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76화 (377/527)

제67장. 향기(2)

커피를 좋아하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커피 아닌 차들을 계속 선물했다. 난꽃의 향이 나는 녹차라거나 색 좋은 국화를 말린 차, 작은 제비꽃을 손수 길러내 만들었던 차 같은 것들을 보냈다. 새까맣게 타버린 향에 취해 잠 못 들지 말고 편안한 향에 잠겨 잠시나마 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향기 좋은 차들을 고르고 골라 보냈다.

그 마음을 알아 주었을지, 단순히 차가 마음에 들었을지.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앨런은 유독 차에 대해 많은 감상을 보내곤 했다. 이번 차는 향이 마음에 들었다거나, 맛이 영 입에 맞지 않았다거나, 칼리안이나 히나가 좋아하여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주고 말았다거나, 그렇게.

"색이 좋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애써 준비해 건넨 '선물'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면서 함께 내어준 차에 대해서는 짧게나마 감상을 전했다.

서운해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인 엘린느가 찻잔 속을 들여다보다 말했다.

"아마란스라는 꽃으로 만든 차야. 보고있자면 어쩐지 그대가 생각나서 나는 그것이 참 마음에 들었지."

앨런이 웃음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앨런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 탓이었다.

"저는 전하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만."

"아, 그도 그렇군."

짙은 분홍빛의 꽃으로 만든 차.

찻물의 색은 꽃보다 옅었다. 잘 익은 복숭아같이 고운 분홍 빛이었다. 때문에 어찌 본다면 앨런의 머리카락 중간 즈음 혹은 가지런한 눈썹의 색을 떠올리게 했고 또 어찌 보면 엘린느의 눈 색과도 비슷했다. 그랬으니 엘린느는 앨런을 떠올리고 앨런은 엘린느를 생각할 수밖에.

"색은 화려한데 맛은 또 그렇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듭니다."

볶은 귀리를 우려낸 것처럼 담백한 맛이 나는 분홍빛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앨런이 입을 열었다.

"혹시 제 몫으로 나눠 줄 것이 있겠습니까."

"또 그대의 새 아드님에게 전부 대접하려 하는 것이로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앨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에는 며느리와 손녀입니다, 전하. 레이첼과 베로니카를 불러다 건네주면 좋아할 터이니 넉넉히 있다면 많이 주시지요."

한 잔으로 만족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차를 선물해달라 하는 말에, 엘린느가 기꺼운 듯 대답했다.

"그래. 많이 준비해두라 하겠네."

조금이라도 더 건네 줄 것이 있다는 것이 다행한 일이다. 어차피 엘린느는 앨런에게 평생을 두고 갚아도 털어내지 못할 빚을 졌으니까.

고맙다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인 앨런이 분홍빛 차를 다시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맛을 볼 수록 신기한 차입니다. 색은 이렇게 화려하면서 맛은 수수하니. 세크리티아에서 단풍잎 말린 차를 마셨던 적 있었는데, 그것과 완전히 반대되는군요."

"단풍잎을 차로 마셔보진 않았는데. 그것으로도 차를 만드나보군."

"네. 허나 썩 얌전한 맛이 나지는 않습니다. 시고, 떫고, 간혹 달기도 하고 아무튼 여러가지가 섞인 맛이 드는데 제 입에는 영 맞지 않았습니다."

"쓰거나 달거나. 그대는 그런 것을 좋아하니까."

"네. 허나 전하의 입에는 맞을 지도 모르겠으니 다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대접을 해드리겠습니다."

엘린느가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처음 앨런에게 선물을 했을 때, 앨런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 무엇을 보내든 다 받았으나 그 뿐. 아무 말도 전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잘 쓰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왔다.

그런 앨런이 어느새 약속을 입에 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다음에도 찾아오겠노라 하는 말을 들으니 이미 차를 대접받은 것 같은 마음이 든다.

"그래. 기대하지."

별 것 아닌 듯 대답한 엘린느가 아마란스 꽃차를 마셨다. 그리고 잠시 눈을 즈려감았다.

귀하디 귀한 분홍 다이아몬드처럼 겉보기로는 그저 어여쁘고 호사한 색의 차였으나 그 맛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차. 딱 맞는 온도에 몇 번을 올려 수분을 빼고 손으로 보듬어 가며 식혀내야 그 빛을 잃지 않는 차. 그렇게 많은 손을 타고 난 뒤에야 간신히 수수한 맛을 내어주는 그런 차.

다른 꽃차라 하여 과정이 다르지 않음은 알지만, 유난하게도 엘린느와 앨런을 닮았다.

그것이 그저 둘을 닮은 빛깔 때문인지.

화려한 날 떨어진 꽃처럼 서러이 닳은 마음을 참 오래도록 부대끼고 말려내고 나서야 간신히 몇 마디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그리 힘겨운 둘의 사이를 닮은 맛 때문인지.

둘 중 어느 쪽일지 쉬이 가늠이 되지 않아서 아주 잠시 눈을 감고 차를 마셨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뒤 대화를 나눌 만한 주제를 생각해내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말해주지 않을 건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사실은 해룡 아르나이젤을 만나러 왔다.

물론 아르나이젤을 만나려 한 이유는 한 가지였다. 칼리안이 건네주었던 시간의 축의 파편. 그것을 어찌 사용했을지, 그것을 혼자 알아내려니 막막한 기분이 들어 바람도 좀 쐴 겸 그러다 아르나이젤을 만나면 잘됐다 하나만 물어보자 할 겸 찾아왔다.

본래 아르나이젤은 리베른의 바다 끝과 연결된 대해를 지키는 용이 아닌가. 물론 칼리안을 찾아 세크리티아의 바다로 오기도 하고 그 때가 아니라 해도 세크리티아의 뱃사람들 앞에 간혹 모습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리베른에서 더 자주 발견됐었다. 그래서 리베른에 왔고 바다 위 이곳저곳을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아르나이젤을 찾았으나 결국은 만나지 못했다.

"늙은이가 잠시 바람을 쐬러 왔겠거니 여기시지요."

제 나이의 반절밖에 안 되는 얼굴로 꺼내놓는 말에 어느정도 익숙한 엘린느가 실소하며 대꾸했다.

"하긴. 리베른의 바다가 보기에 좋기는 하지."

"물론 세크리티아의 바다보다야 좋겠습니까만."

"이거 서운한데. 아무리 그래도 그대와 연이 없는 나라를 이곳보다 높이 쳐 준다니."

"객관적으로 따진다면 세크리티아의 바다만큼 보기 좋은 곳이 또 있겠습니까. 아니었다면 바다를 지닌 땅에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세크리티아 대왕께서 이곳에 터를 두셨겠지요."

칼리안의 정체를 꿈에도 모르니 하는 소리다. 그렇다 해도 져 줄 생각 없던 앨런이 고집을 부리듯 이야기했다.

"그래. 그대 말이 맞아."

결국 앨런에게는 져 줄 수밖에 없는 엘린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앨런에게 전해야 하는 말이 있음을 상기하고 앨런 쪽을 쳐다봤다.

"아델리아는 지금 텐실에 있는 듯 해. 이곳에서 아델리아를 따르던 마법사 한 명이 텐실로 갔다가 우리쪽 세작에게 꼬리를 밟혔어. 마법사 눈을 속이는 것이 워낙 어려워 더 가까이 가지는 못했네만 돌아가는 정황을 보아선 아직 텐실을 벗어나진 않은 것 같고."

"사실 머무는 곳에 대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먹는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이곳이나 카이리스에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위인이니."

"그래도 어디에 적을 두었는지는 무시하기 힘든 일이지 않나."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앞으로도 확인되는 것이 있을 때마다 알리겠네. 그러니 비싼 수정판 장식용으로 두지 말고 연락 좀 잘 받아."

이렇게 말한 엘린느가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진 수정판 하나를 가리켜 보였다.

칼리안과 체이스가 하나씩 가지고 있는 두 번째 수정판 말고, 앨런에게 처음으로 건넸던 수정판의 나머지 한 쌍이었다.

"그리하지요."

수정판을 보다 보니 조금 전 건네받은 선물이 생각난 앨런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느긋한 손길로 포장을 풀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린느가 입을 열었다.

"내가 관리를 소홀히 하여 아델리아가 사고를 친 것이니, 그 보상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만들라 했네. 그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앨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자를 마저 열었다. 그리고 생각한 것 이상의 물건이 들었음에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리베른 왕궁의 방대한 보물창고를 직접 보았기 때문에 그 물건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한 눈에 알아본 까닭이다.

앨런의 얼굴을 본 엘린느가 버릇처럼 말했다.

"그거 비싼 거야."

"······ 기껏해야 아다만티움이나 좀 구해왔겠거니 하였는데. 상상 이상의 재료를 쓰셨습니다."

"그래서 방금 말했지 않나. 비싸다고. 그러니 여기저기 퍼 주지 말아. 아껴 써."

검은 빛을 띠는 어두운 은색의 반지와 암적색의 얇은 가죽으로 된 팔찌. 반지의 안쪽과 팔찌의 이음새 부분에 박힌, 작고 투명한 검은 보석.

하피의 알 속에서 찾은 분홍빛 마석이나 인어의 눈물이 모여 만들어진 진주빛 마석과는 비교되지 않을 귀한 재료. 바로 용의 뼈와 가죽, 그리고 심장으로 만든 통신 용품이었다. 기존에 칼리안과 키리에가 지녔던 것을 아델리아가 죄다 부서뜨려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엘린느가 건네주는 보상품인 셈이다.

"이곳에서 지낼 때 그렇게 좀 내어달라 부탁을 해도 안 주시더니. 그리 귀한 재료로 고작해야 통신용품 세 쌍을 만들어 주십니까."

"더 큰 건 나도 못 내줘. 고작 통신용품이니까 멋대로 꺼내다 만들게 하는 거지. 그나마도 그대한테 준 세 쌍이 전부고 더 만들지도 못해. 그리고 아마 그 재료로 더 큰 뭔가를 만든다 하면 시스파니안께서도 허락 안 하실 걸."

작게 웃은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용의 송곳니, 혹은 발톱이 아닌 이상 잘라내거나 가공할 수도 없는 재료들. 아무리 아델리아라 한들 절대 손대지 못할 재료로 만들어진 '고작 통신용품' 세 쌍을 챙겨 품 속의 주머니에 넣었다.

"잘 쓰지요. 아델리아 맞닥뜨릴 일 많은 손에 쥐여주면 되겠습니다."

세 쌍을 전부 다 칼리안에게 주어야 되겠다 생각하면서.

아무리 귀한 재료로 만든 물건이라 한들, 그것을 받고 좋아하는 칼리안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값어치를 가질 수야 있겠는가. 그러니 이번에도 아낌없이 건네주어야지.

* * *

그런 말을 했었다.

'스승님과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스승님께서 그 돌을 심장에 품으신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데 차마 상상이 되질 않았습니다. 솔직히 상상만으로도 무서운 일이 아닙니까. 물론 그 대화를 나눈 얼마 뒤에 아델리아의 심장에 돌이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만. 그저 호기심 때문에 그런 철없는 일을 벌인 듯 하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칼리안의 말에 공감했었다.

아델리아가 어느 한 종족 혹은 대륙을 없애려는 마음으로 돌에 손을 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고.

'그리고 또 그런 얘기도 했었습니다. 제 심장에 그 돌을 넣는다면, 저는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까. 스승님을 이기거나 시스파니안에게 검을 겨눌 수 있을까.'

······ 그깟 돌 따위.

놈은 이미 세렌티에게 살의를 보낸 전적이 있다. 그것으로 모자라 있는대로 짖어댔던 놈이다. 이물질 하나 안 들어간 멀쩡한 심장 가지고, 미쳤다는 말만으로는 도저히 표현도 안 될 그런 짓을 태연하게 벌인 놈이다.

만약, 놈의 심장에 그 돌이 이미 들어있었다면.

세렌티는 잘 자다 말고 세뉴 강을 건넜을 거다.

'있겠지.'

'네.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스스로를 참 잘 아는 동생 놈이 태연하게도 대꾸를 했었다.

그 검은 돌.

평범한 검사가 오러를 쓸 수 있게 해 주고 노력하지 않은 마법사가 이중 속성 마법을 부릴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돌. 그것이 소드마스터에게, 혹은 대마법사에게 들어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걱정했었다.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런데 그와 조금 다른 가정은 해본 적 없었다.

평범한 검사 말고. 소드마스터 말고.

만약 소공작이, 혹은 동생 놈의 그 과묵한 기사가, 그것을 얻는다면. 검의 길을 목전에 둔 기사가 그것을 심장에 넣는다면.

- 카아아앙!

과연 어떻게 되는가.

'무서운 왕자님, 심장에도, 있다는 그 돌, 혹시, 흔한 건가요?'

'적지는 않은 것 같은데. 왜.'

'자상한 왕자님 옆에, 서 있는, 미친놈, 아니아니아니, 저 사람.'

'······ 그래.'

'저 사람, 심장에도, 있어요.'

'내가 함부로 살펴보지 말라고 했었는데.'

'알아요. 그때 그 하얀 머리, 마법사처럼, 곧바로 알아챌까 봐, 의심하지 않을, 기운을, 살짝 보내봤는데, 눈치 못 채서, 살펴봤어요.'

히나가 제 몸을 훑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수준. 그러나 에일라를 내몰 수 있을 만큼은 되는 실력. 아마도 드미레아나 키리에와 엇비슷할 정도의 검을 다루는 라시드가 심장에 돌을 심었다.

지금 상황에 그런 라시드가 섣불리 움직일 수 없게 하려면, 칼리안을 이 이상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것을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라시드가 섣불리 움직이거나 칼리안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면.

'분홍 머리 마법사.'

'네, 저하.'

'향수를 쓰던데.'

'네. 맞습니다만······ 아, 혹시 그동안 거슬리셨습니까? 그러시면,'

'말고. 지금 가지고 있나.'

'네. 주머니에 들어있습니다.'

'팔아. 나한테.'

'······ 네?'

'당장.'

라시드가 섣불리 움직이거나 칼리안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면, 라시드가 섣불리 움직여 나를 건드리게 해야 한다. 그래서 칼리안과 맞붙게 해야 한다. 좋은 실력에 돌까지 가졌으니 그 효과가 대단하겠으나.

어차피 놈은 내 동생을 이기지 못한다.

절대로.

만에 하나 생각이 틀렸다 해도, 만에 하나 실력 차이를 잘못 계산했다 해도, 괜찮다.

'일이 생기면 소공작이 왕궁에 돌아가라 얘기할텐데. 히나와 내 아우님의 새 부하만 함께 보내고 사단장은 대기하도록. 파란 머리 부군단장 오면, 같이.'

'네. 알겠습니다, 부군단장님.'

지금 이 자리에 '같은 편'이 될 사람은 충분히 많았으니까. 그런 계산을 마치고 이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생각한대로 라시드를 잘 긁어 그 무겁던 심장을 내보이게 했다.

라시드가 숨겼어야 할 약점을 단번에 틀어잡았다.

- 카앙, 카아앙!

처음에는 투명했고 그 뒤에는 검붉었으며 종내에는 붉게 변한 검. 과거를 털어내고 나니 붉은 색만 남았다며 아쉬워했던 검. 그것이 지금은 검은 빛이었다.

어둠에 잠겨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검으로 조금 더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고자 했음인지. 피어의 영향으로 라시드에게 겁을 주기 위함인지. 단순히 그레이에게 보였던 것과 같은 빛의 검을 사용하기 위함인지.

'이거 확인하려고, 당신 목을 걸었어?'

아니면 설마, 화가 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칼리안은 지금 그것을 부러 검게 만들어 휘두르고 있었다.

- 카가가강, 카앙!

- 콰아앙! 카가각! 캉!

어둠을 가를 듯한 라시드의 붉은 검.

어둠을 전부 삼킨 듯한 칼리안의 검.

두 검이 얽혔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검의 잔상이 아니라면 눈으로 좇아가기도 힘들 만큼의 속도로, 순식간에 십여 차례를 붙고 멀어졌다. 귀로도 제대로 가늠하기 힘들 만큼의 날 선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어느 순간 칼리안의 인영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재킷까지 벗어두고 제 몸에 딱 맞는 검은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던 탓에 펄럭이는 천자락의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싸움이 시작될 때 들렸던 사락거리는 소리가 칼리안이 스치고 지나간 플란츠 자신의 재킷에서 들린 것임을 그제야 알았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중요한 사실은, 동생 놈이 지금 정말로 아무 소리 없이 날뛰고 있다는 것, 그래서 눈 하나 마음대로 깜빡이지 않고 있지만 도무지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카아앙!

그러나 라시드는 아니었다.

순식간에 몸을 튼 라시드의 검에서 붉은 빛이 일렁였다. 그 사이로 불똥이 튀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에야 허공에서 라시드를 향해 검을 내리찍고 있는 칼리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카앙, 캉, 카가강!

달빛 아래 더 하얗게 보이는 팔이,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얼굴이, 이럴 때마다 유난히 도드라지는 눈이, 끊임없이 희고 붉은 잔상을 남겼다. 그리고 다시 사라졌다.

- 타앗!

라시드가 바닥을 박찼다. 그리고 또 한 번 공중으로 몸을 띄운 칼리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묵직한 것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잠시 뒤에 들려온다. 서로를 향하던 칼날이 원하는 것을 취하지 못해 내뱉는 듯한 소름끼치는 울음이 이어진다.

양 손으로 검을 쥐고 칼리안의 검을 강하게 올려친 라시드가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칠흑의 칼날 대신 거센 바람이 일며 라시드의 검을 밀어냈다. 검이 아닌 마법으로 공격을 치워낸 칼리안이 라시드를 향해 달려든다. 또 한 번, 검의 울음이 들려온다.

칼리안의 공격을 흘려보낸 라시드가 재빠르게 회수한 검을 뒤집어 잡아 매섭게 꽂아넣었다. 허리를 틀어 그 공격을 피한 칼리안이 살을 에일 듯한 기운의 붉은 검을 바깥으로 쳐냈다. 칼리안이 자주 사용하던, 마치 암기와 같은 여러 개의 검을 보내 라시드의 목을 당장 베어버릴 수 있겠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라시드는 칼리안을, 그리고 칼리안은 라시드를, 지금 이 자리에서 죽여 없앨 수 없다. 때문에 서로 여전히 많은 것을 숨긴 채로 그렇게 맞붙고 있었다.

라시드가 칼리안을 향해 뛰어올랐다.

칼리안의 모습이 흐려지듯 솟구쳤다.

- 카앙, 카가가강!

마치 날개라도 단 듯, 두 검이 공중에서 여러 차례 맞붙었다. 그 날개에서 떨어져내린 깃털과도 같이 살짝 바닥을 디디고 다시 떠오른 둘의 검이 다시 한 번 서로를 향한다.

- 카앙, 카아아앙!

- 카가가강, 캉!

그렇게 하늘 위에서, 그리고 다시 내려앉은 땅 위에서, 수많은 검격이 오갔다.

검을 보내면 막고, 상대가 사라지면 뒤쫓고, 찔러오면 피하고, 베려 하면 쳐내고. 서로 맞닿으면 힘을 겨루고, 그렇게. 수십 혹은 그 이상의 공방이 쉼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 카가가가각!

두 날붙이가 또다시 충돌하며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소리를 냈다. 칼리안의 검신에 검날을 댄 라시드가 그대로 제 검을 미끄러뜨리듯 밀어냈다. 칼리안이 검을 움직여 제 목으로 치닫는 검의 방향을 틀었다.

- 후욱!

에일라를 붙들다 생겨난 상처에 또 한 줄의 긴 금이 생긴다. 불어오는 더운 바람 속에 피 비린내가 짙게 밴다.

투두둑, 투둑······.

아래로 잠시 늘어뜨린 팔을 타고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놀람이든 아픔이든 혹은 감탄이든. 무언가 하나 쯤은 얼굴을 스칠 법 하였으나 붉은 눈은 여전했다.

라시드의 검에 길게 베인 상처를 훑어보듯 일별한 칼리안이, 그렇게나 여전히 무감한 눈을 한 채 라시드를 쳐다봤다. 긴 웃음을 매단 라시드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갚아주시는 겁니까?"

"그리 보입니까."

"그리 보입니다."

"그렇다면 갚은 것이겠고."

분명 서로의 숨통을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달려들어 싸웠으면서, 상처를 입힌 라시드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웃음을 지었다.

결코 치명상이 아닌 곳.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의도하지 않았던 상처. 그것이 칼리안의 팔에 생긴 탓에. 죽이지 못한다면 온전히 두었어야 할 왕족의 몸에 먼저 상처를 입히게 된 탓에.

라시드가 에일라에게 얻어냈던 것처럼, '정당방위'의 여지를 이번에는 칼리안에게 쥐여 줘 버리게 되었으니.

- 카아아아앙!

완전한 침묵 속에 두 검의 비명 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제껏 사려담아 보내지 않고 있던 칼리안의 살기가 라시드의 온 몸을 뒤덮었다. 순식간에 덮쳐오는 사막의 모래폭풍처럼 라시드의 숨을 막았다.

이제는 라시드를, 죽여버려도 되니까.

- 우우웅!

라시드의 손에 들린 붉은 검이 조금 더 짙은 기운을 내보냈다. 잘 숨겨두고 있던 힘을 한꺼풀 더 벗겨낸 라시드가 칼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들 듯이 굴었다.

칼리안을 향해 한 발을 내딛던 라시드가 순식간에 방향을 바꿨다. 마치 칼리안이 그러하듯이 라시드가 바람처럼 움직였다.

칼리안이 아닌, 플란츠를 향해서.

- 타아앗!

가만히 팔을 늘어뜨린 채 둘의 공방을 지켜보던 연두색 눈에 짙은 녹빛의 눈이 담긴다. 그 손에 들린 붉은 검이 한웅큼 들어찬다.

연두색 눈이 살짝 움직인다. 녹빛의 뒤를 본다.

붉은 눈이 보인다. 움직이지 않는다.

칼리안은, 오지 않았다.

······ 하.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와 함께 팔이 움직인다.

일순간 방향을 바꿔 달려드는 공격은 지겹도록 많이 봐왔던 탓에. 그 움직임이 어느 순간 자신을 향하는 정도로 겁먹지 않을 만큼은 겪었던 탓에.

- 카아아아앙!

날아들듯 치닫는 붉은 빛의 검.

그것을 앞에 두고 별을 들어올렸다. 막았다. 다시 달려드는 검을 흘려보내고, 되받아치고, 허리를 틀어 피하고, 공격을 돌려보냈다.

시나스타를 둘로 나누진 않았다.

칼리안에게 죽음의 권한을 넘겨주게 된 이 때조차 라시드가 온전한 힘을 다 뽑아내지는 않았으리라는 예감이 든 탓에. 상대가 숨긴 것이 있다면 나 역시 숨겨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 탓에.

- 카아앙, 카강, 캉!

생각을 읽어낼 수 없는 빛의 붉은 눈이 다시 다가왔다. 그 눈에 웃음이 담긴다. 새빨간 입이 속삭이듯 움직인다.

방금.

······ 체크. 라고 한 것 같은데.

이렇게 라시드의 머릿속에 잡념이 든 순간.

"말 했는데. 칼리안. 누구 몫인지."

플란츠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 콰직!

뼈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뭉클거리는 검은 기운이, 평소의 검보다 더 가늘어진 검은 기운이, 라시드의 목 아래를 꿰뚫었다.

그래.

에일라가 당했던 그 곳을 똑같이 되갚았다. 뒤이어 또 한 번 살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같은 곳을, 똑같은 곳을 되갚았다.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비틀었다. 고스란히 빼냈다.

더운 바람 속에 피 비린내가 담긴다.

"······ 내. 형님께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를 악문 라시드를, 한 치 앞에 놓인 먹잇감을, 목줄에 채여 물어뜯지 않게 된 맹수의 위협이 들려온다.

"굳이 살려두라 하시니."

이런 식으로 말고 제 방법으로 잡겠다 하였으니, 죽이지 않고 갚기만 하였노라고. 살기 그득한 붉은 눈이 그리 말했다.

- 후두둑.

한 발자국.

- 투둑.

- 투둑.

두 발자국.

"주신 기회 잊지 않고."

그리고 세 발자국.

- 뚝, 뚝, 뚝.

라시드가 뒤로 물러났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흘러내리는 피가 줄어든다. 상처가 아문다.

"다음에 잘 찾아뵙겠습니다, 왕자님. 그리고······ 세자 저하."

웃는다.

정중히 예를 보인다.

- 펄럭!

그리고 칼리안의 사람들이 모여있지 않은 곳, 건물의 뒷편으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점점이 이어지다 어느새 끊어진 핏자국을 남겨 둔 채로.

잠시 말없이 바닥을 쳐다보던 플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라시드의 상처와 달리 여전히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칼리안의 팔을 바라봤다.

"칼리안. 팔······."

"야."

플란츠의 말을 잘랐다.

- 화아악!

멱살을 틀어잡았다.

멋대로 휘어진 플란츠의 셔츠 핀이 흰 손바닥에 박힌다. 신경쓰지 않는다.

"······ 날아드는 검 막아낼 정신머리 가진 새끼가 왜 자꾸 목을 내놓지."

붉은 눈이 성큼 다가왔다.

유난히 도드라진다 느꼈던 그 새빨간 눈에 든 것을 보고 나니 이제야 확신이 든다.

"당신한테. 형님새끼 너한테 내가. 나도 말 했는데. 안 했나. 한 것 같은데. 아닌가. 내가 꿈을 꿨나. 어느새 진짜 돌아버려서 착각을 하나. 어느새 그 정도로 미쳤나."

"칼리안."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나도."

칼날의 색이 그랬던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화가 났기 때문이었음을. 설마가 아니라 정말로, 화가 났음을.

"내가. 형님한테."

향기가 치민다.

피 비린내가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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