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56화 (357/527)

제63장. 희고 붉은 그 장미가(4)

외면.

그래. 외면하였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하지 않고 생을 사는 방법을 알지 못해 그리하였다.

그렇게 알고 살았다.

그렇게 믿고 살았다.

그렇게 살았다.

보고 듣고 배운대로 그리 살았다. 그렇게 생을 살면, 그것이 삶인 줄 알아서 그리하였다.

"장미가 아니었다는 말이더냐."

피워낸 것이 장미가 맞았는지. 그 단순한 의문 하나도 풀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 삶이 맞았는지. 그 쉬운 질문의 답을 내지 못하고 꿈 속을 거닐듯 물었다.

"너는 그리 여기는 것이더냐."

"도리어 저에게 물어보시는 겁니까."

란델의 시선이 발치를 향했다.

걸음을 가로막듯 떨구어진 긴 검을 내려다봤다.

검 끝에 이어진 굵고 붉은 핏방울을 내려다봤다.

- 칼리안. 입니다.

그 언젠가의 식탁 위에 점점이 떨어지던 붉은 핏방울을 떠올리게 되었다. 장미가 곧 피겠다 말하던 입술 새로 흘러나온 붉은 핏방울을 떠올리게 되었다.

새하얀 손에 잘려 떨구어졌던 붉은 장미를 떠올리게 되었다.

- 저 좀 보시죠. 이거 말고.

짙푸른 눈이 먼 곳을 향한다.

열어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닫아두기 위해 존재했던 투명한 창문을 눈에 담는다.

열어두길 원한 적 없었으나 이제는 닫을 방법이 요원해진 창. 볼품없이 조각나 깨어진 유리조각 사이로 쌀쌀한 바람이 불어들었다. 이른 새벽에 봄비가 내렸던 탓에.

"······ 바람이 드는구나. 비가 내렸다 하더니."

깨진 틈 새로 든 바람 줄기에 눈이 부셨다. 그래서 눈을 감았다.

제멋대로 깨진 틈 사이로 불어 온 바람에 눈이 부셔서, 빠져드는 모든 것을 깊이 깊이 내려담을 뿐 좀처럼 다시 떠올리는 법 없던 짙푸른 심연이 감겨들었다. 부심을 이겨내지 못해 감겨들었다.

작고 볼품없던 그 장미가.

붉디 붉은 그 장미가.

내려온 빗속에 시들고 저물어 어느새 다시 피었다는 그 말에, 그렇게나 견디기 힘들 만큼 눈이 부셔서. 심장이 시려서. 머릿속이 아려와서. 눈을 감았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거라. 고단하구나."

장미가 꼭 안네루시아 같다 했던 그 아이가 이미 사라져버렸다는 말. 그것이 그 아이를 둘러싼 수많은 이들의 외면 때문임을 알아달라는 말. 그러니 이제 제발 사실을 좀 받아들여 달라는, 말.

둘째 동생의 찬비같은 부탁에 대한 답이었다.

불어드는 바람에 대한 답이었다.

그것이 여전한 외면일까봐, 이해하고 인지했으나 납득하지 못해 또다시 눈을 감은 것일까봐, 제 상처로 축축하게 젖어 든 카펫 위에 여전히 꼿꼿이 선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약속받기 전에는 안 내려갑니다."

"기어코 내 사과를 네가 대신 받아가겠다는 말이더냐. 네 말을 알아들었다 하였는데도."

"그렇습니다."

"이제 와 갑자기, 왜 이리 끈질기게 구는 것이냐."

란델이 한참동안 감겨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바닥에 한가득 고여버린 붉은 응어리를 또 한참동안 내려다보다 말을 이었다.

"내가 피워낸 그 장미를 그 아이가 바스라뜨린 것을 알았다. 그것을 두고 너는 네가 태운 것이라 하였지."

"그랬습니다."

"그 아이가 예전 그대로의 아이가 맞는지를 물었다. 그것을 두고도 너는 내게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랬습니다."

"그리 숨기려던 것을 이제 와 갑자기 왜 들춰내고, 왜 이리 끈질기게 구는 것이더냐."

칼리안이 로젤리타에 나선 동안 피어 있던 작은 장미. 란델이 피웠던 그 장미. 그것을 없앤 이는 칼리안이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그것을 제 손으로 없앴다 거짓말을 했었다.

란델이 플란츠에게 물은 적 있었다. 그 아이가 예전 그대로의 칼리안인지, 아니면 이제는 그저 플란츠의 동생일 뿐인지. 그 때에도 플란츠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었다.

지금 란델은 그 이유를 묻고 있었다.

그렇게 숨기려던 사실을 왜, 이제 와 갑자기 들춰내는지. 왜 이제서야 사실을 받아들이고 사과를 하라 요구하고 있는지.

멀쩡히 잘 닫혀있던 창문을 깨어내고선. 왜. 갑자기.

"······ 떠난 사람은 기억해줘야 하고. 머무는 사람은 바라봐줘야 하니까."

답이 들려왔다.

"잃고 나서도 떠난 것을 모르고 곁에 두고도 머무는 것을 몰라주면. 살았었고 살고있는 이는 잊히니까. 그 생이 잊혀지고 마니까. 그렇게 지워버리면 안 되니까."

답이 들려왔다.

작고 작아서, 가늘고 가늘어서,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고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다 불고 남은 바람의 끄트머리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지우지 말라고 배웠으니까. 그래서 이제는 아니까.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완전히 지워지기 전에, 기억하고 바라봐 달라고. 얘기하신 겁니다. 형님이, 형님께."

가득 피어난 장미를 담고, 흘러내린 피를 담고, 타오르던 불꽃을 담고, 그렇게 채워진 삶을 담은 붉은 눈이 두 형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대신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대신 사과하지 말라고.

"직접 받겠습니다. 제가."

직접 받겠노라고.

칼리안이 그리 말했다.

* * *

흘러 넘친 핏자국을 치워냈다.

다 부서진 창문을 떼어버렸다.

흐르고 부서진 얼룩과 파편을 그렇게 모두 덜어내고 나니, 다시 깨끗해진 조용한 방에 봄 바람이 불어들었다.

- 괜찮아요. 형제 사이에 싸울 수도 있죠. 어차피 다들 그렇게 싸워가면서 살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렇게 강제로 바람이 들게 된 방의 아랫층으로 다시 내려오고 나니,

- 싸우다 다친 건 치료하면 되고 잘못한 건 혼나면 되니까요.

혼나는 일이 남았다.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도록 급한대로 묶어 둔 새빨간 타이를 손쉽게 풀어낸 히나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어의 눈물이 모여 만들어졌다는, 새하얗고 동그란 마석 조각을 플란츠의 손에 쥐여 준 직후의 일이다.

이제는 더 뭐라 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그저 소중하신 우리 치유사님께서 치료를 하는 사이 말씀을 못하셔서야 쓰겠느냐며, 부군단장들이 자리 비운 동안 참 많이 자유로웠던 발칸의 마법사들이 질 좋은 마석을 구해 열심히 만든 통신용품이었다. 물론 마석 사는 값은 발칸의 공금이 담긴 금고에서 나왔다. 공금이 모자라면 르메인이 채워 줄 테고, 르메인이 안 주면 플란츠의 금고를 털면 되고, 그것도 어려울 땐 칼리안의 금고에게 부탁하면 깨끗하게 해결 될 일이니 걱정 않고 경매에 열을 올려 얻어낸 값진 결과라 할 수 있겠다.

- 저하 상처는 남들보다 빨리 아무는 거 알아요, 몰라요?

- 알아.

- 유리조각 든 채로 상처 아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몰라요?

- 몰라.

- 아파요.

- ······ 그래.

붉은 타이에 핏물이 잔뜩 배었으니 알아서 버려야 할지를 고민해보던 히나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것을 착착 개어 옆에 내려놨다. 이 정도 핏물이야 클린 한 번으로 알아서 잘 지울 타이 주인에게 그냥 돌려주는 게 낫겠다 싶어서였다.

그리고는 환자에 대한 배려라곤 도저히 찾아보기 힘들 과감한 손놀림으로 쭉 찢어진 상처를 뒤적여가며 잔뜩 박힌 유리조각을 찾아 하나씩 꺼냈다.

- 많이 아파요?

- 아파.

- 참아요.

- ······ 알았어.

유리조각 든 채로 상처가 아무는 것과 쭉 찢어진 상처 속에서 유리조각을 꺼내는 것 중에 뭐가 더 아픈지 알 수 없어진 플란츠가 눈꼬리를 살짝 찌푸렸다. 그것을 본 히나에게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멀쩡한 유리창은 왜 깼어요?

- 문을 안 열어주셔서.

- 안 열어주면 열어달라 하셔야죠.

- 했어.

- 그럼 기다리면 되죠.

- 기다렸어.

- 그런데 멀쩡한 유리창은 왜 깼어요?

- 더 못 기다리겠어서.

- 그럼, 들고 가셨던 검은 잘 놔두고 왜 팔로 깼어요?

- 어쩌다보니.

- 그러셨구나. 어쩌다보니 팔로 깨셨구나. 그러다가 이렇게 다치셨구나······. 그래서. 많이 아파요?

- ······ 참을만 해.

- 네에.

세크리티아에 가 있는 동안 히나는 체이스의 모친인 루이즈를 정성껏 치료했었다. 그런데 그 곁에 대체로 아리안느가 있었다 했다.

그래서인가.

내 나라 내 방에서 치료받고 있는데 내 아우님의 옛 형님 되시는 바다나라 국왕 전하 그 놈의 정혼자 되시는 그 분이 왜 이렇게 자꾸 떠오르는지. 참 이상한 일이다.

옆에 놓인 건 분명 베로니카가 만들어줬다는 마취제같은데 그건 왜 안쓰는지 물어볼까 하다 말았다. 수면제가 잘 듣는 것을 봐선 마취제도 잘 들을 것 같은데 대체 왜 안쓰는지 아무래도 물어보는 게 나을까 고민하다 아무래도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것도 그냥 말았다.

- 이제 다 꺼냈나······.

그것을 물어보면, 이렇게 말하며 상처 속을 슥슥 뒤적거리는 저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갈까봐 못 물어봤다.

- 아. 다 꺼냈나봐요. 생각보다 적네요.

- ······ 아쉬워하는 것 같은데.

- 뭐를 아쉬워해요?

- 아니야.

- 네에.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아주 작은 유리조각까지 말끔하게 치워낸 히나가 생긋 웃었다. 괜스레 소금 내음을 다시 맡은 플란츠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곧 익숙한 빛이 스미며 벌어진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 하고 싶던 얘기는 다 나눴어요?

- 안 나눴어.

- 이렇게 다쳐가면서 들어간 건데 얘기도 못 나눴어요?

- 하기만 했어. 나누진 않았는데.

하고 싶던 얘기를 다 꺼내놨다.

다만, 마땅히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으니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 하고 싶은 말 했으면, 괜히 다친 건 아닌 거니까. 그나마 다행이네요.

플란츠의 말 뜻을 이해한 히나가 이렇게 대답했다.

- 팔 말고 다른 데는 안 다쳤어요?

- 안 다쳤어. 나는.

- 그것도 다행이네요.

- 다른 두 명은 다친 것 같은데.

- 그래요? 상처 보인 건 저하밖에 없었는데.

- 안 보여. 그건.

히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스한 기운이 계속 계속 스며든다.

- 맞아요. 사실은 누구나 안 보이는 상처가 더 많기는 해요.

- 그래.

- 다들 저하 때문에 다치신 거예요?

- 아니. 한 명만.

- 그럼, 그 한 분한테는 저하께서 사과를 하셔야 되겠네요.

히나와 달리 플란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아니. 못 만나서.

- 그럼 나중에라도 만나면 꼭 하세요.

-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면 안 돼서. 될 수도 없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들은 히나가 잠깐 고개를 들어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내렸다.

- 이미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만나지 못해 사과하지 못한다는 그 한 명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왜 만나지 못한다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만날 일이 있으면 왜 안된다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히나는.

- 사과할 수 없는 거면, 사과할 일을 또 만들지만 말아요. 그러면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예요.

잘못했다 하는 사람을 다독였다.

사과할 수 없는 일들을 위로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히나는.

* * *

희고 붉은 그 장미가.

"희고 붉은 그 장미가 하나 씩만 있는 줄 알았더니."

피고 지는 그 장미가.

"여기저기 참 많네요. 많이 피고, 많이 지고. 그랬나보네요. 저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아픈 장미도 하나가 아니었고, 아프지 말아야 할 장미도 하나가 아니었고, 알고보니 장미가 아니었던 장미도 섞여 있었다. 그렇게나 많은 장미들이 어느새 피고 지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란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들려오는 시계 소리를 귀에 담은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형님 한 분치 기억을 거의 다 꺼내놨는데도 아직 모르는 일들이 계속 남아있습니다."

자신의 머리를 톡톡 건드려 보이며 힘 풀린 웃음을 지은 칼리안이, 여전히 침묵하는 란델을 향해 계속 말을 이었다.

"알고 자른 장미 아니었고 알고 드린 선물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다보니 잘랐고 어쩌다보니 드렸습니다. 좋아하시는 줄로만 알았어서."

그것이 안네루시아였을 줄 몰랐다 말했다.

"그 장미가 그런 장미였을 줄 알았으면. 제대로 보시라 종용하는 일 안했을 겁니다."

그것이 안네루시아인 것을 알았다면, 고작 나 하나를 보라며 잘라내지는 않았으리라고. 그것을 잘라내라는 선물을 주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사과를 네가 하려는 것이더냐. 받으러 왔다더니."

"할 건 하고 받아야죠. 개운하게."

결국 자신의 손짓 하나 선물 하나에 제 정체 또 들킨 셈이 된 칼리안이 답했다. 사실을 직시하라 종용할 마음은 없었다고. 종용하게 되어 미안하다고.

"둘째와 완전히 다른 소리를 하는구나."

"형님이 보기엔, 란델 형님께서 사실을 외면하는 꼴이 안 괜찮다 여겨졌나 봅니다."

"너는 어찌 여기느냐."

"사실은 안 괜찮겠지만, 어쨌든 괜찮습니다. 저는."

그 뒤에는 이렇게, 거짓 없는 솔직한 마음을 꺼내놨다.

"잃어버린 사람에 대해 기억해달라고도 못 하고, 새로 든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아달라고도 못 하고.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야 해서. 그건 제 잘못도 아니고 란델 형님 잘못도 아닙니다."

속에 든 이가 바뀐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서운하다 여기고 어떻게 사과하라 할 수 있을까. 알아보았다 한들, 알아본 것을 드러내지 못한다 하여 어떻게 그것을 잘못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란델의 잘못이 아니었다.

물론 칼리안의 잘못도 아니었다.

"다만 형님께서 저에게 저지르신 진짜 잘못. 전하와 똑같이 저지르셨던 그 잘못. 그것은."

칼리안이 찻잔을 들어올렸다 도로 내렸다.

또, 자몽차라서.

알고 보면 언젠가의 칼리안이 자몽을 정말 좋아한다 말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실없는 의심 하나를 실소하며 집어넣은 칼리안이 란델을 쳐다봤다.

"그것도. 사과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잘못을 잘못이라 여기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살아온 이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과연 잘못인가. 잘못하는 법밖에 몰라서 저지른 잘못이 과연 잘못인가. 잘못하지 않고는 살 수 없어 저지른 잘못이 과연 잘못인가.

살고 싶어 저질렀든.

죽기 싫어 저질렀든.

"계속 모르는 채 지내셔도 괜찮습니다. 진심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혀야 살아낼 수 있었던 삶을 산 이가 저지른 잘못이, 진정 그 사람의 잘못인가.

"형님께서 직접 생각해서 잘못이 생각나면 사과해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사는동안 내내 생각나지 않는다면, 사는동안 내내 기다리겠습니다. 사과하실 때까지."

플란츠가 강제로 깨버린 창. 옛 칼리안과 칼리안을 위해 깨뜨린 창. 사실은 란델을 위해 깨뜨렸을 그 창.

그것이 혹시나 란델의 살을 베어낼까봐. 천천히 걸어나와도 괜찮고 걸어나오지 않아도 괜찮다 답했다.

"대신, 용서는 못 해드립니다. 사과는 받더라도. 사과받을 자격은 있는데 용서해드릴 자격은 저에게도 없어서요."

물론 그렇다 하여 옛 칼리안이 떠난 사실을 감추고 포장하지도 않았다. 창문 안에 든 사람 다칠까 걱정하다가 그 창문 깨뜨리느라 입은 상처가 무색해지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

"잘못이 영영 생각나지 않는다 하면 어찌하겠느냐."

한동안 창 밖을 보던 란델이 이렇게 물었다.

그 창 밖에 보이는 정원을 희게 바라보던 칼리안이 시계 시침보다도 더 느린 것 같은 속도로 입을 열었다.

"형님 탓 안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생각 안 나신다 해도."

"그리 기다리는 동안. 너는."

"말씀 드렸듯이. 괜찮습니다."

"사실은 안 괜찮겠지만. 괜찮다는 말이더냐."

"네. 익숙해져야 할 일이라서요."

모든 것이 괜찮아야만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니까.

"흰 장미가 그리 아파가며 치료한 포도 덕에 흰 장미가 같이 낫기도 하고, 흰 장미가 홀로 아픈 바람에 시들어버린 포도때문에 흰 장미가 다시 병에 들기도 하고. 때로는 붉은 장미가 흰 장미보다 더 많이 아프기도 하고. 안 괜찮으면서 살고 괜찮아지면서 살고 괜찮아져서 살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사는 것이 결국 삶이니까."

아무래도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은 결국 생기게 마련이니까. 그런 것에는 그저 익숙해져야만 하는 법이라고.

자몽 싫어한다는 그 쉬운 가르침도 심연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잊고 지내는 란델에게, 이번에는 잊지 말았으면 하는 또 다른 한 가지를 가르쳐 준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에 마법 다시 걸어야 해서 다 고치는 데 사흘은 걸린다 합니다. 춥지는 않겠지만 조금 불편하실텐데. 괜찮으십니까."

"되었다."

"창문 열려 불편하시면 제 방에 와 계십시오. 고양이 가끔 옵니다. 고양이 좋아하시면 4층 가 계시던가요. 고양이 자주 갑니다."

"되었다."

"네."

가볍게 대답한 칼리안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선물. 잘 쓰마."

그런 칼리안의 뒤로 목소리 하나가 따라붙었다.

이번에는 대답하지 못한 칼리안이 그대로 방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죽을 때까지 그 선물이 정원에 가게 될 일은 없으리란 것을 알아서.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대답해줄 만한 말을 찾기가 어려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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