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장. 희고 붉은 그 장미가(5)
잠깐만.
내가 설명을 할게.
내가 잘못한 건 맞아. 내가 뭐 그런 걸 변명하거나 있지도 않은 핑계 대거나 막 그러는 사람은 아니잖아. 게다가 난 거짓말도 못한다니까.
아, 그래. 그게 문제였지.
맞아. 문제이기는 해. 사람이 흠없이 완벽하기만 한 것도 정도가 있지 솔직하기까지 하니 문제가 크긴 크다. 그치.
아니, 아니. 그러지 말고. 그거 꺼내지 말고. 나 아직 설명 못 했어. 잠깐만 칼 집어넣어봐. 여기 왕궁이야. 수련장도 아니야. 잠깐만 참고 30초만 줘봐. 설명할게.
내가 또 들킨 게 맞긴 맞아. 맞는데. 그게 이것도 이번에 들킨 건 아니거든. 진작부터 들켰는데 들킨 쪽이나 알게 된 쪽이나 둘 다 눈치 못 채고 넘어간거거든. 내가 변한 걸 알긴 알았는데 무시하고 지내셨던 것 같거든. 사실 그게 그렇잖아. 겉은 그대론데 속이 바뀌었다고 누가 생각을 하겠어. 아는 것 없는 만큼 편견도 없어서 세상살이에 편견이라고는 거북이 뱃살 사이에 낀 대사막 모래알만큼도 없는 완두콩같은, 아니. 플란츠 형님 저하 같은 분이나 그런 걸 바로 떠올리지 다들 처음엔 생각도 못한다고.
여하간 요약해서 말하자면 진작부터 들켰어, 내가. 너랑 약속하기는 커녕 너 만나기도 전에 여기서 눈 뜨고 사흘도 못 지나서 들킨 것 같더라고.
그것 참 굉장하지.
아니. 자랑이 아니라······.
그냥 사실이 그렇다고······.
그런데 만약에 말야.
란델 형님이 나더러 '너는 가짜니까 너한테 왕좌 못 내주겠다!' 하면서 쫓아내면 나 갈 데도 없어. 탑에 안 가려면 진짜로 지그프리드로 도망가야 해. 나 혼자 탑에 가고 마는 거면 상관없는데 나한테는 햇살같은 우리 히나가 있고 건사해야 할 완두콩과 레이븐도 있고 부양해야 할 연로한 아버지도 계시고······ 아니, 말은 맞는 말이잖아. 몇 백년을 더 사실지 모른다 해서 연로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 연로한 채로 쭉 사시는 거지.
아무튼 내가 왕자 직함 놓고 가면 결혼해주기로 했었잖아. 혹시 잊어버렸어? 그건 거짓말이었어? 우리 사이 그 정도밖에 안돼?
잠깐만, 잠깐만. 여기 왕궁이라니까.
또 들키면 죽여버린댔지 청혼해도 죽일거라곤 안 했었잖아. 말을 왜 그렇게 무섭게 해.
엄밀히 따지면 이건 또 들킨 게 아니라니까. 눈 뜨자마자 들켰던 게 어쩌다 이번에 5층 창문 깨질 때 같이 튀어나온거거든. 그러니까 약속 어긴 건 아니라고 쳐 주면 안돼? 안 되나? 응?
응? 드미레아.
"하."
말린 닭가슴살을 앞에 둔 루시같이 동글동글해진 빨간 눈을 한참동안 마주보던 드미레아가 깊은 한숨을 뱉었다.
"조심 좀 하십시오. 이러다 정말 조심 안하고 편히 사셔도 되게 생겼습니다. 다 들켜서."
"아니야. 나 진짜 조심히 살고 있어. 세크리티아에서도 이미 알고 계셨던 분이랑 이미 여기 안 계신 사람한테만 알렸······ 아. 이게 아닌데. 칼, 칼. 드미레아. 칼 좀."
"칼 뭐요."
"세크리티아 쪽은 걱정 안해도 돼. 한 분은 어머니고 한 분은 옛날 아버지인데 아버지는 너도 알다시피."
"······ 하."
깊디 깊은 한숨이 다시 새어나온다.
그것이 결국 칼리안의 말에 설득되어 나온 것일지, 어울리지도 않을 우는 소리 때문일지, 그도 아니면 저 속에 든 게 대체 몇 살 짜리인가 싶은 마음에 꺼내진 것일지는 드미레아만 알 수 있을 일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저 얼굴에 넘어간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뿐.
"그래서. 괜찮으십니까."
"응, 뭐.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어도 란델 형님께서 정말로 나를 내쫓으려 하실 분은 아니고. 혹시나 갑자기 왕위에 욕심을 부리신다 해도 내가 내 자리 양보하고 고분고분하게 탑에 가겠다 할 생각도 없고. 그냥 지금처럼······"
"그게 괜찮은지 여쭙는 겁니다."
답답함 가득 쌓인 드미레아의 목소리가 칼리안의 말을 막았다.
"그냥 지금처럼 앞으로도 적당한 타인으로 여기면서 지내기로 하셨다는 것 아닙니까. 란델 왕자님께서, 왕자님을."
"아아. 그거······."
칼리안이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했다.
"안 괜찮은 것 같아."
"······ 어쩐지 대련하는 내내 늙어 죽을 것 같은 얼굴이더라니."
혹시나, 정말 혹시나 싶어 어디 또 들킨 데라도 있느냐 그런데 더 들킬 곳이 있기는 했느냐 물었던 드미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란델 왕자님이든 또 다른 누구든. 만에 하나 왕자님을 가짜라 여긴다 한들 왕자님께서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세상에 진짜 가짜가 어딨습니까. 똑같이 살아있고, 숨을 쉬는데."
"뭐야. 나 위로해주려는거야?"
"네."
"의외네. 내 정혼자님이 그런 말도 해주시고."
"계속 그렇게 마음 쓰다 정말 공작저에 눌러 살게 되실까봐서요."
"걱정 마. 그 남쪽까지 놀러는 가도 살러는 안 갈 테니까."
"걱정 말라는 말 말고, 차라리 그냥 알았다고 대답하는 게 낫다는 건 아십니까."
레이븐보다 조금 더 덩치가 큰 드미레아의 검은 말을 슥슥 쓰다듬던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알아. 사람 속이 바뀌었다는 게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도 알고. 그러니까 란델 형님이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자체가 안 괜찮다는 건 아니야. 그건 신경 안 써. 당연한 거니까. 내가 그 아이 자리 뺏어서 앉아있는 가짜라는 생각도 이제는 안 해."
"좀 나아지긴 하셨네요. 저한테 들키셨을 때만 해도 그런 생각 못 하시는 것 같더니. 그럼 또 뭐가 문제인데 그러십니까."
"왜 못 받아들이시는지를 알 것 같아서. 내가 바뀌었음을 안 뒤에야 내 예전 모습을 떠올리는 걸 보는 게 씁쓸해서. 이미 늦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마음이 쓰네. 잊히는 사람의 기분을 알아서 그런가······ 그래서 그런가. 이럴 때마다 온 세상에서 쓴 맛이 나서, 나는. 그게 아직 적응이 잘 안 돼. 드미레아."
다각, 하고.
조금 뒤에 서 있던 레이븐이 드미레아의 말과 칼리안의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섰다. 그것이 마치 다른 말은 그만 쓰다듬으라는 투정으로 보여서, 또 한 번 웃음소리를 낸 칼리안이 레이븐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레이븐의 갈기를 손으로 빗어내리며 대답을 계속했다.
"잊고 있던 걸 이제라도 떠올린다 하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잊은 것을 이제서야 떠올렸다 하니 안타깝다 해야 할지. 단 맛이 나다가도 쓰고 신 맛이 나다가도 쓰고. 자몽같다, 진짜."
"뭐든 다 먹는 것으로 바뀌는 겁니까."
"좋잖아. 먹는 거."
드미레아가 작게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레이븐이 끼어들어 한 발 뒤로 물러나게 된 자신의 애마의 고삐를 살짝 끌어당기며 말했다.
"저녁에 전하와 석찬 자리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응. 어제 형님이 사고친 것 때문에 걱정되셨나. 갑자기 오겠다 하시네."
"잘 됐네요. 그럼 잠깐 저 데려다 주십시오."
칼리안이 드미레아를 쳐다봤다. 이미 레이븐을 데리고 드미레아를 배웅하러 나온 길이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공작저까진 바래다 줄 거야."
"가기 전에 바넨샤에 들를 생각입니다. 새 갑옷을 맞출 때가 됐는데 왕자님께서 소개시켜주신 대장장이는 무기 말고 다른 것은 익숙하지 않다 해서요."
대장장이들의 거리인 바넨샤는 카이리스 왕궁에서도 꽤 먼 곳에 있었다. 세뉴 강 건너편에 있는 곳이 아니던가.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한 터라, 바넨샤를 들른다면 르메인과의 석찬에 참석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무기도 그렇지만 갑옷도. 왕자님이 저보다는 훨씬 잘 보실 것 아닙니까. 꽤 오랫동안 입게 될 테니 제대로 된 것을 맞추도록 함께 봐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도와주신다 하면 세크리티아에서 또 들키고 오신 일에 대해서 다른 말 안 하겠습니다."
아무리 칼리안만큼은 아니라 하나, 지그프리드의 드미레아에게 갑옷 하나 제대로 살펴 볼 안목이 없을까. 때문에 잠시 드미레아를 쳐다보던 칼리안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그려졌다.
무기를 다뤄본 적 없던 예전의 카이리스 3왕자는 하지 못할 일. 지그프리드의 소가주와 아무런 관련 없던 세크리티아의 소드마스터도 하지 못할 일. 지금의 칼리안이기 때문에 도와 줄 수 있을 그런 일. 지그프리드의 소가주인 정혼자보다 더 좋은 안목으로 갑옷 한 벌을 맞추도록 해 주는, 소드마스터이자 카이리스의 왕자인 사람만 도와 줄 수 있는 별것 아닌 일.
"······ 그래."
누군가는 잊고 지냈든 아니든.
지금의 모습이 받아들여졌든 아니든.
옛 칼리안과 베른이 실제로 있었기 때문에, 그 둘을 모두 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그 별것 아닌 일이야말로 그 둘에 대한 증명이자 지금의 칼리안에 대한 인정이 아니겠나.
그러니 잊혀져가는 두 사람은 칼리안도 잠시 잊고, 이미 전부 다 늦어버린 사람들 속에서 쓴 맛만 잔뜩 느끼는 것도 잠시 미뤄두고, 지금은 지금의 칼리안이라서 해줄 수 있는 그런 일이나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사실은 부탁이 아니라, 속이 왜 쓰다는 것인지를 제대로 알게 되어서 다시 건네는 위로였다.
"내가 이래서 드미레아를 좋아하지. 아무튼 정혼자 복은 있어, 내가."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무미건조한 대답을 마친 드미레아가, 에스코트를 위해 내민 칼리안의 손을 거절하곤 훌쩍 말 등에 올랐다. 피식 웃으며 레이븐 위에 올라탄 칼리안이 한 발을 앞서나가자 드미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는 길에 설탕과자 사 드리겠습니다. 쓴 맛 잊어버리시게."
"달아?"
"네. 엄청 답니다. 라벤더 향도 나고요."
"그래. 좋네."
지난번에 산 책은 다 읽었는지.
가는 길목의 흰 장미는 언제쯤 필지.
갑옷은 이번에도 체인으로 된 걸 입을 생각인지. 다녀오는 길에 아무 곳이나 들러서 고기 잔뜩 든 저녁 식사도 같이 하는 건 어떨지. 그나저나 우리 히나 딸기 좋아하는데 혹시 그 과자 집에 딸기 맛 설탕과자도 파는지.
소소한 대화 소리. 그리고 다각거리는 소소한 발굽 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사실은 둘 다 그리 세심하지를 못한 탓에, 르메인에게 석찬에 못 가겠다는 말을 전해야 한다는 것은 아예 잊어버린 채였다.
* * *
아래층에 사는 누군가.
예의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도 없고 말보다 주먹이 앞설 만큼 과격하기만 해서 얼굴을 마주하기는 커녕 이름을 적는 것도 불편한 바로 그 누군가가 그만 멀쩡한 창문을 깨 부수는 바람에 입맛이 뚝 떨어지는 심각한 문제가 생겨 석찬에 못 가겠다고. 그런 말이 전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글로 남기기 참담한 이유로 소실된 창문이 간밤의 찬 바람을 막지 못해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서신이 전해진 것이지만 르메인의 눈에는 그렇게 읽혔다.
그래도, 뭐.
괜찮다.
- 개인 사정이랍니다.
그나마 직접 전하고 나가는 것도 까먹어서 제 스승과 나눠 가진 통신용품으로 간신히 전달한 내용을 간단 명료하게 알려 준 앨런의 말을 들었을 때보다는 덜 심란했으니까.
그것 참.
이런 저런 사고가 생길 때는 아들이 참 많았던 것 같았는데. 나랑 같이 밥 좀 먹자 할 때에는 왜 이렇게 휑한지.
아무튼 그런 참담한 사정과 개인 사정으로 그 많은 아들들 중에서 하나씩을 빼고 나니,
"죄송합니다. 팔이 자유롭지 않아서 식사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필 오른팔을 못 쓰는 통에 누구랑 같이 격식 차려가며 식사를 하기는 힘드니 그냥 차나 한 잔 하고 가겠다는 아들 한 명이 남았다.
사실 그 둘째 아들의 오른팔에 난 상처는 아침 나절에 이미 싹 다 나았다는 것, 그리고 둘째 아들이 쓰는 검이 두 자루라는 것, 게다가 그 둘째 아들에게 검을 가르치는 셋째가 '사람이 한 팔을 못 써도 식사는 야무지게 잘 챙겨야 한다. 그러라고 두 개 있는 팔 아니겠느냐.'라면서 양 손 쓰는 법을 진작에 잘 가르쳐 놨다는 것, 덕분에 오래전부터 양 손을 다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는 것, 무엇보다 포크와 나이프를 동시에 써야 할 고기는 애초부터 그리 잘 먹지도 않았다는 것, 그러니 밥 안 먹고 차만 마시겠다는 건 그냥 이 자리에 나오기 싫었지만 위층과 아래층 거주자들이 선수치고 불참해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얼굴이나 잠깐 비추고 와야겠다 하며 꺼낸 배려 가득한 핑계라는 것.
아들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는 했으나 그렇다 해서 저것이 사실인지 핑계인지를 가늠해 낼 만큼의 많은 면면을 다 참견해가며 파악할 자격은 못 가진 사람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많이 다친 것이더냐."
"괜찮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르메인이 솔잎과 꿀을 넣고 우린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그 뒤에는 일전에 플란츠가 텐실의 왕세자 세르제인의 방문 허가를 요청했던 일에 대해 대답부터 전해주려는데, 플란츠가 먼저 손을 움직였다.
- 달칵.
플란츠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작은 로켓이 달린 펜던트.
르메인이 건넸던 목걸이였다.
"이만 돌려드리겠습니다."
그와 함께 이어진 플란츠의 말에 르메인이 티나지 않을 한숨을 냈다. 그것을 목에 잘 걸고 있기에 그래도 플란츠와는 조금쯤 거리가 가까워진 것이 아닐까, 아주 조금 기대를 했었던 탓이다.
"그래. 그리하거라."
"질문을 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테이블로 향하려던 르메인의 손이 멈췄다.
곧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목걸이. 형님의 것과 칼리안의 것도 있는 것 아닙니까."
목걸이를 한 번, 그 목걸이 끝에 걸린 펜던트를 한 번, 그리고 그 때와 아주 많이 달라진 둘째 아들의 얼굴을 한 번, 그리고 다시 목걸이를 한 번.
천천히 시선을 옮겨가며 목걸이 만들 때의 일을 생각하던 르메인이 입을 열었다.
"그래. 다른 두 아이의 것도 있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뗀 플란츠가 말했다.
"그러실 것 같아서. 함께 가지고 계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돌려드리는 겁니다. 제가 가지고 싶지 않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르메인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런 르메인을 한동안 보던 플란츠가 다시 말했다.
"그것을 보내 주셨을 때, 받았을 때.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 그래."
"조금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다행이라 생각되지도 않았고, 놀랍지도 않았고, 신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 그러했더냐."
"안타깝지도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고, 화가 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 그러했구나."
"몰랐습니다."
플란츠의 손가락 끝이 펜던트를 가리켜보였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움직여 자신을 향했다.
"그것을 어떻게 여겨야 할지. 저는 몰랐습니다. 한참을 쳐다보고 오랫동안 고민을 해도, 답을 내지 못했습니다.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배운 적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답을 내지 못했습니다."
"······ 답을 내지 못했더냐."
"······ 답을 내지 못했습니다."
르메인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플란츠의 말이 이어졌다.
"전하께서 잘못하셨습니다."
익숙한 말.
당연하다 여기게 된 말.
같은 말을 듣지 않은 날은 오히려 어딘가 허전할 만큼.
앨런에게 그렇게나 많이 들어왔던 말.
"그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전하께서 잘못하신 겁니다."
그 말을 플란츠에게 들었다.
"아버지께서, 저희에게. 잘못하신 겁니다."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아들의 입으로 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