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장. 하나가 더 있다(1)
냄새, 소리, 촉감.
기억 말고, 겪은 것으로서의 감각. 어느 날 어느 때 겪은 일을 꺼내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로서의 감각들을 말함이다.
제가 겪은 일의 대부분을 잊고 사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감각에 물든 일은 보다 더 오래, 더 확실히 기억을 해내곤 하지 않나. 라벤더의 향을 맡은 리리에가 봄 나들이 때 안겨 있던 드미레아의 품을 떠올리고, 빗소리를 들은 에우리아가 어느 비오는 날의 외진 길 위에서 야생 닭고기를 굽던 아르센을 연상하며, 보드라운 천을 매만진 히나가 루시의 목걸이에 길고 긴 이름을 처음 수놓았던 날을 생각하게 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아직 왕세자님이신 부군단장님."
"왜."
"저는 술 약합니다."
"알아."
"그런데 맥주 좋아합니다. 다른 건 썩 좋아하지 않고 맥주만 좋아합니다."
"관심없어."
매몰차게 이어진 말에 아르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관심을 두든 안 두든 신경 안 쓴다는 말이다. 적당히 들어간 술 기운에 주절거림이 시작됐을 뿐이니 상대의 관심이 고플 리 없었다.
"맥주 마시면 스승님이 처음으로 술 주셨던 날이 생각나서, 맥주 향이 나면 스승님이 옆에 계신 것 같아서 좋아합니다."
이런 얘기에까지 매몰차게 굴 수 없을 플란츠가 그냥 주변만 돌아봤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고 마음 편히 먹고 마실 수 있도록 마련된, 식당의 작은 방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지그프리드의 땅에서 시스파니안과 세렌티를 마주한 날의 늦은 저녁.
정작 고기를 사 달라 한 것이 자신이었음을 잊었는지, 칼리안은 저녁으로 무슨 고기가 먹고 싶은지를 물어왔었다. 잠시 고민을 해보려는데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지그프리드에 왔으면 양고기를 먹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그 날의 저녁 식사 메뉴를 추천했다.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르센의 의견을 잘 들어 준 칼리안은 지그프리드의 기사 로난시테에게 구운 대구를 파는 아주 비싼 식당을 물어 찾아왔다. 얻어먹기만 하면 될 내 따까리 의견은 됐고, 베른을 기억해낸 것을 사과한 플란츠에게 이제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고른 저녁 메뉴였다.
"저는 그것 때문에 맥주를 좋아합니다. 왕세자님이신 부군단장님은 그런 것 아직 없으셔서 모르시겠지만 말입니다."
잘 구워진 대구와 새우, 검은 올리브가 아낌없이 들어간 하얀 빵, 여러 종류의 야채와 베이컨을 구운 뒤 상큼하고 달콤한 레몬 소스를 올린 요리,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식감을 자랑하는 질 좋은 소고기 스테이크, 얇게 구운 하얀 빵 위에 여러 야채와 닭고기를 올린 요리, 붉은 과일과 야채가 어우러진 샐러드 등.
형님의 금고를 털어먹기로 작정하고 시킨 것인지 몰라도 어지간한 귀족 가문의 식단보다 나은 듯한 음식들. 플란츠가 그것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답했다.
"없었어."
"네. 그러실 것 같습니다."
감각에 대한 기억. 감각으로 떠오르는 기억.
그런 것이 없었으리라는 말에, 그렇다 했다.
감각이 함께 담긴 특정 기억을 유난히 오랫동안 간직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플란츠는 수많은 일들과 그에 얽힌 감각들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지 않나. 그러니 누군가로부터 '나는 이런 가죽 냄새를 맡으면 어린 시절 선물받았던 내 말에게 안장을 얹어주던 날이 생각난다'는 말을 듣더라도 크게 공감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것과 유사한 가죽 냄새를 지닌 물건 수십, 수백 개와 그에 얽힌 일들을 한꺼번에 떠올릴 머릿속에 특정한 어떤 기억 하나가 도드라질 일은 없었으니까.
르니에리 향을 맡았을 때, 말의 뜻을 배우기도 전에 보고 들었던 일들부터 어느 마지막 날에 제 심장을 향했던 비수까지의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억들이 일시에 머릿속을 잠식해버리는 것처럼.
"지금은 있는데. 나도."
술 기운이 반, 궁금증이 반. 맥주 세 잔에 딱 기분 좋을 만큼이 된 아르센이 의외라는 표정을 가감없이 지었다.
네가 그런 감수성 가득한 것을 알 리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분명한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의 얼굴을 슥 쳐다본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루시 발바닥 냄새."
"······ 그걸 어쩌다 맡으셨습니까."
"어쩌다보니."
르니에리 향이 나고 장미 향이 나고, 그 둘이 아니더라도 온갖 향이 가득한 왕궁에서 맡아 본 루시의 발바닥 냄새. 그리고 안네의 배 냄새. 플란츠조차 그것을 '향기'라고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기분 좋은 냄새를 맡을 때면 루시와 안네를 처음 만났던 날의 따뜻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던가.
"소라 껍데기 소리도."
플란츠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부군단장실 책상 위에 놓인 모래 가득한 소라 껍데기를 떠올린 아르센이 피식 웃었다. 저 왕세자 머릿속에 유난스런 기억 하나를 들여놨다니 니들렌이 참 큰일 했구나 싶어서였다.
"레니시타 솜털 느낌. 파도 냄새. 모닥불 소리."
"그것 참 많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대구 구이."
탁, 소리와 함께 세 잔 째인 맥주의 마지막 모금을 내려놓은 아르센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리고 앞에 놓인 접시들 중 하나를 가리켜보였다.
"오늘 이 대구 말씀이십니까?"
"말고. 다른 거."
광장에 놓이기 때문에 모두가 꺼림칙하게 여기는 레니시타의 놀랍도록 부드러운 솜털, 발바닥을 적시더니 어느새 발등과 발목까지 차올랐던 하얀 파도와 동생 놈의 손에서 풍겨 오던 비린내, 모닥불을 앞에 두고 이어지던 목소리. 그리고 구운 대구.
체이스에게 연락이 왔다며 잠시 밖에 나간 칼리안을 대신해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를 상대해주고 있던 플란츠가, 그 어느 날의 구운 대구를 떠올리다 말고 눈꼬리를 찌푸렸다. 생각해보니 언제부터 내가 저 놈한테 이렇게 순순히 답을 했던가 하는 의문이 든 탓이다.
- 드르륵.
그래서 플란츠는 동생 몫으로 나왔으나 마실 사람이 자리를 비운 탓에 서서히 거품이 가라앉고 있는 맥주잔을 아르센의 앞으로 밀어냈다.
"저 이미 세 잔 마셨는데요."
"아닌데."
새 맥주를 가져 온 직원이 빈 잔을 계속 가지고 나갔던 터라, 마지막으로 마신 빈 맥주 한 잔을 본 아르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그 전에 맥주 한 잔을 더 마셨나 두 잔을 더 마셨나 하는 고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런 사실을 혼돈할 리도 없거니와 자신이 취하는 것을 기꺼워하지도 않을 사람이 심지 굳은 얼굴로 '넌 아직 세 잔 안 마셨다' 하는 것을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더 마시겠습니다."
두 잔이면 어떻고 세 잔이면 어떠랴. 뒷일은 저 왕세자가 감당할 테고 오늘은 컬렉션도 완성시킨 기분 좋은 날인데. 마셔야지.
결정을 내린 아르센이 칼리안의 몫이었다가 이제는 자신의 것이 된 맥주잔에 손을 가져갔다.
플란츠는 제 앞에서 감히 주사를 부리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것, 아르센이 술에 취해 키리에에게 실려 온 모습만 봤다는 것, 그래서 플란츠는 아르센도 칼리안처럼 술에 취하면 조용히 잠을 자겠거니 했다는 것, 때문에 시끄러워진 아르센을 조용히 시키려고 네 잔 째의 술을 건넸다는 것. 그 모든 오해와 오판을 모르는 척 한 채로.
* * *
구운 대구.
플란츠에게 있어 구운 대구란 유난히 독특한 음식이었다. 거의 손대지 않는 해산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똑똑히 기억나는 생경한 감각들 때문에 독특했다. 고기 냄새 나는 고기라거나 과일 맛이 나는 과일과는 달랐다. 홉 냄새가 나고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고 나무 접시가 떠오르는 요리였다.
"형님."
칼리안을 따라 찾아갔던 가게. 그곳을 떠올릴 때면 함께 생각나는 바다색 짙은 소금 냄새, 테이블과 벽에서 풍기던 오래된 나무 냄새, 홉이라는 것 때문이라 했던 특이하고 시큼한 냄새.
가게 주인의 조심성 없는 발 소리, 가게 안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대화 소리, 바이올린 하나를 들고 들어와 서툰 연주를 마친 아이가 내밀어보인 모자 속의 동전 소리.
나무 접시의 부드러운 느낌, 테이블에 난 생채기의 우둘투둘한 느낌, 금속제 포크와 나이프의 차가운 느낌.
플란츠에게 대구 구이란 그런 것이었다.
홉 냄새와 나무 접시, 그리고 서툰 바이올린 소리가 맴돌 수 있을 기억이 하나 생긴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꽁꽁 얼어붙은 커다란 새우를 도로 녹이더니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의 앞에 놓아 준 이가 물었다.
저것을 두고 자상하다 해야 할지.
낭비된 마력이 아깝다 해야 할지.
내 따까리가 취해서 새우 좀 얼리겠다는 게 뭔 대수냐며, 참 자상하게도 얼린 그 새우 다시 녹여 앞에 놓아 준 것이 벌써 여섯 번째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는 오늘의 희생양이 된 커다란 새우를 보며 헤죽헤죽 웃었다. 오랫동안 시선 두기 싫은 얼굴로 향하던 고개를 돌린 플란츠가 대답했다.
"달라서. 처음이랑."
"대구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 혹시 그 때와 달라서 입에 안 맞아 그러시는 거면 다른 음식으로······."
"말고."
"그럼 무엇이 그렇게 다릅니까."
"냄새, 소리. 느낌. 그런 게 달라서."
"어떻게 다른지 여쭤봐도 됩니까."
"전부 다. 바다도 없고, 소금 냄새도 안 나고. 전부 다 다른데."
지금 들어앉아있는 식당은 그랬다. 똑같이 구운 대구를 파는데 냄새도 소리도 느낌도 전부 다 달랐다.
창 밖에 끝모를 바다가 펼쳐져 있지 않은 곳.
멀리 지그프리드 공작저의 불빛이 보이는 곳. 오래된 나무 냄새 대신 대구와 함께 구워지는 감자와 호박의 고소한 냄새가 나고, 아이의 서툰 바이올린 대신 악사의 손 끝에서 만들어진 중후한 첼로 소리가 벽 너머로 들려오는 곳. 나무 테이블의 거친 생채기 대신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테이블 유리의 매끈한 감각이 느껴지는, 그런 곳.
"그렇게 다른 것이 이상하십니까."
"조금."
"비슷한 요리를 파는 식당이라 해서 전부 다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비싸고 좋은 곳이든 적당히 비싸고 맛있는 곳이든 또 다른 곳이든."
"왕궁은 언제 어떻게든 똑같지 않나."
"왕궁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다 같은 교육을 받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런 곳과 비교 할 수는 없는 일 같습니다. 여기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서."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왕위에 관심 없는 플란츠와 카이리스에 관심 없는 란델을 대신해 그냥 내가 평생 왕궁에 눌러 살겠노라 했던 놈이 입에 담았다 하기에는 가시가 많이 돋은 말이 아닌가.
그 어린 아이들을, 기억에 유난히 남을 만한 특별한 경험 하나 못 준 채 이렇게 다 자라게 만든 왕궁을 두고 무슨 좋은 말이 나오겠냐만은.
"똑같은 세상이라 해도 누가 누구로 사는지에 따라 벌어지는 일이 이렇게 다른 것처럼. 사람 사는 곳은 다 다를 수밖에요."
그런데 칼리안이 이런 말을 했다. 그런 동생을 흘긋 쳐다본 플란츠가 앞에 놓인 와인잔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렇게나 유명하다는 지그프리드의 와인, 시즐리누를 입에 가져가며 대꾸했다.
"사람이 산다는 걸 모르는 신이 만든 세상인데. 이상한 일이군."
새로 구워져 나온 대구 한 조각을 잘라 입에 넣으려던 칼리안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그 한 입을 다 먹은 뒤 대답을 전했다.
"그러게요. 산다는 걸 모르는 신이 만들었는데. 그 속에서 사네요. 재밌는 일입니다."
"그래서. 언제 알려줄 건데."
"체이스 형님과 나눈 대화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세렌티 말씀이십니까."
"둘 다."
완두콩 앞에서 사생활 찾는 일은 이제 싹 그만 둔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순순히 입을 열었다.
"전하의 탄신일 축제에 아리안느가 정말로 올 모양입니다. 내일 출발을 한다 하는데 체이스 형님께서 걱정이 많은 것 같습니다. 아리안느에게 이동 마법진을 열어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지만 스승님께서 도와줄 수 있는 것까지 다 거절하고 카이리스 땅을 구경하며 원칙대로 오겠다 고집을 부려서요. 그래서 따라오는 호위에 대한 언질을 들었습니다."
"무슨."
"노란 울새, 아니. 서베인 쳄버만이라는 그 기사가 호위로 온다 하네요. 그런데도 지금 아리안느의 이름이 워낙 유명해진 터라. 체이스 형님이 마음을 놓지 못하셨나 봅니다."
플란츠의 눈이 애써 못본 척 하고 있던 테이블 한 귀퉁이를 향했다. 다 얼린 새우에서 시선을 떼고 칼리안 앞의 구운 대구에 손을 뻗고 있는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있는 곳 말이다.
"호위가 못미더운 것이라면 전하께 말씀을 드려 발칸을 보낼 수 있을 텐데."
"아. 체이스 형님께서 요청하신 건 호위가 아니라, 그냥. 눈을 감아달라는 내용입니다."
칼리안의 어여쁜 미소를 본 뒤 그렇게나 취한 와중에도 손을 거둔 아르센이 조용히 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 꼴을 보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겉모습과 속이 다른 사람이 오더라도 놀라지 말아달라고요."
"······ 설마 그 기사를 보내겠다는 말인가."
"네. 테일란 카스트린. 제 옛 스승께서 쳄버만 경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여기 오실 거라고 하네요. 왕궁에서는 쳄버만 경이 테일란의 모습을 하고요. 그 쪽에서는 특별히 들킬 것이 없는데 여기선 카스트린 경을 알아 볼 사람이 참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 미리 이야기를 해 주신 겁니다."
이제 막 왕위에 오른 국왕의 정혼자가 왕국을 떠나오는 길에 이상한 꼬임이 붙지 않으리라 장담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체이스는 테일란을 보내겠다 하고 있었다. 세크리티아에 갔던 히나가 사용한 마법 변장 도구를 이용해, 테일란의 겉모습을 서베인으로 바꿔서.
"아우님의 옛 형님 속이 시커먼 것인지. 아우님 옛 형님의 정혼자되시는 분 속이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군."
시즐리누 잔을 내려놓으며 꺼내진 이런 평가에, 칼리안이 씩 웃으며 말을 받았다.
"굳이 아리안느가 오는 이유를 벌써 눈치채셨습니까."
"어떻게든 그 소드마스터를 이 땅에 들여놓겠다는 뜻 아닌가."
"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과거의 그 때보다 더 강해져 있어야 할 사람은 비단 저 뿐만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카스트린 경이 이 곳에 오면 대륙에 살아있는 모든 소드 마스터가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서로서로 좋은 일이 생기겠죠."
테일란을 다른 소드 마스터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처음 이 곳에 테일란을 이끌고 왔을 당시에는 테일란이 '과거'에 대한 내용을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 테일란을 슬레이만이나 칼리안, 그리고 시오나와 만나게 하여 서로서로 더 발전할 기회를 만들어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테일란을 보내고 나면 체이스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테일란과 서베인의 외모를 마법 변장 도구로 서로 바꾸어 보낼 계획을 세웠다. 서베인 정도라면 그런 일을 믿고 맡길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체이스를 호위하는 국왕 친위대의 기사단장인 서베인이 직접 따라붙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 없었다. 때문에 아리안느가 축하 사절단의 대표로 오게 되었다. 서베인으로 변장한 테일란이 이곳에 올 수 있을 명목을 주고 '서베인'이 사실은 테일란이었다는 것을 들키더라도 체이스가 왜 그런 일을 꾸몄을지에 대해 르메인을 납득시킬 수 있을 이유가 될 만한 사람이 아리안느 뿐이었다. 정혼자 걱정에 눈이 먼 젊은 국왕이 소드마스터를 호위로 몰래 붙여주었다 하는데, 그것을 달리 납득하지 않을 방법도 없으니 말이다.
"위험할 걸 알면서 굳이 오겠다 하는 이유가 그것이었군."
"네. 모든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명분이니까요."
아리안느가 답지 않게 고집을 부리고 위험을 감수해가며 카이리스에 찾아오겠다 했던 일의 진위를 파악한 플란츠가 실소했다.
그 후 플란츠는, 식당에 찾아온 직후 체이스의 연락을 받아 다시 나갔던 탓에 이제야 식사를 시작한 칼리안을 잠시 지켜봤다. 궁금한 것이 더 있긴 했어도 일단 동생 배부터 좀 채워 놔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때문에 둘 다 궁금했다 말한 것도 잠시 미루고 가만히 앉아 첼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때, 아무 소리 없이 식사를 마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못 들었습니다. 세렌티로부터."
플란츠의 시선이 칼리안을 향했다.
잘못 말한 것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인 칼리안이 말했다.
"질문을 많이 했고, 세렌티가 대답을 했는데. 못 들었습니다."
"이상한데."
"이상한 일이죠."
"그동안 입을 막고 기억을 지운 것이 세렌티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동안 그렇게 군 것이 세렌티가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세렌티 스스로 대답하겠다 한 것을 세렌티가 막아서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말."
"······ 미친 분이 아니고서야."
"말고."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요."
세렌티한테 욕하는 건 괜찮은데 나한테 반말하는 건 더 못 넘기겠다 여긴 플란츠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꼴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린 칼리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렌티 말이 막힌다는 건."
"······ 한 명이 더 있다."
"네. 한 명이 더 있다, 그런 의미입니다. 세렌티의 입을 막을 만한 또 다른 존재가."
그래. 한 명이 더 있다.
"누구인지 전 알 것 같은데. 형님은 어떠십니까."
"모를 리가. 모를 수가."
세렌티조차 탄생을 알지 못했고 세렌티가 직접 막지 못해 시스파니안과 영웅들의 힘을 빌리게 했던 존재. 그렇게 하고 나서도 결국 이기지 못해 함께 잠드는 것을 택하게 한 존재.
"세렌티 모르게 멋대로 흰 말 잡고 먼저 게임을 시작했던 놈. 그 놈이 제 과거에도 흰 말을 잡았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놈이라면 멀쩡한 기억을 지우고 입을 막고, 세렌티가 하는 일을 똑같이 따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세렌티가 깨면서 다시 함께 나타난 악신을 막으려고 내가 영웅 놀이를 했다는 뜻인가. 그러다 실패해서 시간을 돌렸고."
"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톡, 톡, 톡.
다시 집어든 시즐리누 잔을 몇 번 두드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그 해룡이 아우님에게 장난을 쳤을 때 내가 혼자 돌아다녔던 일. 그리고 시간의 축이 이번에 다시 돌아가면 내가 남겨진다는 말. 생각해봤는데."
"······ 네."
그리고 잠시 뒤에 무언가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해룡이 자리를 떠나고 세상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을 그 때. 시간이 멈추었다 다시 흐르기 시작한 그 때. 네가 움직이고 생각할 수 있던 것이 정말 해룡의 뜻이 맞는지. 모두를 멈춰두고 너 하나만을 데리고 나와 서로 이야기하는 그런 일을 벌일 만큼 그 해룡이 시간의 축을 온전히 쓸 능력을 지닌 것이 맞는지. 혹시 그 해룡은 그저 시간을 멈추었을 뿐이고, 멈춘 시간에서 벗어난 너와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 것은 아닌지.
이번 일이 틀어져 내가 남겨질 일을 걱정했을 때,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정말 없었느냐고.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시간이 되돌아간 일.
그것을 너는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혹시 궁금해한 적이 없느냐고. 너는 네가 잊혀진 이유에 대해서 왜 궁금해하지 않느냐고. 그것을 그렇게나 아파하면서 왜, 이유가 궁금하다 여긴 적이 없었느냐고.
너는 왜, 이번 생에서 잊혀졌느냐고.
그런 질문을 꺼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말이 나오지 않아서 입을 닫았다. 그래서 칼리안의 눈 같은, 출렁이는 그 와인을 한참동안 내려다보다 다른 말을 했다.
"재밌군."
칼리안이 웃었다.
재밌다 말한 것은 플란츠였으나 칼리안이 웃었다.
"형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꺼내지 못한 말을 다 들은 것처럼 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네. 적어도, 하나가 더 있었나 봅니다."
이번이 두 번째가 아닌가보다.
처음의 베른이 시간의 축을 돌렸던 모양이다. 그것을 전부 잊어버렸나 보다. 그렇게 되돌아간 시간 속에서 플란츠가 두 번째로 축을 돌렸고, 시간이 되돌아갔고. 이미 축을 돌렸던 베른만 홀로 남겨졌나보다.
"······ 그랬나 봅니다."
그렇게 남겨진 베른이 칼리안의 몸을 찾아왔나보다.
"칼리안."
"겪어보니 이렇게 다시 사는 게 썩 좋은 경험은 못 됩니다."
쓰디쓴 와인을 손에 쥔 플란츠를 칼리안이 쳐다봤다.
고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서 이건 형님께 안 가르쳐드릴 겁니다. 누굴 잡아 죽여버리든. 뭘 없애버리든. 죽어도 안 가르쳐드릴 겁니다. 배우실 일 없게 할 겁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한 놈이 누구든 무엇이든, 다 찾아서 죽이고 없애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하겠노라고. 마지막 기회일지 또 한 번의 악몽일지 모를 삶을 걷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된 칼리안이 말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안 해."
플란츠가 대답했다.
"어련히 알아서 살려주겠지. 내 동생이."
일말의 걱정도 담겨있지 않은 태평한 목소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