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70화 (371/527)

제66장. 내 건데(2)

둘이었던 적은 많았다.

하지만 넷은 처음이다.

왕궁 밖에서 직접 마주친 왕족 일행의 수를 말함이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함께 돌아다니거나 칼리안과 드미레아가 있거나 혹은 칼리안과 키리에가 밖에 나오거나. 항상 칼리안이 껴 있는 것 같지만 아무튼 둘이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긴 있었다. 심지어 칼리안은 드미레아와 함께 인적 드문 서점이나 디저트 가게, 한산한 식당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왕세자와 왕자가 자신들의 정혼자와 함께 귀족들 바글거리는 아스트리샤 거리를 보란듯이 활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저렇게 가벼운 나들이인 양 왕궁 밖을 돌아다니는 왕족은, 지극히 위대한 고룡조차 통제하지 못했던 하츠아라 외에는 없지 않았을까.

"나 얼마 전에 저녁 먹으러 갔다가 도로 나왔어. 식당 들어갔더니 칼리안 왕자님께서 지그프리드 소공작과 식사하고 계시더라고.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잖아."

"길도 안 막고 호위도 없이 돌아다니시는 모습에 언제쯤 익숙해지려나 모르겠군."

"익숙해질 일 없을걸. 왕세자 저하께서 카밀론에 가시고 다른 왕자님들 스무 살 되신 뒤에 카이리시스 밖으로 나가면 저런 모습도 더는 못 뵐 텐데."

덕분에 조용한 소란이 일었다.

왕족을 만나는 것 자체가 신기할 리는 없을 귀족들이니 드러내어 환호하거나 둘러싸고 구경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어마어마한 시선들이 계속 따라붙었다.

"그나저나 전하께서도 참 대단하시지. 한 분도 아니고 두 분을 저렇게 왕궁 밖에 계속 내보내고 계시다니."

"그래도 보기에는 좋지 않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왕궁에 찾아가거나 큰 행사가 있어야지만 간신히 뵙던 분들이 아닌가."

"우리야 그렇겠지만. 그렇게 생각 안하는 놈들도 있을 텐데."

"저렇게 다니셔도 안위에는 문제가 없을 테니 걱정 않고 허락하시는 것이겠지."

아니다.

걱정 진짜 많은 르메인은 이 외출을 허락한 적 없었다. 아마 지금쯤 보고를 받고 또 아연해져 있을 터였다.

심지어 르메인은 아들 둘이 아르센을 데리고 지그프리드로 간 일도 뒤늦게 알았었다. 또 나갔다 하기에 잠깐 왕궁 앞에 놀러갔나보다 했는데 대뜸 이동 마법진으로 가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르메인이 얼마나 놀랐는지는 앨런만 안다. 앨런은 신경 안 썼지만.

결과적으로 르메인은 이번 외출 역시 반대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물론 칼리안은 르메인에게 미리 허락을 받으면 좋겠다는 매우 기특한 생각을 하기는 했다. 다만 르메인이 회의 중이었고 칼리안은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릴 만큼 인내가 길지 않았으며 왕궁 정문을 지키는 기사들은 이번 외출에 꼭 필요한 준비물이었던 순한 플란츠와 우리 히나를 잊지 않고 잘 챙겨 나온 칼리안을 막아설 깜냥이 못 되었을 뿐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도착하게 된 아스트리샤 거리.

"그런데 저 분이 바로 그 분이군."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꽃 한 송이를 꺾어다 둔 것처럼 웃고 있는 왕자, 숨을 쉬기는 하는걸까 하는 의심이 절로 드는 얼굴로 눈을 내리뜨고 있는 왕세자,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진중하고 위엄있는 표정의 지그프리드 소공작. 이 셋을 스치듯 바라본 이들의 눈길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멈추는 곳이 있었다.

"몇 번 본 적은 있는데 저렇게 함께 나온 것을 보니 정혼했다는 말이 뜬소문은 아니었나 보네."

"치유사라 했던가?"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한 것은 드미레아까지였지 히나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가장 많은 눈길을 받는 것은 바로 히나였다. 신물이 필요없는 치유사, 하프엘프, 왕세자의 정혼자. 그것만으로도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할 텐데 왕족들과 소공작까지 함께 있으니 시선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히나, 혹시 불편해?"

언제나와 같이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발굽 소리를 높이며 이 상황을 즐기는 까만 말 위에서 칼리안이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히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을 움직였다.

- 불편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조금, 신기해요. 오빠랑, 다닐 때에는, 이렇게, 쳐다보던 사람들이, 없었거든요.

"그건 키리에가 무서워서 못 쳐다본 걸 거야. 키도 엄청 큰데 맨날 화난 얼굴이라서. 게다가 내 기사이기도 하고."

- 그런데, 자상한 왕자님은, 사람들이, 안 무서워 하잖아요.

"예쁘잖아."

자랑하는 기색은 조금도 담기지 않은 말. 지나칠만큼 평이한 목소리로 튀어나온 그 말에 히나가 소리없이 웃었다. 그 뒤로 짜증을 가득 담아 혀를 차는 소리가 한 번, 깊은 한숨 소리가 한 번씩 났다. 칼리안이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임을 잘 아는 다른 두 명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생글거리며 정혼자와 형의 반응을 무시해버린 칼리안이 거리 한 쪽을 가리켜보였다. 금사로 수를 놓은 짙은 자주색 재킷과 새카만 셔츠 덕에 더 눈에 띄는, 새하얀 붕대가 칭칭 감긴 손을 굳이 움직이면서.

"저기. 슬레이크 경 의상점 보이네."

히나를 향했던 사람들의 눈이 자연스레 그 손으로 움직였다. 이제 의상점에서 나올 때 쯤이면 카이리시스 전역에 칼리안이 손을 다쳤더라는 소문이 퍼져있으리라.

흡족한 결과를 잘 만들어 낸 칼리안이 더 지체하지 않고 섀틴의 의상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플란츠의 예복 디자인을 꺼내와서는 어떻게든 공통점을 둔 드레스를 맞춰주려는 섀틴을 당장 거꾸로 매달아놓고 싶어하는 눈을 애써 꾹꾹 눌러 감으며 인내심을 부렸다.

분홍색, 옅은 노란색, 청보라색, 하늘색, 베이지색. 층이 많이 지고 레이스와 프릴이 가득 달린 화려한 드레스, 크게 불편하지 않을 길이와 장식의 드레스. 곁에서 수어를 통역해주는 드미레아의 도움을 받아 여러가지 색과 모양의 드레스들을 하나하나 골라가는 동안 히나는 단 한번도 연두색의 드레스를 쳐다보지 않았다.

청포도색 드레스. 실리케가 마지막에 입었다던 그것을 혹시라도 플란츠가 떠올릴까 걱정했기 때문임을 칼리안은 알았다. 분명 플란츠도 알아봤을 것이다.

- 꽃 장식은, 안 좋아해요.

세상의 모든 꽃을 다 좋아하는 히나가 이렇게 말했으니까.

- 대신, 예쁜 보석, 많이 달아주세요. 세자 저하가, 전부 다, 사주실 거예요.

그리고 히나는 칼리안의 예상 외로 이런 말을 했다. 그 동안 살려내느라 고생한 값을 싹 받아낸 뒤에 앞으로 또 다른 빚을 만들지 않도록 하려는 것임을, 이번에는 플란츠만 알아봤다.

- 사주실 수, 있죠?

"있어."

- 잘, 입을게요.

"응."

그렇게 히나는 예쁜 옷을 맞추고 드미레아는 평생이 가도 절대 입지 않을 옷들을 잘 구경하고 플란츠는 계산을 하고, 도운 것도 없고 돈도 안 쓰고 편안하게 있었는데 갑자기 생떼같은 내새끼를 어디로 보내주는 기분이 들어 다소 찝찝해진 칼리안이 의상점을 나왔다.

"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잠시 쉬다 가시겠습니까."

들떠있는 히나와 이런 시간에 아스트리샤에 올 일 없던 것은 자신과 마찬가지일 플란츠. 둘을 본 칼리안이 드미레아에게 대답했다.

"잠깐만 있다 갈까봐. 오랜만이라."

"그렇게 하십시오."

짧게 답한 드미레아는, 아스트리샤 거리의 한 카페에 들어가 어쩐지 낯익은 아디니아 꽃잎 색 머리카락을 가진 우락부락한 인상의 근육질 사내가 조심스레 담아주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와 히나에게 건넸다. 길에서 음식을 먹을 순 없을 두 왕족과 아이스크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자신의 몫은 사지 않았다.

많이 잦아든 시선들을 흘려 보내며 거리 한 가운데 놓인 작은 분수 앞으로 걸어갈 즈음,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내일 드미레아가 리리에를 데리고 궁에 오겠다 했는데, 형님 시간 비워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안 올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왜."

"열 살을 채우면 오겠다며 고집을 부린다 들었습니다."

"······ 나이."

"그래서 안 왔던 것 같은데요. 다른 아이들은 열 살이 되어야 왕궁에 들어온다면서요."

카이리스에서는요, 라고 덧붙은 소리없는 말에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까지 받은 리리에가 그 동안 왜 왕궁에 안 왔었는지를 이제야 이해했다.

"상관없는데."

"네. 왕궁에서 정한 것 아니라고 전해달라 했습니다."

"알았어."

"도착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알았어."

곧 칼리안이 드미레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늘 여러모로 도움을 준 것에 대해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려 했다. 이유가 있어 나온 길이지만 정말 오랜만에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게 되어 좋았다는 말도 하려 했다.

- 번쩍!

- 퍼어엉! 퍼엉!

그러나 마치 폭죽처럼 하늘을 밝히며 터져나오는 굉음에 입을 다물었다. 기분 좋은 곡선을 그리던 붉은 눈에 날이 섰다.

그레이가 요즘 자주 걸음한다던 나에랑샤 방향. 사람 많은 늦은 저녁. 공중에서 폭발한, 마력탄.

그래. 폭죽 따위가 아니다. 분명 마력탄이다.

"······ 에일라."

어두운 하늘을 잠시 빛낸 갑작스러운 불꽃을 싸구려 폭죽 정도로 여긴 사람들이 다시 발을 옮길 때,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상황을 파악한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히나, 여기 있어. 다른 데 가지 말고 드미레아랑 형님 옆에 꼭 붙어 있어. 형님도 잠시만 계십시오. 폭음이 있었으니 발칸 단원들이 나올 겁니다. 드미레아, 그때까지만 부탁할게."

몇 마디 말을 내던지듯 전한 칼리안이 레이븐의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수도 내에서 달리면 안 되는 것을 무시한 주인의 의지를 잘 알아들은 레이븐이 가장 빠른 속도로 발을 굴렀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레이븐의 그림자 위로 불꽃의 잔재가 떨어져내리는 착각이 든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드미레아를 향해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내 아우님의 새 부하가 터뜨린 게 맞다면, 곤란할지도 모르겠는데."

수도 안이다.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칼리안이 검을 꺼내들 일은 되도록 없어야 했다. 이미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드미레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품 속에서 작고 둥근 구체를 꺼내 하늘로 집어던졌다.

먼 곳에서 요란한 폭음을 울렸던 것과는 달리, 드미레아가 던진 구체는 아무런 빛도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 드미레아의 검은 말이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치켜들더니 몇 차례 발을 굴렀다.

말의 목을 툭툭 친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지그프리드의 기사들도 이곳으로 올 겁니다. 벗어나지 말고 계십시오."

"알았어."

방금 전의 그것이 잘 훈련된 지그프리드의 말들만 듣고 찾아올 수 있을 소음탄이었음을 눈치챈 플란츠가 대답했다.

곧 드미레아가 자신의 말에 올랐다. 그리고 몇 발자국을 앞으로 걸어가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말에서 내려 플란츠와 히나의 앞에 섰다.

"대체로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때로는 사람들의 시선만큼 안전한 것도 없습니다."

영문 모를 소리를 한 드미레아가 히나의 손을 턱 잡았다. 그러더니 플란츠의 손에 히나의 손을 쥐여주었다.

"그럼."

가볍게 묵례를 보인 드미레아가 다시 말에 올랐다. 그 뒤 칼리안이 향한 곳을 따라 말을 달려 사라져갔다. 손 꼭 잡은 왕세자와 발칸의 치유사를 남겨 둔 채로.

주변에 가득하던 귀족들이 발을 멈춘다.

수많은 눈이 사이좋게 붙잡은 두 손을 향해 고정된다.

시시때때로 다쳤던 탓에 플란츠의 손을 이미 너무 많이 잡아봐서 아이스크림 먹기가 조금 불편해진 것 외에는 다른 감흥이 없는 히나와, 효과적인 문제 해결방법 하나를 배워 좋기는 한데 사실 나도 그렇게 약하지 않다는 것을 소공작도 인정해주지 않고 있었음을 같이 깨달아 복잡해진 마음 속으로 어찌됐건 당분간 칼리안이나 키리에와 대련할 일은 만들면 안 되겠다 생각 중인 플란츠.

"······ 하."

그렇게 둘은, 쏟아지는 눈길 속에서 아주 안전하고 건전하게 기사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 * *

푸른 빛의 솔새.

마력탄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손에 쥐었던 날, 실수로 누르게 되었던 점화 버튼. 그것을 해제하지 못해 사람이 없는 곳으로 멀리 던졌던 일이 있었다.

폭음이 일었고 맑은 하늘 아래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마력탄이 터진 흔적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죽은 채 떨어져 있었다.

"손해 보기 좋은 성격인데, 이거."

푸른 솔새.

아무 관계 없이 죽어버린, 파랗고 작은 새. 그 새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마력탄을 꺼냈다. 공중으로 집어던졌다. 도와주러 오든 도망을 가든, 알아서들 하라 알려주려고. 그랬더니 놈이 그런 말을 했다. 손해 보기 좋은 성격이라고.

그런 평가는 들어본 적 없던 에일라가 살짝 웃었다.

"관계 없는 이들까지 죽일 필요 없으니까요."

"나한테 던졌으면, 대신 나도 죽을 것 아냐."

"당신보다 비싼 목숨들도 같이 죽을까봐요. 여기 건물 약한 것 같아서."

"손해야, 그거."

"내 선택이니까. 내가 손해를 보든지 말든지."

앞에 선 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가늘고 긴 자신의 검을 살짝 들어올려 이제 떠오르기 시작한 달빛에 비춰봤다. 방울방울 묻어난 진득한 붉은 빛을 슥 훑어본 놈의 시선이 에일라를 향했다.

"누구야? 너 보낸 사람. 내가 호기심이 많아서 그건 좀 알아가야 할 것 같은데."

"글쎄. 누굴까."

"아플 텐데. 아픈 데 찔렀는데. 안 아프나?"

놈의 검이 오른쪽 쇄골 위를 관통하고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정말 찰나와 같은 시간에.

어디를 어떻게 다쳤을지 지나치게 잘 알려주고 있는 통증을 버텨내면서, 멀쩡한 얼굴로 흔들림 없이 서 있던 에일라가 대답했다.

"아파야 하는데 안 아파보여서. 기분 나빠요?"

"그냥, 실망."

가볍게 답한 놈이 손에 들린 칼을 털어냈다. 에일라의 상처에서 번져나오는 것과 같은 빛의 핏방울이 흩뿌려지며 사라져갔다. 그것을 잠시 보고 있던 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짜 안 아픈건가. 대꾸 잘 하네."

에일라의 입가에 다시 한 번 웃음이 그려졌다. 그러자 놈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 새구나, 너."

"아닌데."

"맞는데."

"지금은."

"지금은?"

에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쌔애액!

그 때, 에일라의 품에서 뻗어나간 비수 하나가 놈의 목을 향해 치달았다. 동시에 에일라가 발을 박찼다. 쓰지 못하게 된 오른팔을 대신해 왼손으로 검을 잡은 채였다.

- 휘익, 탁!

- 카아앙!

소매 끝부리에서 바람이 일 만큼 빠르게 팔을 휘두른 놈이 에일라의 비수를 잡아냈다. 그리고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날아드는 검격을 쳐냈다.

에일라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접근했던 놈.

그러니 이번 공격이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에일라도 잘 알았다. 때문에 에일라는 미리 준비한 것처럼 곧바로 몸을 숙여 놈의 반격을 피해냈다. 잘려나간 뼈와 근육이 서로를 찔러대는 바람에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비명을 참아내면서.

- 쉬익!

한 팔로 바닥을 살짝 디딘 에일라가 놈의 발목을 향해 발을 뻗었다. 에일라와 똑같은 훈련을 받았던 세작의 발목을 부스러뜨린 적 있던 매서운 공격이었으나, 놈은 가볍게 몸을 날려 피해냈다.

놈의 검이 다시 날아든다.

- 카가각, 카앙!

- 카아아앙!

옆으로 구르다시피 하여 날아드는 검을 피한 에일라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연거푸 이어지는 놈의 검을 가까스로 막았다.

얇디 얇은 검인데도 무게가 상당하다. 키리에가 사용하는 것 이상의 무게를 지닌 검이다. 한 번 한 번의 공격을 막을 때마다 어깨가 내려앉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새 맞는데."

"지금은 아니라고, 대답 했는데."

"아. 그랬지."

내가 건망증이 심해서, 하고 어깨를 으쓱인 놈이 다시 한 번 에일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 카앙, 카아앙! 카강, 캉!

- 쉬이익, 캉!

계속하여 날아드는 검을 막고 튕겨내고 피해냈다. 오른 팔을 다치지 않았더라면 던질 필요 없었을 암기들을 쏘아 보내며 쉼없이 팔과 발을 움직였다.

놈의 검이 다시 한 번 짓쳐든다.

빠르기 때문에 쳐내기만 해도 충분해 보이지만 실제로 받아낸다면 목끝까지 내리눌릴 무게임을 안다. 때문에 에일라는 몸을 틀어 피해내며 놈의 복부를 향해 검을 찔러들어갔다.

- 툭!

한 발을 물린 놈의 검 끝이 에일라의 머리 끝을 건드렸다. 그 바람에, 잘 꽂아두었던 은색의 비녀가 풀려나와 바닥에 떨구어졌다. 바다빛의 긴 머리가 조금 잘려나가 흩어진다.

욱씬!

마치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무시하기 어려운 통증이 다시금 머릿속을 휘저었다. 아랫입술을 악문 에일라가 검을 다잡았다.

- 쌔애액!

품 속에서 나온 마지막 단검이 놈을 향해 뻗어나갔다. 여전한 웃음을 가득 달고 있던 놈이 왼손을 뻗었다.

- 콰악!

그리고 자신에게 날아드는 단검의 날을 잡아챘다.

뚝, 뚝, 뚝.

놈의 손바닥에서 단검의 날을 타고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진다. 굳이 잡아내지 않아도 될 것을 꽉 붙든 놈이 씩 웃었다.

"내가 여기 온지 얼마 안 됐거든. 그래서 네가 누구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서 그래. 나도 다쳐 있어야 더 크게 다칠 일이 안 생기잖아."

정당방위를 말하는 것이다.

에일라의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르니 에일라로부터 먼저 공격을 받아 맞대응을 했다 주장하겠다는 소리였다.

그 말은 곧, 이제 그만 놀고 돌아가겠노라는 뜻이기도 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지 그랬어. 참다 죽으면 더 억울할 텐데."

놈이 비수의 손잡이를 잡았다.

오른손에는 자신의 검을, 왼손에는 에일라가 던진 비수를 잡은 놈이 발을 박찼다. 다시 한 번 입술을 꽉 깨문 에일라가 놈을 노려봤다.

서툰 왼손에 쥐고 있던 검을 오른손으로 옮겨잡는다. 놈을 향해 달려든다. 떨어지는 바람에 깨져버린 비녀의 구슬 값 정도는 받아내야겠다 생각하면서.

- 타아앗!

- 카앙, 카아앙!

놈의 검을 막았다. 올려친다. 몸을 돌려 다리를 뻗었다. 놈의 배를 걷어찼다. 허리를 숙여 다시 날아드는 검을 피해냈다. 검을 뻗어 놈의 다리를 베어내려 했다.

- 카가각!

- 푸욱!

검이 막혔다.

이제껏 놈의 왼손에 들려있던 비수가 살을 파고든다. 깊이 파고든 칼날이 비틀린다. 상처를 넓힌다. 그리고 빠져나간다.

선연한 감각에 숨을 삼킨 에일라가, 저도 모르게 한 발을 뒤로 물렸다. 그런 에일라를 보던 놈이 낭패한 얼굴을 했다.

"아. 거기······."

낭패한 얼굴을 '만들어냈다'.

"조심해야 할 텐데."

툭, 하고.

옥상의 낮은 난간이 에일라의 다리에 걸렸다.

어찌 할 도리 없이 그 뒤로 몸이 젖혀진다. 받쳐줄 곳 없는 아래로 몸이 기운다. 머리와 등이 옥상을 벗어나고, 종내에는 바닥을 디디던 발이 떨어졌다.

점점이 이어지는 붉은 핏방울, 무표정한 얼굴로 푸른 새의 추락을 내려다보는 녹빛의 눈동자가 눈에 담겼다.

추락한다.

푸른 새였으나 날개가 꺾인지 오래인 탓에.

추락한다.

눈을 감았다.

그런데.

- 펄······ 럭!

- 타악!

큰 천이 바람을 담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한참이 지나도록 바닥에 부딪히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대신 단단한 무언가가 등을 받치는 느낌이 났다. 바닥을 뒹구는 느낌이 났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다 지켜낼 것처럼 온몸을 꽉 끌어안는 느낌이 났다.

목소리가 들렸다.

"아······ 잡았다."

끌어안은 팔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린다.

"에일라."

아직,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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