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장. 둥지(1)
널찍한 공동 안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울렸다.
"폰, d3."
"나이트, c5."
가는 미성이 들려오자, 낮은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뒤를 잇는다.
"나이트, e5. 폰 잡았는데."
"네. 압니다. 나이트, e7으로."
"반말. 퀸, f3."
"지금은 봐주시면 안 됩니까. 폰, f6로. 요."
체스를 두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시스파니안을 기다리고 있다 하면 맞을 것이다. 드넓은 공동 안에서, 바로 전날에 팔에 박힌 유리조각 빼낸 플란츠를 데리고 대련을 할 수도 없고 벽면이 전부 다 유적인 곳에서 마법 서툰 플란츠에게 마법을 가르쳐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시시콜콜한 수다나 떨 사이도 아니지 않나.
멀뚱히 서 있느니 게임이나 해야지.
"그럼 저는······."
그렇게 시작된 체스 게임.
몇 차례의 수가 오간 뒤, 잠시 다음을 고민하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퀸 d1으로 갈게요. 룩 잡았습니다."
"후회할텐데."
곧바로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간다.
"······ 아."
다시 한 번 체스판을 신중히 떠올려보던 칼리안이 난색을 표했다. 그러더니 생글생글 참 예쁘게 웃으며 플란츠를 쳐다봤다.
"체스판도 없이 하느라 잠깐 실수한건데, 물러주시면 안 됩니까."
"안돼."
"이미 두 번 이기셨잖습니까. 한 수만요."
"싫어."
안 통한다.
세상에 둘도 없이 어여쁜 웃음을 지어보인다 한들 씨알도 안 먹힐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안 통한다. 이럴 때 찔러보면 파란 피가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쩐지 눈에 띄게 파릇파릇하더라니.
"룩, d1. 퀸 잡았고. 체크."
플란츠가 기어코 칼리안의 퀸을 잡아갔다.
"······ 아무튼 내 형님께서는 어찌나 매정하신지."
"짖지 말고. 다음."
'어쨌거나 물러 줄 생각 없으니 그만 툴툴대고 다음 수나 놓으라'는 말에, 퀸을 빼앗긴 뒤 머릿속의 체스판을 잠시 이리저리 살펴가며 생각을 해 보던 칼리안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킹을 살릴 방도가 없어졌음을 깨닫고 입을 열었다.
"졌습니다."
칼리안도 체스를 못 두진 않았다.
오히려 잘 두는 편이었다. 체이스와 두었을 땐 곧잘 이겼었고 앨런에게는 진 적이 없었다. 물론 아들 이겨먹을 생각이 없는 앨런이 가끔은 모르는 척 져 주기도 하고 또 어느 날에는 한 두 수를 물러주기도 해서 나온 승률임을 알았으나 아무튼 이긴 건 이긴 거니까.
어쨌든. 이번에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계속 지기만 한 이유는 칼리안이 체스를 못 두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가 플란츠라서다. 정말로.
"형님 체스 안 즐기신다더니 완전히 속았습니다."
"체스 선생 말고 다른 사람 상대해 본 적 없는 것 맞는데."
"네. 그러셨겠죠. 워낙 똑똑하셔서 그냥 배워두기만 해도 질 일이 없으시겠죠."
플란츠는 체스를 즐겨하진 않았고 다른 이들과 둔 적도 없었다 했다. 체스 선생과 몇 번을 두고 책을 좀 봤다 하기에 그 정도면 만만하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세 번을 두었고 전부 다 졌다.
애초부터 저 완두콩을 상대로 체스를 두겠다 생각한 것이 잘못임을 거듭 깨달은 칼리안이 툴툴거리기를 그만두고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한 뒤 물었다.
"시스파니안이 너무 안 오시는데. 한 판 더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돌아갈까요."
"가."
"네."
뭐. 오지 않을 수도 있지.
공동에서 부르면 오겠노라, 칼리안이 찾으면 반드시 화답하겠노라 약속 한 것도 아니었으니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으면 오지 않을 수도 있지. 세렌티가 없는 만큼 바쁘기도 할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형님."
"왜."
"내기에서는 다 져 주시면서 왜 게임이나 대련에서는 안 지려고 하십니까."
"왜."
"그냥. 세상살이에 욕심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서요."
"왜."
"고양이 두 마리만 있으면 세상에 더 바랄 것 없다는 듯이 굴기도 하고 다누 뿌리를 잘라낸 일을 가지고 사냥에서 제가 이긴 셈이니 소원 들어달라 할 때에는 또 순하게 알았다 하시면서, 이런 것은 절대로 안 져 주시니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도통 속에 뭐가 들었나 알 수가 없는데요."
잠시 설명하자면 처음의 '왜'는 왜 부르냐는 뜻이고, 두 번째 '왜'는 그게 왜 궁금하냐는 뜻이고, 세 번째 '왜'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물론 칼리안이 그렇게 알아들었다는 의미다.
플란츠는 높낮이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나온 세 번의 대꾸를 완벽하게 알아듣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칼리안을 잠깐 보다 피식 웃었다. 그리고 대답을 전했다.
"어쩌다보니."
"······ 네."
더 할 말이 없어진 칼리안이 그냥 고개만 주억거렸다.
"아무튼 내일은 제가 혼자 와 보겠습니다."
"알았어."
"혹시나 형님 있어서 안 찾아온 것은 아닌가 생각하다가 또 시들시들해지지 마시고요."
"······ 내 아우님께서 웃기지도 않을 것으로 나를 부르는 일에 재미가 드시더니. 이제는 나를 아예 한 명이 아니라 한 포기로 보고 계시나본데."
"그래도 저를 한 마리로 보시는 형님보다는 형님을 한 포기로 보는 제가 낫지 않습니까."
한 마리나 한 포기나.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완두콩 완두콩 노래를 부르더니 이상한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한 마디를 했다가 본전도 못 찾은 플란츠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한 마리로 보는 것이 맞긴 맞았으니까. 그것을 본 칼리안이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제 말은, 형님 때문에 시스파니안이 안 오는 것은 아닐 테니까 신경쓰지 마시라는 겁니다."
"맞다고 해도, 신경 안 써."
"자책하는 버릇은 이제 싹 버리신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하루가 다르게 참 잘 크고 계셔서 형님 볼 때마다 제가 정말 뿌듯합니다."
그래. 짖어라.
안 무는 게 어디냐.
반쯤 포기 상태가 되기도 했고 아무튼 잘 크고 있단 말이 험담은 아니어서, 플란츠는 그냥 낮은 한숨만 한 번 쉬곤 공동 밖으로 나갔다. 작은 웃음 소리를 낸 칼리안이 잠시 공동 안을 둘러봤다. 혹시나 플란츠가 나간 뒤 시스파니안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여 취한 행동이었으나 시스파니안은 오지 않았다.
결국은 터덜터덜, 온 길을 되짚어 체르밀 궁으로 돌아왔다.
"그럼 쉬십시오."
"알았어."
"전하께 욕하는 꿈 꾸지 마시고요."
"······ 알았어."
"란델 형님이랑 싸우는 꿈도 꾸지 마시고요."
"너. 자꾸."
"형님 동생 한 마리 그만 짖고 이만 갑니다."
예를 올린 칼리안이 계단 끄트머리에 플란츠를 남겨놓고 제 방으로 쏙 들어갔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한 채였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시스파니안이 오지 않는 이유보다는, 특별히 욕심도 없고 내기에 이겨서 득 볼 생각도 없는 플란츠가 승부에서만은 절대 안 지려고 드는 까닭이 더 궁금했던 것이 맞다. 시스파니안이 오지 않았다는 문제보다는 그것에 플란츠가 또 신경을 쓸까 걱정했던 것이 맞다.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불안한 것보다 란델과 르메인에게 마음을 쓰던 미련한 완두콩이 꿈에서라도 기어코 옛 칼리안까지 만나려 들까 우려하고, 떠올리고 입에 담고 마주친 것에서 모자라 입에 넣기까지 한 장미 때문에 혹시나 또 르니에리 향을 맡을까봐 평소보다 더 열심히 짖은 것이 맞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지그프리드 공작 부부와 시오나 힐이 어제 저녁에 수도에 도착했다 합니다, 왕자님."
"······ 그래."
그러나 시스파니안은 칼리안이 혼자 찾아갔을 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주일이 더 지나 슬레이만과 세리에 부부가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까지도, 고룡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의 축의 파편을 모으고 있다던 시스파니안.
비록 의지였다지만 앨런과 아델리아의 싸움을 말리러 찾아올 정도였던 시스파니안이 바다 한 가운데 나타난 파편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음을, 그것을 아르나이젤이 멋대로 써먹는 것을 반겨할 리도 없었음을, 그러니 그것을 아르나이젤이 가지고 놀도록 그냥 둔 것부터 이미 이상한 일이었음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오늘 바로 공작저로 찾아가도 되는지 일정 확인해줘, 얀."
"왕자님께서 직접 가시려고요?"
"응."
"네. 알겠습니다."
상황이 석연치 않음을 안 칼리안이 눈을 내리떴다.
* * *
초록색이라 그런가.
"애오옹! 애옹!"
"니아오옹······!"
그나마 히나는 곧잘 따른다. 그러나 플란츠와 히나 외의 사람, 칼리안을 포함한 모든 두 발 달린 사람을 전부 다 간식 보관통 정도로 여기는 루시와 안네가 작은 손바닥 아래 몸을 맡기곤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그 작은 손의 주인, 리리에.
고양이를 보러 오라 했는데도 리리에는 찾아오질 않았다.
왜 함께 오지 않는 것인지 드미레아에게 이유를 물어보고 싶었으나 드미레아는 늘 칼리안만 만나고 돌아갔던 터라 딱히 기회가 없었다. 그렇다고 칼리안에게 그것을 물어봐 달라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여전히 엄청난 양의 식사를 잘 마친 칼리안은 슬레이만과 세리에를 만나 부탁할 것이 있으니 오늘은 키리에와 수련을 하시라 말을 했었다.
슬레이만에게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인지, 세리에에게는 또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눈치 못 챌 플란츠가 아니지 않나. 그래서 칼리안의 일은 칼리안이 알아서 하고 자신의 일은 세리에에게 직접 말을 하겠노라 했었다. 결국 이번에도 따라왔다는 소리다. 리리에에게 보여 줄 고양이까지 데리고.
"애옹, 므에옹."
"냐옹. 니아옹."
왕궁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잠깐이니까. 두 고양이에게 오늘 외출하는 이유를 최선을 다해 열심히 설명해준 뒤에 함께 나왔다.
아무튼.
그렇게 나온 고양이들은 낯선 기색도 없이 리리에를 졸졸 따라가더니 온갖 애교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깊이 고민을 하고 있었다.
고양이가 초록색을 좋아하나.
그런 거면 히나는 왜 좋아하지, 라고.
"오랜만이군. 둘째 왕자."
"······ 세자."
"그새 바뀌었던가?"
"바뀌었어."
"그래. 오랜만이군, 카이리스의 왕세자."
그런 고민을 하며 리리에를 지켜보고 있으려니, 누군가 플란츠를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기다리고 있던 세리에가 아니라 이곳에 돌아온 또 다른 사람. 소드마스터 시오나였다.
- 딸랑.
익숙한 방울 소리.
칼리안도 플란츠도 숱하게 듣게 되었던 그 방울 소리가 시오나의 검 끝에서 울렸다.
저도 모르게 그 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시오나의 말이 들려왔다.
"그 새 키가 컸군. 인간들은 자람이 빨라."
"어쩌다보니."
피식 웃은 시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고양이에 둘러쌓여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리리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수련을 조금 미뤄주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어머니의 가문에서 당신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우두커니 앉아 리리에의 손 끝을 바라보고 있던 플란츠의 목소리. 그 낮은 목소리가 시오나의 발을 붙들었다.
우뚝 멈춘 자신의 발을, 평생을 간직한 방울을, 결국 뽑지 못했던 검의 손잡이를, 검을 들지 못했던 손을, 그렇게 한참동안 바라보던 시오나가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아는 척 해서 달라질 것 없지 않나."
"칼을 겨누지 않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리리에에게."
그리고 그런 시오나를 똑바로 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 그리고 나에게도."
잠시 숨을 쉬듯 멈추었다 이어진 말.
그 말에 시오나의 귀가 살짝 움직였다. 귀 끝에 매달린 은빛 피어싱이 햇빛에 반짝였다.
자신의 손과 검의 손잡이, 방울. 그것을 향해 다시 시선을 내린 시오나가 입을 열었다.
"고맙기는."
그리고는 뚜벅뚜벅.
리리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소문이 돌았다.
플란츠 왕자가 세자위를 얻은 뒤 칼리안 왕자의 발이 바빠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지그프리드의 소공작을 만나고 공작저에 드나든다. 라고.
나는 그냥 내 정혼자랑 정답게 칼도 맞대고 그러다 서로를 향해 꾸밈없는 살기도 주고 받고 오늘은 어디 들킨 곳 없는지 검사도 받고 설탕과자도 얻어먹고 고기도 사 주면서 평화롭게 지냈을 뿐인데 어느새 둘째 형님이 카밀론 가기 전에 그 자리 되찾아오려 무던히도 애쓰고 있는 셋째 왕자가 되어 있었다.
안 그래도 이상한 소문이 날까 신경이 쓰여, 카이리스로 온 뒤로 빌헬름 관에도 안 가고 마법사 협회장 에우리아는 물론 폴룬 상단의 상단주 멜피르조차 만나지 않았다. 심지어 앨런과 따로이 만나는 것에도 발을 아꼈다. 레릭에게 한가해보인다는 평가까지 들어가며 신경을 쓴 보람도 없게 되어버린 칼리안이 실소하며 혼잣말을 했다.
"나 형님이랑 사이 안 나쁘다고 몇 번을 말해야 제대로 알아듣는거야, 대체."
카이리스를 떠나기 전에는 예쁘고 깜찍한 검은 고양이 브로치도 달아 드리고 세크리티아에 다녀온 뒤에는 너 이 자식 왜 우리 형님한테 인사 안하냐며 그레이의 허리도 착착 접어줬지 않나. 그 후로도 공식 석상에 몇 번이고 같이 입장을 했다.
그렇게 열심히 둘 사이가 상당히 좋다는 것을, 그리고 플란츠가 세자위를 얻은 것에 일말의 불만도 없음을 제대로 보여줬는데도 그것을 의심하는 눈길이 다시 슬금슬금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브리센 후작이겠죠. 또."
결국 칼리안과 플란츠의 사이를 벌려두어 가장 큰 이득을 볼 사람은 그레이 브리센 뿐이다. 플란츠를 고립시킬 생각이든 칼리안을 꿍꿍이 가득한 속 시커먼 왕자로 만들어 둘 생각이든. 지금 그나마 가까이 지내고 있는 란델에게 큰 이득이 될 테니까.
"브리센 후작과 절친한 사이라는 리브렛 변경백의 영애와 란델 왕자의 정혼 이야기가 오간다 하던데, 혹시 그 이야기도 들으셨습니까?"
"아뇨. 전하께서는 여전히 고민만 하고 계시고 란델 형님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상황에 정혼같은 걸 하진 않으실 것 같습니다만. 그런 소문이 돕니까."
아스트리샤 거리만큼이나 온갖 귀족이 모여드는 휴양지, 슈린츠. 그곳에서 지내다 보니 왕궁 사정에 일말의 관심도 없는 슬레이만에게까지 귀족들의 소문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게다가 정혼이 이뤄진다 해도 브리센과 연이 닿은 가문쪽을 선택하실 전하와 형님은 아닌데요."
"네. 그런데도 정혼이 기정 사실화 되어 있다 하기에 저도 참 이상하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전하께서 그런 소문을 모르시는 것인지도 의문이 들었고 말입니다."
최근 르메인이 겪은 일들을 떠올려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전하께서도 소식을 전해듣는 귀는 있으니 모르고 계시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란델 형님을 만나질 못하고 계셔서 대응이 늦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어쨌거나 란델 형님의 의견 없이 결정하실 전하는 아니니, 그 일에 대해서는 저도 한 번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슬레이만이 한 모금을 마신 붉은 와인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게다가, 또 듣자 하니 왕세자 저하께서도 대단한 정혼자를 맞이하신 듯 한데."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리안의 입이 다시 열렸다.
"공께서 왕실의 일에 귀를 열어두실 일은 없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호기심을 보이실 만큼이 되었습니까."
"소공작이 왕자님과 정혼을 하고 나니 자연스레 귀가 열리지 뭡니까."
"······ 그렇습니까."
- 톡.
찻잔 손잡이를 살짝 건드린 칼리안이 옅은 녹빛의 찻물 속에 인 파문을 잠시 지켜봤다. 그러다 붉은 눈을 들어 슬레이만을 깊이 응시했다.
"내가 여전히 공의 그늘에 등을 맡기고 있는 입장이니 공의 눈과 귀가 왕궁으로 향하는 것 까지는 관여하지 못합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왕자님들 일에 참견할 생각 말라는 말은 소공작에게 이미 들었으니 다시 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들려온 소식을 전할 뿐이니 당장 파혼부터 해 버릴 생각도 않으셔도 됩니다. 소공작이 뜻대로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까지 잃고 싶진 않으니 말입니다."
혹시나 코끼리의 거대한 눈과 귀가 더 거대할 것이 분명한 입과 손으로 번져나가지 않도록. 칼리안을 돕겠다는 드미레아의 뜻을 오해한 슬레이만이 란델 혹은 플란츠를 향해 섣부르게 나서지 않도록.
만약 코끼리들이 나서려는 기색이 있다면 당장 파혼하겠노라는 말을 막은 슬레이만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그렸다. 어떻게든 코끼리들의 등에 오를 생각을 했던 먼 오랜 날의 친우와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왕자를 보면서.
"이미 말을 했던 것 같지만. 내가 공에게는 항상 이런 모습부터 보이는 것 같습니다. 혹여 공의 마음이 상할 말이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서로 지닌 바가 많을 뿐이니 마음 상할 것이 있겠습니까. 됐습니다."
칼리안의 도움 요청에 거절부터 하고, 슬레이만의 관심에 의심부터 하는 것.
서로에 대한 호감만큼이나 가진 것도 많고 지킬 것도 많아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 아니던가.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칼리안의 경고와 사과를 들어 넘긴 슬레이만이 응접실 밖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세리에를 만나겠다 하셨다더니. 왜 저부터 찾아오셨습니까."
세리에를 만나 플란츠에게 창술 가르쳐주는 것을 도와줄 수 있을지 부탁하려던 생각도 미루고 시오나에게 키리에와 히나를 만나볼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려던 것도 미루고 관심 없던 슬레이만을 찾아왔기에 하는 말이었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찻잔을 톡톡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 둥지. 시스파니안의 둥지 말입니다, 지그프리드 공."
"네. 말씀 하십시오."
"아무래도 그 곳에 가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괜한 불안이 들어서."
로젤리타 기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굳게 닫힌 곳. 그 곳에 두 번을 찾아간 카이리스의 혈통은 없었다.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찾아왔다 하더라도 방문을 허락받은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것을 모를 리 없을 칼리안의 말.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소리를 할 리 없을 사람이 꺼낸 말에, 슬레이만이 작은 침음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