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장. 수면(2)
쉬이 바스라지는 하얀 것.
폭신하고 보드랍다 하기보다는 단단하고 묵직하다 해야 맞을 빵에 포크를 가져다 대자, 겉면을 꼼꼼하게 덮은 새하얀 아이싱이 바스라진다. 그 바람에 새콤한 향이 곁으로 퍼져나간다.
레몬 향이 가득한 빵과 설탕 덮개로 만들어진 케이크를 입에 넣은 리리에에게 따뜻한 우유를 건네 준 레릭이 옆을 쳐다봤다. 고개는 리리에 쪽으로 돌린 채 시선은 바스라진 설탕 쪽에 닿아 있는 플란츠. 그런 플란츠의 손이 혹시나 리리에를 따라 포크를 집어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담은 채였다.
제 앞에 놓인 케이크와 빵에는 손도 대지 않는 플란츠를 잠시 바라보던 레릭이 풀 죽은 얼굴을 감췄다. 그리고 리리에를 향해 웃어보이며 한 입의 케이크를 더 잘라내 손에 쥐여주었다.
"입에 맞을까요? 혹시 너무 시진 않아요?"
"아니. 맛있어요."
"다행이에요. 고양이는 다른 시종이 금방 찾아서 데려올 테니까, 잠시만 이것 드시면서 기다려주세요."
리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왕궁에 오게 되어 잔뜩 긴장한 리리에를 레릭이 살갑게 챙겨주는 사이, 플란츠의 시선이 닿아있던 곳을 함께 쳐다보던 드미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체르밀 궁 밖으로라도 걸음을 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침묵을 물리듯 흘러나온 목소리에 리리에와 레릭이 드미레아를 봤다. 그러나 드미레아의 말이 향한 곳에 있던 플란츠의 눈은 여전히 리리에의 접시 위에 머무르고 있었다.
방금 건넨 말을 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얼굴이었으나 드미레아는 내 말을 들었느냐 묻지 않았다. 대신 담담한 얼굴로 플란츠의 반응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리리에의 접시에 가득한 설탕 부스러기같은 눈길이 드미레아를 향했다.
"왜."
하얀 설탕보다 더 시고 더 많이 바스라진 목소리 탓에 리리에가 걱정어린 눈을 했다.
"이유를 몰라 물으십니까."
"어차피 귀족들은 상황을 모를 텐데. 안 나가면, 뭐가 어때서."
"모르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이 일에 대한 이야기가 왕궁 문을 넘지 않도록 입 단속을 시켜두셨다 한들 알 사람은 이미 모두 아는 일입니다."
칼리안이 돌아오지 않은지 벌써 나흘이 지났다.
왕궁 안은 말 그대로 서슬퍼런 혼란에 잠긴 상태였다. 다만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한 혼란이었다.
플란츠의 세자위가 결정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런 때에 칼리안이 실종된 것이 알려지면 칼리안 스스로는 물론 플란츠와 란델에게까지 의심의 눈초리가 닿을 것이 분명했다.
이 일이 칼리안과 손을 잡은 플란츠의 입지를 좁히려는 란델의 계략은 아닐지, 칼리안을 없애려는 플란츠의 계획은 아닐지, 플란츠의 세자위를 '돌려 받으려는' 칼리안의 자작극이 아닌지. 셀 수 없을 만큼 그럴싸한 이야기들이 온 나라를 휘저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그 칼리안이 실종되었다면 이 기회에 돌아가는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려두려는 이들이 칼을 꺼내지 않으리라 단정할 수가 없었다. 란델을 향해서든, 플란츠를 향해서든.
때문에 르메인은 칼리안에 대한 일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소리높여 칼리안을 찾는 행동 역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칼리안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이 생겼는지 단 하나도 알지 못하는 채로.
누구보다 많은 이들을 다스리는 왕은, 아들 한 명이 사라진 일조차 마음껏 드러내어 걱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칼리안 왕자님이 큰 싸움을 벌인 뒤 계속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일, 그레이 브리센의 저택을 엘라자르가 수색한 일, 그 그레이 브리센이 그 일에 대해 항의 한 번을 못한 일, 마나실 후작이 사라진 일까지. 왕궁에서 아무리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다 한들 이미 다들 어느정도 눈치를 챘을 겁니다."
"전하께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결국 소문일 뿐인 일 아닌가."
"네. 소문일 뿐입니다. 그러니 귀족들도 아직은 조용합니다. 그레이 브리센이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 날 칼리안 왕자님이 소란에 연관되었던 일에 대해서도 별다른 이야기를 퍼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목하고 있습니다. 왕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란델 왕자님은, 그리고 플란츠 왕세자 저하는,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는지."
"귀족들이 눈치를 채고 나를 지켜보는 것과 내가 여기 있는 게 무슨 상관인데."
"귀족들의 시선이 저하께 닿아있다 함은, 그레이 브리센이 저하를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하께서 체르밀 궁 밖으로 나서지도 않고 왕자님을 걱정하고 있음을 전부 다 알게 된다는 겁니다."
"······ 그래서."
"제 말 뜻을 모르시는 분 아니잖습니까."
플란츠가 대답없이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드미레아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서였다.
한참이 지난 뒤 플란츠의 입이 열렸다.
"나흘이나 지났으니. 동생 걱정은 충분하다. 설마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인가."
"맞습니다. 나흘이나 지났으니."
형제간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 여기는 것.
때문에 플란츠에게 발칸의 힘과 왕세자의 자리를 빼앗긴 뒤에도 여전히 다른 불만 없이 플란츠의 손을 놓지 않는 것. 오히려 자신과 지그프리드의 힘으로 플란츠의 뒤를 받쳐주고 있는 것.
이렇게나 우애 깊은 행동은 칼리안이 해야 할 일이다.
칼리안이 사라진 뒤 플란츠가 취해야 할 것이 아니다.
"보여주실 만큼의 걱정은 이미 모두 보여주셨습니다. 이 이상 걱정을 보이시면 그레이 브리센의 머릿속에도 생각이라는 것이 들어갈 겁니다. 저하께서 '이 좋은 일'을 두고 대체 왜 그렇게 미련스레 구시는지. 그 이유가 무엇일지. 그렇다면 누가 누구의 약점이 될 수 있는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요."
"소공작."
"그러니.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게 지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하."
칼리안이 사라졌을 때 플란츠는 다른 행동을 해야 했다.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언젠가는 제 손으로 불러오게 될 날을 운좋게 빨리 마주했다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해야 했다. 그런 뜻이었다.
"나는. 소공작이."
플란츠의 숨 소리가 조금 더 바스라졌다.
시디 신 시선이 리리에를 향했다. 낮디 낮은 목소리가 드미레아를 향했다.
"때와 장소를 안 가리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어린 리리에가 있는 곳에서 온기라고는 일절 담기지 않은 말들을 입에 올리는 일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냈다.
드미레아의 갑작스런 방문.
체르밀 궁이 아닌 세뉴 관에 와서 플란츠를 찾는다 하기에, 그냥 돌아가라 하려다 말고 걸음을 했다. 혹시나 다른 소식을 접했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드미레아의 곁에 리리에가 함께 있었다.
사라진 동생 때문에 복잡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리리에와 함께 왔나보다고. 리리에를 본 플란츠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칼리안이 드미레아에게 했던 말을 전해준 일을 신경썼던 모양이라고. 그래서 이러나보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 때문에 마음을 써 주는 것에 고마움도 느꼈다.
그런데 아니었다.
칼리안이 사라진 상황을 너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라고. 그레이 브리센을 속여서 이용할 수 있을 발판으로 삼으라고. 그런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리리에를 옆에 둔 채로.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 아닙니다. 겉과 속이 다른 세상을 함께 보고 배울 필요도 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이 세상을 직접 눈으로 보게 해주려고. 동생의 실종조차 내가 쓸만한 좋은 패로 삼는 모습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하겠다며 데려왔다는 소리다.
드미레아가 꺼내놓는 말이 마치 심지 곧은 검과 같아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목표만 좇는 검과 같아서. 그런 말이 오가는 자리에 리리에를 데려온 이유가 지나치게 냉정하여서.
"소공작이. 나와 같은 사람을 한 명 더 만들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는데."
"실망하셨습니까."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
"저는 보호하겠다 했지, 주변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고 생각없이 자라도록 가둬두겠다 한 적 없습니다."
그 드미레아가 정말 그렇게나 차가운 마음을 먹고 이 자리에 리리에와 함께 온 것이 맞을지. 평소와 달리 그런 것을 채 생각해내지 못하는 연두색 눈이 감겨들었다. 드미레아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또 한참이 지난 뒤, 낮은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먼저 가지."
차 한 모금, 함께 놓여 있던 맑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드린 조언은 듣지 않으실 겁니까."
"······ 그딴 걸 내 패로 쓸 생각. 없어."
"알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드미레아가 똑같이 몸을 일으켰다. 둘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던 리리에 역시 일어나 섰다.
"힐 경을 데리고 함께 왔습니다. 부재중인 마나실 후작을 대신해 전하를 호위할 겁니다. 허나 제가 힐 경과 둘이 온다면 칼리안 왕자님과 마나실 경의 부재를 인정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리리에와 함께 왔습니다."
평소의 플란츠였다면 이미 짐작했을, 드미레아가 왕궁을 방문한 진짜 이유가 이제서야 전해졌다.
"명분은 중요하니까요."
앨런 마나실이 칼리안을 찾겠다며 나선지도 이미 사흘이다. 다른 가벼운 일로 잠시 외출한 것이 아님은 이미 모두가 짐작할 것이다. 때문에 르메인, 혹은 란델과 플란츠에게 만일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염려한 드미레아가 시오나 힐에게 지난 번처럼 잠시 왕궁에 머물러 줄 수 있을지 부탁을 했다.
다만 시오나만 왕궁에 든다면 또 무슨 말이 퍼질지 알 수 없는 일이라서, 드미레아는 리리에까지 데리고 함께 왕궁을 찾았다. 다른 큰 일 때문이 아니라 본래부터 정해뒀던 약속을 오늘 지킬 뿐이라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도록 말이다.
사실이야 어떻든 명분은 중요하니까.
"물론 리리에에게는 미리 설명을 했습니다."
"맞아요. 드미레아에게 얘기 들었어요, 저하."
물론 처음으로 왕궁에 가게 되는 목적이 누군가를 위한 눈가리개 역할이라는 사실에 대해 리리에에게 미리 설명도 하고 양해도 구했다. 기대한 것만큼 즐거운 날이 되지는 못하리라고. 오히려 우울하고 실망스런 날이 될 지도 모르는데 같이 가도 괜찮겠느냐고.
리리에는 고민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리하여 함께 왕궁에 들었다.
그래놓고 플란츠를 찾아와서는 차디찬 말부터 꺼냈다. 칼리안이 없다며 넋놓고 있지 말고 이 기회를 틈타 그레이를 속일 방법을 강구하라면서.
그런 말에 플란츠가 화를 내니, 왕궁에 시오나를 데려왔음을 그제야 알린다. 리리에를 데려온 진짜 이유를 그제야 말한다.
"······ 소공작. 지금, 나를."
"네. 제가 저하를 떠봤습니다."
마치 플란츠의 속내를 슬쩍 들여다보려는 듯이 말이다.
"왜."
"아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오라버니를 위해 칼리안 왕자님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 오라버니고, 그렇기 때문에 칼리안 왕자님의 안위가 중요합니다. 전하 역시, 저는 믿지 않습니다. 전하를 보호하려는 것도 칼리안 왕자님의 안위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칼리안 왕자님이 무슨 뜻을 두고 저하를 대하는지 모릅니다. 저하께서 왕자님의 등에 칼을 꽂을 분인지 아닌지. 왕자님만큼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걸 하필 이 상황에 확인했어야 했다는 소리인가."
"네. 하필 이 상황에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어째서."
리리에가 드미레아의 곁으로 걸어왔다.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듯 리리에의 머리를 쓰다듬은 드미레아가 리리에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플란츠를 향해 다시 말했다.
"칼리안 왕자님의 아랫사람 중 한 명이 사흘 전 새로 임명된 수도 경비대장의 딸입니다."
수도 경비대장으로 보직 변경되었던 트리번 피아트.
그는, 가명을 쓰지 않는 몇 안 되는 시종과 시녀 중 한 명인 메를린 피아트의 아버지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갑작스레 그 이름을 낸 것에, 잠시 리리에를 보던 플란츠의 시선이 드미레아를 향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임에도 드미레아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다시 열었다.
"그런데 수도 경비대에서 외팔이 검사 한 명을 붙잡았습니다. 휘트린 영지 출신이라는 말에 경비대장이 직접 그를 만났고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 하는데······ 누구를 믿고 그 말을 알려야 칼리안 왕자님의 안위에 이상이 없을지. 그것을 가늠하지 못하겠다 합니다."
그가 수도 경비대로 오기가 무섭게 수상한 외팔이 검사 한 명이 붙잡혔다. 출신지가 칼리안의 영지임을 확인한 이들이 트리번에게 보고했고 트리번이 그를 직접 만났다. 그리고 모종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것을 왕실에 전해야 했으나 트리번은 도대체 누구를 믿고 말을 전해야 할지, 이 일을 누구에게 알려야 '살아있는 칼리안'이 왕궁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판단하지 못했다.
결국 트리번은 메를린을 찾았다.
칼리안이 없어진 상황에 믿을 수 있을 왕실의 또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르메인인지, 란델인지, 혹은 플란츠인지. 그것을 물었다.
그런데 르메인이 칼리안을 어찌 대해 왔는지 아주 오래도록 지켜본 메를린은 이 나라의 국왕이자 왕자의 아버지인 이조차 믿지 못했다. 차라리 지그프리드가 나서는 것이 낫다 생각할 만큼 불신했다.
그래서 메를린은, 칼리안의 일로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머무르고 있던 얀을 찾아갔다. 도움을 청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말해."
"저하께서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으면서 신뢰할 수 있는 발칸의 단원. 몇 명이나 됩니까."
플란츠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한 명."
"······ 그렇다면."
"빼고. 나머지 전부."
군단에 소속된 마법사와 기사 중 딱 한 명.
애초부터 카이리스 사람도 아니고 사람이라 하기보다는 전서구에 가까운 딱 한 명. 도대체 왜 안 가는지 몰라도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는 세크리티아의 세작을 제외한 전부. 그들 모두를 입에 담았다.
플란츠의 답을 들은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메를린의 말을 들은 얀이 말했다.
플란츠를 찾아가라고.
"칼리안 왕자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플란츠의 입에서 길고 긴 숨이 흘러나왔다.
* * *
- 콰아아앙!
굉음이 울렸다.
그러나 대지가 흔들리지 않았다. 공기가 찢기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주변이 소란해지지도 않았고 거대한 먼지가 퍼져나가지도 않았다.
"깜짝이야."
정말 깜짝 놀랐다는 듯, 다만 그 이상의 낭패감은 없는 목소리가 칼리안을 향했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빛이 도는 검은 눈. 아델리아였다.
두터운 실드로 칼리안의 검을 막고 사일런트까지 순식간에 펼쳐낸 아델리아가 눈을 치켜떴다.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칼을 써?"
"그걸 내가 신경 써 줄 필요가 있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묻지도 않아? 성질머리 왜 그래?"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납치를 해? 정신머리 왜 그래?"
"납······ 내가 뭐가 한가해서 그딴 걸 해?"
"그게 아니면 대체 왜 여기있는데, 내가?"
"그러니까 그것부터 일단 확인했어야지."
"그랬으면 재우려 들질······ 말았어야지."
깜빡, 하고.
칼리안이 들고 있던 검이 잠시 빛을 잃었다 돌아왔다.
- 욱씬!
그와 함께 심장에서 통증이 인다. 축복의 힘을 쓰느라 오러를 펼치기가 버거울 때의 느낌임을 이제 잘 알았다.
그런 칼리안을 슬쩍 본 아델리아가 말했다.
"밥은 없고 물은 먹여놨어. 어차피 그 정도 굶어도 안 죽잖아? 약도 없어서 그냥 뒀어. 알아서 아물 것 아냐."
그제야 피 냄새가 난다.
아델리아 말고 칼리안 스스로의 몸 이곳 저곳에서 나는 피 냄새가 이제야 느껴진다.
"이래서 검 쓰는 것들은 짜증나. 제 몸이 어떤진 관심도 없고 칼부터 들지. 엄청 아플 것 아니까 얌전히 앉아. 나 지금 너희 아빠가 보낸 놈들이랑 네 그 잘난 스승 눈 피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니까. 힘드면 그냥 자든가 싫으면 대화나 해, 성질 그만 부리고."
잠들기 직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전히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아서, 칼리안이 작게 입을 열었다. 여전히 칼은 집어넣지 않은 채였다.
"설명."
"납치 아니야."
"그럼."
"구한거지."
"네가 나를?"
"내가 너를, 그래."
"왜?"
"그건."
순조롭게 잘 이어지던 평화로운 대화가 잠시 멈췄다. 미간을 찌푸린 칼리안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것을 느낀 아델리아가 짜증 섞인 말을 꺼냈다.
"너 대체 뭘 믿고 나를 협박해? 내가 마음 먹으면 너 하나쯤,"
"날 믿는 게 아니라 널 못 믿는 거야, 아델리아."
아델리아가 헛웃음 소리를 냈다.
백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죽다 산 놈한테 고맙단 말도 아니고 협박이나 받게 되는 일은 처음 겪은 탓이다.
"너 말야."
"잊었나본데. 아델리아."
말을 또 자른 칼리안이 왼손을 들었다. 그리고 은근한 흉이 남아있는 아델리아의 목을 가리켜보였다.
"날 죽이려 들었던 건 너야. 금지된 마법으로 장난질이나 쳐 놓고 도망간 것도 너야. 그걸 안 죽이고 살려준 건, 나야. 공격하려 했든 구해주려 했든 관심없어. 내 발 멋대로 묶어놓고 구해줬느니 어쨌느니 질척대는 놈 얘기 진득하게 들어 줄 만큼 여유로운 사람도 아니야. 안 그래도 없는 인내심 아예 사라지기 전에 똑바로 설명해. 당장 갈 데 있으니까."
"가긴 어딜 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놈이."
브리지트 숲에서 자신에게 날아들었던 칼날이 다시 목을 파고드는 기분이라, 저도 모르게 목 언저리에 손을 가져다댔던 아델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때 브리지트 숲에서 다누가 아델리아를 추방하지 않았다면 둘 중 한 명은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 분명하니까.
"하여간 요즘 것들 버르장머리하고는."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 누가 됐을지는 아델리아도 장담하지 못할 일이지만.
"그 날. 브리지트 숲에서 다누가 그러던데. 참을 일이 한 번. 귀찮을 일이 한 번이면 크게 고마울 일이 한 번이라고. 그래서 브리지트 숲에서 참고 넘어갔어. 그러다 얼마 전에 세르제인 부탁받고 너희 첫째 형 잠깐 만나러 왔는데 어디서 싸움 난 소리가 들렸어. 궁금해서 가봤더니 네 놈이 죽기 직전이잖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구했어. 아는 놈이랑 모르는 놈 싸우고 있으면 아는 놈 살려야지 어쩌겠어. 죽이다 보니까 내 심장에 있는 돌이랑 똑같은 걸 가진 놈들이 있길래,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싶었긴 한데 일단 죽이던 놈들은 다 죽였어. 덕분에 내가 놈들 시체까지 다 치웠어."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목격자가 싹 죽었잖아? 넌 죽을 만큼 다쳤고, 난 너랑 싸운 적이 있고, 게다가 너 공격한 놈들이 제온인데 내 심장에도 놈들이 준 돌이 들었다고. 그럼 대부분 뭐라고 생각해? 너처럼 생각하겠지. 그래서 일단 고민을 좀 했어. 네가 좀 나을 때까지 푹 쉬게 해 뒀다가 잘 달래서 데려다줘야겠다 했는데 네 스승 그 놈이 주변을 어슬렁거리잖아?"
"······ 그래서."
"그래서 이렇게 된 거라고."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제온이 다시 나타났다.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으나 아델리아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제온과 싸움이 났고 아델리아가 구했다 한다.
"내가 지금 네 스승한테서 숨으려고 그 돌에서 나는 힘까지 끌어다 쓰고 있어. 그런데 네가 깨자마자 날 죽이겠대. 그럼 내가 억울해, 안 억울해? 나흘 넘게 이게 뭐야?"
온 몸이 찢어질 것 같던 통증이 일순 멈췄다.
한동안 눈을 감고 숨을 참던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며칠?"
숨막힐 듯 짓쳐드는 살기에, 아델리아가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