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63화 (364/527)

제64장. 둥지(5)

새하얀 꽃송이를 기억한다.

고양이들의 목줄에 적힌 긴 이름처럼, 따뜻했던 하얀 로브에 수놓인 꽃송이를 기억한다.

- 라, 리, 시, 움, 이에요.

향기 없는 꽃.

말 못하는 저를 닮아 이름처럼 새겨두었다는 그 꽃 사이에 꽃만큼이나 소중한 것인 양 함께 수를 놓은 글자를 기억한다.

'베른.'

처음으로 알게 된 히나와 키리에의 성. 이전까지는 둘이 남매였는지조차 몰랐으니 그 역시 알지 못했던 둘의 성. 그것을 보았을 때의 생소한 기분 역시 기억한다.

처음 보았다면 낯익은 말이라 여겨지지 않았어야 했고 이미 보았다면 잊지 않았어야 했으나, 낯이 익었음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부러 기억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꺼내보지 않기 위해 애쓰는 그런 눈가림이 아니라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생소했다.

낯이 익지만 기억나지 않는 일 같은 것은 겪어본 적 없었으니까. 그런 경험을 해본 적 없었으니까.

- 궁금하지 않는 이유를 궁금해하니 답이 나와서.

그 날의 일을 기억한다.

체이스가 알려준 그 왕제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지워졌음을 알았다. 세렌티의 '안배'가 그렇게 만들었음을 알았다. 그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지금 이 순간 앞에 선 저 놈을 붙들어 맬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놈을 불러도 왜 대답하지 않는지.

- 오지 마십시오. 당신 못 버팁니다.

앞에 선 놈이 칼리안이 아니었음을.

문제의 해결 방법을 알게 된 플란츠가, 문제의 답을 알아내기 위한 새로운 생각을 시작했다.

생소한 것, 알게 된 것, 알고 있던 것, 지난 기억.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일들을 순식간에 걸러낸 똑똑한 머리가 그 모든 일들을 한꺼번에 떠올렸다. 그리고 정리했다. 그렇게 알게 되었다.

제 이름 하나 제대로 알지 못했을 만큼 이른 시기에 부모를 잃은 남매가 하필 동생 놈의 영지 출신으로 기록된 이유가 무엇일지, 그 일에 손을 댔을 것이 분명한 칼리안이 그토록 아끼는 남매가 쓸 성으로 내려줄 만한 것이 과연 무엇일지. 히나의 성을 읽은 자신이 왜 그것을 낯익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여겼는지. 그리 낯선 기분에 왜 더 큰 의문을 가지지 못했는지. 세렌티가, 자신의 머릿속에 무슨 장난을 쳤는지.

왜, 무엇을 숨기고자 그런 장난을 쳤는지.

알게 되었다.

들은 것을 기억해내거나 '과거'의 일을 떠올려내지도 못했으나 깨닫게 되었다.

"······ 베른."

그렇게 알게 된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

손 끝에 닿은 칼리안의 어깨가 식는 느낌이 든다. 두꺼운 옷들로 가려져 있었으나 칼리안의 몸이 차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그리 느꼈다.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건."

찬 얼굴에 아픈 웃음을 매단 채로 플란츠를 쳐다봤다.

베른을 불러 칼리안을 붙들어 맨 형을 보면서 웃었다.

붙들린 곳이 아파서 비명을 지르듯, 소리없이 웃었다.

전부 다 받아들이기로 한 베른이, 제 이름 사라지게 만든 놈 말고 제 이름 사라지는 것을 그냥 지켜본 신만 원망하기로 한 베른이, 다 이해하고 간신히 살려놓은 그 놈이 혹시나 혼자 남겨져 영원히 살게 될까 하고. 그런 것이나 걱정하고 있던 그 순간에서만큼은 부르지 말았어야 했던 이름.

"······ 알아내지 말지."

몇 번을 불러도 돌려세우지 못할 만큼 백 번을 돌고 천 번을 돌아 베른으로 돌아갔다 해도, 이미 다 늦어 손에서 놓아버리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진 그 이름만은 그냥 두었어야 했음을, 칼리안을 불러 세우겠다는 이유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됐음을.

그것을 플란츠는 몰랐다.

다만 베른은, 플란츠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았다. 멈춰 세우려는 생각에 급급해 베른에게 그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미처 떠올리지 못했음을 알았다.

그래서 칼리안은 아무 말로도 형을 책망하지 않기로 했다. 살기도 집어넣고 피어도 집어넣고 여느 날 여느 때와 같은 칼리안으로 되돌아와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렇게 해 주었다.

"일 틀어지면 형님 어떻게 되는지. 알아내지 말지."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왜 묻지 말라 말렸는지 그 이유를 알아서. 세렌티에게 무엇을 묻고자 했는지에 대해 플란츠도 이미 다 눈치채고 있었음을 알게 되어서.

시간이 다시 돌아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플란츠가 몰랐으면 했던 마음 역시 거짓이 아니었고, 플란츠가 칼리안의 가정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음에 마음이 서늘해진 것도 사실이라서.

"······ 그냥 모르는 채로 살지. 형님은."

그래서 베른의 이름을 꺼내든 부름 때문에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을 거짓 섞이지 않은 다른 질책으로 덮어두었다. 이름 말고, 알지 않아도 될 최악의 상황을 눈치 챈 일 때문에 보인 반응인 것처럼 여기게끔 말을 더했다.

덕분에 플란츠는 칼리안이 웃은 이유를 알게 됐다.

자신이 낸 결론이 완전한 오답이었음을 알게 됐다.

칼리안은 어른이었고 플란츠는 눈치가 빨랐으니까.

"내가."

때문에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알아낸 것을 사과하려고. 물리지 못할 섣부른 실수를 사과하려고.

- 화아아악!

하지만 말을 잇지 못했다.

불이 타올랐다. 시스파니안의 거대한 날개 안쪽에서, 이 공동 안의 모든 것을 제물로 삼겠다는 듯한 불길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조금도 뜨겁지 않았으나 온 몸을 살라낼 듯한 불에 휘감겨 눈을 감느라, 사과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언뜻 느끼면 찰나와 같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영원처럼 느껴지던 시간이 흘렀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로.

"걱정 말거라."

불길이 가라앉았음을 느껴 다시 눈을 뜨기도 전에 이런 말이 들려왔다. 눈을 떠서 보게 된 광경에 플란츠가 무엇을 떠올릴지 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플란츠는 그 말을 들은 뒤에야 눈을 떴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 불길도, 불길을 만들어 낸 투명한 알과 그 속의 붉은 새도, 공동이 비좁게 느껴질 만큼 까마득하던 검은 용도, 세상의 그 어떤 말을 가져와도 얼마나 아픈지를 보여주지 못할 얼굴로 웃던 동생 놈도.

"세렌티는 어떤 것도 무너뜨리지 못하니. 너의 새 형제는 곧 돌아올 테니."

플란츠의 앞에 선, 초상화 속 왕비와 똑같은 모습을 한 이가 하염없이 봄을 기다리는 나비같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가만히 선 채 시스파니안을 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 때."

칼리안이 사라진 것에 대한 불안은 시스파니안의 말 덕에 가지지 않게 되었으니, 아마도 이 순간 칼리안 역시 입에 담고 있을 질문을 똑같이 건넸다.

"무엇을 하셨습니까. '과거'의 그 날에."

벌어져선 안 될 일이 벌어지던 그 날에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 저질러선 안 되는 일을 저지르는 후손을 왜 그냥 두었는지 물었다. 자손의 특별함이 곧 우월함이 될까 걱정하여 축복조차 아껴 건네 준 사려깊은 이가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없었다 들었다."

시스파니안이 대답했다.

플란츠는 그 대답을, 듣지 못했다.

* * *

추측.

불확실한 것. 확신할 수 없는 것.

온통 다 추측 뿐이다.

베른이 지키던 시간의 축이 필요해졌다는 것도, 그것을 손에 넣은 이가 플란츠였다는 것도, 그 일에 앨런과 슬레이만이 도움을 주었다는 것도, 플란츠가 시간의 축을 움직였다는 것도, 때문에 시간이 되돌아갔고 그것이 다시 움직이는 일이 벌어지면 플란츠가 홀로 남겨진다는 것도, 그런 사실을 알았든 몰랐든 플란츠가 나설 만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도, 그것에 제온이 연관되었으리라는 것도. 전부 다 추측 뿐이다.

플란츠가 시간의 축을 썼다는 것이 맞는지. 맞다면, 플란츠가 그런 짓을 벌이겠다 마음먹을 일이 뭐였는지. 대체 그 플란츠가 무엇을 알았기에 그것을 쓰겠다며 전쟁을 일으켰는지.

아니, 그보다.

그래서 베른이 살았던 것이 맞기는 한지. 그 생이 상상속의 착각은 아니었는지. 지금 생은 현실이 맞는지.

"다, 모르겠습니다."

이제 막 그친 비에 젖어든 풀의 내음.

그 향에 감싸여 주변을 둘러보던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하늘 아래 덩그러니 놓인 섬 같은, 언덕진 작은 들판. 땅도 바다도 보이지 않는 너른 곳에 올려진 작은 곳. 처음 시스파니안을 만났을 때 찾아오게 되었던 곳.

- 이곳은 어디입니까.

- 인간의 발이 닿을 수 없는 곳이다.

어디인지 물었으나 알 수 없는 대답만 돌려받게 된 그 곳을 다시 찾게 되었다. 그러니 지금 칼리안과, 언덕 끝의 작고 마른 나무 위에 날개를 접고 내려앉은 붉은 새를 이 곳에 보낸 이는 아마도 시스파니안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역시 추측이었다.

"깨어 있던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지켜봤어. 네 말대로."

드디어 대답이 들렸다. 답을 듣게 되었다.

그 마지막 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추측한대로.

- 부디, 세렌티시여.

- 혹여 어디엔가 계신다면. 이제 모두 되었다, 하시면서. 멈춰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 ······ 제발.

이제는 만나지 못할 그 날의 체이스가 무엇을 바랐을지, 베른은 듣지 못했으나 세렌티는 들었던 기도. 부탁의 말. 신을 향한 그 원이 길을 잃는 것을 지켜보았노라고.

"왜. 그랬습니까. 입을 막고 기억을 지우고 멋대로 그렇게 끼어들 수 있으면서. 그것만은 왜 그랬습니까."

세렌티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스파니안보다 더 신비로운 모습을 한 채, 불꽃이 뚝뚝 흘러내리는 꼬리를 아래로 드리운 채, 말없이 앉아 칼리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은 그 뿐이라 말하는 것처럼.

베른의 원망과 체이스의 기원을 다 듣고도 아무것도 답하지 않겠노라 하는 것처럼.

"대답 안 해주실 겁니까."

과거의 양신전쟁.

알지 못한 때 갑작스레 나타난 악신에게 선공을, 흰 말을 빼앗겼던 것처럼 혹시 이번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는지. 또 누군가에게 흰 말을 빼앗겨 한 수를 늦게 두었는지. 그 때와 달리 이번에는 그 한 수의 거리를 좁히지 못해 지고 말았는지.

그래서 플란츠로 하여금 시간을 되돌리게 하였는지.

새로 벌어지는 판 위에서 이번에는 흰 말을 잡아 한 수를 먼저 두기 위해 그리 하였는지. 이미 늦은 것들은 전부 다 포기하고 두 번째 게임을 시작한 것이 맞는지.

그 두 번째 게임은 이기리라 확신한 것이 맞는지. 당신이 그리 확신했노라 믿고 지내도 되겠는지. 아니라면 당신 역시 승리에 대해 추측하고 있을 뿐인지. 플란츠가 묻지 말자 하였던 것을 결국 물었다.

"아니야."

세렌티가 대답했다.

"두 번째가 아니야."

라고.

질문에서 벗어난 답을 전했다.

"네가 남겨졌어. 내가 너를 데려왔어."

시간의 축이 돌아갔을 때, 멈춘 시간 사이에 홀로 남겨졌던 베른을 데려왔노라고. 이번이 두 번째가 아니었노라고. 검은 말을 놓고 흰 말을 잡았음에도 이기지 못했노라고.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시간이 되돌아갔다고.

"됐어. 이제."

그것으로 되었다고.

잠든 신이 대답했다.

칼리안은 그 모든 대답을, 듣지 못했다.

신의 답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안 칼리안이 웃었다. 새하얀 얼굴에 그려지듯 자리한 새빨간 입술에 화려한 봄 같은 웃음이 담겼다.

"재밌네."

칼리안의 답이 세렌티에게 전해졌다.

* * *

또 육포인가.

눈 앞에 들이밀어진, 검은 천에 감싸인 것을 본 칼리안이 경계의 빛을 띠었다. 쥐여 준 적도 없던 목줄을 매번 틀어잡고 당겨대는 걸 봐선 형님 저하 저 분이 아무래도 나를 멀쩡한 사람으로 취급해 줄 요량은 없으신 듯 하니 손에 들린 저것이 또 육포인지 고민이 될 수밖에.

물론 그런 취급이 억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저 안에 든 것이 육포인지 사람 간식인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다.

플란츠 안 시들었나 살피는 칼리안이나.

칼리안에게 육포 가져다 주는 플란츠나.

서로 크게 다를 것이 없기도 하고.

"먹는 것 아니야."

그런 의문을 가질 것이 뻔하다는 듯 플란츠가 먼저 답했다.

대답을 해줘도 들리지 않는 말을 두고 세렌티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이유가 없었다. 때문에 그 이상 이야기를 하겠다며 속만 앓는 일은 집어치웠다. 그렇게 하고 나니 자연스레 공동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어느새 해가 기우는 시간.

처음 찾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굳게 닫힌 공동의 입구 앞, 나무 사이로 스미는 석양의 빛줄기 아래 오도카니 선 채 동생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완두콩이 보였다. 조금만 내려가면 아르센이 있을 텐데 그 쪽으로 가지도 않고 혹시나 오랫동안 기다렸는지를 물어보려는데 플란츠가 뭔가를 또 쑥 내밀어 보였다. 그리고는 먹는 게 아니라 말했다.

잠깐 실망한 칼리안이 물었다.

"그럼 무엇입니까."

"파편. 바다에 있던 것."

"설마 시간의 축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곳을 찾아 온 이유를 잊지 않은 플란츠가, 시스파니안의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알려야 할 내용을 전했다. 그러자 플란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스파니안의 손에 주먹만한 금속 조각 하나가 올려졌다. 아르나이젤이 지니고 있던 것을 곧장 찾아 온 것이다.

"그 잠깐 사이에 바다에 있던 것을 곧바로 찾아왔다는 겁니까."

"그 해룡이 어디에 있을지 아신다면서."

"······ 네."

어디 있을지 알면 바로 찾아지나보다.

플란츠의 토막말을 듣고 시스파니안의 능력을 애써 이해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칼리안이 천을 풀었다. 시간이 되돌아가기 전에 세크리티아 왕궁의 보물창고에서 보았던 시간의 축, 그것의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경한 얼굴로 파편을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일부라서 그런가. 가까이서도 아무런 기운도 안 느껴지네요. 멀쩡한 축은 이렇지 않았었는데."

"본래 다른 기운이 있나."

"네. 마력도 아니고 치유사들의 신력과도 다르고, 처음 느끼는 이질적인 기운이 풀풀 났었습니다."

"왕궁 지하에 모아 둔 건. 어땠는데."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가까이 쳐다볼 수 없긴 했지만, 거기 모인 것들도 그 때와 같은 기운이 나진 않았습니다."

카이리스 왕궁의 지하에 시스파니안이 모아 둔 다른 파편들과 마찬가지로, 손에 들린 조각 역시 마력도 신력도 품지 않은 평범한 금속 조각 같은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파편에서 시선을 뗀 칼리안이 공동의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빨리 찾아오는 것이 가능하면 왕궁의 석실에 바로 가져다 두는 것도 가능할텐데. 이걸 왜 저에게 맡기시는지 모르겠네요. 혹시 다른 얘기는 없었습니까."

"있었어."

"······ 그럼 같이 얘기를 해주셔야죠, 형님."

"가져다 두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던데."

"굳이 제가요."

고개를 끄덕여 보인 플란츠가, 파편의 위에 적힌 알 수 없는 문자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해룡이 한 번을 쓴 것이니 직접 가져다 두라고."

칼리안이 파편에서 시선을 떼어 플란츠를 쳐다봤다. 플란츠의 말이 이어졌다.

"언제까지 가져다 두라고는, 말 안하셨어."

"······ 그럼."

시간의 축.

시간을 강제로 되돌릴 만큼의 거대한 힘을 가진 물건. 세크리티아의 대왕이 악신의 앞에 나섰을 때 들고 있던 물건.

그것을 달리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직접 알려줄 수 없던 탓에, 시스파니안은 이번에도 힌트만 전했다. 아르나이젤이 그것의 힘을 끌어다 썼다는 것을 상기시켜줬다.

"스승님께서는 알아보실지도 모르겠네요."

아르나이젤이 그것을 썼을 때, 아르나이젤의 마력이 파편에 남겨 둔 흔적. 그것을 앨런은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르나이젤의 마력이 어떤 식으로 파편을 사용했는지 알아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해룡이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요."

건망증 심한 해룡의 장난. 아르나이젤이 잠시 멈춰두었던 시간 속에서 바닷속을 구경했던, 정확히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던 기억을 떠올린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다른 표정 없이 칼리안을 지켜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

석양 덕에 더 도드라지는 빨간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축의 파편 말고, 보다 중요한 것을 전해야 해서 칼리안을 기다리고 서 있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됐습니다, 사과."

그리고 칼리안의 목소리 덕에 말을 하지 못했다.

"······ 왜."

"가시박히라고 그렇게 부른 게 아닌 것 아니까."

끝내 알리지 않으려 했던 이름.

간신히 생긴 흉터같고 이제 막 아문 상처같은 이름.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이상 아물 수 없을 이름. 이제 와 그 누구의 입으로 듣게 되어도 사라진 과거에 불렸던 것과 같아질 수는 없는 이름. 두 번 다시 베른으로서 듣지 못할 부름이라는 사실만 상기시켜 주는 그런 이름.

돌아버린 칼리안을 붙들겠다며 그 이름을 꺼낸 것이, 베른으로서 세렌티의 앞에 서 있던 이를 그렇게 부른 것이, 결국은 현실을 깨우쳐 주게 될 뿐이었음을 몰랐을 테니까. 이제 없는 사람 노릇 그만하고 이곳에 있어야 할 이름으로 돌아오라는 의미로밖에는 들리지 않으리라는 걸 몰랐을 테니까.

지금의 체이스가 왜 과거의 체이스를 대신해 칼리안을 베른이라 부르지 않는 것인지, 플란츠가 그것까지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리지 않나.

"기억해주려고 알아내고 달래주려고 불렀다는 걸 아니까. 사과하실 일 아닙니다."

"미안해."

의도가 달랐다 해서, 모르고 있었다 해서 이미 생긴 상처가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적어도 그것은 아는 플란츠가 사과를 했다.

"······ 네."

사과를 받은 칼리안이, 베른이, 씩 웃어 보였다.

곧 칼리안이 축의 파편을 주머니 속에 잘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산 아래로 펼쳐진 지그프리드령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저 고기 사주십시오. 배고픕니다. 오늘 일에 대한 고민은 배부르고 나서 해보겠습니다."

멀쩡한 공작저 놔두고 사달라는 것이 고기일지 아니면 술 참 좋아하시는 왕세자의 위명 속에 숨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술일지.

"알았어."

어쨌거나 플란츠의 금고도 허전한 편은 아니라서, 동생 놈이 뭘 얼마나 퍼마시든 그 정도는 사줄 수 있는 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츠 경 고생했으니까 헤르츠 경도 같이 가면 좋겠네요."

"알았어."

"헤르츠 경 몫도 같이 사주세요, 그럼."

"싫어."

"······ 칼같으시네. 그럼 헤르츠 경 밥값은 제가 낼게요."

"알았어."

"네."

하루종일 문 지키느라 고생한 내 따까리, 동종업자가 안 내준다는 밥값 정도야 내가 내 주면 되는 일 아닌가.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기분 좋게 웃어보이며 내려간 칼리안이 아르센을 불렀다.

아니.

부르려 했다.

공동 입구에서 칼리안과 플란츠의 대화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아르센이 왜 찾아오지 않았는지, 플란츠의 사과를 받고 무슨 고기를 얻어먹으면 좋을지를 생각하느라 미처 의문을 갖지 못한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타박 타박 거리던 칼리안의 발소리가 순식간에 없어졌다. 곁에서 걷던 플란츠를 남겨 둔 채로, 칼리안의 신형이 그림자 속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거의 그와 동시에 아르센의 곁에 나타났다.

- ······ 콰직!

단단한 무언가가 바스라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공동 밖으로 스며나온 살기, 그리고 피어.

아무튼 내가 왕자님 따까리 하며 살기로 한 것은 일생일대의 완벽한 결정이었다고. 그나저나 안그래도 기다리기 무료했는데 잘 됐다고. 왕자님 오시기 전에 주머니에 잘 넣어 숨기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그런 이유로 만들기 시작한 얼음 조각이 깨어지는 소리였다.

"헤르츠 경."

"······ 네, 왕자님."

"설명."

"수련입니다."

"내 눈엔 나 닮은 조각처럼 보였는데."

"아닙니다. 수련입니다."

"무슨 수련."

"세 개의 기운을 담아서 구현시킨 겁니다."

"자세한 설명."

"왕자님의 모습은 얼음으로 만들었는데, 왕자님께서 살기와 피어를 동시에 쓰신 것을 나타낼 방법이 없어서 고민을 했습니다만. 살기는 불로 피어는 모래 먼지로 표현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세 속성의 마법을 동시에 형체화하여 유지시키는 방법을 생각해보다 이렇게 구현시켜본 겁니다."

그 사이 곁으로 다가와 상황을 파악한 플란츠가 깊디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러에 피어 담아 검은 말 만들려 했던 얘나, 얼음과 불과 땅의 기운을 모두 모아 얘 닮은 동상 만든 쟤나. 아무튼 내 주변에 정신머리 제대로 된 건 내 정혼자밖에 없다는 걸 다시 깨달으면서.

"······ 헤르츠 경."

이제는 안네루시아 받을 일만 남은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바닥에 흩어진 잔재와 아르센을 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작은 바람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랜만에, 웃음을 터뜨렸다.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할 만큼, 둥지에 돌아와 날개를 접었던 새들이 소란스레 날아오를 만큼, 정말 오랜만에 마음껏 큰 소리를 내며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칼리안이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줘요. 이제."

"제 목숨 말씀이십니까?"

"아직 그건 말고. 스푼 줘요."

아르센의 얼굴에 빛이 돌았다.

"아. 저 말고 스푼 부러뜨려 주시는 겁니까?"

"그래요. 경 대신 스푼 부러뜨려 줄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재빨리 대답한 아르센이 곱게 보관해오던 스푼을 내밀었다. 그리고 마치 세상을 다 얻은 대마법사라도 된 것처럼 웃음을 지었다.

내 따까리 분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담은 온화한 손길에 뚝, 부러지는 스푼을 보면서.

어쩌다보니 부러진 것이 두 개.

일부러 부러뜨린 것이 한 개.

"이제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왕자님."

컬렉션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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