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68화 (369/527)

제65장. 하나가 더 있다(5)

상처.

드미레아의 손에 난 무수한 물집처럼 그대로 두어야 단단해지는 상처가 있고, 플란츠의 팔에 박혔던 유리조각처럼 헤집더라도 꺼내놔야 아무는 상처가 있다.

베른의 몸에 생겨났던 수많은 상처들은 조금 달랐다. 단단해지지도 않았고 아물지도 않았다. 그것을 그대로 두어야 할지 헤집어 꺼내야 할지 살피고 돌봐줄 수 있을 손길이 없던 탓이다. 덕분에 채 낫지도 않은 상처를 꽁꽁 감싸고 덮어두기만 하여, 진물이 배어 나오지 않도록 억지로 만든 흉터 속이 모두 곪았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낫지 않고 곪았다.

그래서 잘 몰랐다. 칼리안도 잘 몰랐다.

쓸데없이 좋은 머리 때문에 죽을 때까지 못 잊어버릴 향기는 어떻게 쫓아낼 수 있는지. 향기 한 번을 맡을 때마다 하나씩 늘어나기만 하는 상처는 도대체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그대로 두어야 할지.

헤집어 꺼내야 할지.

잘 몰랐다. 상처를 살펴보았던 적이 없던 탓에.

"머리는 없어도 눈치는 있어서. 내가 널 왜 살려뒀는지는 알 것 같아서. 그래서 공기 아까운 것 애써 참아가며 내버려뒀는데. 허리도 붙고 걷게 되니 달리고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생각되었느냐."

그저, 감싸고 덮어두지만 않도록. 짓무르고 곪다 썩지 않도록. 그대로 두기도 하고 헤집어 꺼내기도 해 가며 모르면 모르는대로 알면 아는대로 살폈다. 정답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살폈다.

상처 치료하는 법은 몰랐으나 겉으로는 멀쩡한 그 상처가, 곪은 자리가 얼마나 아픈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스치기만 해도 아픈 그것을 가진 놈을 하나 더 늘릴 필요가 없다 여겼으니까.

그런데 또 상처를 내 놨다. 간신히 몇 발자국 걸어 나와 제 손으로 장미 향 설탕과자 집어먹게 된 놈을 또 다시 르니에리 속으로 잡아당겼다.

"나를 피해서. 네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랬으니 화가 나겠나, 안 나겠나.

"아니면. 누구인지 말하거라."

"누구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네 머릿속에 떠오른 그 새끼. 누군지 말하거라."

머릿속에 떠오르기는.

아무도 안 떠오른다. 그럴 정신이 없다.

마법을 쓴다. 덕분에 마력을 형상화 해 검으로 만들었다. 그것에 형태 없는 오러를 담아 휘두르는, 시스테라 대륙 어디를 뒤져도 찾아보지 못할 힘을 쓰는 칼리안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검에 피어까지 담는다.

풍기는 살기는 살기대로 머릿속을 휘저어놓고, 검에 담긴 피어는 피어대로 심장을 식힌다. 차라리 정신을 놓고 싶겠으나 그러지도 못한다. 몸이 기울면 목을 관통한 저 검이 정말로 목을 잘라내버릴까봐 오히려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선다. 말이라도 크게 하면 목젖이 베일까봐 입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대답을 한다.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되느냐. 그 정도로 속에 든 것 없는 머리였느냐. 실망이구나."

그런 놈이.

칼리안이 곁에 있기만 해도 허리가 쑤실 놈이. 본능적으로 올라오는 두려움에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놈이. 칼리안이 체르밀 궁 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을 그런 놈이. 저를 살려 둔 것이 플란츠를 위한 칼리안의 인내임을 모르지도 않을 놈이.

미치지 않고서야 제 입에 실리케를 올렸을 리 없다. 이건 인사를 하고 말고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레이가 미쳤거나, 아니면 누가 시켰거나.

둘 중 하나다.

"네 입에 그 이름 담아서 짖게 만든 새끼. 네 놈의 텅 빈 머리를 채워주겠다 했을 그 새끼. 그게 누구인지 꺼내놓으라는 소리다."

"일단, 검을 좀."

"대답부터."

플란츠는 브리센을 등지고 혼자 살겠다 한 것이니.

칼리안은 절대로 그레이에게 손을 대지 못할 테니.

그러니 적당한 말로 플란츠를 떠보라고. 플란츠의 의중을 확인한 뒤 행보를 결정지으면 된다고. 만약 플란츠가 브리센을 배신한 것이 맞다면 란델의 손을 꽉 잡으라고. 그렇게 꼬여낸 입이 있을 것이다.

칼리안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래서 물었고, 그레이가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거짓말.

미소 짓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 카각······!

작고 섬뜩한 소리가 목 뒤에서 울린다. 회랑 벽에 이미 박힌 검이 한 치를 더 들어가는 소리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상처 하나 없이 목을 꿰뚫은 검이 움직이고 있었다. 저 움직임에 조금의 실수라도 생기는 순간, 그 실수 저지른 칼리안이 어떻게 추락하는지에 대한 일은 그레이와 완전히 상관없는 문제가 되어 버릴 터였다.

칼리안이 실수하는 순간 그레이는 죽어버릴 테고, 그 뒤 칼리안이 어떻게 되든 그레이는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순간적으로 그레이의 눈이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왕궁의 기사들은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사일런트가 펼쳐져 있었고,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키리에가 막고 있었다.

체르밀 궁의 회랑 안쪽은 평소에도 인적이 드물다. 아무도 안 찾는다. 그러니 이 상황을 보고 겪는 것은 오로지 두 명. 칼리안과, 칼리안의 손에 붙들려 눈깜짝할 새 이곳에 끌려와 벽에 처박히게 된 그레이 뿐이다.

그레이의 눈짓을 확인한 칼리안의 입술이 작게 움직인다.

"기대하지 말거라. 아무도 너를 돕지 않을 테니까. 지금껏 그래왔듯이."

그래, 안다.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다. 차라리 다시 맞는 게 낫겠다 싶은 일을 겪고 있는데 보는 눈은 하나도 없고 심지어 몸뚱이에 생채기 하나 안 생긴다. 목을 관통했으나 표시가 나지 않는 검이라니. 도대체 누가 이 말을 믿어준단 말인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악몽을 꾸었느냐 하겠지.

"나쁜 짓을 하려면 나처럼 해야지. 이 드넓은 왕궁 한 가운데에서 내가 하는 짓을 보는 놈이 단 한 명도 없도록. 확실히 확인해야지. 입을 놀리려면 그렇게 해야 명이 안 줄지. 그리 생각하지 않느냐."

확인했다. 분명 아무도 없었다.

크게 말하지도 않았다. 말을 속으로 삼킬 필요 없이 살아온 삶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인도 하고 중얼거리듯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화를 못 참고 실수할까봐, 왕세자와 왕자에게 연이어 무시당한 기분을 정말, 정말 조심스레 털어냈다.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건 저 왕자다.

억울하다.

"혹여 억울한 것이냐."

"······ 아, 닙니다."

"억울하면 나 말고 너에게 언질한 그 놈에게 풀거라."

얀이 죽이지 말라고 했다.

얀의 말은 얌전히 들었다.

"네 아비도 그랬다. 내 발 밑에 무릎꿇고 쓰러져 죽을 때까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더구나. 너도 똑같다. 고개 빳빳하고 입은 가볍고 속에 든 것은 없는 모양새가 네 아비와 하등 다를 것이 없지 않느냐. 스스로의 잘못은 커녕 눈앞에 뭐가 있는지도 못알아보는 한심한 태를 보고 있자니 죽은 네 아비를 다시 만난 것 같구나. 그렇게 살면 똑같이 내 손에 죽을 것을 모르는 꼬락서니까지도. 네 아비를 쏙 빼닮았구나. 너는."

키리에는 대신 갚아주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키리에의 말은 그냥 안 들었다.

너무 화가 나서 듣지 못했다.

"네가 그리 싫어하는 네 아비를 네가 닮았다. 혹여 네 자식도 네 아비 닮은 너를 닮았을까 걱정이구나."

가는 미성이 끝도 없이 귓가에 닿는다. 잊지 않도록, 그 나쁜 머리에도 잘 새겨 가져가도록,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이어지는 말이 피할 곳도 주지 않고 파고든다.

그것이 무슨 말에 대한 대가인지 정도는 알아들은 그레이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피가 식은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것이 대답이냐."

새하얀 손 끝에 힘이 들어간다.

죽는다.

죽는다.

"네. 그렇습니다. 칼리안 왕자님."

아니, 안 죽는다.

지금 칼리안은 그레이를 못 죽인다. 그러니 사실을 알릴 필요 역시 없다. 앨런과 칼리안을 죽여놓겠다 장담하듯 말했던 그들과 손이 닿았음을 벌써부터 밝혀 큰 일을 망칠 필요가 없다.

당연한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칼리안의 조롱에 피가 식어서.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모르겠느냐."

"네. 머릿속에 든 게 없어서 말입니다.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달의 그림자를 뭉쳐 만든 듯한 검을 목에 꽂은 채로, 아무도 없는 회랑 벽에 기댄 채로, 그레이가 대답했다. 그리고 칼리안을 쳐다봤다. 이제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를 묻는 눈으로. 화를 꾹꾹 참아내는 얼굴이 보고싶다는 표정으로.

"그래······ 그래야지. 그렇게 대답해야지."

칼리안은,

"그래야 재밌지. 내가."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사각.

곧이어 아주 작은 소리가 났다.

회랑의 벽에 박혀있던 검이 한 치 쯤 다시 빠져나오는 소리였다. 검이 지나가는 느낌이 고스란히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검은 진흙속에 숨구멍을 처박는 듯한 칼리안의 살기. 그것이 사라졌다. 그런데, 왜.

"곱게 살려두겠다 했으니 살려둬야지. 약속은 잘 지키는 사람이거든, 내가. 아······ 소공작과의 대련 약속은 빼고. 그건 이상하게 자꾸 미뤄져서."

말에 든 서늘한 기운도 사라졌다. 피어도 사라졌다. 어느새 붉은 빛으로 돌아온 검은 여전히 목에 박혀있었으나 더 이상 공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러니 살려 둬야지. 살려두기는 해야지. 너는."

그런데 왜 이렇게 팔이 후들거리는지.

살기도 피어도 없이 평범하게 이어지는 말이 무섭다. 아무렇지 않은 듯 쳐다보는 눈빛이 무섭다. 평범한 대화처럼 이어지는 말이 무섭다.

마치 배고픈 뱀을 앞에 둔 것처럼.

그것이 무서워서 그레이는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너는 살려두겠다 했던 그 말의 의미를 곧장 새겨듣지 못했다.

"예순 네 명, 그리고 한 명. 혹시 너는 이게 무슨 숫자인지 아느냐."

박아 둔 검을 도로 빼내면서,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 그것도."

"모르겠지. 머릿속에 든 게 없어서."

- 사각.

"네 편을 드는 귀족 중에 그나마 이름 난 것이 예순 넷이다. 멜리온, 세그니스, 이벨, 헬리카, 베리안, 진, 테라한, 트리비카, 비에프, 또 누구더라······ 그래. 에넨시타. 다들 한 번씩 나도 얼굴을 보아 알고는 있다. 그런 백작들이 예순 넷."

다시 한 마디 쯤, 검이 빠져나왔다.

"그놈들을 하나 하나 없애면 네가 좀 조용해지겠구나. 그놈들을 다 잡고 너를 잡으면 내 화도 좀 풀리겠구나 생각했는데 놓친 것이 있더구나."

검을 박아넣는 것이 아니다. 분명 빼내는 중이다. 조금씩 살려주는 중이다. 그러나 뼛속이 갈려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 하나가 더 있다는 걸."

- 사각.

작고 작은 소리.

"어쩐 일로 네 놈이 여기에 아들을 안 데려왔을까. 변경백령에서는 계속 데리고 있던 네 자식을 왜 후작령에 옮겨놓고 너 혼자 여기에 와 있을까. 고민을 해 봤는데. 네 아비가 너를 두고 그러했듯이 네 자식이 네 자리를 탐낼까 경계를 했다면 후작령에 두었을 리가 없어서, 내가 참 이상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었거든."

소름끼치는 소리. 그 소리가 선연해서 견딜 수가 없다.

"혹여 아끼는 것이냐. 너는. 네 자식을. 네 세력이 온전치 않은 날 수도 한가운데 머무르다 다칠까 걱정이 되었느냐. 그래서 후작령에 꼭꼭 숨겨두었느냐."

그레이가 웃었다.

"내가 내 아비 닮았다 말씀하신 분께서, 그런 말을 하십니까."

"아껴서. 숨겨두었구나. 내 말이 틀렸느냐."

"틀렸습니다."

"거짓말."

칼리안이 웃었다.

"널 돕는 놈이 누구인지 궁금한 것도 미뤄두고 잠시동안 더 살려주는 대신. 기억해두마."

사각.

"그, 한 명."

사각, 사각.

* * *

니들렌의 고민이 시작됐다.

샐러드 위에 뿌려진 호두 조각을 치워내는 것을 그만 보고 말았는데 그냥 드시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모르는 척 해야 하나.

견과류도 잘 드셔야 튼튼해진다 말하기에는 얇게 썰린 아몬드를 잘 먹고 있었다. 호두도 좀 드셔라 권하기에는 관심이 지나치다 여길 것 같다. 호두가 머리에 좋다 알려주면 오히려 멀리 할 만큼 똑똑하다. 편식하면 안 자란다 겁주기에는 이미 니들렌보다 키가 크다. 다 필요없고 그냥 골고루 드셔라 가르치기에는 상대가 왕세자였다.

"둬."

"네?"

"호두."

"······ 네."

아무튼 눈치 하나는 시스테라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 아닐까.

골라내는 호두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으니 어떻게 눈치를 못 채겠냐만은. 얌전히 식사 마친 니들렌이 찔끔 놀라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곧 플란츠의 식사도 끝나고, 어떻게 알았는지 때맞춰 잘 들어온 레릭이 식기를 치워갔다. 그것을 잠시 도와준 니들렌이 아르센의 책상으로 가 앉았다. 밥값은 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플란츠는 아니었다. 식기를 치운 뒤로도 계속 테이블 앞에 다리를 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세자 저하께서는 왜 밥값 안하시냐 물어보고 싶었으나 차마 입 밖에 낼 수는 없던 니들렌이 조용히 또 눈치를 보고 있는데.

- 저벅.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던 플란츠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퇴근하십니까, 부군단장님?"

'설마 일을 다 나에게 떠넘기고 부군단장 둘 다 나가버리려는 큰 계획이었나' 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대한 대답이 돌아왔다.

"말고. 나갔다 오려고. 잠깐."

"아, 식후 산책 가십니까?"

"말고."

다 아니다.

찍어 맞히는 재주는 없는 니들렌이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어쩐 일인지 플란츠가 매우 친절한 대답을 전해왔다.

"지금쯤이면 아우님이 화를 다 냈을 것 같아서."

"칼리안 왕자님께서 화를 내신다고요?"

칼리안이 화를 낸다니.

반쯤 죽든가, 울든가, 아니면 진짜 죽든가. 셋 중 하나는 하게 될 것이 분명한 상대방에게 잠시 애도를 보내려던 니들렌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설마, 칼리안 왕자님이 그레이 브리센 만나셨습니까?"

"그래."

아마도 만났을 것이란 예상이 아니라 만난 것을 눈으로 본 듯한 말이다.

사실 확신하기 어려울 일도 아니다. 체르밀 궁의 입구로 걸어나오던 길, 후문 쪽에 마련된 수련장에서 체르밀 궁으로 걸어오던 충직하고 귀 밝은 기사를 봤으니까.

그레이 브리센이 체르밀에 온 이유야 란델 때문일 텐데 란델이 칼리안을 만났다면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더 만나려 들지는 않을 것 아니겠나. 칼리안을 만나러 직접 내려왔다면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소리인데, 피해다녀도 모자랄 칼리안을 억지로 만난 기분에 브리센까지 마주치려 할 리가 없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란델은 그레이를 도로 돌려보낼 것이 뻔하다.

그렇게 돌아 나가는 그레이를 찾아갔겠지. 내 동생이.

참아야 하는 걸 알 텐데도 결국은 못 참고.

"그레이 브리센 죽일까봐 말리러 가시는 거군요."

"말고. 밥 주려고."

플란츠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저벅저벅, 문 밖으로 나갔다.

루시와 안네 밥 줄 시간 됐다는 투로 내려놓고 나간 부군단장의 말 덕에, 머릿속에 계속 떠오르는 고양이 사료를 시금치 스프로 바꾸느라 애쓰고 있는 사단장을 덩그러니 남겨둔 채로.

* * *

그렇게 안 세심한데 알고보면 꽤 섬세하신 내 동생 놈이 또 화를 냈다. 그레이 브리센 죽여 없애면 안 되는 것이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화내고 협박하고 상처 하나 없이 되돌려 보냈을 거다. 그런데 그 그레이 브리센의 몸을 온전히 둔 채로 겁만 먹게 할 방법이 뭐가 있겠나.

이번에도 또 뱀이 됐겠지.

데블란에게도 유령이 되었던 그 방법을 또 썼겠지.

그러니 또 속이 허해서 배가 고프다 할 것이 뻔하다. 어쩌다보니 원인 제공을 한 셈이 된 형이 되어서 그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고. 그러니 그냥 밥이나 먹여야지.

- 우뚝.

그냥 그런 생각이었다. 그래서 체르밀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또 마주쳤다.

"······ 왕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무슨 협박을 어떻게 들었는진 몰라도 이번에는 조금전과 반대가 되었다. 그레이의 얼굴에서 표정이 싹 사라져 있었다.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겁을 먹은 것인지, 알아내기 어려울 만큼.

그래도 배운 것은 있는 모양이라. 그레이가 먼저 플란츠에게 인사를 건넸다. 존경은 없었으나 격식은 담겨 있어서, 그것으로 만족한 플란츠가 고개를 살짝 움직여 예를 받았다. 그리고 그레이를 지나칠 듯 한 발을 내딛었다.

아니, 한 걸음만 움직였다.

서로 다른 방향을 보는 채 그레이의 옆에 선 플란츠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내 핏줄을 못 알아봤다지만. 너는 웅크릴 때를 못 알아본 것 같은데."

그레이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아무 쪽으로도 눈을 두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는 왕세자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나와는 달리. 브리센처럼."

칼리안을 만났으리라 확신했다는 듯한 말. 뒤에 선 레릭조차 듣지 못할 만큼 작고 낮은 목소리가 그레이의 귀에 정확히 들어갔다.

"그게, 무슨······."

- 저벅, 저벅.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해를 했든 못했든 상관없다는 듯, 플란츠는 아주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한 가지 일에 반드시 두 가지 이득은 취하는 놈. 그런데 이번에는 이득없이 배만 고파지면서 무턱대고 화만 냈을 놈을 대신해 무언가를 좀 얻어내려고 잠시 발을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뱀 앞에서 이제 막 빠져나와 서둘러 도망가던 초록 개구리 한 마리. 그걸 잡아 서서히 끓어오를 냄비 속에 넣어두려고. 따뜻한 안식처인 척, 안전한 곳인 척, 누구에게도 공격받지 않을 그런 좋은 자리인 척. 뱀에게서 도망친 개구리를 그렇게 붙들어 넣어두려고.

이제껏 잘 만들어놨던 대외 홍보용 인격에 데블란도 속았었는데 그레이가 속지 않을 리 없으니까.

"형님 어디 다녀오십니까."

"빌헬름 관."

"지난 번엔 돌아오셨던 날 밤 새고 오셨다더니 오늘은 아니네요."

"배고파서."

"식사 안 하셨습니까."

"안 했어."

거짓말.

칼리안은 알아본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냥 헤실헤실 웃었다. 나 대신 고생했다 말하는 법을 아직 못 배워서 냅다 밥이나 먹이려 드는 게 재밌어서 웃었다. 절여져 있더니 어느새 숨이 돌아 있는 게 재밌어서 웃었다.

"그럼 같이 하시겠습니까."

"알았어."

"저 고기 많이 먹을 건데. 형님 시간 괜찮으십니까."

"언제는."

"그래도요. 유난히 배가 허해서."

"알았어."

"네."

"닭고기 말고 소고기랑 돼지고기 먹을 겁니다."

"알았어."

"네."

플란츠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그레이가 지나간 자리를 잠시 쳐다보다 다시 앞을 봤다.

개구리 머리가 얼마나 생각을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있긴 있다면 알아서 들어오겠지. 안 들어오면 나가서 잡아오면 될 일이니 걱정할 것 없다.

그깟 개구리 한 마리. 어차피 언젠가는 직접 불을 피워 직접 잡아야 할, 내 사냥감이니까.

"지그프리드에서 양고기를 보내왔던데, 그것도 같이 내오라 할까요."

"싫어."

"······ 네."

개구리는 개구리고, 뭐가됐든 양고기는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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