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61화 (362/527)

제64장. 둥지(3)

검은색을 좋아했다.

그래서 흑을 잡았다. 다른 이유 없이 단순히 검은색이 좋아서 그랬고 그것이 버릇이 됐으며 이후로는 버릇이 되어서 당연스레 흑을 잡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플란츠를 상대로도 흑을 선택했었다.

"비숍, g6. 체크메이트."

그리고 딱 여덟 수만에 졌다.

"······ 하하하하. 이 형님 정말."

당연히 칼리안은 멋지게 웃으며 패배를 받아들였다.

칼리안은 승패의 결과를 존중할 줄 아는 어른이니까.

지그프리드의 땅으로 향하는 길.

비록 공간 이동 마법진을 쓴다지만, 이동 마법진은 슬레이만과의 약속에 따라 지그프리드 공작령에서 하루 이상 떨어진 거리에 만들어졌었다. 게다가 공작령에 들어선 이후에도 둥지와 공작저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사흘을 더 가야 했다. 아무리 급한 마음에 출발했던 여정이라 하나, 몇 달 동안 소식 없던 시스파니안을 이제야 찾아가면서 고작 하루 이틀을 아끼겠다며 학교 일로 한참 바쁠 레이첼을 또 차출해올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말 위에서 보내는 긴 시간이 생겼다.

처음 이 곳을 지날 때 칼리안은 플란츠에게 이런저런 꽃과 나무들이 무엇인지 알려줬고, 지금 떠 있는 것과 반대되는 모양의 구름이 뜨면 소나기가 온다는 사실과 갑작스런 많은 비에는 어디로 어떻게 몸을 피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리켜보이고 아는 것들을 하나하나 가르쳐주며 지나갔었다. 그리고 똑똑한 플란츠는 그것들을 전부 다 잊지 않고 기억했다.

때문에 두 번째 마주한 같은 길에서는 알려줄 만한 새로운 것이 별로 없었다.

"저건 봄이 되면 지금 보이는 것처럼 가시 끝이 붉게 변하는데, 붉은 부분에 피부가 닿으면 많이 따갑고 아립니다. 독성이 있어요."

"그래."

"저기 저 작은 블루베리같은 열매는 맛이 꽤 좋습니다. 술을 만들면 향이 진짜······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튼 그냥 먹기도 좋아요. 대신 열매 근처에 벌집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잘 살펴가며 따야 합니다."

"알았어."

대륙에서 가장 큰 나라의 허우대 멀쩡한 왕자가 저 혼자 가시나무 덤불에 들어가고 제 손으로 열매 따 먹을 일이 어디 있겠냐만은. 무료함이 반, 시스파니안에 대한 불안함이 반쯤 섞인 기분을 못 견디고 종알종알 꺼내놓는 말임을 아는 플란츠는 다른 대꾸 없이 얌전히 다 배웠다.

다만 그것이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칼리안이 아는 몇몇 가지를 더 일러주고 나니 다시 정적이 찾아든 것이다.

그래서 플란츠는, 언제 그렇게 말을 했냐는 듯 어느새 레이븐의 안장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손 끝을 톡톡 두드리는 칼리안을 흘끗 본 뒤 입을 열었다.

"다시 해."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그때. 공동에서. 체스."

그렇게 다시 시작하게 됐다.

시스파니안이 만들어 둔 공동에서 둘이 했던 일. 체스판 없이 체스를 두는, 칼리안과 플란츠만 할 수 있을 그 기상천외한 일 말이다.

버릇처럼 흑을 잡고 필연처럼 내리 지던 칼리안이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가 말했다.

"한 번만 더 하시죠."

"상관은 없는데. 아무래도 아우님께서 백을 잡으시는 게 어떨지."

"싫습니다."

"······ 질 텐데. 계속."

아무리 그래도 칼리안이다.

플란츠가 더 똑똑한 것이지 칼리안이 바보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칼리안은 고집스럽게 몇 번 더 흑을 움직였다.

"킹, b4. 비숍 잡았습니다."

"퀸, b3로. 체크."

"킹, a5로요."

"퀸, b5. 체크메이트."

그래서 딱 그 고집만큼 졌다.

그 뒤로는 얌전히 백을 잡았다.

"형님 킹 옆의 룩, f7에 놓을게요. 체크."

"킹, g8."

"룩, g7으로요. 체크."

"킹, h8으로."

"룩, h7. 폰 잡았어요. 체크."

"졌어."

"네."

그렇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간혹 몇 번을 이겼다.

눈 앞에 체스판이 있으면 흑을 잡아도 이겨볼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아무리 용을 써도 달리는 말 위에서 온전한 체스판과 그 위의 여러 말들을 오러로 만들어 띄워낼 만큼은 못 되는 터라 그냥 백을 잡고 말기로 했다.

물론 칼리안이 시도해보지 않았다는 건 아니다.

평생을 받들어 모시기로 한 사람이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두 종류의 오러를 동시에 구현하는 세기의 기적을 일으키더니 그 대단한 성취의 결과를 가지고 기껏 한다는 게 먼 여정의 지루함을 날리고자 참으로 영민하신 형님 저하와 함께 둘 작은 체스판을 그려내고 그 위에 아기자기한 여러 모양의 체스 말들을 올려보려다 때려치는 일이었음을 알게 된 미친 따까리의 얼굴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역시 왕자님은 도전 정신도 남다르십니다."

물론 아르센이 싫어했다는 건 아니다.

오랜 야근과 과로에 푹 절여진 채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칼리안이 하는 양을 보던 아르센은 습관같은 칭찬을 건넨 뒤 다시 로로의 등에 엎어져 기절했다.

아무튼 얘가 쟤 따까리를 하겠다 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나.

"흰색을 어떻게 내는지는 모르겠고 혹시나 피어의 기운을 오러에 담으면 검은색이 나지 않을까 했는데. 그게 되네요. 좋은 걸 알았습니다. 이제 체스말만 제대로 만들어내면 제가 흑 잡고도 이깁니다, 형님."

"······ 고작 그 따위 이유로 그걸."

"고운 말 쓰셔야죠. 험한 말 쓰시면 좋은 어른 못 됩니다."

생글생글.

방긋방긋.

"매일 짖는 것은 나중에 뭐가 되시려는지 궁금해지는데."

"아. 형님과 달리 저는 이미 어른이라서."

"짖지. 또."

여하간 그렇게 보냈다.

체스판 만드는 일은 그만두고 칼리안은 얌전히 계속 백을 잡고 플란츠가 흑을 잡고,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해 가면서. 말이 지칠 즈음 잠시 멈춰 왕궁에서 준비해 온 빵을 먹고 다시 출발하고. 그러다 해가 기운 뒤에는 모닥불 하나를 피워낸 뒤 둘러앉아 숙면 마친 아르센이 잡아 온 갈색과 검은색의 야생 닭 네 마리를 다 같이 나눠먹은 뒤 '저런 게 달무리인데 달무리가 생겼으니 내일은 비가 올 거다'는 등의 이야기를 주고받다 잠에 들었다.

그 후 지그프리드 공작령에 들어선 뒤에는 정말로 비가 왔고, 덕분에 시트렌 시에서 하루를 더 보낸 뒤 다시 길을 나섰다. 그리고 저녁마다 다음 시의 시장저에 찾아가서 일행 중 어느 파릇하신 분의 예민한 식습관에 대해 매번 설명해가며 부지런히 사흘을 더 가서야 도착했다.

코끼리들의 주인.

슬레이만 혼 지그프리드의 저택에.

"세자 저하, 그리고 3왕자님을 뵙습니다. 지그프리드의 수석 기사단장 로난시테입니다."

"반갑습니다. 경이 이 곳에 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아는 얼굴이 있으니 좋네요."

"아, 기억하십니까."

"여러 번을 보았는데 모를리가요."

"감사합니다. 공작님이 수도에 머무르게 된 이후부터 제가 대신 이 곳에 와 있었습니다. 우선 안으로 드십시오."

늘 드미레아의 곁에서 기사들의 훈련을 시키던 로난시테가 그곳에 있었다. 새보다 사람의 발이 빨랐던 터라 상황을 전해듣지 못했을 텐데도, 로난시테는 크게 당황하지 않고 왕실의 사람들을 훌륭히 맞이했다.

그 뒤 전해진 슬레이만의 서신을 확인한 로난시테가 창 밖을 살피며 말했다.

"이미 가 보셔서 아시겠지만, 둥지로 가는 길이 많이 어둡고 험합니다. 아무래도 내일 아침에 출발을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건."

길이 어두운 것은 물론 험한 것도 칼리안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때문에 이렇게 입을 연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 의미를 곧장 눈치 챈 플란츠가 선언하듯 입을 열었다.

"갈 건데. 나도."

"네. 내일 아침에 가겠습니다."

앞의 한 글자는 플란츠를 보면서, 뒤에 이어진 말은 로난시테를 보며 이야기 한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기억을 굳이 찾기 위해서인지, 칼리안을 돕기 위해서인지, 왕궁이 싫어서인지, 시스파니안에 대한 일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서인지. 플란츠는 별다른 이유를 붙이지 않고 칼리안과 함께 걸음을 했다. 만일을 대비해 얀이나 키리에도 없이 아르센만 데리고 출발하려던 칼리안은 당연하다는 듯 에스티나에 올라 함께 따라나오는 플란츠를 제지하지 않았다.

빌헬름관을 비운 이후 그렇게나 바빴으면서 굳이 또 따라오겠다 하는 데에는 나름의 생각과 이유가 있을 테니까. 캐묻지 않아도 될 일이다.

* * *

요즘 살만하냐는 질문에 당장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아르센을 데려온 이유.

"지그프리드 공을 못 믿는 것은 아닌데. 공은 영지 살피는 눈이 워낙 관대한 터라. 대신 좀 부탁할게요."

"네. 압니다. 왕자님께서는 그냥, 제가 지금 저 안에 같이 들어가서 시스파니안 뵙고 싶지만 꾹 참고 입구 지키겠다 하는 중이라는 사실만 알아주시면 됩니다."

"왜. 시스파니안 만나서 기억 찾고 스푼 부러뜨려달라 하려고?"

"아. 벌써 눈치 채셨습니까."

내 따까리 또라이인 건 알았는데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는 것이 나 때문인지 아니면 멀쩡한 놈처럼 보이게 하던 베일이 벗겨지고 있는 것일 뿐인지를 모르겠어서,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연애하면서 그 많은 용돈 써볼 시간도 없도록 야근시키다 필요할 땐 또 이렇게 매번 데리고 다니면서 닭까지 잡아오게 만드는데 동상 하나 못 세우게 막는 것도 모자라 그깟 스푼조차 안 부러뜨려주는 것이 아무래도 좀 매정한가 싶다. 때문에 공동 쪽으로 향하려던 발을 잠깐 멈춘 칼리안이 선심 쓰듯 입을 열었다.

"다녀와서 기분 좋으면 부러뜨려 줄게요. 경이 가진 그 스푼."

"알겠습니다, 왕자님. 다녀오십시오. 영지 내에 누가 있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제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내 주변에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곤 내 정혼자밖에 없는 것 같은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플란츠가 가만히 이어나가는 사이, 세상 피로가 다 가신 얼굴로 씩 웃은 아르센이 자리를 잡고 섰다. 그리고 칼리안은 플란츠의 얼굴에 깊이 드리워진 수심을 못본 척, 멀리 보이는 공동을 향해 발을 옮겼다.

이곳에 처음으로 왔을 때와 달리 굳게 닫힌 입구.

그 앞에서 잠시 멈춰 선 칼리안이 까마득히 높고 거대한 바위를 올려다봤다. 곁에서 같은 곳을 올려다보던 플란츠가 먼저 말했다.

"닫혔군."

"그러게요. 와본 적 없었으면 여기가 입구인 줄 알아볼 수도 없었겠네요."

"어떻게 열 건데."

"글쎄요. 노크를 할 수는 없고······ 불러볼까요."

대책없이 왔다는 소리다.

로젤리타가 끝났으니 이렇게 닫혀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태평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칼리안이 앞을 가로막은 바위 쪽으로 한 발을 더 디뎠다. 그리고 나지막한 소리를 냈다.

"계시면, 열어주십시오. 들어가겠습니다."

정말로 불렀다.

윗 방 찾아가 방 주인을 불러내듯이, 그냥 불렀다.

예상한대로 둘의 앞에 자리한 바위는 꿈쩍하지 않았다. 시스파니안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도 않았고 마법처럼 바위가 갈라지며 방문객을 맞이하지도 않았다.

플란츠의 고개가 슬며시 칼리안 쪽을 향했다.

아니나다를까. 난처함이라고는 고래 비늘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얼굴을 한 칼리안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려내고 있었다.

저 표정 안다.

"안 열어주시면. 제가 들어갑니다. 부수고."

그래.

이런 말 하기 전에 짓는 표정이다.

"······ 너."

지그프리드 가문이 500년을 지켜온 곳. 신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태고의 고룡이 머물렀던 곳. 그런 곳에 무단침입하겠다며 내 동생이 내 조상님에게 협박을 하고 있는데 내가 하필 그 옆에 같이 있게 되어 버린 상황에 놓인 이성적인 플란츠가 무슨 말이든 꺼내보려 그 똑똑한 머리를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한 그때.

- 쿠구궁······.

거대한 바위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열어주셔서."

대체로 그것을 열어줬다고 하는 것이 맞는지를 고민할 새가 없었다. 한 사람이 들어갈만한 틈이 만들어지기가 무섭게, 환대에 감사해 한 칼리안이 그 안으로 몸을 쑥 들이밀었다.

멀찍이 서 있는 미친 마법사의 파란 머리카락과 그보다 덜 파란 하늘을 한 번씩 쳐다 본 플란츠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칼리안의 뒤를 따라 공동으로 들어갔다.

- 저벅, 저벅.

어둡다.

두 명이 들어선 공동에 한 명의 발걸음 소리만 울린다.

"처음 오셨을 때, 무슨 이야기 나누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됐다고."

플란츠의 짧은 대답에 이어지는 칼리안의 목소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으나, 답을 이해하지 못한 칼리안이 의문 든 표정으로 제 쪽을 쳐다보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플란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말 안 하고. 이제 됐다고. 그 말만 하셨는데. 시스파니안이."

"그게 무슨 뜻인지 안 물어보셨습니까."

"안 물어봤어."

"안 궁금하셨습니까."

"궁금했어."

"네."

지금과 그 때의 플란츠가 얼마나 달랐는지 상기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시 한참동안 한 사람의 발 소리가 공동을 울리다 낮은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

"넌."

"시간의 축에 대해서 여쭸습니다. 이미 저에 대해 다 알고 계시기에."

이 곳에 올 수 없던 사람이, 이 곳에 없어야 할 영혼을 지닌 채 방문한 것에 의문을 가지고 찾아왔던 시스파니안. 그때 만났던 시스파니안을 떠올린 칼리안이 답했다.

"다른 건."

"시간의 축을 아는지, 그것을 누가 움직였는지. 그런 것만 물었습니다. 뭘 물어야 할 지도 모르겠고 그 때는 그 외의 다른 건 궁금한 적 없었어서요."

"그래서."

"제대로 된 대답은 하나도 못 들었습니다."

"왜."

"세렌티가 시스파니안의 입을 막아서요. 시스파니안이 말을 해주셨는데 저에게 전해지진 않았습니다."

고분고분 대답하던 칼리안의 입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궁금한 것 많으신 분이."

엘프의 도시에 갔을 때에도 느꼈지만.

이 공동에 찾아왔을 때. 그리고 체르밀 궁의 4층에서 하루하루를 그저 보낼 때. 그 오랜 날 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어서.

"······ 별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하다는 듯 되돌아온 대답에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후로도 둘의 걸음이 계속 이어졌다.

예전에는 이 정도를 온 뒤 시스파니안의 앞에 불려갔음을 떠올리고 나서도 한참을 더 걸었다.

때문에, 아무래도 문만 열어주었지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거절당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조금씩 머릿속에 스며들 즈음.

- 너는 여전하구나.

비로소 시스파니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박, 하고.

칼리안의 발 소리도 그제야 다시 들려왔다.

- 걱정을 하였느냐. 네가.

"그래서 왔습니다. 제가."

칼리안이 대답했다.

그러자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어디 계십니까."

- 함께 있지 않느냐.

어둠에 밝은 시력으로도 주변을 분간하지 못한 채 앞으로 걷기만 했던 터라, 칼리안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려다 포기하고 아무 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평소와 다르시네요. 사려 깊으신 분께서."

굳이 이렇게 찾아왔는데 어둠을 걷어주기는 커녕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한 투정이라 해야 할까. 칼리안의 입에서 나온 볼멘소리에 봄날의 저녁 같은 바람이 다시 불었다. 그것이 어쩐지 고룡의 웃음처럼 느껴진다고, 이 곳을 찾은 둘은 똑같은 생각을 했다.

- 빛을 싫어하여서 그리 하였다.

알 듯 모를 듯 한 말의 의미를 채 파악하지도 못했을 때.

- 펄······ 럭!

시스파니안의 웃음같은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 위로 거대한 돛이 태풍을 떠안은 듯한 소리가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빛이 들었다.

잠시 눈을 감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다시 빛 앞에 세워 둘 준비를 한 플란츠가 눈을 떴다. 이미 한참 전에 다시 눈을 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칼리안이 제일 먼저 보였다. 칼리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플란츠가, 잠시 숨을 멈췄다.

칼리안은, 그 플란츠가 그 정도의 반응을 보인 것을 두고 놀리거나 재밌어하지 않았다.

- 혹시 놀랄까 걱정이 되어 그리 하였다.

세상의 모든 빛을 다 담은 듯한 검은 비늘.

화산의 검은 연기를 모아놓은 것 같다가도 빛 한 줄기 들지 않은 검은 바닷물을 담아놓은 것 같기도 한 얇은 피막의 날개. 그리고.

이제 막 소생하는, 혹은 잠겨드는 생명을 고스란히 담아 만든 듯한 붉은 눈. 그 눈을 세로로 나누어 둔 검은 동공.

체르밀 궁의 인공호수에 만들어진 조각상으로, 수 없이 많은 곳에 새겨진 그림으로, 이젠 식상하다 할 만큼 여러 번을 보았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대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차라리 신성하다는 말이 어울릴 모습을 하고 있었다.

- 잠든 이가. 그리고 너희들이.

투명한 알 하나를 보호하듯 품은 채로, 시스파니안의 본신이 두 사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극히 위대한······."

지극히.

지극히 위대한 모습으로.

"시스파니안을 뵙습니다."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플란츠를 대신해 칼리안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함께 있었다는 시스파니안의 말을 그제야 이해했다.

공동 입구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칼리안과 플란츠는 웅크리고 누운 시스파니안의 긴 꼬리 곁을 따라 걸었다. 집채만한 발을 지나치며 걸어왔다. 천장에서 쏟아지던 여린 빛을 가린, 하늘같이 활짝 펼치고 있던 검은 날개의 아래를 지나왔다. 그 먼 걸음을 걷는 동안 시스파니안은 계속 곁에 있었다. 그랬으니 함께 있었다 답할 수밖에.

날개를 접어 늘어뜨린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들었다.

칼리안 역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시스파니안을 살폈다. 그 품에 안긴 투명한 알을 보았다. 온갖 색으로 반짝이는 빛무리에 둘러싸여 잠들어있는, 붉은 새를 보았다.

거대한 날개.

땅을 향해 쏟아져내리는 불꽃같은 긴 꼬리.

"······ 설마."

칼리안이 아는 모습.

플란츠 역시 보았던 모습.

한 번을 스치듯 읽고 내버려 둔 경전 속의 모습을 기억한다. 화려한 신전의 지붕 위에 올려진 조각상을 기억한다. 붉은 새의 그림, 그리고 붉은 새의 조각상. 그것과 꼭 같은 모습을 한 채로 잠들어 있는 눈 앞의 존재.

잠든 신.

"세렌티. 입니까."

세렌티.

숨 쉬고 사는 한 마주할 일 없다 여겼던 이를 맞닥뜨린 칼리안의 붉은 눈이 가늘게 변했다.

- 머지 않았다. 하여 지켜보고 있다.

플란츠의 숨 소리가 다시 잠시 멈추었다.

진작부터 숨 쉬기를 잊고 있던 칼리안은 그 역시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세렌티가······ 머지 않아 깨어납니까."

깊고 깊은 붉은 눈이 한 번을 깜빡였다.

긍정이었다.

"머지 않았다는 것이 몇 백년 뒤인 것은 아니겠죠."

인간과 시스파니안의 시간 계산이 다를 수 있음을 잊지 않은 칼리안이 침착함을 가장한 얼굴로 물었다. 농담처럼 꺼내졌으나 높낮이 없이 그저 딱딱하기만 한 목소리에, 시스파니안이 조용한 대답을 했다.

- 겨울이 다시 오기 전에.

짙고 짙은 붉은 눈이 잠겨들었다.

칼리안이 잠겨 든 제 눈을 잠시 감았다.

차라리 감았다.

"······ 칼리안."

플란츠만큼 똑똑하지 않다 하나 칼리안도 바보는 아니라서. 지금 플란츠가 떠올린 것을 칼리안 역시 떠올리게 되어서. 이번만은 칼리안이 플란츠보다 먼저 깨닫게 되어서.

칼리안이 무엇을 생각했을지 바로 눈치 챈 플란츠의 부름에도, 칼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다른 말이 새어나왔다.

"······ 잠든 것이."

대답하지 않았던 잠든 신. 잠들었기에 대답하지 못했던 신. 그리 믿고 애써 원망하지 않으려 했던.

신.

"잠들어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체이스가 그렇게나 간절히 세렌티를 찾았던 그 순간.

베른이 죽고 플란츠가 시간의 축에 다가갔던 그 순간.

세렌티가 가장 필요했던 그 순간.

"아니었습니까."

세렌티는, 잠들어있지 않았다.

체스판을 내려다보듯 모든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왕의 말로를. 세상의 끝을. 그 참극을.

세렌티는.

"왜."

칼리안이 눈을 떴다.

종막을 바라는 듯한 살기가.

종막을 불러올 듯한 피어가.

"칼리안."

"······ 세렌티."

공동 안을 집어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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