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66화 (367/527)

제65장. 하나가 더 있다(3)

떼어 두고 나가는 것이 미안하지만 한 편으로는 기껍다.

해먹 밖으로 흘러나온 하얀 뒷발의 분홍색 발바닥과 쿠션 아래로 살랑살랑 움직이는 회색의 꼬리가 후다닥 사라졌다. 대신 동그란 얼굴 두 개가 빼꼼히 들어올려졌다.

그 뒤에는,

- 우다다닷······!

강아지도 아니면서, 같이 있을 때라 하여 곁에서 항상 애교를 부려주는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온갖 소란을 피우며 달려온다. 달려와서는 서로 목청을 올려가며 말을 걸어온다. 애옹, 냐옹, 하고, 너무 예쁜 소리로.

정말 많이 반갑다는 듯이.

참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루시, 안네."

처음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날에는 그렇게 서럽게만 울어대더니 어느새 플란츠의 긴 외출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더는 그렇게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대신 반겨줬다.

숨기고 감추어야 할 것들 투성이인 이 왕궁에서 그 어느 하나 계산하는 법 없이 온몸으로 달려와 지치지도 않고 소리를 높여가며 반가움을 건넨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맞아주는 모습이 고마워 두 팔을 뻗어 고양이들을 안아올렸다. 품에 한가득 들어오는 두 고양이를 품에 가득 안았다.

"루시."

"애옹!"

"안네까지 배가 동그래졌는데. 뭐 하고 다녔어."

"니앙!"

"맞는데. 왜."

이런 일이 어느새 당연한 것이 되어 그렇게 어느새, 해야 할 일을 다 잊고 잠시 앉아 고양이 색에 물들어 포근해진다.

"궁금했어. 잘 있는지."

"애오옹!"

"그래. 안 잊어버렸어. 두고 간 것 아니야."

알고 보면 그저 빨리 간식을 꺼내달라 조르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너 누군데 내 영역에 또 왔냐고 묻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되는대로 이해하고 되는대로 대답을 했다. 이런 일도 어느새 이렇게 일상이 되었다.

"냐아!"

"응. 나도."

"냐아······!"

"그래. 보고싶었어."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말을 어색한 줄도 모르고 아낌없이 꺼내놓는 일 역시 일상처럼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만지는 것을 썩 좋아하진 않는 것 같지만 이럴 땐 모르는 척 가만히 참아주는 루시의 분홍색 발바닥과, 아무리 봐도 조금 더 포동포동해진 것이 분명한 안네의 빵빵한 배를 보던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새 옷 입었네."

"에웅!"

"히나가 준 건가."

"냥!"

연노란 바탕에 수놓아진 하얀 꽃송이.

연분홍 바탕에 수놓아진 하얀 꽃송이.

길가에 흔하게 피어 있는 흰 꽃이라 하였는데 생각해보니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다. 흔하디 흔하지만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꽃. 하지만 잊을 수 없을, 플란츠에게 있어 꽃이되 꽃이 아닌 유일한 꽃. 라리시움. 고양이들은 그 특별한 꽃이 몇 송이씩 수놓아진 새 옷을 입고 있었다. 솜씨 좋은 손길을 가진 이의 온기를 그대로 담은 고운 옷을 입고 있었다.

"잘 어울리네, 루시."

"애웅!"

마법사들의 것처럼 후드까지 달려 있는 연노란 로브를 입은 루시가, 소파에 잠시 앉은 플란츠의 무릎 위에 몸을 누이며 대답을 했다.

"니아앙!"

루시에게 제일 좋은 자리를 뺏긴 안네가 솜방망이같은 앞발로 플란츠의 팔을 툭툭 건드리며 다시 말을 건넸다.

"그래. 안네도."

후드 대신 빨간 리본을 단 연분홍색 셔츠를 입은 안네도, 그리고 루시도,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보들보들한 기분이 들어서. 작고 작은 웃음이 났다.

한동안 그렇게 고양이들과 함께 여유를 부리고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나와 옷을 입었다. 흰색과 짙은 회색이 섞인, 정확히는 루시와 안네의 털이 묻어도 크게 티나지 않을 색의 가디건이 레릭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플란츠의 입이 아주 짧게 열렸다.

"말고."

가디건 '말고' 다른 것.

수련장에 갈 생각이라 더 편한 옷이 필요하다는 뜻이거나 체르밀 궁 밖으로 나갈 예정이라 더 격식있는 옷이 필요하다는 뜻이거나. 둘 중 하나다.

재빨리 생각을 마친 레릭이 둘 중 한 가지를 골라 물었다.

"수련장에 가실 겁니까?"

"빌헬름 관."

틀렸다.

플란츠가 길게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때는 고양이들을 대할 때 뿐이다. 밖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긴 말을 꺼내는 것을 얼마나 피곤해하는지 안다. 칼리안에게 말을 짧게 하는 것은 그렇게 해도 쏙쏙 다 알아듣기 때문이고, 레릭에게 말을 짧게 하는 것은 레릭이 편해져서 라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틀려도 괜찮다. 다음엔 맞히면 되지.

"네, 저하. 재킷으로 드리겠습니다."

플란츠가 돌아와서 기분 좋아진 레릭이 함지박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에 들린 얇은 가디건을 다른 시종에게 건넨 뒤 그 대신 옅은 보라색 재킷을 받아들었다. 늦은 시간이라 타이는 따로 건네지 않으려 했는데 그것까지 차려입으려 하기에, 은사로 장식된 짙은 회색의 타이 하나를 부랴부랴 가져와 매 주었다.

"저하,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빌헬름에서."

"알겠습니다. 준비되는대로 가져오라 전해두겠습니다."

"둘."

"칼리안 왕자님도 함께 드시는 겁니까? 그럼 양을 조금 더 많이······."

"말고. 부군단장."

"아······ 아, 네. 헤르츠 부군단장. 네, 알겠습니다."

아르센이라니.

아르센의 식사를 플란츠가 함께 챙기다니.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는지 봐야 한다. 아니, 해가 뜨기는 뜨는지부터 확인해봐야 한다.

놀랍고 당황스러운 마음을 서둘러 접은 레릭이 타이 매듭을 손보고 흑진주와 백금 체인으로 이루어진 장신구를 달아주었다. 우리 저하 며칠동안 그 부군단장과 계속 함께 계시더니 사이 많이 좋아져서 돌아온 모양이라고, 그런 생각에 아주 많이 기뻐하면서 말이다.

파란머리 미친 마법사가 '배고프니 밥 먹고 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밖에 나가서 안 돌아올 일 없도록. 어디 나갈 생각 않고 밤새도록 밀린 업무 잘 끝내도록.

그래서 언제 다시 나갈지 모를 아우님 내가 곧장 따라 나서는 길에 쌓여있는 발칸의 일을 핑계로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계산 가득한 속내가 파릇파릇한 눈 속에 숨겨진 것을 모르는 채였다.

"다 되었습니다, 저하. 지금 바로 나가실 겁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마차를 불러놓도록 하겠습니다."

"됐어."

"빌헬름 관에 또 걸어가시려고요?"

플란츠가 고개만 한 번 끄덕인 뒤 방을 나섰다. 빌헬름 관까지 거리가 멀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대체로 걸어다니던 길이었으니까.

계단을 내려갔다.

3층. 계단이 보이는 쪽의 벽 앞에 서 있던 얀이 플란츠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플란츠와 얀 주변에 다른 이들이 많았던 탓에 얀의 고개가 까닥이는 것보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갔음을 안다. 상관하지 않고 적당히 인사를 받은 뒤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2층. 칼리안의 아랫사람 한 명이 차 두 잔을 가지고 걸어오다 인사를 건넸다. 진하다는 말 만으로는 표현하기 힘들 만큼 다디단 꿀 향이 확 퍼졌다. 찻잔 속에 든 레몬이 무색할 만큼의 그 향에, 플란츠의 한쪽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무슨 변덕이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란델이 칼리안의 방을 찾아간 듯 싶어서였다. 지닌 뒤끝의 길이를 재어 보면 시스파니안 본신을 몇 바퀴쯤 감고도 남을 동생 놈이 아니던가. 대접받았던 자몽 차 한 잔도 그냥 넘기지 않고 꼬박꼬박 다 돌려 줄 인성임을 잘 아는 플란츠가 메를린을 지나쳐 발을 옮겼다.

1층. 건물 정문을 나섰다. 분수대 물 소리와 사락거리는 나뭇잎 소리를 지나쳐 걸었다. 작고 평평한 돌이 빼곡하게 놓인 길을 저벅저벅 걸었다. 체르밀 궁으로 향하는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의 예를 받았다. 멈추지 않고 다시 계속 걸었다.

"······ 아주.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우뚝.

발이 멈췄다.

"플란츠, 왕세자······ 저하."

청록색의 머리, 청록색의 눈, 번듯한 얼굴, 잔잔한 미소. 하지만 날을 세운 눈. 날을 고르며 벼려둔 눈.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내리떴다.

앨런보다도, 키리에보다도 더 큰 듯한, 그러니 플란츠보다 주먹 두 개 쯤은 더 큰 듯한 이의 날 선 눈을 똑바로 내려다봤다.

"누구."

그리고 물었다.

"네, 저하. 브리센 가의 그레이 브리센 후작입니다. 얼마 전 귀족 회의에서 한 귀족이 저하께 제대로 인사하지 않아 칼리안 왕자님이 역정을 냈던 일이 있었는데,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플란츠의 짧은 말과 그 속에 든 의미를 이번에는 완벽히 알아들은 레릭의 대답이 뒤에서 들려왔다. 앞에 선 그레이를 신경써서 작게 말한다는 듯, 하지만 절대로 안 들리지 않을 만큼의 매우 적절한 작은 목소리로.

"그때의 그 후작입니다, 저하."

"아아."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그레이를 다시 한 번 쳐다봤다. 저보다 큰 그레이를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려다봤다.

"브리센······ 그렇군."

그리고 멈췄던 발을 다시 옮겼다.

같은 브리센임을 완전히 잊었다는 행동.

여느 귀족들을 대하듯 똑같이 선을 긋는 행동.

그것이 남아있는 브리센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플란츠의 대답이었다.

그레이의 입가에 맴돌던, 꽤 보기 좋은 미소가 짙어졌다.

에반이었다면 무시당한 상황에 화가 번져 그 이상의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을 터였다. 허나 그레이는 조금 달랐다. 적어도 그레이는 화를 삼키고 웃는 법을 알았다.

"네. 제가 바로 브리센 가의 후작, 그레이 브리센입니다. 잊고 사시는 줄을 몰라 제 소개를 안 드렸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플란츠의 발이 다시 멈췄다.

"세자위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하. 지난 번 뵈었을 때 미처 따로이 축하를 드리지 못해 이제야 말씀을 드립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척, 자신은 브리센이 아닌 척, 고고한 용의 핏줄만 가지고 태어난 척, 그렇게 무시를 보내는 조카에게 축하로 답을 했다.

플란츠가 그레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도 무시를 보낼지, 웃음을 보낼지. 그것을 아주 잠시 가늠하고 있는데 그레이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호감 가득한 보기 좋은 미소를 지닌 입에서 속삭이는 듯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일견 부럽습니다. 좋은 동생을 두셨으니······ 저와 달리."

향기로운 말.

르니에리 향을 한가득 담은 듯한 그 말에, 언제나 한 치 정도 들려 있는 레릭의 뒤꿈치가 땅을 디디는 소리가 난다.

그러다 또 맞아봐야 정신을 차릴 건지. 슬레이만이 수도에 와 있다던데 오러 없는 것을 감추려면 어디 먼 곳으로 도망이나 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지.

그런 질문을 건네볼까, 하다가.

"덕분에."

어느 하나 틀린 곳 없는 말. 그러니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을 했다. 그리고 다시 발을 움직였다.

발 끝에 힘을 주었다.

흔들리지 않도록 걸었다.

* * *

더 이상 차를 마시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칼리안이 오기 전 앞에 두었던 차를 얀이 치워가지 못하도록 했을 테지만 그것은 이미 늦은 일이다. 그렇다 해서 다디단 저 차를 또 입에 댈 수도 없어서 더는 차에 손을 대지 않았다.

"제가 알기로 란델 형님이 저를 찾아오신 것은 처음인 것 같은데. 혹시 맞습니까."

옛 칼리안이 사라지고 새로운 이가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괜찮다 했다. 그렇다 해서 그 사실을 애써 묻어두려 하지도 않았다. 무럭무럭 자라는 중인 플란츠에게는 져 주더라도 이미 다 자란 란델에게는 져 줄 생각 없었으니까.

"그래. 그렇더구나."

"그럼 이제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왜 오셨는지."

한동안 칼리안을 쳐다보던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품 속에서 작은 편지 하나를 꺼내 내려놨다. 그러자 칼리안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피냄새 납니다."

이제 거의 지워져 아주 옅어진, 애초부터 그리 짙게 묻지 않았던 듯한 피 냄새. 그것이 편지에서 풍겨나오고 있었다.

"그러하더냐."

"무엇입니까."

"열어보거라."

편지와 란델을 한 번씩 쳐다본 칼리안이 손을 뻗어 편지를 집어들었다. 어디에서 보낸 것인지,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지,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텐실에서 보낸 겁니까."

"달리 있겠느냐."

"하긴 그렇네요."

팔락, 하고 접힌 종이가 펼쳐지는 소리가 났다.

- 세크리티아에서 우연히 그대의 동생들을 만났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대에 대한 친근한 마음이 듭니다. 나와 그대 역시 형제라 할 수 있을 일이니, 모두 함께 만나 친분을 쌓고 오래 미뤄두게 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빠른 속도로 편지를 읽어 내려간 칼리안이 란델을 쳐다봤다.

"누가 란델 형님이랑 친해지고 싶다 하는 이런 편지 처음 받으셔서 감동받으셨고, 그래서 막 의미있게 간직하고 싶고. 혹시 그런 생각 드십니까."

"태우거라."

"네."

대답과 동시에 불길이 일었다.

종이가 타들어가는 냄새에 가려져 피냄새도 서서히 소각되었다.

곧 칼리안의 손이 란델의 심장을 가리켜보였다.

"맹세의 인 맺으실 때. 란델 형님이 알게 된 사실을 누군가에게 전부 다 일러바쳐야 되는 그런 약속도 하셨습니까."

"그리 했겠느냐."

"혹시 모르죠."

"하지 않았다."

란델이 무언가를 알게 되더라도 맹세의 인을 나눈 상대방에게 꼭 알릴 필요는 없다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긴 만약 그랬다면 칼리안이 바뀐 것에 대해서도 상대방에게 전해줘야 하지 않겠나. 그런 계약이 아니라 참 다행한 일이다. 아니었으면 악신이고 세계평화고 나발이고 드미레아 손에 죽을 뻔했다. 또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채로 일단 죽고 나서 답을 알게 될 뻔했다.

"계약하신 내용이 비교적 구체적인가 봅니다. 확답을 주시는 걸 보니."

"적힌 것이 많기는 하였다. 두 번을 맺진 않아서 비교하긴 어렵겠구나."

"형님은 워낙 말도 안되는 계약을 맺고 왔었는데, 그나마 낫네요. 그래도 란델 형님이 형님보다는 똘똘한 계약을 하고 오신 듯 하니."

"조롱이더냐."

"질책입니다."

대체 뭘 보고 자랐으면 다들 그 나이에 그렇게 심장들을 홀랑홀랑 내다 파시는지.

구시렁거리듯 덧붙인 칼리안이 재 하나 남기지 않고 타버린 편지를 떠올리다 입을 열었다.

"형님께 편지 보낸 이가 텐실의 세르제인 왕세자 맞습니까."

"그래."

"세르제인. 죽었습니다."

달칵.

손 대지 않던 찻잔을 든 란델이 천천히,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내려놨다. 칼리안은 담담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 되었느냐."

"세크리티아에서 제가 만난 세르제인, 형님께 편지를 보낸 세르제인, 이 곳에 오겠다며 사방으로 애쓰고 있는 세르제인. 전부 다 왕세자로 변장한 가짜입니다. 진짜 세르제인은 진작에 큰 부상을 입은 채였습니다. 제가 세크리티아에 머무를 때까지만 해도 살아있었고."

하얀 손가락이 조금 전 란델이 편지를 내려놓았던 자리를 가리켜보였다.

"이 편지 보낸 날 죽었습니다."

만나보고 싶다 이야기는 하였으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정하자는 내용은 빠져있는 편지. 때문에 편지 내용은 기억에 담아 둘 것도 없이 태워버렸다.

'세르제인'이 전하고자 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이름과 냄새일 테니까.

피 얼룩 하나 없는 깨끗한 편지에 남겨진 피 냄새.

일부러 배게 한 것이 분명한 피 냄새. 란델은 알아보지 못하겠으나 칼리안은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른 기사들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약하게 배여 둔 피 냄새.

"혹시 전하께서 세르제인을 카이리스에 불러와도 안 싫어할 건지, 란델 형님 눈치 엄청 봐 가며 물어보신 일 있습니까."

"너희들이 세크리티아에서 돌아온 뒤로 전하를 따로 뵌 적 없었다."

아, 좀.

만나시라고.

옥수수수염 너한테 정혼자 생겼다는 소문 도는 건 혹시 아느냐고. 첫째 형님 너를 전하가 좀 만나야 이렇다 저렇다 대응을 할 것 아니냐고. 완두콩이 세르제인에 대해서 전하한테 부탁을 했는데 그거 어떻게 할지 전하가 대답해주러 왔다가 완두콩한테 혼나고 냅다 사과부터 하느라 당신 여기 왜 왔었는지 싹 까먹고 그냥 가셨다고. 못견디게 싫다는 생각도 안 들 만큼 마음이 문드러진 건 알겠는데 그래도 좀 만나보면 안되겠느냐고.

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문드러진 걸 알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니까 못 꺼내놓지.

"네."

내가 진짜 답답해서 늙어죽겠네.

어여쁜 미간에 생긴 주름을 애써 펼쳐낸 칼리안이 쓴 맛 없애 줄 레몬차를 발칵발칵 마시고 내려놨다.

"그것 전해주시러 오신 겁니까. 다른 하실 말씀 없으시고요."

"있겠느냐."

"없으시겠죠."

"그래."

"알겠습니다. 혹시나 나중에 전하께서 세르제인 만나도 괜찮겠냐 물으시거든."

"상관없다 하마."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란델을 쳐다보다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혹시, 심장 안 무거우십니까."

일어나려던 란델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깊숙이, 정말 깊숙이 쳐다봤다. 그것을 짐짓 못본 척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돌 들어있는데 안 무거우신지 여쭙는 겁니다."

"······ 모르겠구나."

맹세의 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란델이 사용하는 붉은 빛의 치유력. 그 역시 제온의 일원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빛이라서 하는 말이었다.

"혹여 무겁거든, 버거워지거든 얘기해주십시오."

"가벼이 해 줄 것처럼 이야기하는구나."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별 것 아니라는 듯한 대답이 나왔다.

- 심장 속의 돌, 꺼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위험,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좋은 사람 심장, 말고, 나쁜 사람 심장, 고쳐볼 때, 얘기해주세요.

첫째 형님 저 분이 나쁜 놈이라서가 아니라. 무거울까봐. 좋은 놈까진 아니었을 때 달아 둔 것 때문에 좋은 놈으로 계속 못 돌아오고 계속 무거울까봐.

"목숨 걸어 주시면, 시도해 드리겠습니다."

꺼내 볼 수 있노라고, 히나로부터 전해들었던 이야기를 건넸다.

"기억해두마."

"네."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규칙적이고 낮은 발소리가 멀어져가다 이내 사라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란델에게 예를 보였던 칼리안은,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앉아 숨을 돌리는 대신 방 안을 둘러봤다. 그리고는 딱 두 모금이 줄어든 란델의 찻잔을 잠시 내려다보다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내가."

세렌티가 그랬는지 악신이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두 번 죽어서 덩그러니 남은 베른을 여기에 데려다 놓은 그 놈은 아마 시간의 축이고 뭐고 이 집안부터 어떻게 해보라는 의미였나보다고. 내가 맘 편하게 죽지도 못하고 신경 써야 될 일이 지금 한 두개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나중에 그 놈 만나면 내가 정말 가만 안 둘 거라고.

이런 투덜거림이 든 한숨을 내쉬고 나서도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꽤 오랜만에 테라스로 발을 옮겼다.

봄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좋았다.

봄을 가져오는 바람을 한껏 누리며 속을 풀어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이상한데."

체르밀로 들어오는 그레이와 체르밀에서 나가는 플란츠의 모습. 이 저녁에 들어와야 할 사람과 나가야 할 사람이 바뀐 것 같은 그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봤다. 나가야 하는데 들어오는 중인 그레이에게선 관심을 끄고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의 걸음을 계속 쳐다봤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으나 칼리안의 눈에는 너무 잘 띄는 걸음. 그것을 지켜봤다.

그 걸음.

휘청휘청, 유난히 곧은 발걸음.

"왜 저렇게 절여졌을까."

고양이도 있었는데.

완두콩이 왜 또 잔뜩 절여졌을까.

"······ 궁금하네."

새빨간 눈이 체르밀로 걸어오는 이의 청록색 머리카락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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