날 동안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방.

누구 하나 온전히 머무르지 않는 세 곳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르메인의 눈이 3층의 불 꺼진 방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러다 다시 한 걸음을 옮겼다.

뒤를 따르던 호위기사 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전하."

시오나는 아르피아 궁에 남겨두고 렌만 동행을 했었다. 르메인 스스로의 안위를 맡기는 일이야 큰 걱정이 되지 않았으나 체르밀 궁에 발을 들이는 것까지 허락을 할 만큼 완전히 신임하지는 못한 탓이었다.

한 걸음만에 발을 멈추고 살짝 뒤를 돌아보는 르메인을 향해, 렌이 조심스런 목소리를 냈다.

"등을 켜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으니 그냥 두지."

"주변이 많이 어둡습니다."

시종장 라울을 포함한 다른 시종들도 전부 다 두고 온 길이다. 체르밀 궁의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에게 자신의 걸음을 알리지도 못하게 한 채로 걸음을 했다. 그런데 등을 켠다면 그런 수고로움도 무용하게 왕의 방문을 알리는 셈이 되지 않겠나.

"이제는 익숙해지기도 했고, 소란하게 할 생각도 없으니."

"······ 알겠습니다."

그 말마따나 잘 만들어진 미로와도 같은 이 넓은 정원에서 불빛 하나 없어도 길을 잃지 않을 정도로는 익숙해지게 되었다. 첫째 아들을 보러 오는 대신 이곳을 찾은 날이 쌓이니 어느새 저도 모르게 그리 되었다.

매일같이 오지는 못했다. 때를 맞추어 꾸준히 오지도 못했다. 다만 그저 시간이 날 때마다, 생각이 많을 때마다, 겨울을 보내고 봄이 오도록, 한밤을 기다려 그렇게 여러 번을 왔었다.

그러다보면 간혹 언젠가는 우연한 걸음이 겹쳐 란델을 마주치지 않을까. 이 곳에 올 때면 으레 그런 기대를 하곤 했었으나 오늘은 달랐다.

다른 날과 달리 오늘은 란델 때문에 찾아온 길이 아니었으니까.

"여러 방면으로 수색 중이니 칼리안 왕자님에 대한 소식도 곧 전해질 겁니다."

"······ 그래."

"그러니 이만 발을 돌리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카밀리아 궁에 가지 않으신 지 이미 나흘입니다. 걱정이 크심은 알지만 잠시라도 쉬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고 잘 치기로는 대륙에서 제일 난 놈이라 하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오래도록 사라진 적은 없었다. 플란츠의 심장을 지키겠다며 묶어두었다던 맹세의 인으로 칼리안이 살아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뿐, 그밖의 어떤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럼에도 르메인은 막내 아들에 대한 걱정을 다른 이들의 앞에 드러내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온전히 꾹꾹 눌러두지도 못해 계속 이렇게 체르밀로 걸음을 했다.

"오늘까지만. 내일은 그렇게 하지."

그 이상 무거울 수 없을 르메인의 낮은 목소리가 대답을 전했다.

저 고집을 라울도 꺾지 못했음을 렌도 잘 안다.

다만 르메인이 오늘도 아르피아 궁의 집무실에서 밤을 보내면 칼리안보다 르메인의 안위에 더 큰 이상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어떻게든 르메인을 카밀리아의 침실로 보내야겠다 결심한 렌이 다시 말을 하려다 말고 장미 정원의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저벅, 저벅.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 소리 때문이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발소리.

뒤를 따라오는 작은 잘그락 소리.

아직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르메인은 여전히 체르밀 궁을 쳐다보는 채였다.

"전하. 이곳으로 지금······."

- 파앗!

그러나 이번에는 밝은 불빛이 렌의 입을 막았다.

장미 정원 곳곳에 설치된, 이제껏 꺼져있던 마법 등불들이 일순간에 빛을 냈다.

그제야 누군가 이곳으로 오는 것을 안 르메인이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저벅, 저벅.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르메인의 귀에도 들릴 만큼, 그것이 누구의 걸음인지 쉬이 가늠할 수 있을 만큼.

- 저벅, 저벅······ 저벅.

- ······ 우뚝.

다듬지도 않고 불도 꺼 두었던 정원에 멋대로 찾아온 르메인을 발견한 상대의 발이 느려지다 멈췄다.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찰나가 지나갔다.

"······ 전하를 뵙습니다."

흔들림없는 목소리가 르메인을 향한다.

마주침을 기대하지 않았던 날에 비로소 마주하게 된 이를 본 르메인의 움직임이 멈췄다. 반가움과 미안함이라는 말만으로는 표현하기 힘들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흔들리지 않으려는 목소리로 답을 전했다.

"그래, 란델. 따로이 보는 것이 오랜만이구나."

표정 없는 란델이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르메인의 뒤에 서 있던 렌과 자신 곁의 시종 덴을 한 번씩 쳐다봤다. 르메인이 온 사실을 왜 알리지 않았는지, 그 사실을 왜 모르고 있었는지에 대한 무언의 질책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르메인을 마주하기 싫었다는 듯 보여지는 행동이기도 했다.

그런 태도를 무례하다 할 수 없을 유일한 사람인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혹시나 이곳에 더는 발을 들이지 않는지를 걱정했었다."

르메인의 시선이 덴의 손에 들린 은색의 가위에 닿아 있었다. 잠시 대답을 미루고 흐트러진 장미 나무들을 보던 란델이 조용히 대답했다.

"손이 가지 않아서 자라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손이 가지 않았다니. 혹시 마음 복잡한 일이라도 있는 것이더냐."

"전하께서 마음을 써주셔야 하는 일은 아닙니다."

한동안 란델을 바라보던 르메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하마."

르메인이 신경 써주길 바라지 않아 하는 말이든, 신경쓰지 말아야 해서 하는 말이든. 무엇이든 참견하지는 않겠노라 했다.

"혹시라도······ 언젠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이야기 해주려무나. 그것이 무엇이든."

다만 그 대답이 더는 무관심에 기인한 것은 아니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말을 한다 하더라도 란델이 르메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일은 없으리라 여겼지만 그럼에도 굳이 덧붙였다.

"괜찮습니다."

여지없는 거절의 말이 돌아왔다.

"그래."

더 멀어지지 않는 거리.

더 이상 멀어질 곳이 없어 멀어지지 못할 뿐인 거리.

새로이 관계를 쌓을 수 있을 그 출발점이 여전히 멀고 멀었으나 그 사실을 차마 안타깝다 여길 입장도 못 되는 르메인은 조용히 거절을 받았다. 앨런이 몇 번이고 말했던 것처럼 평생을 건네주고 평생을 거절당한다 하여도 이제껏 저지른 일을 다 갚지 못함을 아는 까닭에.

"허락없이 걸음을 하여 미안하구나. 돌아갈 테니 둘러보거라."

"걱정이 되어 오셨습니까."

그런데 질문이 들려왔다.

예상하지 못한 이 말에 르메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돌아오지 않는 칼리안에 대한 걱정일지, 일상을 놓친 플란츠에 대한 걱정일지, 언제나 여전한 란델에 대한 걱정일지. 사흘 내내 이곳에 들른 것은 칼리안 때문이 맞았으나 체르밀 궁에서도 하필 장미 정원으로 버릇처럼 찾아온 이유까지는 한 가지로 말하기가 힘들어서. 이제 와 누구를 걱정한다는 말을 입에 담기도 어려워서.

아무 답도 건네지 못하는 르메인을 가만히 쳐다보던 란델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굳이 대답을 듣고자 함이 아니었으니 이만 나가달라 하는 것처럼.

"그래, 이만······."

- 탁, 탁, 타다닥!

그 뜻을 알아들은 르메인이 이제 돌아가겠다 말하려는데 다급히 달려오는 발소리가 났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의 눈이 왕궁에서 쉬이 들을 수 없는 그 소리를 향했다.

밝게 켠 마법 등불 덕에 달려오는 사람이 시종장 라울임을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았다. 덕분에 르메인의 얼굴에 반가움과 우려가 함께 떠올랐다. 칼리안을 찾아서 돌아오는 것인지 아니면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던 까닭이다.

"전하."

숨도 고르지 못한 라울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플란츠 저하께서 외출 후 돌아왔습니다."

"지그프리드 소공작과 함께 나간 것일 텐데."

"네. 전하. 그렇습니다."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미레아와 지그프리드의 기사들과 함께 잠시 외출한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칼리안이 돌아오지 않는 문제와 관련된 일이라 하기도 했고, 지그프리드와 발칸의 기사들이 호위를 한다 하여 직접 허락을 했으니까.

"그 일이라면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라울이 말을 머뭇거렸다.

칼리안이 도망쳤음을 알려올 때 이런 얼굴을 하곤 했다. 아주 잠시 안심한 얼굴이 되었던 르메인이 다시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외출 후 돌아온 플란츠에 대해 알리고자 체르밀까지 뛰어 올 리는 없지 않나.

"다시 나갔습니다."

"다시?"

"네. 전하. 전하께서 이 곳으로 향하신 직후 돌아온 뒤에, 조금 전 다시 왕궁 밖으로 나갔습니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이유가 있다 한들 왕궁 밖에 오래 머무르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기사들을 보내 왕궁으로 돌아오게 하도록."

"네, 그런데."

그래서 이렇게 대답하는 르메인을 본 라울이 고개를 더 숙이며 말했다.

"발칸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발칸의 절반 가량에 해당되는 마법사들과 기사들을 이끌고······ 브리센의 임시 후작저를 찾아갔습니다."

르메인이 할 말 잃은 얼굴을 했다.

살다살다 내 아들이, 아무리 이름 뿐이라지만 그래도 내 휘하에 있는 군대를 마음대로 끌고 나가 귀족의 저택에 쳐들어갔단 말을 듣게 될 줄은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우선 마나실 군단장을 보내서."

"함께 갔습니다, 전하."

"마나실 경까지 갔다는 말인가."

"네. 그리고 이 상황을 설명드리겠다며 헤르츠 부군단장이 찾아와 있습니다."

······ 깜빡.

르메인의 눈이 아주 느리게 감겼다 올라왔다. 긴 한숨이 이어졌다.

"렌."

"네."

아르센이 상황을 설명하려 기다린다 하였으나 그것을 듣지도 않은 채로, 아무 말 없이 지켜보는 란델을 옆에 둔 채로, 르메인의 말이 이어졌다.

"엘라자르를 이끌고 브리센 후작저로 가도록. 세자의 독단 행동이 아니라는 것부터 알리고, 상황을 지켜보되 충돌이 있다면 지원하라."

"네. 전하."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렌이 발을 움직였다.

라울이 서둘러 렌의 앞을 막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헤르츠 부군단장의 설명을 먼저 들으시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전하."

"설명을 들을 필요 있겠나. 칼리안이 브리센 후작저에 있으리라 여겨 발칸을 끌고 갔겠지. 아니라면 마나실 군단장이 함께 했을 리 없으니. 그렇지 않나?"

"후작저는 이미 모두 수색하였습니다. 그곳에 칼리안 왕자님은 없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레이 브리센이 무슨 수를 썼는지 알 수 없으니 단지 한 번을 뒤져 본 것으로 그곳에 왕자가 없었다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전하. 칼리안 왕자님이 그곳에 있는 것이 확실하지도 않을 뿐더러 발칸이 왜 갔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엘라자르를 다시 움직이시는 일은 좋지 않습니다."

"라울."

"네. 전하."

"헤르츠 부군단장도 내가 섣불리 움직이지 않게 하려고 온 것이겠지. 내가 엘라자르를 거듭 보냈음에도 칼리안이 없다면 내 입장이 곤란해지니, 발칸을 멋대로 움직인 플란츠 왕세자 선에서 책임을 지려 하는 것일 테지. 아닌가?"

지금 라울은 브리센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었다. 르메인을 위해 섣부른 행동을 말리는 중이었다. 르메인의 명만 따르면 되는 렌과 르메인을 보필하는 라울이 해야 할 일은 서로 달랐으니까.

만약 르메인의 친위대가 그곳에 다시 갔으나 이번에도 칼리안이 없다면 문제가 커지지 않겠나. 그러니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다 여의치 않으면 철없는 왕세자의 실수 정도로 무마하라는, 쉽게 말해 꼬리 자를 준비를 하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플란츠도 그것을 원해서 아르센을 놓고 갔으리라.

만에 하나 누군가 책임을 질 일이 생긴다면 부군단장 한 명은 온전히 남아있어야 할 테니 말이다.

"곤란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전하. 브리센이라면 가벼운 충돌로 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충돌. 하면 안 되나?"

"······ 전하."

"책임지고 수습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시간 낭비 그만하지."

더 이상 다른 말 말라는 듯 라울의 입을 막은 르메인이 렌을 쳐다봤다.

"서두르도록."

"네.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인 렌이 라울을 지나쳐 걸어갔다. 걱정 가득한 얼굴이 된 라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르메인이 란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소란한 모습을 보여 미안하구나. 이만 돌아갈 테니 염려 말고 있거라."

잠시동안 르메인을 보던 란델이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르메인을 지나쳐 저벅저벅, 정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란델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시선을 돌린 르메인이 깊은 한숨을 냈다.

"발칸의 반이라니······ 플란츠."

그리고 서둘러 아르피아 궁을 향해 발을 옮겼다. 아들놈이 사고를 쳤으니 이제 또 열심히 수습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플란츠가 무엇을 하든 칼리안이 무탈히 돌아오기만 하면 뒷일을 책임지는 것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바쁘기는 하겠지만.

어쨌거나 이런 때 잘 쓰라고 앨런이 굳이 붙여 둔 모가지 아니겠나.

* * *

낮은 목소리.

낯선 낮은 목소리.

아르피아 궁의 공기를 고스란히 머금은 듯한 르메인의 낮은 목소리. 새끼 품던 어미새의 가장 포근한 깃으로 감싸 안는 듯한 앨런의 낮은 목소리. 시계 태엽을 하나 하나 떼어다 심은 듯한 란델의 낮은 목소리. 세상을 지탱하는 거대한 바위를 녹여 부은 듯한 드미레아의 낮은 목소리. 잔잔한 강가에 새겨진 깊은 발자국 한 줌을 쥔 듯한 키리에의 낮은 목소리. 달 저문 호수에 피어오른 안개를 모아 삼킨 듯한 플란츠의 낮은 목소리.

그 목소리들과 많이 다른 또 하나의 낮은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브리센 남작이라 들은 듯 한데.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라시드 브리센입니다."

칼리안이 바뀌었다. 바뀐 모습을 보았다.

그레이가 보았다. 상황을 이해했다. 안심한 얼굴을 했다.

키리에가 보았다. 눈치를 챘다. 반가움과 우려를 감췄다.

앨런이 보았다. 알아보았다. 아픈 표정을 간신히 삼켰다.

라시드가 보았다. 수를 파악했다. 웃음을 한가득 띄웠다.

그런데 플란츠는, 보지 못했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 풀잎 끝에 간신히 매달린 빗방울 같기도 하고, 타다 만 양피지에 남겨진 마지막 글자 같기도 하고, 무너진 옛 왕국 터를 홀로 지키다 조금씩 깎여나간 기둥 조각 같기도 하고.

"제 소개를 하였으니 응당 돌아오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내 소개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 글쎄. 무어라 해야 할까."

미처 다 피우지 못하고 못내 고개를 떨군 검은 장미 꽃잎이 바람결에 하나 둘 흩어지는 듯한 그 낮은 목소리가 낯설어서. 아무래도 낯이 설어서.

모습을 바꾸라 팔찌를 전해 준 이가 플란츠 자신이었으나 설마 '그'의 모습으로 이렇게 나설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여서. 그리고 무엇보다.

- 툭.

어느새 큼지막한 손 하나가 돌아서려는 플란츠의 어깨를 툭 건드리듯 막아버린 바람에.

덕분에 몸을 돌리질 못했다.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아직은 그 잘난 얼굴을 보여줄 생각 없다 했던 동생 놈의 말이 생각나서 결국 돌아보길 포기했다. 못 봤다. 안 봤다.

별다른 말이 없었음에도 뜻을 잘 알아듣고 앞을 보는 파릇파릇한 뒤통수를 본 칼리안이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지었다.

"특별히 알려주고 싶은 이름은 아니라서. 반갑다 하기는 하였는데 사실 반갑다 할 만큼 반갑지만은 않기도 하고."

"반갑다 하기에는 제가 그리 달갑지 않으신가 봅니다."

그런데 라시드가 건네오는 말투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변장용 마법 물품이 카이리스에서 사용이 금지된 물건이라 하여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조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 알았을 터였다.

애초부터 플란츠 역시 라시드를 완전히 속일 생각은 없었을 터였다. 중요한 것은 명분이지 사실이 아니니까. 플란츠 이상으로 그것을 잘 아는, 때문에 스스로도 본래의 말투를 바꾸지 않고 말을 건넸던 칼리안이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느새 예전보다 가까워진 키리에의 눈을 보며 물었다.

"나 혹시 아버지보다 늙어 보여?"

그 목소리가 작지 않았던 까닭에 플란츠가 조금 놀란 눈으로 앞을 살폈다. 그리고 어느새 사일런트 막이 둘러쳐진 것을 보게 되었다.

"아닙니다, 왕자님."

키리에가 입모양이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대답했다.

만약 그 질문이 플란츠를 향했다면, 상처난 것은 신경이 안 쓰이냐 하거나 하필 그 모습으로 바꿔들고는 이런 상황에서도 짖을 생각이 드느냐 하겠으나 상대는 충직한 따까리가 아니던가. 때문에 아주 진지한 대답이 이어졌다.

"훨씬 어리십니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그거 좋네."

그러니까 지금이 '그 때' 라는 거지.

제 외견 나이를 확인한 칼리안이 씩 웃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칼리안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훤히 아는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 아우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지."

여전히 그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로, 몸이 커진 만큼 다시 벌어져버린 상처에서 또 한 번 풍겨나오는 피 냄새를 감추지도 않은 채로. 낯선 낮은 목소리의 대답이 들려왔다.

"형님은 형님 손으로 향기를 부르셨고. 저는 제 손으로 묻어뒀던 모습을 수면 위로 떠올렸고. 다를 것 있겠습니까. 형님 지켜드리려면 형님이 하신 만큼은 해야죠, 저도."

"그럼 그 얼굴은 왜 안 보여주시는데."

"너무 잘 생겨서. 형님 주눅드실까봐."

농담같은 말을 마친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옆으로 살짝 비켜 선 분의, 이제야 간신히 땅 위로 머리를 내민 순무 줄기같이 참 파릇파릇한 그 뒤통수 너머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걸리는 것 하나 없이 탁 트인 시야 속에서 유난히 거슬리는 놈을 보며 입을 열었다.

"라시드 브리센. 그대가 달갑지 않은지 물었었는데."

"맞습니다. 제가 그리 물었습니다."

"달가울 리가 있겠습니까."

술 처드시고 절벽에서 굴러내려오셨으나 딱 이틀 밤낮을 처주무신 뒤 멀쩡히 일어나셨다 했던 바로 그 찬란한 청춘을 맞이하기 직전.

"얼었다 녹은 상추 이파리마냥 찝찝하게 생긴 사람이 허리 부실한 제 아비 등에 업혀서는 하늘에라도 닿았다는 듯 옹알이하는 꼴을 봤는데."

진정한 질풍노도의 내 동생을 맞닥뜨리게 된 플란츠의 입에서 짧게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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