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69화 (370/527)

제66장. 내 건데(1)

꽃이 피었다.

장미 정원의 붉은 장미들은 아직 피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다른 곳은 이미 완연한 봄이었다. 노란 프레디아는 어느새 다 시들어 떨어지고 온갖 색의 꽃들이 온통 피어났다.

때문에 누군가는 그 피어남을 반가워하고 누군가는 새 향기에 익숙해지려 애를 쓰고 또 누군가는 이미 시든 꽃에 아쉬움을 보낼 그 계절, 체르밀 궁의 수련장.

- 카아아앙! 카강!

- 카아앙!

건물 밖을 지나치는 바람을 따라 흩날리던 보랏빛 꽃잎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소리가 퍼져나갔다.

- 카앙!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히는 짙은 묵빛의 얇은 검을, 보다 크지만 색은 같은 또 다른 검이 막아냈다. 그러자 이제껏 숨기듯 내리잡고 있던 청은빛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뻗어나온다.

공격을 막은 이의 검은 한 자루.

공격을 보낸 이의 검은 두 자루.

위에서 내려친 공격을 막고 있던 중 두 번째 검이 날아들었으니 그것은 어찌 막을까 하였는데, 플란츠가 보낸 첫 번째 공격을 잘 막아낸 키리에는 제 검을 살짝 트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버렸다.

- 카강!

힘을 받고 있던 상대의 검이 비틀리자 플란츠의 묵빛 검이 순간적으로 미끄러졌다. 정확히, 지금 뻗어내고 있던 두 번째 검이 있는 곳을 향해서였다.

묵빛 검이 올려치려던 청은빛 검 위로 내리떨어졌다. 자신의 공격을 스스로의 칼로 막아버린 셈이다.

"피할 줄 알았는데, 그냥 흘려보내서 해결하는군요."

"키리에는 원래 잘 안 피해. 웬만해선 그냥 막고 말아."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피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해. 그게 장점이기도 하고, 내 마음에 아주 안 드는 단점이기도 하고."

방금 전의 일에 대해 열심히 평가하는 또 다른 두 명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 채, 플란츠가 두 팔을 양쪽으로 움직였다. 교차하여 늘어뜨린 두 개의 검을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동시에 뻗어낸 것이다.

- 카아아앙!

그러나 그것 역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둘로 나뉜 시나스타가 양쪽으로 벌어지기 직전, 두 검이 교차된 지점을 키리에의 검이 강타한 탓이었다.

연이은 두 번의 공격이 무효로 돌아가자 플란츠가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검을 회수함과 함께 키리에에게 한 발을 더 달려들며 팔을 내뻗었다. 오른손의 검은 목을 향해 찔러들어가고, 왼손의 검은 허리를 베어낼 듯 가로로 휘둘렀다.

"······ 그렇게 움직이시면 중심이 흐트러집니다, 저하."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침착한 키리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느긋하기까지 한 말과는 달리 숨을 들이쉬는 것보다 빠른 움직임이 이어졌다.

- 스륵······ 툭!

- 카앙!

발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 무언가를 건드리는 소리, 그리고 세 개의 검이 서로 얽혀 만들어 낸 요란한 쇳소리가 한꺼번에 울렸다.

찔러오는 검을 피하기 위해 옆으로 비켜서는 소리, 키리에의 긴 다리가 플란츠의 정강이를 살짝 건드리는 소리, 그리고 휘둘러지던 검을 걷어내듯 올려치는 소리였다.

순간적으로 플란츠의 검 끝이 크게 휘청였다.

"지금처럼 말입니다."

피하고 걷어찬 뒤 검을 막는 키리에의 움직임이 마치 물이 흐르는 것과 같았다. 때문에 플란츠는 키리에의 세 움직임을 모두 막지 못했다. 바닥을 구르거나 몸이 흔들릴 만큼 중심을 잃은 것은 아니었으나, 공격할 때는 확실히 놓치게 된 플란츠가 결국 한 발을 물렸다.

그 모습을 본 관람객의 입이 다시 열렸다.

"피하는 것 안 좋아한다더니."

"······ 안 좋아하는 거지 안 한다고는 안했어."

조금 멋쩍은 듯 대답하는 칼리안을 보며 드미레아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베른 경도 참 대단합니다. 왕세자의 다리를 걷어찰 생각을 다 하고 말입니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단 한 번 직접 겪는게 낫지. 양 손에 들린 검이 따로따로 움직이는데 발을 저런 식으로 디디다가는 중심 못 잡을 건 뻔한 일이고."

"직접 겪는 게 낫다지만 대부분 못 합니다. 왕자님도 그러실 것 같은데요."

"못하지, 나는. 내가 걷어차면 저 정도로 안 끝나니까."

내 형님이 워낙 약하셔서.

이렇게 덧붙는 말에 드미레아는 그냥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리고 다시 연무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플란츠와 키리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검의 움직임에 휘둘리지 않도록 반드시 신경을 써야 합니다. 한 쪽은 찌르고 한 쪽은 베어내면 힘을 이용하는 방식과 방향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몸의 무게를 전부 다 발에 싣는다 생각하시는 편이 낫습니다. 잘못하면 힘이 분산되어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버립니다."

"내 아우님은 아니던데."

"왕자님은 오러가 있지 않습니까. 저희와는 움직이는 방식이 다소 다릅니다. 오러를 쓸 때와 아닐 때 왕자님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떠올리신 뒤에 발 디딤을 자세히 비교해보시면 그 차이가 보일 겁니다."

"알았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두 개의 검을 다잡았다. 그것을 확인한 키리에가 곧바로 플란츠를 향해 달려들었다.

- 카앙! 카가강, 캉!

- 카아앙, 카앙!

순식간에 하나로 합쳐진 시나스타를 들어 키리에의 공격을 막은 뒤 다시 두 개로 나눈 플란츠가 몸을 크게 회전시켰다. 빠르게 들이닥친 두 번의 베기를 흘려보낸 키리에가 서로 다른 색의 시나스타를 차례로 쳐냈다.

그렇게 얼마동안 공방을 주고 받던 플란츠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유효한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한 탓이다.

흐트러진 움직임을 재빨리 다잡은 플란츠가 양쪽 검을 똑같이 늘어뜨린 채 키리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공격을 받아 낼 준비를 마친 키리에의 앞에서 방향을 틀었다.

- 타아앗!

둘을 지켜보던 칼리안의 입매가 올라갔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옆에 앉아있던 드미레아도 흥미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안 통할 텐데."

"안 먹히겠네요."

상대의 앞에서 순간적으로 공격 방향을 바꾸는 것은 바로 칼리안의 싸움 방식이 아니던가. 그렇다는 것은 곧, 키리에가 가장 많이 겪어보았던 방법이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양 손에 나눠 든 검이 더 무거울 뿐더러 움직임도 키리에보다 느린 플란츠가, 키리에도 아닌 칼리안을 따라한 공격을 재현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었다.

"그걸 모르실 리가 없는데. 또 뭘 하시려고."

마치 이렇게 이어진 칼리안의 말을 들은 것처럼, 키리에의 옆으로 다가간 플란츠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 철컥!

묵빛 검과 청은빛 검의 손잡이가 맞닿아 연결됐다. 제 키보다도 더 길어진 검의 가운데를 쥔 플란츠가 몸을 날렸다.

- 부우웅!

- 카아아앙! 카가각, 카앙!

키리에의 날카로운 두 눈이 시나스타의 움직임을 살폈다. 그리고 계속 회전하며 사방을 뚫고 들어올 듯 공격해오는 시나스타를 빠짐없이 막아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나스타의 한쪽 검면을 강하게 쳐낸 키리에가 발을 박찼다. 둘 사이를 가르며 날아드는 키리에의 검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코앞까지 달려드는 공격을 막아낸 플란츠가 상체를 틀었다. 그러자 손잡이 끝에 연결된 나머지 하나의 검이 자연스럽게 키리에를 향해 뻗어졌다.

키리에가 플란츠의 검에 막혀있던 자신의 검을 살짝 들었다가 다시 강하게 내리쳤다.

- 카아앙!

시나스타의 청은빛 검이 바닥으로 내리꽂힌다. 연결되어 있던 묵빛의 검은 그와 반대로 위를 향해 치켜올려졌다.

"중심 잃지 마십시오. 또 흐트러졌습니다."

- 휘이익, 카앙!

여지없이 이어진 가르침과 함께, 키리에의 검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떠오른 시나스타의 묵빛 면을 걷어내듯 쳐냈다.

- 우웅······.

곧이어 가느다란 검의 울림이 플란츠의 귓가에 닿았다. 투웅, 하고 묵직한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키리에의 검이 목을 겨눈 것을 느낀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검날에 베일 걱정은 전혀 없다는 듯한 그 태도에 부응하듯, 키리에가 검을 거둬들였다.

"알았어."

"네. 저하."

키리에가 예상하지 못할 방향으로 달려들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검격을 보냈으나 이기기는 커녕 자신의 허점만 잔뜩 찾아낸 셈이 되었다. 그러나 플란츠는 낙심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이미 국왕 친위대 대장이자 르메인의 호위 기사인 렌과 호각을 다투는 정도로 성장한 키리에가 아니던가. 그런 키리에를 상대로 이기기 위해 대련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점을 찾아 고치기 위한 싸움이었으니 실망할 필요가 없었다.

곧 자신의 검을 집어넣은 키리에가 바닥에 떨어진 시나스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린 뒤 플란츠에게 건넸다.

둘의 대련이 끝난 것을 지켜보던 드미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움직임이 많이 빨라진 것 같습니다. 더 정교해졌고, 무게감도 늘었네요."

"내 형님? 아니면 키리에?"

"둘 다. 특히 베른 경은 그 사이에 또 실력이 늘었습니다."

"그치. 너도 그렇지만 키리에도 매일 얼마나 열심히 검을 쥐는데. 검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 늘어나게 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아. 좋은 일이야."

"기대되십니까."

"당연히 기대되지. 네가 먼저 오를지, 키리에가 더 빠를지. 똑똑하신 내 형님은 과연 어디까지 자랄지. 가르치고 지켜보는 재미가 있어, 나는."

"······ 왕자님 대체 몇 살이셨습니까."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조용해진 연무장을 울렸다.

"왜. 세상 살 만큼 산 사람 같아?"

"네. 같은 나이 가진 정혼자 입에서 그런 말 나오는 것을 겪는 제 입장은 언제 생각해주실 겁니까. 어머니가 옆에 계신 줄 알았습니다."

"미안. 신경쓸게, 정혼자님."

"왕자님도 스스로 얼마나 더 성장할지, 그걸 기대해보시라는 겁니다. 말씀 조심해달라는 뜻이 아니라요. 지금은 그래야 할 나이 아닙니까."

"그걸 기대해 본 적이 있었던가······ 모르겠네, 나는."

드미레아가 마뜩치않다는 얼굴을 했다.

"왕자님 과거에 어떻게 사셨는지 안 궁금합니다. 지금을 얘기하는 겁니다. 스스로가 자라는 것은 정해진 수순인 듯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 가르쳐서 나아지는 모습에 좋아하고. 그러지 말고 왕자님 자신에 대해서도 기대해보고 살피시라는 말입니다. 왕자님 자신이 성장하는 걸 기대하고 즐거워했던 적 없었다 해서 지금도 그래야 하는 것 아니잖습니까."

"나 걱정해주는거야?"

"잔소리하는 겁니다. 보기 싫어서요."

여전한 웃음을 잔뜩 매단 채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내가 나한테 그런 기대까지 가지게 되면 내 정혼자님은 나를 이겨볼 날이 영영 안 올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돼도 괜찮겠어?"

"저는 안 움직이는 목표에 관심가졌던 적 없습니다."

장난스런 웃음기 대신 긴 미소만 남은 붉은 눈이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내 정혼자님 너무 멋있어서 큰일이네. 나중에 아쉬워서 어떻게 파혼하나."

"누구 고양이 노릇 끝내고 할 일도 다 마치고 나서 오시던가요."

"왕자 직위도 내려놓고?"

"당연한 말씀을."

"그럼 왕자 직위 대신 왕관 쓰고 가면 나 받아주나?"

"왕자님 말고 파혼서는 받겠습니다."

"와······ 이렇게 예쁘게 말하는데도 안 통해."

"그래서 좋아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결국 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렇네. 내가 그래서 좋아하지, 드미레아를."

"네. 압니다."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드미레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칼리안의 손, 정확히는 손에 칭칭 감겨 있는 붕대를 가리켜보였다. 그레이를 협박하느라 벽에 박았던 검을 빼내던 칼리안이 그만 '실수'하여 스스로의 손을 살짝 베는 바람에 생긴 상처였다.

"내일은 낫습니까."

"나 다쳤다고 소문 나려면 이틀은 더 지나서 나아야 하지 않을까?"

"축복에 더해 베른 자작도 여기 있는데 왕자님 상처가 이틀이 더 가도록 안 나을 정도면 광장에 이미 레니시타 잎이 깔렸어야 합니다. 게다가 오늘 오찬 마치고 귀족들 나오는 시간에 맞춰 그 앞을 지나쳐 오셨으니 소문은 필요한 만큼 이미 다 났을 겁니다. 그러니 늦어도 오늘 저녁에는 다 낫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겠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힐 경도, 그리고 괜찮다면 어머니와 리리에도 함께요."

"그래. 얼마든지."

자고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소문에는 소문 아니던가.

칼리안과 플란츠의 행보, 그리고 란델의 정혼자, 왕세자위를 둘러싼 형제 다툼 등. 지금 칼리안은 그레이가 열심히 퍼뜨린 소문을 잠잠하게 할 새로운 흥미거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이를테면 그레이를 향한 두 번째 협박이었다.

지그프리드령에서 돌아오던 날. 많은 이들이 보는 가운데 멀쩡한 모습으로 왕궁에 돌아와 곧바로 체르밀 궁에 들어간 뒤 누구와도 대련한 적 없던 칼리안이 아닌가. 그런데 하필 그레이가 체르밀 궁에 다녀간 이후 칼리안의 손에 상처가 생겼으니, 그 원인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수작 부리지 말고 얌전히 지내라는 의미였다.

협박에 있어 꼭 타인의 피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그 정도로 부족할 것 같으면 저 데려다주시는 길에 다른 데라도 들르시던가요."

"그럼 우리 꽃 보러 갈까? 많이 피었던데."

"장미는 아직입니다. 그리고 왕궁에 핀 꽃이 더 예쁩니다."

창 밖으로 흩날리던 꽃잎들을 생각한 드미레아가 반대 의견을 냈다. 그리고 키리에와 대화하며 걸어오는 플란츠 쪽에 시선을 두다 말했다.

"아스트리샤로 가시죠. 소문 나기엔 그보다 좋은 곳이 없을 텐데요."

아스트리샤 거리.

언제 찾아가든 귀족들이 한가득씩 모여 있는 곳이 아니던가. 그곳을 떠올려 본 칼리안이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너 배웅하면서 여기저기 가긴 했지만 그래도 아스트리샤는 좀 무리일 것 같은데."

"명분만 있으면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내가 거기 갈 이유가 뭐가 있어."

물론 소문을 확실히 내기에는 아스트리샤만한 곳이 없는 것은 맞다. 다만 칼리안이 굳이 드미레아와 함께 그곳에 갈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드미레아가 앞을 향한 얼굴을 그대로 둔 채 대꾸했다.

"이유 있는 분 저기 오시네요."

"형님?"

"전하의 탄신일 축제. 준비해야 할 사람이 왕자님과 저하 뿐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 아. 히나."

"네."

르메인의 탄신 기념일을 위해 지그프리드령에 가기 전 칼리안과 플란츠는 각각 의복을 맞췄다. 하지만 올해 그렇게 옷을 맞춰야 할 사람은 둘 뿐만이 아니었다. 축제가 진행되는 내내 둘의 곁에 함께 있어야 할 드미레아와 히나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때문에 드미레아는 이미 저택으로 사람을 불러 여러 벌의 새 옷을 주문해뒀다. 그런데 히나는 아니었다. 작위를 받았음에도 따로이 저택을 두지 않고 왕궁에서 계속 생활했던 탓에 어디로 사람을 불러와 옷을 맞추지 못했을 터였다. 게다가 바쁜 나머지 밖에 나갈 생각도 못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사실을 안 어린 왕세자가 정혼자를 직접 데리고 나가 옷 몇 벌 맞춰주는 일이 크게 이상하다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드미레아를 데려다 줘야 할 칼리안이 호위도 해줄 겸 함께 나서는 것 역시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일이다.

씩 웃어보인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내 덕에 카이리스에서 제일 유명해진 의상점이 하필 거기에 있네."

단정하기 짝이 없는 수트부터 프릴이 잔뜩 달린 예복까지, 작은 루비 장신구부터 새까만 고양이 브로치까지. 무엇을 어떻게 입고 꾸미든 언제나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바쁜 칼리안의 차림새. 그것을 일임하고 있는 섀틴의 의상점이 아스트리샤에 있지 않던가.

"비쌀 테지만, 뭐. 형님 금고도 가끔씩은 활짝 열려줘야지."

우리 히나 얻어입는 것 싫어하니까 직접 낸다고 할 테지만 그건 내가 다시 채워주면 되니까 마음대로 고르라고 해야겠다. 그나저나 우리 히나 이번에는 또 얼마나 예쁜 걸 고를까. 너무 잘난 우리 히나 더 예뻐지기까지 해서 이상한 놈 더 꼬이면 안 되는데. 희멀건 놈 하나도 아직 못 떼내고 있으니 그것 참 큰일이네.

깊은 고민이 시작됐다.

* * *

나에랑샤.

고급 상점과 카페들이 즐비해 귀족들이나 주머니 두둑한 평민들만 찾는 아스트리샤와는 분위기가 다른 거리. 구경을 원하는 귀족들이나 물품을 구매하기 위한 평민들이 모두 모여드는 시장과 아스트리샤만큼 비싸지는 않은 카페들, 그리고 여러 음식점과 술집들이 모인 곳. 때문에 계급과 상관 없이 많은 인파가 돌아다니는 곳.

저녁 시간의 나에랑샤는 늘 사람들로 붐비곤 했다. 뒤늦은 장을 보려는 이들도 있었고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여유를 즐기려는 여러 사람들이 가득했다.

깊은 후드를 뒤집어 쓴 이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얼굴이 잘 알려져 있는 귀족들이나 시선이 귀찮은 마법사들, 그냥 후드 차림이 좋은 사람들. 자신만 알고 있을 이유로 후드를 눌러쓴 채 돌아다니는 것을 보는 일도 다반사인 곳이라 그런 차림 자체가 시선을 끌지는 않았다.

- 툭!

때문에 갈색의 깊은 후드로 머리를 감싼 채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걷던 한 남자가 앞에서 걸어오던 이와 살짝 부딪혔다. 가볍게 밀린 어깨를 툭 털어낸 후드 속 남자의 입에서 짜증 가득한 목소리가 나왔다.

"눈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것이냐."

"피하실 수 있는 분께서 먼저 피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후작."

그랬더니 이런 대꾸가 들려왔다.

이 말에, 후드로 가려져있던 남자가 눈꼬리를 찌푸리려다 말고 아주 살짝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보니 상대의 말에 틀린 것이 없다. 빠르지도 않게 걸어오던 상대를 눈치채지 못해 부딪힌 것은 맞았으니까.

후작이라 불린 후드 속의 남자, 그레이 브리센이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을 오가는 수많은 이들은 둘의 작은 대화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후작'이라는 말을 들은 이들도 없을 터였다.

"나는 너와 만날 약속을 한 적 없었다."

"정확히 말씀하십시오. 약속한 적 없던 것이 아니라 후작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깨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약속을 깬 것이 아니라 미룬 것이다. 귀찮게 굴지 말고 물러나거라."

상대에게 짜증 가득한 목소리를 낸 그레이가 다시 발을 옮겼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이가 한 발을 움직여 그레이의 발을 다시 막았다.

"어제 왕궁에서 란델 왕자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본래대로라면 후작이 저에게 알려주고 계셔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만.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바삐 움직이고 계시면······ 무슨 일 때문인지 참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분명 다시 연락하겠노라 했었는데, 이젠 너까지 나를 우습게 보는 것이냐."

"설마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앞에 선 이의 목소리에 조소가 가득했다.

"아버지신데."

후드에 가려진 그레이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순간적으로 주변을 둘러 본 그레이가 고개를 조금 더 들었다. 짙은 갈색의 머리와 녹빛의 눈, 저를 알아보는 이가 있으리라는 것은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 어느 하나 가린 곳 없이 맨 얼굴을 꼿꼿이 들고 서 있는 청년이 보였다. 그 모습에 다시 인상을 찌푸린 그레이가 씹어뱉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다. 눈에 띄기 전에 돌아가 있거라."

"싫습니다만."

곧바로 거절 의사를 보인 이가 그레이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빙글빙글 웃는 낯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지금 아스트리샤에 난리가 났습니다. 왕세자와 3왕자가 정혼자들과 함께 나섰던데. 후작은 후작대로 이런 곳에서 이렇게 의심스러운 걸음을 하고 계시면 제가 어떻게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그레이의 눈이 다시 찌푸려졌다.

바로 전날,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협박을 해오던 칼리안이 이번에는 아스트리샤 거리에 직접 나섰단다.

"3왕자의 손에 상처가 있다 하던데 설마 후작께서 그런 것은 아니겠죠. 하기사, 지금의 후작께서 그 왕자의 머리카락 한 올이나 건드릴 수 있으실까 의심되기는 합니다만."

"······ 그게 무슨 소리냐."

"아, 이런. 아무 말도 아닙니다."

일부러 흘린 것이 분명한 말.

마치 그레이가 더 이상 소드마스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듯한 말.

그런 말을 꺼낸 이가 손사래를 치며 한 발을 뒤로 물렸다. 그러더니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내일 밤에 저택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 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후작."

긴 웃음을 남긴 이가 목을 까닥여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이내 인파 속으로 스미듯 사라졌다.

주먹을 꾹 움켜쥔 그레이가 자신의 아들이 있던 자리를 한참 쳐다봤다. 생각 같아선 당장 뒤쫓아가 성을 내고 싶었으나.

- 웅크릴 때를 못 알아본 것 같은데. 나와는 달리, 브리센처럼.

머릿속을 울린 목소리 때문에 애써 발을 멈췄다.

'플란츠.'

본심을 숨기고 웅크리는 중이라는 말.

분명 칼리안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도대체 숨기고 있는 그 본심이 무어란 말인가. 잠시동안 고민하던 그레이가 이내 인파들에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자신과 긴밀하게 연결된 귀족들, 칼리안이 직접 이름을 언급했던 바로 그 백작들이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다시 발을 옮겼다. 이번에는 누군가 따라붙지 않는지 제대로 확인하면서.

"······ 후작령에 있을 거라더니."

그런 그레이로부터 한참 떨어진 한 건물의 옥상.

긴 속눈썹을 몇 번 깜빡여가며 그레이를 만나고 돌아간 남자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던 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그 움직임에,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 가죽옷에 달려있던 광택없는 버클이 아주 작은 소리를 냈다.

그레이의 앞을 가로막고 대화를 나눈 뒤 사라진 놈. 분명 그레이의 아들이 아닌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듣지 못했으나 칼리안이 꽤 흥미를 가질 만한 장면을 보게 된 셈이다.

다만 지금 확인해야 할 사항은 그레이가 몰래 만날 귀족들과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에 대한 것이었으니, 이미 사라진 놈 말고 그레이를 뒤쫓는 것이 우선이었다. 때문에 그는 칼리안에게 전할 새로운 소식 하나를 일단 머릿속에 잘 담아 두기만 한 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레이가 지나간 쪽을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그런데 그 때.

"아무튼 후작은 이게 문제야. 쥐새끼 하나를 눈치 못채서······ 나까지 들켰잖아."

낯선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방금 전 몸을 일으켰던 사람, 에일라의 목에 서늘한 감촉이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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