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62화 (363/527)

제64장. 둥지(4)

비 개인 하늘이 유난히 높다.

청명한 하늘 아래, 두 마리의 새가 부지런히 나뭇가지를 물어 날랐다. 새가 지나칠 때마다 방 안에는 작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둥지를 틀려는 것이다.

체르밀 궁의 어딘가. 저 작은 생명의 눈에 가장 안전하리라 여겨지는 곳에.

"체르밀 궁에 둥지를 틀려나 봅니다. 혹시 불편하시면 찾아내어 옮기라 할까요."

새의 그림자가 들 때마다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모습에, 회의 참석을 앞둔 란델의 옷을 점검해주던 시종 덴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새가 체르밀 궁 어딘가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나면, 오래지 않아 새끼 새의 소란한 울음과 먹이를 나르는 부모 새의 부지런한 날갯짓이 시작될 터였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방 안에 둔 시계 소리마저 소란하다며 모두 다 치워두고 지내던 란델이 아니던가. 때문에 새들의 둥지도 란델에게는 소란으로 여겨질까 묻는 것이었다.

얼마 전 새로 바꾸어 달아 둔 창에서 거울로 시선을 돌린 란델이 대답했다.

"두거라. 나쁘지 않으니."

"네, 왕자님. 알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덴이 다른 시종과 시녀들을 모두 물린 뒤 마지막 점검을 했다.

왕세자와 3왕자가 카이리스에 돌아온 이후로 계속 칩거하던 란델이 귀족들의 앞에 모습을 다시 드러내는 자리였다. 그러니 자칫 놓친 실오라기 하나마저 티가 될까 유난스런 걱정을 했다.

그러나 사실, 덴이 란델의 옷차림보다 훨씬 더 걱정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저······ 왕자님."

"얘기하거라."

"세자 저하와 3왕자님이 다시 자리를 비운 직후에 귀족들의 앞에 다시 나서게 되시면, 또다시 낭설이 돌까 우려됩니다. 차라리······."

"낭설이라니."

정식으로 책봉식을 치르고 카밀론 궁으로 거처를 옮겨가진 않았다 하나 분명 르메인에 의해 세자위를 내려 받은 2왕자. 그리고 지난 겨울까지는 세자위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3왕자. 그 둘이 없을 때에만 모습을 내비치는 1왕자 란델에 대해 어떤 소문이 도는지는 듣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지난 해 르메인의 탄신일 축제 때, 르메인이 텐실의 사절단을 추방하다시피 내보낸 이후 1왕자가 동생들의 앞에 꼬리를 말고 눈치만 본다는 이야기. 에반이 죽은 뒤 위세가 크게 흔들렸던 브리센의 그레이와 몰래 손을 잡고 상황의 반전을 노리고 있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는, 어떻게 걸러들어도 결코 명예롭지 않은 그런 이야기가 퍼져나가지 않겠는가.

"낭설이 아니다."

"낭설입니다, 왕자님."

"그들의 말에 잘못된 것이 있더냐."

"그들의 말에 맞는 것이 없습니다."

전 왕비이자 친모이기도 한 아이샤가 누구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었는지 잘 아는 란델에게 있어서는 끔찍하리만치 듣기 싫은 소문. 그런 소문이 또 생겨나 퍼져가게 두느니 차라리 이번에도 회의에 참여하지 말라는 권유였다.

물론 덴은 아이샤가 사망한 이유에 대해서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돌보고 곁을 지켜 온 란델이 왕위, 정확히는 이 나라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던 탓에 하는 말이었다.

열어 둔 창 밖으로 들려오는 지저귐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란델의 눈이, 방 한 구석의 협탁에 가 닿았다. 그 위에 잘 개어진 채 올려져 있던 검은 로브를 쳐다봤다.

"귀족들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것을 보지 않더냐."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자님."

"당장 더 크게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둔다는 뜻이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진 것을 살필 여력이 없는 이들이 아니더냐."

조금만 더 날아가면 천적 하나 살지 않는 울창한 숲이 있음에도, 정원의 장미나무와 조경수가 전부인 이 체르밀 궁에 둥지를 틀려는 저 새처럼.

"설마 왕자님, 지금 일부러······."

"시간이 빠듯하구나. 서두르거라."

신랄한 말로 귀족 무리를 내려다 본 란델이 덴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곧, 자신의 묵인 아래 체르밀 궁에 계속 둥지를 틀 수 있게 된 새들의 소란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갔다.

형제들이 없는 때에만 귀족들의 앞에 나서는 1왕자.

그를 본 귀족들이 왕위에서 이미 멀어진 왕자의 발버둥을 마음껏 입에 담도록. 그리하여 별다른 이유조차 밝히지 않은 채 또 한 번 자리를 비운 왕세자와 3왕자가 '과연 왕좌에 오른 뒤 이 나라를 진득하게 이끌어 갈 재목이 맞는지'에 대해 고민해 볼 틈이 없도록 해두기 위해서.

그것은, 멋대로 열린 창문을 멋대로 막아 둔 놈에게 티끌만큼의 빚도 남겨 둘 생각이 없는 란델이 멋대로 보내는 보답이었다. 귀족들의 입에 끔찍한 오해를 달고 오르내리는 것보다 그 놈이 만들어 준 빚을 남겨두는 것이 더 싫었으니까.

* * *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머리가 나쁘지 않아 다행이라고. 때로는 원망스럽고 가끔은 저주스럽던 똑똑한 머리가 있어 오늘만은 다행이라고.

오지랖 넓은 이해심을 가진 미련한 동생 놈이 주절거리던 말들을, 옆 나라의 국왕이 원망처럼 내뱉은 위로의 말을, 자신을 마주한 태고의 고룡이 건넨 한 마디를. 그 모든 것을 단 한 글자도 잊지 않고 떠올릴 수 있어 다행이라고.

가늠하지 못할 짐승의 송곳니가 숨통을 파고드는 기분, 세상을 집어삼킨 짐승의 눈을 마주 보는 기분. 동시에 터져나온 칼리안의 살기와 피어를 고스란히 맞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리면서, 애써 숨을 쉬어 내려 온 힘을 쥐어짜낸 플란츠는 고작 그런 생각을 했다.

어느새 시스파니안의 곁으로 다가간 칼리안이 보인다.

당장 주저앉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이 순간, 몇 걸음이고 발을 물리고 싶은 마음을 정말 간신히 가라앉히는 이 순간에도 플란츠의 머리는 생각을 했다.

- 저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들이 아니라면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칼리안이 관여하지 않은 일은 '과거'와 똑같이 벌어진다. 그리고 칼리안은 잠든 세렌티가 깨어나는 일에 손톱만큼도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니 세렌티는 과거에도 이번 겨울이 오기 전에 눈을 떴다는 소리다. 앞으로 7년 뒤에 찾아 올 '과거'의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는 뜻이다.

그 어떤 것도 도와주지 않은 채로 말이다.

- 세렌티.

한 사람이 죽었다.

한 나라가 멸망했다.

그래. 관망할 수 있다. 한 명이 죽든 만 명이 죽든, 지켜볼 수 있다. 신이니까. 인간이 아니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든 지켜보아야 할 신이니까.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하겠으나 신이라는 것은 그런 존재라고 배웠으니까.

그러나.

- 그 날의 플란츠는 --에게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작 전쟁이 아니었다.

시간이 움직였다. 세계가 무너졌다. 되돌아갔다. 잠들어 있지 않았던 세렌티는 그 일을 막는 대신 한 명의 생을 지웠다. 잊힌 이의 이름 하나를 마음껏 알리지도 못하도록 다른 이들의 입을 막아가면서 참 열심히도 지워냈다.

과거의 플란츠가 시간의 축을 움직이는 것을 지켜봤으면서, 그것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도 막지 않은 채, 모든 일의 대가를 엉뚱한 한 사람의 생으로 치뤄버렸다.

- 이제 되었다······ 하였다.

마치.

잘못 둔 게임을 뒤로 물리듯이.

이길 도리 없어진 게임을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듯이. 지금껏 잡고 있던 말로는 이기지 못할 게임을 치워내듯이. 흰 색의 말을 붙들어 잡아 흠없이 완벽해진 새로운 수로 선제공격을 시작하듯이. 새로 마련된 수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듯이.

그래.

게임을 하듯이.

- 세렌티.

그것을 신이라 할 수 있나.

그딴 것을, 신이라 부르나.

······ 라고.

지금 칼리안은 그리 판단했고 그렇게 생각하는 중이리라고. 플란츠는 그 똑똑한 머리로 칼리안의 속내를 모두 다 눈치챘다. 그리고 이해했다.

"그만."

그래서 말렸다.

- 성질부리려고요, 세렌티 만나면.

- 만나게 된다면 화풀이는 꼭 해야겠습니다.

온 생을 다해 지켜내려던 것을 제 등 뒤에 두고 끝내 스러진 놈. 누구보다 절박하게 살았을 놈. 삶을 살았다기 보단 차라리 연명하며 살았다 해야 할 그 생을 다해 지켜오던 모든 것을 전부 다 잃은 놈. 그러고 나서도 누구 하나 제대로 원망하지도 못한 채 제 빈 자리만 걱정하며 다시 살게 된 놈. 오로지 그것만 허락받았던 놈.

그런 놈이 곧죽어도 거짓말은 못 하는 놈인 것을 알아서.

미친놈이라는 것도, 제대로 돌은 놈이라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어서.

- 저벅.

버르장머리 없는 미친놈이 제 뒤에 누가 있었는지까지 다 까먹고 화를 터뜨린 바람에 미친듯이 떨리는 손을 힘 주어 말아 쥔 플란츠가 한 걸음을 간신히 걸었다.

간신히 붙들어 맨 생이 또 부스러져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세렌티를 향해 칼을 겨누겠다는 생각일까봐. 저딴 것의 손에 놀아나느니 차라리 그렇게 없어지겠다는 심보를 부려 가며 원망하는 것일까봐. 그런 생각으로 베개 밑에 칼을 두었던 제 형처럼.

- 저벅.

그래서 고집스레 다시 한 발을 더 걸었다.

시스파니안을 올려다보던 놈이 고개를 틀었다. 지금껏 외워두었던 것들과 완전히 다른,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의 붉은 눈이, 슬쩍. 플란츠를 향했다.

"오지 마십시오. 당신 못 버팁니다."

그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비로소 플란츠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 하나를 더 깨달았다. 그렇게 여러 번을 불렀음에도 답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 하."

완전히 목줄 풀린 내 동생 저 새끼가 진짜 돌아버려서, 돌다 돌다 아예 그냥 죽기 전으로 돌아가버렸다는 것을.

* * *

다 좋아졌다.

모든 것이 좋아졌다.

히나가 살아있다. 다른 모든 이유를 전부 다 버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좋아진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브리센의 악행이 멈췄다. 키리에는 히나를 계속 곁에 둘 수 있게 되었다. 얀이 계속 웃는다. 때문에 지그프리드의 세 사람은 가족을 또 놓치지 않았다. 멜피르가 목숨을 건졌다. 리리에가 구조되었다. 홀로 살아남았던 세크리티아의 이름 모를 아이는 계속 살게 되었다.

카이리스는 절대로 세크리티아를 침략하지 않을 것이다. 발칸의 유쾌한 미친 놈들은 계속 그렇게 유쾌할 것이고 그들의 옷자락에 무고한 피가 묻을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막아서다 눈을 감았던 테일란은 이제 그들과 함께 세크리티아와 자신의 왕을 지켰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아리안느는 정혼자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않아도 되며 루이즈는 제 심장이 뜯기는 기분을 다시 겪지 않을 터였다.

에일라를 계속 곁에 둘 수 있게 되었다. 앨런은 새로운 아들을 얻었다.

결과적으로 체이스는 동생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플란츠는, 살기 시작했다.

숨을 쉰다. 앞을 본다. 삶을 산다.

다 좋아졌다. 전부 다 좋아졌다. 한 명, 그리고 또 한 명. 한 명의 죽음이 묻히고 또 한 명의 생이 잊힌 덕분에.

- 아! 그러니 이 얼마나 실리적인 희생인가.

내 생각은.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 넌.

세렌티.

* * *

시스파니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혼을 내든 화를 내든 공격을 하든, 그도 아니면 하다못해 세렌티가 잠든 저 알을 어딘가 다른 곳으로 보내든. 무엇이든 할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세렌티를 품에 안은 채 베른을 내려다봤다. 세렌티를 대신해 이 땅을 영글어냈듯이 쏟아지는 원망도 대신 받겠다는 것처럼 바라봤다.

"그만 멈추어 주거라."

그리고 부탁을 했다.

이제껏 마음 속으로 전해지던 의지 대신 조용한 목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사려 깊은 고룡이 평소와 다르다던 말에 불어왔던 그 따뜻한 바람을 담은 듯한 목소리였다.

"무엇을 멈추라 하십니까."

"네가 속에 담은 그 말을 말함이다."

"왜 멈추라 하십니까."

"왜 멈추지 않으려 하느냐."

"멈추지 않길 바랐던 것 아닙니까."

"이런 모습을 의미함이 아니었다."

봄을 부르는 듯한 바람이 다시 불었다.

"세렌티는 나와 다르다."

"지금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세렌티는 다누와 다르다."

"내 칼날이 닿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미 압니다."

"세렌티는 너희와 다르다."

"사고가 맞지 않는다 해도. 만나겠습니다."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의지는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비켜주십시오."

"이미 너는 전하였다."

베른은 이미 세렌티에게 뜻을 알렸다.

참을 수 없다는 것을, 화가 났다는 것을, 이제껏 가져 온 여러 의문들을, 이미 잘 알렸다. 세렌티의 뜻에 순응하지 않겠노라는 그 말 역시 이미 온 몸으로 전했다.

"네. 전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못 들었습니다."

베른은 못 들었다.

"아무 말도 못 들었습니다. 나는."

그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

"다시 살아도 되겠는지. 살려내고 지켜주고 제대로 사는 법을 가르치고, 그걸 보고 나도 이제야 살아가면서 모든 것이 더 좋아지도록. 새로운 생을 기회처럼 쥐여주어도 괜찮겠는지. 끝내 불행하지 않았다 여긴 내 생을 멋대로 판단해 지워내고 새로운 생을 선물처럼 건네주면 감사히 여기겠는지. 고분고분 따르겠는지.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듣지 못했습니다. 내가 알고자 하는 그 모든 일에 대해서도, 나는 듣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이 일을 굳이 겪지 않았어도 될 이의 연두색 눈. 이 자리에 굳이 찾아오지 말았으면 했던 이의 새빨간 눈. 무슨 뜻을 지니고 잠들어있는지 굳이 대답하지 않는 이의, 감겨들어 보이지 않는 검은 눈. 그 모든 눈을 들여다보던 시스파니안에게서 또 한 번 바람이 불었다.

그것이 그저 웃음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아마도 웃음이 아니었나보다. 지금 이 자리의 모두를 이해하고 만, 그리하여 그 누구도 질타할 수 없게 되어버린 시스파니안의 탄식이었나보다.

"세렌티는 우리와 다르다."

"무엇이 그렇게 다릅니까. 이해 구할 생각 없이, 설명하고 행동할 필요 없이, 큰 것을 위해 작은 희생 하나 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새끼. 다른 놈들 제 손바닥에 올려두고 관망하는 새끼, 그러다 잘못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 드는 그런 새끼. 그 모든 것에 다 큰 뜻이 있었노라 개소리하는 그런 새끼. 세상 천지 온갖 밑바닥에 널리고 깔렸습니다."

펄럭.

하늘을 만드는 장막과도 같은 거대한 날개가 잠시 펼쳐졌다. 그리고 세렌티를 감싸는 듯한 모습으로 다시 접혔다. 베른의 눈 앞에서 세렌티를 가렸다.

어쩌면 반대로 세렌티로부터 동생 놈을 가린 행동일지도 모르겠다고. 플란츠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베른은, 신경 안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안 들고 먼저 듣기나 하겠다 하는 것은, 지금 내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이해입니다. 지금 내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인내입니다. 신이라 하니. 대체 뭔 뜻이 그렇게나 높고 높아서 고개 그만 쳐들고 입 닥치고 살라 하는지. 직접 묻고 듣겠습니다. 내가."

"······ 그만."

낮은 목소리 하나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베른은 시스파니안의 날개가 자신과 세렌티의 사이를 막은 이유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으나, 똑같이 굴기에는 신경이 쓰였던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손 위에 올려놓고 지켜보던 것이 제 눈 밖에서 벗어날 때 그 손 주인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그것 하나만은 이미 오래 전부터 너무나 잘 배워왔던 탓에. 저 놈의 말마따나 세상 천지에 널린 그런 이들처럼 세렌티 역시 같을까봐. 그리하여 제 손에서 벗어나려 하는 우스운 미물 하나 쯤, 다시 치워내고 새 말을 집어들면 그만이라 여길까봐. 신경이 쓰여서.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갗이 도려내지는 기분을 짓눌러가며 결국은 걸어왔다. 붙들어 잡았다. 저로 인해 가로막힌 칼날같은 원망, 혹은 원망같은 칼날. 그것이 혹시라도 자신을 향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했다. 그냥 붙들어 잡았다.

- 형님 탓 아닙니다.

저 놈이 누구든 거짓말 못 하는 놈인 건 맞으니까.

그딴 신경은 더 이상 안 썼다.

"하지 마."

붙들린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 뿐.

줄곧 세렌티를 향하던 시선이 돌려지지 않았다.

칼날이 날아들지도, 원망이 날아들지도 않았다.

"그만 하고. 물러나."

"못 죽입니다. 나도 이제 못 죽습니다. 할 일 있어서."

"······ 그럴 생각이 있긴 하면. 그만 하라고."

"원망 끝났습니다. 다 했습니다. 다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못 그만둡니다. 깨기 전에, 또 사라지기 전에, 마주쳤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온갖 감정을 다 쏟아내고 욕도 실컷 했다.

이미 다 늦어버린 일이며 돌이킬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세렌티 뒷통수 치겠다는 생각은 이미 진작에 다시 담았다. 원망만 했다.

그 원망 다 꺼내놨으니 이제 물을 것이 있다고.

세렌티가 눈을 뜨기 전에. 이 몸이 다시 죽기 전에는 찾아가지 못할 곳으로 떠나가 또 다시 세상을 내려다보기 전에. 물어보고 확인할 것이 있다고 답했다.

"칼리안."

부름에 대한 답은 여전히 없었다.

대신 계속 막아서는 플란츠를 향해 무언가를 도려내는 듯한 목소리만 돌아왔다.

"얘기했는데. 내가. 당신한테. 당신 못 버틴다고."

살기를, 피어를, 베른의 말을.

세렌티에게 묻고 확인해야 할 그 사실을.

시간의 축을 플란츠가 돌린 것이 맞는지.

혹시 내 생각대로 그 재앙이 다시 돌면 모두가 멈춘 시간 안에 플란츠가 혼자 남게 되는 것이 정말 맞는지.

시간이 다시 되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하면, 플란츠가 시간을 되돌린 그 이유를 내가 찾아 없애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인지. 그렇게만 하면 되는 것이 맞는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시간의 축을 없애버리면. 두 번 다시 그것이 돌아갈 일이 없도록 시간의 축을 없애버리면. 그렇게 하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 것이 맞는지. 이미 늦은 것을 뺀 모두가 다 좋아지는 것이 맞는지.

- 그 날의 플란츠는 --에게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검은 말을 내려놓고 게임을 물린 당신은, 이번에는 같은 결과가 반복되지 않으리라 확신하여 흰 말을 든 것이 맞는지.

이미 늦은 건 이미 늦은 내가 다 집어치우고 넘어가 줄 테니 그것은 대답해 달라고.

- 그 날의 플란츠는.

만약 아니라면, 나는.

"물어보지 마. 말하지 마."

알아서는 안 되는 일.

알아서는, 안 되는 일.

과거에 대한 그 어떤 기억조차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베른에게서 단 한 마디 질문조차 나오지 않았음에도.

때로는 모르는 것이 약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것만은 베른보다 조금 더 잘 아는 똑똑한 플란츠가.

"······ 베른."

칼리안의 목줄을 다시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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