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장. 희고 붉은 그 장미가(6)
잘못임을 알고 있었노라 하면 답이 될까.
눈을 돌렸던 이유를 설명하면 답이 될까.
이제는 절대로 그리 하지 않겠노라 하면.
답이 될까.
조용히 해라 나서지 마라 함부로 손을 내밀지도 마라, 무슨 말을 하든 이미 전부 다 가시일 뿐이니 그냥 입 다물고 곁에서 지켜보는 것부터 해라. 바라보는 시선조차 가시가 되지 않도록 언제나 그저 조심하고 또 조심해라.
앨런은 그렇게 주의를 주었었는데.
'아버지.'
이미 잔뜩 멍든 말.
말에 든 멍이 이미 한가득이라.
대답을 해도 괜찮을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보듬고 도닥여도 아플 말에는 무슨 답을 주어야 하는지. 그것까지 가르쳐주진 않았어서.
부족한 아비는 그런 것도 몰라서.
"내가······."
열린 입에서 목소리가 쉬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르메인이 손을 뻗어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가시같은 솔잎이 든 그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난 뒤 애써 조용히 찻잔을 내려놨다.
잘못했단 이야기를 아들에게 처음 들어 놀란 것인지. 아버지란 말을 아들에게 처음 들어 놀란 것인지. 그에 앞서 정말로 놀란 것이 맞기는 할지.
다른, 까닭이, 있을지.
가늠할 도리 없는 이유 때문에 찻잔을 든 손끝이 하릴없이 떨려와서.
"······ 내가."
잔뜩 힘을 주었는데도 결국 조금 쏟아진 찻물이 테이블의 하얀 보를 녹빛으로 물들였다.
누군가의 앞에서 차를 쏟는 것을 처음 보았다. 말을 잇지 못하는 것도 처음 보았다. 이런 르메인의 낯선 모습을 담담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지켜보던 플란츠가 비슷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제 말이 과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 아니다. 과한 것이 아니라 과분하여서."
알고 있는 단어들을 죄 꺼내보며 대답할 말을 찾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그 답이 하필 오래전의 플란츠가 했던 말과 참 많이 닮았음을 알 리 없을 사람이 그렇게 대답을 했다. 고맙다도 아니고 미안하다도 아니고, 결국은 제 아들과 별 수 없이 닮은 사람임을 알려 줄 뿐인 그런 대답을 하고 말았다.
"네."
그래.
닮았다.
결국은 외면한 것도 닮았고 그것이 답이라 여긴 것도 닮았고 사실은 오답인 줄 몰랐던 것도 닮았다. 르메인은 그런 방법만 보여줬고 란델과 플란츠는 그런 방법만 보고 배웠으니, 결국 르메인을 보고 닮아가며 자라 서로 닮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닮았다.
똑똑한 플란츠는 그 닮음을 잘 알아봤다.
이제 와 현실을 보게 된 것도, 너무 많이 늦어버렸음을 깨달은 것도, 과분한 말에 대해 고마움은 커녕 사과 한 마디조차 차마 쉬이 꺼내지 못하는 것도. 그 모든 면을 전부 다 쏙 빼어 닮아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 이만 일어나겠노라고.
말로 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아들었다고.
자신은 하고 싶은 말을 다 전했고 르메인이 말로 꺼내지 못한 사과와 후회와 앞으로의 다짐을 전부 다 빠짐없이 잘 알아들었으니 이만 일어나겠노라고. 그렇게 말하려 했다.
"잊어버리지 않으마."
그런데 르메인의 대답이 돌아왔다.
얼결에 나온 말 말고, 고르고 골라낸 말. 소같은 사람이 제 나름대로 정말 열심히 가시를 골라내고 남긴 말. 그것이 플란츠에게.
전해졌다.
"내가 한 잘못들도, 네가 오늘 해 준 말들도, 전부 다 잊지 않으마. 매일 생각하고 너희들을 볼 때마다 되새기면서 그리 지내마."
그 말이 정답이 맞을지 알 수는 없겠으나. 말을 전했다.
하고 싶은 말들을 어떻게 다 입 밖으로 꺼낼 수 있겠냐만은.
거창한 여러 마디 말보다 이제는 그저 묵묵히 보여주는 행동이 더 낫다는 것을 설마 아직도 모르겠냐만은.
"내가 잘못했다. 정말 많이 잘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미안하다. 상처를 주어서. 바라봐주지 못해 미안하다. 내가 정말 미안하구나. 내가 너를 세상에 내어 놓고 혼자 두어서."
전해주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다 자라도록 혼자 두어서······ 미안하다."
용서는, 아직 요원한 일이겠지만.
다 곪아 해진 상처가 아물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플란츠."
"······ 네."
사과를 했다.
사과를 받았다.
* * *
- 탁, 탁!
털 먼지도 없건만 두 손바닥을 맞부딪혀가며 털어낸 칼리안이 뿌듯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누가 보면 방금전에 마왕이라도 혼자 잡은 듯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돌렸다.
"어떻습니까."
"무의미하구나."
칼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고생했다는 말이라도 해주시면 안 됩니까."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만."
"어려움이 아니라 정성을 봐주셔야죠. 시종들도 다 물리고 직접 이렇게 손을 써드렸지 않습니까."
지어진 이래로 체르밀 궁의 창문이 깨진 적이 참 드문 탓에 미리 만들어두질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웬 놈이 제 형에게 '저 정원에 핀 것이 장미가 맞느냐' 물어보겠다며 시스파니안이 마법을 걸어 둔 창문을 깨뜨려버릴 수도 있겠다는 예상을 대체 누가 어떻게 하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넓고 두껍고 투명하며 아름다운 세공까지 되어있는 멋진 유리를 먼저 만든 뒤 마법까지 걸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달아 둘 수 있을 그 창의 여분이 없는 것은 체르밀 궁의 관리 담당자가 잘못하거나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절대 아니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저 때문에 없어진 창문이니까 알아서 책임지고 막아드린 겁니다. 착하고 기특하게."
덕분에 칼리안이 이렇게 책임을 지러 다시 올라온 참이다.
새로 바뀐 목욕 담당 시종이 자신에게 충분한 이해를 구하지 않고 솔을 가져다 댔다는 이유로 그 담당자 엉덩이에 편자 모양의 피멍 하나를 만들어 준 레이븐을 대신해 치료비와 위로금을 전해주었던 것과 같은 이치랄까.
아무튼 뭐 그런 거다.
"네가 직접 했다는 것이 그리 큰 의미가 있는 일이더냐."
"그럼요. 저도 란델 형님처럼 곱게 자란 자식인데요."
조금 전.
다디단 라벤더 향 설탕과자를 잘 얻어먹고 왕궁에 가져 올 설탕과자를 또 조금 사고 바넨샤에 들러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체인 갑옷을 추천했다가 파혼당할 뻔한 칼리안은, 그보다 조금 더 투박하지만 드미레아의 검술에 조금도 방해되지 않을 좋은 재질과 형태의 갑옷 맞추는 것을 잘 도와줬다. 그리고 아스트리샤 거리의 적당한 식당을 찾아 3인분의 식사를 말끔하게 해치우고는 드미레아를 공작저에 데려다주는 개인 사정 가득한 용무를 모두 훌륭히 마친 이후에 팔랑팔랑 가벼워진 걸음으로 왕궁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칼리안이 자리를 비운 사이 찾아 온 르메인이 플란츠와 대화를 나누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르메인이 왔다 가는 내내 란델은 여전히 5층에 콕 박혀있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렸다.
'바람이 불어서 란델 형님이 아프시다 했다고?'
'네. 급한대로 다른 창을 먼저 끼워드리겠다 해도 그냥 두라 하셨다더니 그 사이에 감기라도 걸리셨나 보더라고요. 아무래도 왕자님이나 세자 저하보다는 몸이 많이 약하실 테니까요.'
순진한 새끼 코끼리는 그 말을 믿는 모양이다.
5층에 아주 그냥 뿌리를 내린 듯한 그 분이, 다 익으려면 까마득한 어린 호박의 속껍데기보다 몇 배는 파릇한 것 같은 그 어느 분보다 더 훌륭하게 무병장수하실 거라는 말을 꾹 참은 칼리안은 그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고로 자라나는 아이들의 환상 가득한 착각은 함부로 깨는 것이 아니라 했으니까.
대신 그 길로 자신의 길고 거대한 검은 로브를 집어들고 5층에 올라갔다. 그 뒤에는 방수와 방풍 마법 정도는 기본으로 걸려 있는 그 로브를 아낌없이 투자해 란델의 창을 막았다. 암흑 한 줌을 떼어 만든 것 같은 시커먼 로브를 활짝 펼쳐 허전한 창문 자리에 대충대충 덧댔다는 소리다. 예쁘게 덧대어 줄 만큼 솜씨가 세심하진 않았으니까.
느닷없는 시커먼 천.
방의 커튼과 벽지, 바닥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두껍고 칙칙한 천으로 막아진 창을 본 란델이 입을 열었다.
"보기에 좋지 않구나."
"도로 아픈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도로 아픈 것이 나을 듯 하다만."
"아닙니다. 오래오래 사셔야죠. 건강하게."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첫째 형님께 무병장수를 기원해 준 칼리안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 꼴을 보던 란델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를 냈다.
"괜한 일을 하는구나."
"괜한 일 같습니까."
"기껏 열어두고 간 창을 도로 막았으니."
"힘들게 열린 창인 것은 아시네요."
"내가 그것을 모르겠느냐."
"다행입니다. 그나마는 아신다 하니."
살짝 고개를 끄덕인 란델이 칼리안의 눈을 깊이 응시했다.
"나를 대하는 네 태도가 달라졌구나."
"그렇습니까."
"나를 향해 세우던 날이 무뎌진 듯 보이는데."
"날을 세워 숨길 것이 이제 없으니 마음이 편해졌나 보네요."
"그것이 편하더냐."
"태도 달라진 것은 알아보시면서 빈 말인 것은 못 알아보십니까."
사실은 불편하다.
옛 칼리안이 어찌 되었는지 잘 알게 되었음에도 그것을 인정하거나 지금의 칼리안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도 못할 사람을 하루만에 다시 보러 왔으니 편할 리가 없었다.
란델에게도 이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사실은 괜찮지 않을 것이라고.
"편하지는 않고 억울하기는 합니다. 그래서 무뎌졌나 봅니다."
"무엇이 억울하더냐."
"사과 못받아도 괜찮다 했고 멀쩡하게 눈 뜨고 숨쉬는 사람을 두고 없는 취급 하시려는 것도 괜찮다 말씀을 드렸는데. 힘들게 깨진 창을 핑계로 또 숨으려 하시기에."
란델이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아무 차도 놓여있지 않은 빈 테이블을 스치듯 바라본 칼리안이 말했다.
"형님이 깨뜨리고 간 그 창문 제가 다시 제 손으로 막아드렸으니 형님 때문에 아프다 핑계 대지는 마시라고. 창문 깨진 건 형님 탓 아니니까. 그 말씀을 한번 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올라왔습니다."
"둘째에 대한 네 걱정이 극진하구나."
"뿐만 아니라 란델 형님도 극진하게 걱정하고는 있습니다. 모르시는 것 같지만."
"기억해두마."
"네."
할 말 마친 칼리안이 품 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손을 넣었다. 그 속에서 빨간색의 작은 종이 봉투 하나를 찾아들곤 테이블에 올려놨다.
"무엇이더냐."
"설탕과자입니다. 장미 향이 나는 것이 있기에, 란델 형님 드리려고 사 왔습니다. 새로 드리는 생일 선물인 셈 쳐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단 것 싫어한다만."
"가려서야 되겠습니까. 저도 자몽 싫어합니다."
모래 씹히는 목소리로 다디단 과자를 선물한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새로운 생일 선물을 거절할 틈도 없이 예를 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붉은 빛 도는 종이 상자를 한동안 쳐다보던 란델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쓰지 못할 생일 선물 대신 전해진 장미 향 설탕과자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달다.
장미 향은 나지 않는다.
대신 다른 맛이 났다.
진한 딸기 맛이 났다.
우리 히나 주겠다며 함께 샀던 딸기 맛 설탕과자 봉지도 빨간색이었던 탓에. 이번에도 세심하지 못한 칼리안이 란델에게 딸기 맛을 선물로 주고 갔다.
"······ 덴."
"네. 왕자님. 부르셨습니까."
"차를."
"네. 곧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입가에 남은 딸기 맛 때문에, 그 단 맛 때문에, 란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인상을 찌푸렸다.
딸기 맛 지워 줄 차를 가지러 가는 시종의 발걸음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란델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디단 설탕과자 하나를 더 입에 넣은 뒤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다시 먹어보아도 그건 분명 딸기 맛이 맞았다.
딸기 맛이었다.
"······ 장미라더니."
란델이 아는 칼리안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실수를 해놓고 신나게 내려가버린 놈.
딸기 맛과 장미 향도 구분 못하는 그 놈이 볼품없이 붙여두고 간 저 검은 천은 그냥 도로 떼버려야 되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 * *
사고는 완두콩이 치는데.
이상하게 내가 바쁘다.
왜지.
곰곰히 생각하던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님."
"왜."
혹시 또 다른 사고 치실 생각 있으면 미리 얘기 좀 해 달라고. 이러다 나 정말 늙겠다고.
그런 말을 하고는 싶은데 못 하겠어서 그냥 다시 웃어버렸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 덮어 둔 채로 다른 말을 꺼냈다.
"시스파니안 만나러 갈까 하는데."
"이제야."
"네."
시간의 축 조각을 해룡 아르나이젤이 가지고 있다는 말. 시스파니안에게 그 말을 전해주어야 했다. 어쩌면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이야기였으나 다른 일들에 밀려 이제야 가게 되었다.
"같이 가시죠."
"알았어."
같이 가자 말 안 해도 분명 또 데굴데굴 따라 올 사람이라서 아예 그냥 같이 길을 나섰다.
멀리 장미 정원이 보이는 인공호수를 지나고 체르밀 궁을 벗어나 분수 정원을 가로질렀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다른 말을 더 꺼내진 않았다. 꺼낼만한 말이 없어서였다.
"전하께. 그동안 잘못하셨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데 한참만에 플란츠가 이런 말을 꺼냈다.
걷고 있던 그대로, 좋은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분수 쪽에 시선을 둔 그대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러셨습니까."
"그래."
르메인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안 봐도 뻔하다.
르메인이라면 어떻게 대답했을지, 이미 잘 안다.
그래서 굳이 묻지 않고 그냥 잘했다고만 말했다. 어차피 둘 사이의 일을 알려 주기에도 어려울 테니까.
"고생하셨습니다."
사과 받겠다던 일.
그것이 칼리안 자신과 관련된 일이었는지.
칼리안의 질문 하나를 받고 난 뒤에 창문을 깨뜨려가며 란델을 만나더니, 그 김에 르메인에게까지 이야기를 했다. 결국 발단을 제공한 셈이 된 칼리안은 다른 얘기 없이 고생했다는 말만 했다.
"아시게 되면."
분수 정원을 다 지나칠 즈음, 플란츠가 이렇게 입을 뗐다.
"보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보셔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질 않으셔서."
"란델 형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 모든 사람이 다 형님같지는 않습니다. 사실을 알았다 해서 모두가 다 형님처럼 새 자리를 만들어 거기에 저를 두고 잘 보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무조건 저만 걱정하고 모든 일을 저에게 배려해주던 스승님같은 분도 계시고, 아리안느처럼 저를 온전히 믿어주지 못하기도 하고,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저보다는 얀을 더 걱정했던 드미레아같이 반응하기도 하고.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 안 쓰는 지그프리드 공도 있고요. 때로는 다시 외면해버리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다 각자 나름대로의 반응을 보일 수밖에요."
플란츠는 조용히 걸음만 옮겼다.
"그게 마음이 쓰여서 전하께 화풀이를 하신 겁니까."
"······ 아마도."
외면하는 법만 가르쳐 준 르메인이 원망스럽고 원망스러워서. 결국 이 모든 일이 생겨난 것은 르메인의 외면 때문이라서. 사실을 알고도 외면해버리는 란델에게 다시 한 번 실망한 마음을 르메인에게 풀어냈단다.
"그것도 잘 하셨습니다."
르메인이 건넨 사과에 플란츠 마음이 편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 뻔해서, 칼리안은 이렇게 대답을 해줬다.
"속은 좀 풀리셨습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기어코 전하를 혼내고 사과까지 받으셨을 분 반응이 왜 그렇게 미적지근 하십니까. 차라리 속이나 좀 후련해졌다 여기시지 않고요."
"아무래도 괜한 일을 한 것 같아서. 내 아우님한테."
플란츠의 말을 들은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괜한 것을 들쑤셔 기껏 아물어가던 것을 헤집어 둔 셈이 되었으니 그것 역시 신경을 썼다는 말이라서.
곧 칼리안이 품을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란델에게 준 것이 하나, 그리고 히나에게 줄 것이 하나.
"드미레아가 리리에에게 사줬던 과자라는데. 맛있습니다. 마음이 좀 쓰다 했더니 드미레아가 이것을 저에게 사주던데요. 입이라도 달아지라고. 형님 살리겠다고 에반의 집에 들어가고, 그러다 리리에를 만나고, 리리에를 보고 놀라서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고. 그렇게 찾은 리리에를 드미레아가 데려가고, 리리에에게 과자 하나를 사 주고. 그러고 나니 같은 것이 저에게도 오네요."
딸기 맛, 이라고 아직 믿고 있는.
사실은 장미 향이 나는 설탕과자를 꺼내 보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다 그런 겁니다. 사춘기셔서 그런지 배우라는 건 안 배우고 매번 이상한 것만 배우고, 사고는 사고대로 치고, 골치아프고, 덕분에 속도 좀 끓이기는 했습니다만. 형님이 형님 나름대로 저 생각해서 하신 일인 것 압니다. 그러니까 미안하게 여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건. 생각처럼 안 흘러가는 일들 사이에서 결국 그렇게 계속 사는 거니까."
곧 칼리안이 그 과자를 플란츠에게 건넸다.
칼리안 만큼이나 속이 쓴 것 같아서 형님 너도 단 것이나 드시라는 뜻이었다.
플란츠가 설탕과자를 받아들었다.
같은 것을 하나 더 꺼내 먼저 입에 넣은 칼리안이 순간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번개같이 팔을 뻗어 플란츠의 입에 막 들어가려던 설탕과자를 도로 뺏었다.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날아 든 동생 손에 설탕과자 잃어버린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당황한 얼굴이 된 칼리안이 설탕과자 향을 맡아보며 말했다.
"드시지 마십시오. 장미 향 나네요, 이거."
딸기 맛.
내 딸기 맛 어디갔냐고.
살짝 고개를 돌려 체르밀 궁을 본 칼리안이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란델에게 딸기를 주고 플란츠에게 장미를 줄 뻔했으니 웃음이 나올 수 밖에.
그 모양새를 보며 뭔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한 플란츠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칼리안의 손에 들린 종이 봉지 속에서 장미 향 난다는 설탕과자를 하나 꺼내 제 입에 넣었다.
달다.
장미 향이 난다.
"향기 난다니까요. 그걸 왜 드십니까."
"다 그런거라며."
생각지도 않은 일들 사이에서 다들 그렇게 사는 거니까. 가끔은 생각지도 않게 장미 향도 먹어보고 그렇게 사는 것 아니겠느냐고.
덤덤하게 대꾸한 플란츠가 저벅저벅 발을 옮겼다.
잠시 그 모습을 보다 피식 웃은 칼리안이 플란츠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럼 하나 더 드릴까요."
"아니."
"다 그런거라고 하셨잖습니까."
"싫어."
"그래도 기특하시네요. 피하지 않는 법도 배우시고."
"내 아우님은 안 짖는 법을 아직 못 배우셨고."
"그런데 형님 더 크시면 더 큰 사고 치실 겁니까. 혹시 그러실 거면 사고 치기 전에 꼭 말씀해주세요. 마음의 준비 해 놓겠습니다."
"계속 짖지."
어제보다 조금 더 따뜻해진 바람이 불고 물 소리가 들리고, 하늘은 어둡고 날은 좋았다. 그 많은 것들을 지나 다시 또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옛 헤이시아가 있던 곳에 도착했다.
여전한 넓은 공동.
고룡의 흔적이 가득 남은 그 곳에 들어선 칼리안이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시스파니안을 불렀다.
검은 나비는,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