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65화 (366/527)

제65장. 하나가 더 있다(2)

세상의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음은 이미 안다.

그렇다 해서 세상 모든 일이 뜻에서 벗어나는 것이 유쾌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제껏 만나 본 적 없던 유형의 속 썩이는 형님 한 분을 살려놓은 뒤에 그 형님과 완전히 다른 참 좋은 형님 한 분을 왕위에 올려드렸다. 그렇게 되기까지 계획대로 진행된 일은 손에 꼽기도 힘들 만큼 적긴 했지만 아무튼 어찌저찌 하기는 했다.

그 일들이 일단락됐으니, 남아있는 또 다른 뻣뻣한 형님의 심장도 지켜드리고 겸사겸사 계속 발에 채이는 제온도 잡을 생각이었다. 그러다보면 내 나라였던 곳과 내 나라가 된 곳도 지켜질 테니까.

그렇게 우리 히나가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둔 뒤에 우리 히나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사는 것 보면서 평안한 여생이나 좀 보내며 속 편히 늙으면 세렌티도 만날 수 있겠지 싶었다.

세렌티에게 반가운 마음 가득 담긴 가벼운 몽둥이질을 살짝 해주고 나면 그것이 바로 뿌듯하고 보람찬 두 번째 삶이겠거니 했는데.

"제 계획에 쫄래쫄래 끼어드는 건 질풍노도의 파릇한 형님 한 분으로 족한데 말이죠."

"배부르더니 다시 잘 짖네."

애초에 두 번째가 아닌 것 같다. 거기에 더불어 칼리안의 이런 희망찬 미래 계획에 아무래도 누구 하나가 더 끼어든 것 같다는 확신까지 든다.

물론 악신을 말함이다.

그것이 악신인지 아닌지 무슨 근거로 예상을 하느냐 묻는다면 당당히 대답할 수 있다.

베른이 살았던 과거, 세렌티보다 한 수 앞서 공격을 시작한 것이 악신인 듯 하다는 결론을 플란츠에게 말하려 하니 목소리가 안나왔으니까. 플란츠 역시 마찬가지인 듯 보였으니까.

그 정도면 세렌티와 시스파니안의 말을 들어 볼 필요도 없을 정확한 추론이라는 의미가 아니겠나.

"아무튼 정말 대단하네요. 입을 막는 것이 악신 뿐이었든, 세렌티와 악신이 같이 막고 있었든. 숙면 중에도 자신들이 알리고 싶지 않은 내용이 흘러나가는지 확인해가면서 그렇게나 단단히 틀어막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말 대단하다 할 것까지 있는 일인가."

"네. 저는 깊이 잠들었을 때 누가 건드리면 그게 누군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칼부터 나가던데요."

"······ 참고해두지."

"감사합니다."

아 물론 이번 생에선 그런 적 없습니다, 하고 덧붙인 칼리안이 장난스레 웃었다. 지금껏 중요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주제는 완전히 잊어버린 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사생활을 보장받은 것에 일단 만족한 것처럼.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웃음이 나오지. 또."

"진지한 얘기만 하면 너무 무섭잖습니까."

플란츠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칼리안을 쳐다봤다.

지금 떠올려도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은 살기와 피어를 똑똑히 기억한다. 저걸 계속 버티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내 목을 조르는 게 낫겠다 싶게 만드는 기색을 세렌티에게 보내놓고, 그것도 모자라 당장이라도 칼 뽑아 달려들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서 무섭단 소리를 하니 할 말을 잃어버릴 수밖에.

"아무튼 저는 형님 세자위에서 도로 내려드릴 궁리를 다시 해 봐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술을 더 뜬 칼리안이 사일런트를 발현하더니 대뜸 이런 말을 했다. 플란츠를 세자위에서 안 내리고 그냥 자신이 곧장 왕위에 오르겠노라 장담하듯 선언하더니 뜻을 바꾼 것이다.

"그건 또 왜."

"왜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자위 안 내려도 된다고 했지 않나."

밥 잘 먹고 배 많이 불러서 누구보다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어 있던 칼리안이 어딘가 굉장히 많이 실망한 얼굴을 만들어보였다.

"혹시 싫으십니까. 설마 형님 그 자리에 계시는 것에 이제 만족하시는 겁니까. 왕위에는 조금도 관심 없다 하셔서 한 점 의심 않고 올려드렸는데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그리고 짖었다.

이미 많이 짖었는데도 멈추지 않았다.

"흠결 하나 없이 곱기만 했던 제 뽀얀 등에 하나도 안 어울리는 큼지막한 흉터까지 만들어가며 혹시나 형님 시드실까 애지중지 살펴보고 물도 드리고 밥도 드리고 고양이까지 드리고 이렇게 파릇파릇하게 잘 키워드렸는데 그런 형님이 이제 와서 마음 바뀌었다며 세자위 안 내려놓겠다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것참형님정말너무하시네요."

······ 아.

그냥 나도 같이 짖을까.

자신의 형이 열 일곱 해가 넘도록 몸담고 있던 신념과 믿음을 홀랑홀랑 내던지고 종족 변경에 대한 깊디깊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자리가 정 그렇게 마음에 드신다면 어쩔 수 없죠. 형님 좋으시다는데 아우가 되어서 자리 뺏을 수는 없는 일이니. 저는 형님 그만 키우고 남쪽 내려가 드미레아에게 이 한 몸 위탁해 놀고 먹으며 우리 히나랑 얀이랑 키리에도 건사하고 연로하신 스승님도 부양하고 형님보다 더 착하고 순한 레이븐이나 훌륭하고 의젓한 어른 말로 키우면서 얌전하고 조용하게 살겠습니다."

아무튼 칼리안은 계속 짖었다.

드미레아와 레이븐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그냥 막 짖었다.

문제는, 이미 잘 아는 대로 칼리안은 거짓말을 못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지금 칼리안은 진심을 다해 온 마음을 다 바쳐 짖고 있다는 소리다.

"······ 식사비는 그리 생각 깊으신 아우님께서 전부 치르셔야 되겠군. 난 사람 식사를 사겠다 한 것이니."

"아닙니다. 사람 말 하겠습니다."

여기 비싼 곳이다.

기사 로난시테가 첨언하기를 슬레이만도 드미레아와 얀을 빼놓고 세리에와 단 둘이 가끔씩만 온다 했던 곳이다. 그래서 옳다구나 하고 찾아오지 않았던가.

이미 여러 번을 치워간 빈 접시와 새로 들여온 접시의 수, 그 위에 올려졌던 많고 많은 대구들과 고기들을 가늠해 볼 것도 없이 곧장 대답한 칼리안이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비로소 사람 말을 시작했다.

"제온을 잡느라 무리하다 또 죽을 고비 넘기고 히나랑 얀에게 혼나느니 조금 더 여유롭게 알아보며 내실부터 단단히 다질까 했는데, 세렌티가 올해 안으로 눈을 뜬다면 그럴 시간 없겠습니다. 같이 잠든 놈이 같이 깰지 안 깰지 장담 못하니까요. 그러니 조금 더 열심히 찾고 제가 직접 나서서 잡아들여가면서 내막 파악을 해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데 제가 바빠져서 왕궁 안에 없고 형님 혼자 세자위에 계시면 형님,"

"죽는다고."

"네. 이제 그런것도 잘 아시네요."

칼리안은 정답을 맞힌 완두콩이 기특하다는 듯 생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카이리스는 세자위의 주인이 평화롭게 바뀐 일이 거의 없는 나라인 것으로 압니다. 세자위에 오른 뒤 왕위까지 잘 가져가든, 세자위의 주인이 죽어버리거나 탑에 가게 되어서 다른 왕자에게로 넘어가든. 카밀론의 주인이 곱게 바뀐 역사를 찾기 어렵던데. 아닙니까."

"맞아."

"그러니 형님께 별 탈이 없다면 왕위는 확정된 것이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을 할 것 같은데요."

"그렇겠지."

"그런데 사실 형님께서 왕위에 오르면 그 성미에 발칸을 어떻게 휘두를지 걱정하는 귀족들 꽤 있을 겁니다. 실리케의 일에 대해 침묵하는 것으로 저를 도운 귀족들에게 보복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이들도 많을 테고요. 그나마 제가 왕궁에 잘 붙어있고 형님과 좋은 관계 유지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한 섣부르게 걱정 내비치는 귀족들은 없을 테지만 제가 계속 자리를 비우면. 과연 그 때에도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닐 겁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실리케를 입에 올리면서 플란츠를 잠시 쳐다본 칼리안이 별 것 아니라는 듯 가벼운 말투로 계속 말을 이었다.

떠올리기 싫은 일을 잠깐 참는 것이, 현실을 잊고 지내다 제대로 된 뒤통수를 맞는 것보단 덜 아플 테니까.

"하다못해 브리센 후작만 봐도 그렇습니다. 제 눈치 보느라 입 다물고 지낸다지만 형님께서 정말 카밀론에 가게 되면 상황 달라집니다. 브리센 후작을 위한 레니시타 잎이 깔리는 건 시간문제라는 걸 후작도 이미 잘 알지 않습니까. 다른 귀족들과 달리 브리센 후작은 형님이 브리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장 정확히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후작은 브리센이 쌓아놓고 저도 몰랐던 일들 전부 다 밝혀가며 형님 먼 곳에 보내드리려고 혈안이 될 겁니다. 탑이든, 광장이든. 브리센 팔아 제 살을 좀 깎아내더라도 죽는 것보단 나을 테니 말입니다."

플란츠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칼리안의 말을 들었다. 다만 그것이 아무렇지 않을 때의 얼굴은 아니라는 정도는 이제 잘 아는 칼리안은 눈에 보이지 않을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형님 아무리 똑똑하셔도 아직 그런 싸움은 못 이깁니다. 저 없으면 스승님이 계셔도 그건 못 막아드립니다. 형님 세크리티아 왕궁 별장으로 도망이나 보내드리는 일이라면 해드릴 수 있겠지만요."

"상관없어."

"아. 세크리티아 바다가 그렇게 좋으셨습니까. 물론 좋긴 좋은 곳이니 이해는 합니다만."

"말고."

"그럼 뭐가 또 상관없다는 말씀이십니까."

"따라다닐 건데."

"누구를요."

"너."

"······ 누가요."

"나."

그리고 플란츠는 이렇게, 대구 구이집에서 아주 쿨쿨 잠들어있던 또 한 명의 발칸 부군단장이 벌떡 일어날 만한 말을 했다.

"그럼 걱정할 필요 없지 않나."

칼리안이 자리에 없으면 플란츠도 자리에 없을 테니 괜찮다는 소리다.

그렇게 되면 플란츠를 정식 왕세자로 올리는 일도 미뤄질 것이 아닌가. 그 때에는 그레이가 르메인의 눈 밖에 날 위험을 감수해가며 굳이 앞장서서 플란츠를 끌어내리려 애쓰느니, 차라리 란델의 입지를 잘 다져주는 것에 공을 들여두다 때를 봐서 플란츠에 대한 암살 시도나 해보는 편이 나으니까.

암살자야 뭐, 그리 강하신 아우님께서 알아서 싹싹 잘 막아주실 테니 걱정할 일이 아니었고.

"저는 또 왜요."

동종업자 또 사라진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날 기회 놓치고 잘 자는 따까리 대신 벌떡 일어날 뻔한 칼리안이 애써 침착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 안 쓸 플란츠가 한동안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러다 가만히 입을 열었다.

"재미있어서."

명분도 없고 대책도 없고 책임감도 하나도 없는 말.

일국의 왕세자로서 절대로 꺼내서는 안 될, 그런 말.

하지만 딱 제 나이에 맞을 법한 대답이 나왔다.

"······ 재미요."

"왕궁보다."

"혹시 그럼 여기 같이 오신 것도 재밌을 것 같아서 오신 겁니까."

"아니면 왜."

"형님 위험할 것 뻔한데도 계속 저 따라다니실 거고요."

"그래."

"재미있어서요."

"그래."

생각한대로.

거짓말 잘 알아보는 칼리안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하지 못했다.

"네."

길고 긴 한숨을 다 담아낸 짧은 허락만 했다.

* * *

왕궁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 역시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쏟아낸 살기와 피어가 누구를 향했던 것인지를 전해들은 뒤 '역시 우리 왕자님은 남다르시다. 언 새우 따스하게 녹여주시던 기억이 얼핏 나는데 정확히 그만큼 비범한 분이다.'라며 칼리안을 칭송하고 '그걸 막아섰다니 오늘도 어쩐지 계속 세자이신 부군단장님도 정상은 아니다' 라는 말로 플란츠를 평가했던 아르센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을 일을 하며 돌아왔으니까.

"킹, f7."

"폰, e8으로요. 형님 퀸 잡았고 제 폰은 퀸으로 승격할게요. 체크. 입니다."

어느새 두 개가 된 칼리안의 하얀 퀸과 지금껏 진행된 체스판을 떠올려 본 플란츠가 앞으로의 수들을 가늠해보다 말했다.

"졌어."

그 말을 들은 칼리안은 그냥 이겼나보다 했다.

칼리안으로서는 한 두 수라도 더 두어 보아야 승패를 알 것 같은데 똑똑한 플란츠가 이미 확인했지 않나. 그 상태에서 게임을 더 해본다 해서 결과가 달라진 적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체스는 대련이 아니었으니까.

"네."

여하간 그러니까 이것이 비범하다는 소리다.

좋게 말해 비범이지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구비한 아르센으로서는 도저히 이해 못할 미친 짓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머릿속으로 체스판을 떠올리고 도대체 몇 수를 내다봤는지 모를 사고를 하고 그것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반응을 보이는 저 머리 좋은 사람들의 재수없는 행태가 비범하단 소리는 아니었다. 그건 지그프리드로 출발했던 때에 이미 잘 느꼈다. 이제 아르센이 비범하다 여기는 건 다른 쪽의 문제였다.

"두 분은 속도 없으십니까."

"뭐가."

"지고하신 분들에 의해 체스말처럼 놀아나고 있는 중이라고, 저는 분명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래놓고는 돌아오는 동안 조금만 심심해져도 체스를 두고 있으니 그걸 두고 제가 뭐라고 생각해야 합니까."

"재밌잖아요. 아직 더 많이 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방금 전처럼 이기는 때가 좀 늘어나서 좋은데, 나는."

아르센의 고개가 다시 절레절레, 움직였다.

도대체가.

속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하도 부대끼다보니 그만 무뎌지고 만 것인지.

아무튼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두 왕족이 두고 있는 체스판을 천천히 떠올려보며 나름대로 구경을 하던 아르센과 농담을 주고받고, 말들에게 물을 먹인 뒤 다시 움직이고.

모닥불 대신 마법 불꽃을 띄워둔 채, 투명한 것과 불투명한 얼음으로 나누어 아르센이 대충 만들어 낸 체스말로 아르센과도 게임을 하고. 그러다 별 뜻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 식사를 한 뒤 다시 대화를 좀 나누다 잠에 들고. 그렇게.

짧다 하나 그래도 열흘은 넘게 걸린 지그프리드로의 외출을 마치고 왕궁에 돌아왔다.

"내 방에 누가 와 있다고?"

"네, 왕자님."

아직 밤이 되기에는 조금 먼 그런 시간.

할 일이 더 늘어났을 아르센은 빌헬름 관으로 곧장 발을 옮겼다. 르메인에게 얼굴 도장을 찍은 플란츠는 체르밀 궁으로 갔다. 쉬려는 생각인지 아니면 씻고 옷을 좀 갈아입은 뒤 다시 빌헬름 관으로 갈 생각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에스티나에 훌쩍 올라 유유히 체르밀 궁으로 갔다.

그리고 칼리안은,

- 아르나이젤이 이것을 어찌 사용했는지 제가 알아내더라도, 그 사실을 왕자님께 알려드릴 수나 있을는지.

- 혹시 알려주시는 것도 방해를 받으면 그땐 제가 어떻게든 다시 살펴보면 되니까요. 우선은 확인을 한 번 해주세요, 스승님.

- 네. 그리하지요.

이렇게. 시스파니안에게 받았던 시간의 축의 파편을, 정확히는 그 파편을 아르나이젤이 어찌 사용했는지에 대한 것을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앨런에게 전했다. 그리고 공동에서 알아낸 일을 자세히 전해주려다 어김없이 실패하고 적당히 아르센에게 말했던 내용 정도만 일러줬다. 그 뒤에는 자신을 대신해 분개해주는 앨런을 다독인 뒤 에일라를 아주 잠시 만나 안부를 확인하고 나서 체르밀 궁으로 왔다.

"손님이 와 계십니다."

그랬더니 마중을 나와 있던 메를린이 이런 말을 했다.

생일도 막 지났으니 칼리안도 없는 왕궁에 혼자 있지 말고 집에 가서 가족들과 지내다 오라 했던 까닭에, 얀은 아직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머무르고 있었다. 칼리안이 왕궁에 온 것을 이미 진작에 전해들었을 테니 곧 돌아올 것 같지만.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얀을 대신해 칼리안을 맞이한 메를린의 얼굴에는 굉장히 보기 드문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손님 누구?"

"란델 왕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본인도 당혹스럽고 믿기지 않지만 사실은 사실이라는 듯 이야기한 뒤 칼리안과 함께 3층으로 올라온 메를린이 거대하고 화려한 방문을 쳐다봤다. 시종 덴은 함께 오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덴도 함께 안에 들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문 앞에는 둘을 제외한 누구도 없는 채였다.

그런 메를린에게 고맙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칼리안이 예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메를린. 차 좀 준비해줄 수 있을까?"

"네, 당연히. 란델 왕자님께서는 홍차를 많이 드시는 것 같던데 민트차와 홍차를 준비해드리면 될까요."

칼리안의 웃음이 진하게 변했다.

"아니. 나 피곤해. 꿀 넣은 레몬차로 두 잔 가져다 줘. 둘 다 꿀 많이 넣어서. 꿀 엄청 많이많이. 진짜 달게 만들어 줘."

"네. 알겠습니다."

짓궂은 메뉴에 웃어보였을 뿐 다른 의문을 보이지는 않은 메를린이 문 손잡이로 향하려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칼리안을 보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곧 메를린의 손이 칼리안의 타이에 와 닿았다. 먼 여정에 생긴 티나 주름은 마법으로 없앨 수 있었지만 비뚤어진 타이까지 교정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주 조금 비뚤어진 와인색의 타이, 검은 셔츠 칼라 끝에서 붉게 반짝이는 블랙 오팔. 타이보다 조금 짙은 와인색 재킷에 꽂아 둔, 장미 모양의 검은 펜던트와 체인이 달린 브로치까지. 잘 갖춰입은 옷과 장신구의 매무새를 좀 더 보기 좋게 싹 다듬어 주는 메를린을 향해 칼리안이 말했다.

"그렇게 꼼꼼하게 안 봐도 괜찮아. 형님들 그런 걸로 트집잡는 사람 아니잖아."

"혹시라도요. 왕자님 단정치 않다 이야기 들으시는 것은 제가 싫습니다."

"그래. 고마워."

"별 말씀을요. 그런데 왕자님. 참 많이 변하셨습니다. 앞머리 잘라내실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꾸미는 것은 질색하시더니, 이제 막 여행에서 돌아오신 분이 맞을까 싶을 만큼 잘 입고 오셨습니다."

"그러게. 내가 어느새 그렇게 됐네. 그래도 프릴 많은 건 싫어. 그건 아마 계속 싫을 거야."

"네. 왕비님 추숭식 때 한 번 입혀드렸으니 저도 이제 미련 없습니다."

피식 웃으며 답한 메를린이, 타이를 손보느라 풀었던 베스트와 재킷의 단추를 다시 잘 여며주며 작은 목소리를 냈다.

"기사 베른 경이 왕자님을 많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란델 왕자님과 이야기 나누신 뒤에 수련실에 잠시 가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알았어, 그렇게 할게."

"네. 이제 들어가 보십시오."

"응. 고마워."

또 나온 고맙다는 말에 고개를 숙여보이는 것으로 화답한 메를린이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칼리안이 방 안에 들어간 뒤 문을 닫고 차를 준비하러 갔다.

익숙하기 짝이 없는 검은 방.

그 안에 발을 디딘 칼리안이 어색함을 숨기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란델 형님을 뵙습니다."

덴은 아예 데려오지 않은 것인지 검은 방 안에 홀로 앉아있던 란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맞은편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어쩌다보니 자신의 방에 앉기를 허락받게 된 칼리안은 작은 웃음만 지으며 란델을 마주보고 앉았다.

"오시라 할 땐 안 오시더니 이렇게 갑자기 오셨습니까. 고양이도 없었는데요."

"일이 그리 되었다."

주인 없는 방에 멋대로 들어온 행동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들었을 텐데도, 란델은 그냥 짧은 대답만 했다. 이를테면 플란츠의 '어쩌다보니'와 비슷한 류의 대꾸인 것이다. 아무튼 다른 사람 사생활 따위는 존중하지 않는 면이나 제대로 된 대답같은 건 해주지 않는 꼬락서니를 보면 둘이 아주 꼭 닮기는 했다.

칼리안은 그런 란델에게 왜 왔는지를 묻거나 환영의 말을 꺼내놓는 대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메를린이 다시 올 때까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동안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이 지나간 뒤, 어느새 왕궁에 돌아왔는지 메를린을 대신해 얀이 차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얀은 칼리안에게 작은 눈인사만 건넨 뒤 차 두 잔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짙고 짙은 꿀 향이 앉아있는 자리에까지 퍼진다.

그것을 느낀 란델이 칼리안에게 시선을 뒀다.

"가르침은 확실한 편이로구나."

"배움이 확실하다 해주셔야죠."

싫어하는 자몽 꾸준히 건넨 것은 누가뭐래도 란델이었다. 역지사지의 입장을 가르쳐주는 중이라 해도, 아무튼 전부 다 란델에게 보고 배워 다시 돌려주는 것일 뿐이지 않나.

"돌려줌이 명확하다 말해야 할지."

"갚아드리는 게 명확하긴 합니다."

"지는 것은 퍽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고."

"지는 것에 썩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

"다소 버거운 성격이구나."

"똑같이 여기는 중입니다."

란델의 말마따나 한 마디를 안 지고 대꾸한 칼리안이 꿀 잔뜩 든 레몬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목이 따가울 만큼 단 그 맛을 기분 좋게 삼키며 말했다.

"저에 대해 그렇게 억지로 알고 적응하려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크게 신경 안 씁니다. 마음에도 없는 행동은 나중에 해주세요. 지금은 됐습니다."

"안 그래도 그리 할 생각이다."

"네."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란델의 짙고 푸른 눈을 흐트러짐 없이 응시했다.

"저희들 대신해서 귀족 회의 자리에 참석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것을 벌써 들었더냐."

"입보다 귀가 커서요."

"그래."

"감사합니다. 신경써주셔서."

"갚은 것일 뿐이니."

"감사합니다. 그래도."

자신을 갑자기 찾아온 이유도 묻지 않은 채로 칼리안은, 란델에게 있어 결코 익숙하지 않을 인사를 입에 담았다. 그리고 덴이 들고 와 놓고 나갔을지 아니면 직접 들고 왔을지 알 수 없는 물건, 빈 소파 위에 올려진 검은 로브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안 버리고 돌려주시는 것도, 감사합니다."

"······ 너는 그리 갚는 것이더냐."

"갚아드리는 것이 아니라 감사드리는 겁니다."

한결같이 곧은 미성이 맑고 붉은 시선을 따라 흘러나간다.

"신경 써주신 것에 대한 뜻으로는 이 정도의 인사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저나, 란델 형님이나."

그 말을 마주한 란델은 한동안 다물고 있던 입을 살짝 열었다. 그러다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길 그만두고 손을 뻗어, 칼리안을 향한 얀의 반가움만큼 꿀이 들어간 레몬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것이 곧 란델의 대답임을 알아본 칼리안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냈다.

"이런 날에 딱 필요한 단 맛 아닙니까."

"무용하구나."

"마음에 드신다 하니 다행입니다."

칼리안이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 같은 맛의 차를 한 입 더 삼켰다.

더 이상 깊은 곳에 묻어버리지 않고 똑바로 마주쳐오는 란델의 눈을 계속 응시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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