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60화 (361/527)

제64장. 둥지(2)

색과 맛이 서로 다른 사탕.

겉보기로는 맛을 알 수 없을 쿠키.

그래서 이번에는 무엇일까, 여러 갈래로 늘 이어지는 생각의 타래 중 하나가 그런 것을 떠올렸었다.

"이번에는 무엇을 만들어볼까 고민하는 중입니다. 세 아이를 키울 때에는 하지 못했던 일이다보니 재미가 있어 끊지 못하는 취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리에는 어제 막 수도 카이리시스로 돌아온 탓에 아직은 아무것도 새로 만들지 못했다며 그냥 평범한 아몬드 쿠키를 내려놓았다. 쿠키와 같이 내어진 체리 차에서 은은한 단 향과 신 향이 함께 났다. 또 다른 작은 응접실에서 레릭과 있을 얀이 체리를 좋아하여 함께 준비했다는 말이 뒤이었다.

제 아이들에 대한 세리에의 관심. 리리에에게까지 전해지는 애정이 결코 싫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해하거나 부러움을 느낄 시기는 이미 전부 지나간 까닭이다.

"그래."

"혹시 단 것을 싫어하시면 과일을 준비해오라 할까요. 저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몰라 다른 아이들의 입맛대로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아니야. 맛있어."

처음으로 단 둘이 나누어 보는 대화.

성인식 로젤리타를 위해 지그프리드 공작령에 갔을 때에도, 플란츠는 지그프리드의 사람들과 달리 말을 섞지 않았었다.

두 명의 남자 아이와 한 명의 여자 아이가 그려져 있던 초상화. 그것을 보고 동생의 시종이 누구인지를 눈치 챘던가, 그 뒤에 알게 되었던가. 그때는 얀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지기엔 마음의 틈이 없었던 터라. 그 똑똑한 머리를 가졌음에도 그것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함께 했던 석찬 자리에서도 드미레아든 세리에든 슬레이만이든 플란츠와 특별한 대화를 함께 나누지도 않았었다. 모든 대화는 그 때 플란츠의 곁을 지켰던 상급 시종이 대신했고 플란츠는 그곳에 그저 머무르다 돌아왔다.

"처음에는 칼리안 왕자님께서 저를 만나고자 하신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하께서 대신 말씀을 하겠다 하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내가 대신하려는 게 아니라 내 아우님께서 대신 하려고 했던 건데."

"그렇습니까."

기억에 거의 남아있지 않은 날의 일들을 집어 넣은 플란츠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 집안의 구성원 중 유일하게 강아지같은 블론즈 색의 머리카락을 지니지 않은 사람을 향해 말을 꺼냈다.

"부탁······ 을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입을 떼는 것이 썩 쉽지만은 않다.

오래 전 언젠가 3층으로 처음 내려갔던 날. 동생의 모습을 한 타인에게 저와 제 어미의 목숨을 건네주려 내려갔던 날.

전부 다 내려놓을 수 있도록 내 손을 좀 잡아달라 부탁을 했던 그 날이 되기 전까지는 단 한 사람에게만 부탁을 해왔고 그렇게 전해진 부탁은 언제나 거절 받아 왔던 탓에. 때문에 누군가에게 부탁이라는 것을 한 적이 드물었던 탓에.

"말씀하십시오. 무슨 부탁을 이야기하시는지 듣겠습니다."

플란츠가 바뀌었다는 것은 전해들어 알고 있었으나 이런 이야기를 꺼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세리에가 조금 놀란 얼굴을 삼켜내며 대답했다.

"내가 당신의 창을 배울 수 있을까 하고."

이제는 둘이 된 세 아이의 어머니 말고, 녹빛이 선명한 또 다른 한 아이의 새로운 어머니 말고, 어느새 세리에 자신으로서의 세리에가 된 이가 플란츠를 쳐다봤다.

"창술 말씀이십니까."

"그래."

플란츠의 대답은 길지 않았다.

그런 플란츠를 쳐다보던 세리에가 드미레아와 꼭 닮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하. 일반적으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할 때에는 그 이유가 따릅니다. 이유에 따라 부탁을 들어줄지 들어주지 않을지를 결정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 이유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명령이 아니라면, 부탁의 이유를 함께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칼리안이었다면 얀에게 그러했듯 검이라도 들어 보이며 이유를 함께 설명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야 막 숨 쉬고 사는 법을 배우고 있던 터라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까지는 못 배운 플란츠라서.

"검이 두 개라서."

설명 못 했다.

그 정도면 이유를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했다 해야 맞을 것이다. 덕분에 슬레이만마저 무서워하는 바로 그 세리에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이 상황과 앞에 앉은 사람에 대한 기억의 괴리가 너무 커서 웃음이 났다.

잠시 이어진 웃음을 멈춘 세리에가 플란츠를 쳐다봤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왕세자를 향해 손을 내밀고는 웃음에 대한 사과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럼 제가 저하의 검을 잠시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이 말에 순하게 고개를 끄덕인 왕세자가, 비록 지그프리드의 대장장이가 만들었다고는 하나 브리센의 모든 비밀이 담겨있을 시나스타를 세리에에게 넘겼다.

어느새 날카로운 눈매가 된 세리에가 플란츠의 앞에서 검을 꺼냈다. 그리고 검이 두 개인 것과 창술을 가르쳐달라는 말의 연관성을 직접 찾겠다는 듯 주의깊게 살폈다. 왕세자의 앞에 있던 무인이 무기를 손에 들었다는 사실은 이 자리의 둘 모두 신경쓰지 않은 채였다.

- 철컥.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세리에는 양 손잡이의 각 끝이 서로 맞물려 고정되도록 되어 있는 시나스타의 특수 장치를 확인한 뒤에야 플란츠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 드미레아도 지그프리드의 대장장이도 검에 숨겨진 비밀에 대해서는 모두 다 입을 다물었던 탓에 이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나의 검이 되기도 하고 양 손에 드는 양 날의 검이 되기도 하고 이렇게 이어 붙기도 하니, 브리센에서 생각해냈다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신기한 무기입니다."

"그래."

세리에 역시 브리센과 플란츠를 함께 보지 않기 때문에 꺼낼 수 있는 험담이다. 때문에 플란츠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그냥 공감하기만 했다.

"이런 상태로도 검을 쓸 만한 방법을 알기 위해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맞아."

"알겠습니다. 다만 이것이 창과는 또 다르니, 활용할 길을 생각해 본 뒤에 저하께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자신의 창술을 가르쳐 주겠다는 허락이었다.

거절당할 것이 분명하다 생각해서 설득할 마음도 먹지 않고 왔었다. 칼리안이 대신 이야기하고 대신 거절당하는 것보단 직접 말하고 직접 거절당하는 것이 낫겠다 여겨서 함께 찾아왔을 뿐이었지 허락을 기대하고 온 걸음이 아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게 넘어갔다. 지나치게 빠른 허락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는데."

"혹시나 하여 말씀드리자면 저하라서 도와드리겠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공작의 정혼자인 칼리안 왕자님과 연이 있어 돕겠다 하는 것도 아니니 그 때문이라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럼. 왜."

허락을 해 줘도 이유를 묻는다.

누군가를 설득할 의지는 없는 것이 분명한데 궁금한 것을 묻어두는 성격도 아닌 듯 보여서 세리에가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지난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많은 이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 아닙니까. 그런 이들을 이끌어 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보람이 없는 법인데, 가문과 터전이 다르다 해서 아는 것을 숨기고 혼자 간직하며 세월을 보낼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본래에는 궁금한 것도 묻어두었을 것이 분명한 왕세자. 누군가에게 부탁이라는 것을 꺼내 보았을 리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굳이 이런 것을 입에 담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알 것 같아서, 세리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많이 바뀌셨습니다, 저하. 몇 년 전에 뵈었을 때와 같은 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 그렇게 보이나."

"네. 정말 많이 자라셨습니다. 이유는 제가 알 수 없겠습니다만."

가끔 시들긴 해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며 하루가 멀다 하고 칭찬을 듣는다. 한 때는 타인이었음이 분명한 그 동생 놈의 입으로 매일같이 듣고 있다. 그 말을 또 다른 이에게 들었다.

그렇게 자라는 이유.

그것이 동생 때문일지.

아니면 동생 덕분일지.

잠시 생각하던 플란츠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동생이 있어서."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말에 대한 답례라 하기엔 어렵겠으나 그렇게, 세리에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대답을 했다. 멀리 창 밖으로 들려오는 두 고양이의 예쁜 울음소리와 리리에의 예쁜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 * *

여덟 명의 영웅이 세상을 구했다.

머리맡에 앉은 어머니 혹은 할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에 들고 학원의 선생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배운다. 그렇게 자란 뒤에는 그 영웅들이 서로 싸움을 하면 누가 이겼을지, 그들 중 누가 가장 강했을지, 누구의 희생이 가장 비통했으며 누구의 결심이 가장 결정적이었을지를 안주 삼기도 하고 진중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자신들의 아이들, 또는 손주들의 머리맡에 앉아 그 낡은 이야기를 후손에게 돌려주며 늙어간다.

옛 이야기로, 역사로, 혹은 한낱 안주거리나 진중한 토론으로. 그 모든 방법으로 이어지는 말들의 종막엔 언제나 같은 결말이 따른다.

- 그들이 없었다면.

- 우리도 없었겠지.

그렇게 전해지는 이야기.

역사서로도, 입에서 입으로도, 한결같이 이어져 내려온 오랜 이야기. 듣고 말하기에 참 좋은 영웅들의 이야기.

지금을 사는 모두의 시작을 만들어 낸 전설같은 이야기. 전설이 된 이야기.

"시스파니안이 종적을 감춘 것 같습니다. 세크리티아의 왕위가 교체되기 얼마 전, 혹은 조금 뒤에요."

그 이야기가 묻히거나 변형되지 않은 채 이어질 수 있던 것은, 전설 속의 한 명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

지극히 위대한, 그리고 사려 깊은 시스파니안을 말함이다.

하츠아라가 죽고 몇 대를 지나게 된 이후부터는 사람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 없었으나 시스파니안은 분명 존재했다. 카이리스 왕가에 내려오는 용의 핏줄로도, 왕궁 곳곳에 남겨진 흔적으로도, 여전히 제 힘을 발하고 있는 여러 마법으로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실재함을 믿었고 따라서 그들의 이야기는 역사 속으로 흩어져 지워지지 않은 채 여전히 남아있었다. 잠든 세렌티를 대신할 마지막 구원의 끈인 것처럼 시스파니안을 높여 부르며 따르고 존경했다. 온갖 상점의 이름에 시스파니안을 가져다 두곤 친숙해하며 애정을 보냈다.

"혹시 축복이 사라진 겁니까."

"아닙니다. 얼마전에 플란츠 형님이 좀 다친 일도 있었고, 그 뒤로 저도 축복의 힘에 이상이 있는지 형님과 함께 확인을 해봤습니다만. 축복은 그대로였고 왕궁에 남겨진 시스파니안의 마법도 모두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시스파니안이 모으고 있던 물건 역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고룡의 부재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반드시 왔어야 할 곳에 오지 않았고, 늘 오던 곳에 오지 않고 있습니다."

나타나야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슬레이만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정도만으로는 사라졌다 보기에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또 다른 연유라도 있습니까."

고작 몇 개월.

인간에게는 길다면 길겠으나 천고를 산 시스파니안에게는 찰나와 같은 시간. 그러니 고작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하여 고룡의 부재를 의심하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것이 아닌가. 때문에 슬레이만은 칼리안과 마찬가지로 시스파니안이 사라졌다며 호들갑을 떠는 대신 판단의 근거를 물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근거는 불필요합니다."

시간의 축이니까.

시간의 축이 나타났다며 시스파니안을 불렀지 않나. 오지랖 넓은 책임감을 가진 그 고룡이, 저 스스로 만들어낸 뒤 '재앙'이라 일컬은 그 물건의 파편을 찾았다며 부르는 말을 무시할 리가 없다. 시스파니안은 그렇게 속 편하게 외면하며 살아오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니 시스파니안은 바닷속에 나타난 파편의 앞에 반드시 왔어야 했다. 자신이 만들어 둔 그 공동에 찾아왔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결코 시스파니안답지 않은 일이었다.

장담하듯 이야기한 칼리안이 잠시 슬레이만을 바라봤다. 이 땅의 역사가 이어지는 내내 시스파니안의 둥지를 지켜 온 가문의 주인은 칼리안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시간의 축이 무엇인지, 무슨 일이 있어 칼리안이 이 곳에서 두 번째 생을 이어나가고 있는지 모르는 이가 칼리안의 확신을 이해할 수는 없을 테니까.

때문에 칼리안은 잠시 고민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을 알려주어도 괜찮을지. 정확히는, 그 사실을 슬레이만에게 알려도 드미레아가 칼을 뽑지 않고 넘어가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

"······ 시간의 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그프리드 공."

그리고 마음을 정한 뒤 입을 열었다.

혹여 언젠가는 코끼리들의 검과 방패를 사용해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니까. 이 나라 이 왕궁의 형제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귀족들을 향해서가 아니라. 만들 일이 없었으면 하는 또 다른 한 번의 전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 그대들의 땅에 있는 시간의 축을 사용해야 한다. 반드시. 내가.

- 뭔 개소리야.

아. 물론 저렇게 답신을 하진 않았다.

혈기왕성한 시절을 다 보내고 난 뒤 우아한 언어생활을 향유하고 있던 당시의 베른이, 저런 의미를 아주 우아하게 포장한 곱디고운 답을 전했었다. 그저 답신에 숨겨진 의미를 아주 잘 파악한 완두콩이 곧바로 쳐들어왔을 뿐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베른의 답신이 아니라 그 플란츠가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못한 채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 아닌가. 발칸을 움직인 미친 왕은 앨런의 힘을 빌어 세크리티아로, 베른이 지키던 땅으로 순식간에 밀고 들어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수도로 진격해 그 길로 시간의 축을 향했다.

어쨌든 급박했다는 소리일 터다.

그러니 그 때가 다시 온다면,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면 설명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과거'에 벌어진 일에 대한 이야기를 슬레이만에게 미리 전했다.

뭐, 그냥 완두콩 말이 지금보다도 더 짧아서였을 수도 있고 르니에리 향에 취해 회생할 길 없이 완전히 시들어버린 완두콩이 베른보다 좀 더 미쳐 돌아버려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믿어줘야 그 때의 완두콩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미우니까. 아무튼.

"그 전쟁의 발단이 된 물건을 시스파니안께서 만들었고. 그것의 파편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일부가 또 하나 나타났는데 시스파니안께서는 부름에 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맞습니까."

"맞습니다."

"······ 허허."

전설보다도 더 전설같고 연극보다 더 연극같고 거짓보다 더 거짓같은, 하지만 이제는 사라진 시간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슬레이만은 그저 웃었다. 그러더니.

"세자 저하를 찾아가 절이라도 올려야 되겠습니다. 내 새끼 한 명을 또 잃었지 않고서야 제가 이 땅을 두고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 직접 나섰을 리가 없으니."

이런 대답을 했다.

잊혀진 시간이고 뭐고 시간의 축이고 뭐고.

슬레이만은 확실히 드미레아의 아버지였다. 그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들은 뒤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이 과거의 얀에 대한 일이었으니.

칼리안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그리하여 잊혀진 베른을 품은 채 적국의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칼리안의 정신머리는 과연 괜찮은지 아닌지.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슬레이만이 칼리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영지에는 제가 함께 가 드리면 되겠습니까."

"영지에 가실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둥지에 방문하는 것을 허락하는 내용이 담긴 서신 정도면 족합니다. 당장 둥지에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테니 공께서 나와 동행해주실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그렇다면······ 봄이 갈 때까지는 저도 그 아이와 조금 친해져 볼 생각으로 올라온 터라. 서신을 적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시스파니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슬레이만이 관여할 부분이 없었다.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의 앞에 다시 현신한다 해서 슬레이만까지 시스파니안을 만나볼 수 있는 것도 아닐 터였다. 그러니 멍멍이 얀까지 데리고 리리에를 보기 위해 카이리시스에 온 슬레이만이 공작령에 함께 돌아가 줄 필요는 없었다.

곧바로 서재로 돌아가 몇 줄의 내용을 적어 낸 슬레이만이, 자신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칼리안에게 건네며 말했다.

"모쪼록 이번에는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길 바랍니다. 칼리안 왕자님."

전쟁을 말함이 아니다.

얀에 대한 일을 다시 부탁하는 것이다. 다른 이 말고 '칼리안'에게.

칼리안이 평소 잘 보이지 않던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나'에게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겠으나······ 사실을 알게 되든 영원히 모르고 지나가든. 얀은 괜찮을 겁니다. 내가 있을 테니."

비록 아버지라 하나 그것은 슬레이만도 어찌 해줄 수 없을 일이 아닌가. 오로지 칼리안만이 지금의 얀을 계속 세워둘 수 있음을 슬레이만 만큼이나 칼리안도 잘 알았다.

"부탁합니다."

"네."

부탁 하나를 허락받은 플란츠. 그리고 부탁 하나를 전하고 다른 하나를 전해 받은 칼리안.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각자의 일을 해결하고 함께 궁에 돌아왔다. 그리고 칼리안은 다른 모든 일을 전부 다 미뤄둔 채 다시 왕궁을 나섰다.

이번에는 드미레아에게 미리 사정을 설명하고 남은 대련을 며칠 뒤로 미루는 것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챙겼다.

왕궁에는 앨런이 있고 르메인이 있고 발칸과 지그프리드가 있다. 때문에 고작 며칠동안 다시 자리를 비운다 해도 왕궁에 문제가 생기진 않을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았다. 만약 일이 틀어진다 하더라도 시스파니안에 대한 것을 가장 먼저 챙겨야 함은 당연하니까. 시스파니안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다면 왕궁이고 뭐고 대륙이 흔들릴 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렇게 칼리안은 지그프리드령으로, 지그프리드의 시트렌 시를 지나 공작저로, 그 뒤의 바위산으로. 바쁘게 움직였다. 물론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도 자신의 위치를 망각했음이 분명한 완두콩도 데굴데굴, 함께였다.

- 걱정을 하였느냐. 네가.

그리고 만났다.

비로소 다시 만났다.

"그래서 왔습니다. 제가."

칼리안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거대한 성보다 거대하고 웅장한 산보다 웅장하며 드높은 하늘보다 드높은 검은 용을 앞에 둔 채로.

그 품에 안긴 투명한 빛의 거대한 알.

그 속에 웅크린 붉은 새의 모습을 보게 된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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