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67화 (368/527)

제65장. 하나가 더 있다(4)

침묵이 감돈다.

문을 막고 선 것은 키리에였고 여전히 열린 창의 앞에 선 것은 얀이었다.

"얀."

나지막한 목소리에 얀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왕자님."

"몇 명이랬더라. 브리센 후작 쪽 귀족이 몇 명이나 되는지. 잊어버렸어."

"왕자님께서 이름 아실 만한 백작만 64명입니다. 왕자님께서 이름 모르시는 한지의 백작이나 영지 없는 백작도 있고 그 백작들과 연계된 귀족들도 있고 그 백작들의 가신과 하위 귀족도 있습니다. 자작과 남작까지, 그들의 가신과 기사들까지 생각하면 수를 가늠하기 힘듭니다.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을 테고요."

"그래."

"네. 에반이 죽어 따르는 귀족이 반절 이상 줄고, 덕분에 브리센 후작도 지금은 조용히 지낸다 해도 아직 그만큼 영향력 있는 다른 귀족이 없습니다. 마나실 후작이나 지그프리드 공작, 왕자님 편에 선 세이렌 백작가나 에이프린 백작가, 마법사들. 그렇게 꼽아가며 다 따져봐도 세력 싸움에서는 못 이겨요. 발칸 끌고 나가서 전부 다 없애버리실 것 아니라면 당장은 절대 못 이겨요."

"그렇지. 그래서 그냥 두는 거였지, 내가. 다 죽이기엔 너무 많아서 그냥 두는 거였지."

"네. 그러니까 제발 가만히 계세요. 나가지 마세요. 왕자님 다치십니다."

그러니까 조금 전.

테라스에서 흥미진진한 모습을 확인하고 있던 칼리안의 방에 얀이 들어왔다. 빈 찻잔들을 치우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열린 문 사이로 칼리안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찾아온 키리에의 모습이 보였다.

'키리에.'

'왕자님. 말씀 안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칼리안이 무엇을 궁금해하고 있는지 익히 잘 아는 키리에가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했다. 그러나 결국 칼리안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이곳에 오는 동안 듣게 된 그 흥미로운 대화의 전말을 알렸다.

'아. 브리센 후작이 미쳤나보다.'

그리고 칼리안은 이렇게 말했다.

부럽다니. 좋은 동생을 뒀다니······ 자신과 달리.

의도한 것은 실리케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겠으나 어떻게 이런 절묘한 말을 건넸을까. 딸기 향과 민트 향과 르니에리 냄새가 골고루 배어 썩은내가 풀풀 나는 그런 말을 어떻게 했을까.

미치지 않고서야.

'진짜 미쳤나봐. 돌아버렸나봐.'

웃음소리를 내는 칼리안을 키리에가 막아섰다. 칼리안의 뒤에는 얀이 섰다. 그리고 칼리안의 질문이 시작됐다.

그레이 브리센.

그 놈을 왜 지금 죽여버리면 안 되는지. 왜 참아야 하는지. 스스로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브리센 후작에게 그런 망신을 주셨는데 또 나가시겠다고요. '그 꼴을 내 눈으로 봤으면 너무 놀라서 회의장이 통째로 구워졌을 텐데 우리 왕자님이 역시 의연하시다' 이런 소리를 해 가며 마나실 후작이 겁을 주고. 전하께서는 '막내가 속이 깊어 그렇다' 대답하시고. 억지로 그렇게 귀족들 입 막은 것 모르십니까?"

칼리안도 안다.

칼리안의 행동을 질책했다가는 귀족들의 불만이 커질 것을 붙들어놓기 힘들 것 같다 여긴 앨런과 르메인이 그렇게 나섰었다. 앨런의 말을 부정했다가는 남은 수명도 부정당할 것 같아서 결국은 그 자리의 모두가 함께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렇게 안 막았으면 왕자님 왕궁에 영영 못 오실 뻔했어요. 지금은 왕자님이 왕세자가 아니라서 다들 그냥 넘어가 준 겁니다. 아무리 무서워도 왕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플란츠 저하가 왕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일 잊어버리기 전에 왕자님이 브리센 후작에게 다시 손을 대면 왕자님 아르피아는 물론 카밀론에도 못 가십니다. 사람들은 한 번 있던 일은 실수라 여기지만 두 번 연이은 일은 세 번째를 확신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번째는 안 잊어버릴 거고요. 아무도 왕자님을 위에 두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상관없는데. 나중 일은.

지금 당장 너무 화가 나서.

그런 말이 나오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얀의 이야기가 조금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안다. 회의장에서 이미 한 번을 참았으나 다시 한 번 참아야 함을 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냥 두십시오."

말없이 서 있는 칼리안을 향해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왕자님께서 대신 화내고 대신 손 봐주며 사실 것 아니잖습니까. 나중에 혹시나 저희가 없더라도······ 나중에 세자 저하께서 왕궁 밖에 나가게 되더라도 혼자서 살 수 있도록 하시려던 것 아닙니까."

얀의 놀란 눈초리에 '없더라도'의 의미를 조금 바꿔 다시 말한 키리에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세자 저하도 나름의 생각을 하셨을 겁니다. 이유가 있으니 참고 지나쳤을 겁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왕자님께서 다 나서주셔야 할 일 아닙니다. 직접 화내고 직접 해결하는 법도 가르치십시오. 그래야 삽니다, 왕자님."

스스로 화내고 해결하는 법도 알아야 산다.

결국 그 말이 칼리안의 발을 붙들어맸다.

딱 30분 동안.

* * *

이미 없다.

왕궁에 돌아오자마자 빌헬름 관으로 향하기에, 언제나처럼 영혼이 사라진 얼굴을 한 채 서류에 파묻혀 있으리라 생각했다.

"헤르츠 부군단장 방금 전에 코코 보겠다며 나갔습니다."

그 오리.

저 닮아 시끄럽게 꽥꽥거리던 그 오리를 보러 갔단다. 오리를 보러 간 것인지 오리의 공동 양육자를 보러 간 것인지는 궁금하지도 않다.

"코코 잠깐 보고 식사 얼른 하고 곧바로 돌아오겠다 했습니다."

"······ 알았어."

"혹시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시면 제가 나가서 바로 찾아오겠습니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 대신 소금 넣은 것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가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어딘지 모르게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얼굴이라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고양이들 만나는 것과 오리 만나는 것이 아마도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그것을 생각해 본 플란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떻게 따져보든 일보다는 그 쪽이 중요한 게 맞긴 맞으니까.

"둬."

"네, 부군단장님 저하."

대체 저 웃긴 호칭은 또 어디서 나왔는지.

세크리티아에서 왕세자가 되어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그프리드령에 다녀왔다. 덕분에 니들렌과 따로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서 저렇게 부르는 것을 이제야 들었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의 영향인지 아니면 '형님 저하'라 불러대는 동생 놈의 영향인지. 어쨌거나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만은 분명한 호칭에, 플란츠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하나만."

"네?"

"호칭. 하나만 부르라고. 이상하니까."

"아, 네."

니들렌이 짧은 고민을 하다 말했다.

"그럼 여기는 빌헬름 관이니까 하던대로 그냥 부군단장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저하."

"알았어."

"네, 부군단장님."

아르센의 행방도 알았고 니들렌과 시덥지않은 대화나 나눌 시간도 없었고 누군가를 앞에 두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던 플란츠가 이만 나가보라는 이야기를 하려 했다.

- 똑똑.

그런데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체르밀 궁에서 식사가 도착했는데······ 드시겠습니까."

레릭의 목소리가 함께 전해졌다. 평소였다면 '지금 들일까요' 정도로 물어봤을 텐데 오늘의 질문은 좀 다르다. 물론 그레이 때문이다. 르니에리 향을 맡은 날에는 으레 끼니를 거르곤 했으니까. 나아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직은.

때문에 생각 없어진 저녁 식사를 도로 물리라 이야기하려던 플란츠가 또 한 번 말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 꼬르륵.

때 잘 맞춰 고요한 집무실을 울린 또렷한 소리 때문에.

"아. 죄송합니다, 부군단장님."

식사 이야기에 우렁차게 존재감을 과시한 제 배를 내려다 본 니들렌이 멋쩍게 웃으며 사과를 건넸다.

연두색 눈동자가 니들렌을 향했다.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다가.

"들여와."

왕족의 몫으로 만들어낸 것이니 돌려보내봐야 다른 누구도 먹지 못하고 버리게 될 뿐인 음식을 그냥 먹겠노라 이야기했다.

구워낸지 오래되지 않아 여전히 김이 나는 하얀 빵, 시금치와 치즈를 넣어 끓인 따뜻한 스프, 얇게 썰어낸 네 종류의 햄, 피망과 양파가 섞이지 않은 샐러드, 구운 치즈, 노른자가 흐르지 않을 정도로만 익힌 계란프라이. 그리고 과일과 우유.

화려하지 않으나 플란츠의 입에 거슬리지 않을 것들로만 채워진 간소한 저녁 식사를 집무실 중앙의 큰 테이블 위에 차려놓은 레릭이 정중한 인사와 함께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보니 인사하고 나가야 할 때를 놓친 니들렌이 그 옆에 멀뚱히 서 있게 된 꼴이 됐다.

"뭐해."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 앉은 플란츠가 니들렌을 흘끗 보며 물었다. 그것을 축객령으로 들은 니들렌이 서둘러 예를 올리려는데, 플란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앉아."

"······ 네?"

"배고프다며."

그런 말 안 했는데요!

굉장히 큰 누명을 쓴 얼굴이 된 니들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물론 밖에서 야영을 했을 때 플란츠와 함께 식사한 적은 많았다. 엘프의 도시에 갔을 때에도 모두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은 적 많다. 하지만 독대는 아니었지 않나. 어떻게 왕족과, 그것도 왕세자와 마주보고 앉아서 저녁을······.

- 꼬르르륵!

아.

왜 하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금치 스프가 있는 건지.

"감사합니다."

모르겠다.

여긴 빌헬름 관이니까. 아르센과 식사 한 적은 많았으니까. 기사단을 담당하는 부군단장과 밥 먹는 자리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두 눈 꾹 감고 플란츠의 앞에 마주앉은 니들렌이, 스프 한 스푼을 입에 넣는 플란츠를 따라 식사를 시작했다.

맛있다.

엄청 맛있다. 동생이 만든 것만큼 맛있다.

왕궁에서 나오는 식사야 하루에도 두 번씩은 꼬박꼬박 먹는다지만 그 음식들이 이 정도로 훌륭한 맛은 아니었다. 때문에 체르밀 궁의 주방장에게 소리없는 감사인사를 전한 니들렌이 스프 한 접시를 싹싹 비워내고 빵과 햄을 먹기 시작했다.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게 됐다.

"부군단장님은 왜 안 드십니까."

왕족과의 식사 자리.

비록 직전까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이라 하나 식사가 시작된 후 플란츠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니들렌 역시 침묵을 지켰어야 하는 상황. 그것을 무시하고, 스프 한 스푼으로 저녁을 마친 듯한 왕세자를 향해 질문을 건넸다.

쓸데없는 예절을 니들렌에게 가르쳐 줄 의향은 조금도 없던 플란츠는 별다른 내색 없이 입을 열었다.

"생각 없어."

"저 때문에 식사하겠다 말씀하신겁니까?"

"됐고. 먹어."

낯부끄러운 소리 할 줄 모르는 어린 부군단장을 보던 니들렌이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그리고 우유 옆에 놓여 있던 탄산수로 입을 비워낸 뒤 말했다.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왜."

"그러신 것 같아 보입니다."

"별로."

"그레이 브리센이 체르밀 궁 쪽으로 갔다 하던데. 혹시 마주쳐서 그러십니까?"

왕궁을 수비하는 것 역시 발칸의 업무이지 않나. 출입하는 귀족들 중 주시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상부로 모두 보고가 되고 있었다. 때문에 그 '상부'의 끄트머리에 있는 니들렌도 그레이의 입궁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탄산수에서 올라오는 기포를 잠시, 스프와 빵에서 올라오는 김을 잠시, 걱정어린 니들렌의 눈을 잠시 쳐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말씀하십시오, 부군단장님."

"때릴 수도 없고 같이 싸울 수도 없는 사람을 맞닥뜨리면. 어떻게 하는지."

"죽입니다."

무시무시한 대답을 깃털처럼 내려놓은 니들렌이 싱긋 웃었다.

"마법사는 괜한 인정으로 후환만드는 짓 안합니다, 부군단장님. 때리고 싸우는 일 안 생길 놈이면 애초부터 참아야 할 일도 안 생길 것이고, 때릴 수도 없고 같이 싸울 수도 없는 놈인데 그냥 두면 결국 나중에는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죽입니다."

"죽여서는 안 되는 놈이면."

"죽입니다."

대답은 똑같았다.

"인생 어렵게 살아 뭐 합니까. 죽은 놈 자리는 어차피 누군가 알아서 채워놓게 돼 있습니다."

"못 죽일 놈이면."

"놈이 저보다 강하면 제가 죽을테니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영영 안 마주치게 된다는 건 같지 않습니까."

루시한테 간식 뺏기고 계단 구석에 앉아 소금 넣은 샌드위치나 주섬주섬 먹고. 제 상관 주겠다며 소라껍데기나 줍는 사람이라 해도 발칸의 마법사였다.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을 발칸의 사단장에 앉혀 둘 리가 없는 것이다.

"······ 그래."

질문에 대한 답은 못 듣고 마법사 사고방식이 얼마나 극단적인지에 대해서만 거듭 깨닫게 된 플란츠가 작게 답했다. 그러자 니들렌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레이 브리센, 죽여드릴까요."

그레이가 이제 소드마스터가 아님을 아직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한다. 칼리안은 커녕 시오나 힐도 상대 못하면서.

"더 못참겠거나 이제 죽여도 되겠다 싶어지면 말씀해주십시오. 얼마든지 나가서 얼마든지 죽여놓고 오겠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던 빈 스프 접시를 앞에 둔 니들렌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발칸 전체가 저하 편인데 뭘 그렇게 참으십니까. 그런 놈도 그냥 살려놓겠다고 마음 넓게 쓰실 필요 없습니다."

이름값 하나는 확실히 할 수 있는 대단히 능력있는 마법사가 명성값 못하는 망나니 왕세자에게 그리 말했다.

"알았어."

"그럼 죽여놓고 올까요?"

"둬."

"그냥 둘까요?"

"······ 일단."

"알겠습니다. 일단 살려두겠습니다."

드넓은 아량으로 일단 눈감아 주겠다는 말.

왕세자 말고 부군단장 말고 그냥 저보다 어린 사람 한 명을 어르고 달래는 듯한 그런 대답.

그림인지 인형인지 사람인지 구분도 안 될 정도로 평소보다도 몇 배는 더 무표정했던 얼굴에 색이 돌았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이었지만 그래도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니들렌이 다행이라는 듯 마주 웃었다.

플란츠가 먹지 않으려던 흰 빵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살려두고, 먹고. 일 해."

누구 죽이겠단 얘기 그만하고 밥 먹고 일이나 하라고.

"저 퇴근 못하고 일 해야 합니까, 부군단장님?"

"밥값."

"······ 밥값."

얻어먹었으면 일을 해야지.

세상에 공짜 없다고, 내 정혼자가 그랬다.

* * *

이제 완치되었다 해도 좋을 허리가 괜스레 뻐근하다.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 미안합니다. 조금 전에 후작저로 사람을 보냈는데 길이 엇갈린 것 같습니다.'

란델을 찾아가 브리센과 연이 있는 리브렛 변경백의 영애와 정혼을 하도록 설득하려 궁에 든 길이었다. 두 동생이 이미 번듯한 정혼자를 두고 있는 마당에 혼자서만 다른 배경 없이 계속 꼬리를 말고 지내겠느냐 이야기를 하려고.

'오늘 란델 왕자님께서 매우 고단하시어 아무도 만나지 않겠노라 하셨습니다. 다른 날로 일정을 확인해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그런데 기껏 찾아와 한참을 기다린 보람도 없이 문전박대를 당했다.

소리소문없이 지금 당장 사라져도 이상할 것 없는 1왕자에게 그런 취급을 받아서, 똑같은 왕자인 칼리안에게 같은 취급을 받았던 허리까지 쑤셔오나보다. 그렇게 여기며 체르밀 궁을 나서던 그레이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하나같이 저 지경으로 컸는지."

무려 후작과의 약속을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고 깨버린 1왕자나, 무력만 강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줄 알고 날뛰는 3왕자나.

세상 혼자 산다는 듯 제 혈육 등진 왕세자나.

- 후작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왕세자가 저대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브리센은 사라지리라고. 왕세자는 3왕자가 독차 마시고 쓰러졌던 그 날부터 이미 싹을 보인 놈입니다. 제 어미 벼랑에 밀어넣은 3왕자 대신 칼에 맞은 것도 모자라 아직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3왕자 손을 꼭 잡고 안 놓는 것 보면 모르십니까. 실리케 입지가 약해졌다 싶으니까 목숨걸고 제 살길 찾은 것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어미까지 내버리고서.

전날의 늦은 밤.

비웃음 가득 담은 채 전해졌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 혹시라도 왕세자의 의중을 확실하게 알고 싶다면, 내일 왕궁에 가시는 길에 한번 만나 실리케를 입에 올려 보십시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을 테니.

그 말이 정확히 맞다는 것을 증명하듯.

'덕분에.'

대놓고 실리케를 언급했음에도 플란츠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제 어미처럼, 누가 그려둔 것 같이 살아있는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에 실낱같은 표정 하나 띄워올리지 않고 대답을 하더니 하늘 아래 저 혼자 있다는 듯한 걸음으로 자리를 뜨던 모양새를 보란 말이다.

"······ 지독한 새끼."

불 꺼진 지 오래인 4층 창을 노려보던 그레이의 입이 열렸다. 아무리 오러를 다루지 못한다 한들 주변에 듣는 귀가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살필 능력이 되었다. 때문에 아무런 걱정 않고 입을 놀렸다.

"그렇게 부정해봐야 그 핏줄 어디 안 가지."

에반과의 힘싸움에서 결국은 이기지 못하고 변경백이 된 뒤, 도저히 참지 못하겠으니 나를 좀 수도로 불러내달라 부탁하려 왕궁에 들었던 날. 손에 쥐기엔 너무 날카로워 오히려 쓸모가 없다 답하며 매몰차게 뒤돌아섰던 실리케. 그 때의 실리케와 조금 전 놈의 모습이 다를 것이 대체 뭐란 말인가. 제 핏줄 무시하는 꼴까지 똑 닮았으니 말이다.

- 후작께서 살 길은 1왕자 뿐입니다. 회의장에서 있던 일 때문에라도 3왕자는 더 이상 후작께 손대지 못합니다. 그리고 앨런 마나실과 3왕자는 저희가 차차 손을 볼 겁니다. 3왕자가 없다면 왕세자는 자존심만 높은 한낱 어린애가 아닙니까. 그러니 후작께서는 다른 걱정 말고 1왕자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 줄 준비나 하십시오. 두 번째 르메인으로 만들어 마음껏 쓰시는 겁니다.

그 말이 맞다. 단 하나도 틀린 것 없이 맞는 말이다.

그 놈에게 똑같은 결말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오늘 란델에게 수모당한 일은 일단 참자고. 칼리안에게 당했던 일을 참아낸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고.

긴 생각의 끝에 각오를 마친 그레이가 뒤로 돌았다.

지금 당장 브리센이 사라지면 안 된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칼리안은 절대로 그레이를 건드리지 못할 테니. 다른 걱정은 하지 않은 채로.

"결국 제 어미처럼 끝날 길인 걸 모르고 세상 다 얻은 듯이 구는 꼴이라니."

"그리 보이느냐. 네 눈에는."

그런데.

그랬는데.

- 콰아앙!

그렇게 여겼는데.

"세상 다 얻은 듯이 구는 그 꼴을 좀 봤으면 좋겠구나. 나도."

어둠이 갈라졌다.

빛이 번쩍인다. 비명도 새어 나오지 못할 지독한 통증이 찾아든다. 목을 죄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으나 숨이 터지지 않는다. 숨이 막힌다.

당장은 절대로 마주할 일 없다 여겼던.

두 번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 여겼던.

"그래. 기대하는대로 티끌만한 상처도 안 내고 곱게 살려 둘 테니."

"칼, 리안, 왕자님."

새빨간 두 눈이 그레이의 심장을 옥죄여 온다.

- 콰직!

시선을 내렸다.

그림자 속에 파묻힌 듯한 새카만 검이 어둠을 갈라내고 있었다. 온기 없는 그 검이 목을 꿰뚫고 체르밀 궁 외곽의 두터운 회랑 벽에 푹 박히는 것이 느껴진다. 숨이 막힌다. 상처는 없다. 심장은 착실히 뛴다. 목에 박힌 검을 타고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린다. 서늘하다. 숨이 막힌다.

공포가 짓쳐든다.

차라리 악몽인 듯한 공포가 찾아든다.

손이 떨린다.

숨이 막힌다.

"······ 어디 한 번 계속 짖어보거라."

노래하듯 속삭인 입술이 세상을 다 가질 듯한 아름다운 미소를 그렸다.

"멍멍,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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