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55화 (356/527)

제63장. 희고 붉은 그 장미가(3)

이해한다고는 말씀 못드립니다.

이해 못한다고도 못하겠습니다.

칼리안은 끝내 그렇게만 말했다. 수많은 이들이 쌓아 올린 죄에 갇혀 결국 스러진 한 아이의 얼굴을 한 채로.

떠나간 아이의 자리를 대신한 이의 입장에서, 완벽한 타인이지만 유일한 당사자이기도 한 이의 입장에서. 그런 입장에선 란델이나 르메인과 다를 바 없이 원망스러울 뿐인 형제를 앞에 둔 채로 그렇게 대답했다. 이해하지도 못하겠으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없겠다고.

그리고 물었다.

"무엇에 대한 사과를 받으려 하십니까. 란델 형님께."

제 아비에게 죽음을 알리지조차 못하여 안네루시아 대신 라프라니아를 계속 받게 된 아이가 아니라, 왜.

"왜 형님이."

왜, 플란츠가.

이제 와 란델에게 무엇을.

무엇에 대한 사과를 받으려는 것인지. 왜 칼리안이 아니라 플란츠가, 란델에게 사과를 받겠노라 하는 것인지. 그것을 물었다.

"대답이 꼭 필요한가."

"혹여 대답해주기 싫으십니까."

"못하겠어서."

"알겠습니다."

해소되지 않은 의문을 애써 갈무리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수련은 키리에와 하십시오. 형님 검에 죽을까봐 오늘은 못 봐드리겠습니다. 생각이 많아서."

"······ 전부 가르쳐주기만 하고."

형을 가로막고 서 있던 발을 돌려 수련장 밖으로 나가려는 칼리안의 걸음을, 이번에는 플란츠가 막았다.

"정작 스스로 지키지는 못하시는군. 내 아우님께서는."

"제가 지키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드린 적 있었습니까."

"싸울 때에도 늘 생각이 앞서지 않나. 그리하지 말라 했으면서."

"형님 때문에 생각이 늘어 그렇습니다."

"궁금하면 물으라 하더니. 그리하지도 못하시고."

"여쭤봤습니다. 대답 못하겠다 하신 건 형님 아닙니까."

"정말 궁금하면. 다시 물으면 될 일 아닌가."

"싫습니다, 저도."

"왜."

"하기 싫은 질문이 같이 나올까봐."

이렇게 대꾸한 칼리안이 서늘한 눈빛을 감춰 다물었다.

오늘따라 말 꼬리 참 많이 잘라먹는다는 생각도, 하기 싫은 질문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도 가지지 못한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말없이 옆으로 한 발을 움직여 칼리안의 앞에서 비켜섰다. 그 뒤에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먼저 가겠노라는 말은 꺼내지 않고 이미 다물린 입술만 더 꾹 사려물며 걸어나갔다.

칼리안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던 터라. 자신을 지나쳐 나가는 플란츠에게 다른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플란츠가 서 있던 곳에 못박힌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아니. 못했다.

- 기어코 사과 받고자 하는 이유가 혹시, 란델 형님 때문에 동생을 영영 잃어버렸다 여겨서인지.

그런 질문을 받을까봐.

그런 질문을 건넬까봐.

하지 못할 질문을 삼킨 칼리안을 남겨 둔 채로, 전하지 못할 대답을 묻은 플란츠가 계속 발을 놀렸다.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체르밀 궁 4층의 욕실에 들어간 뒤 한참을 씻었다. 그 뒤에는 레릭이 준비해 둔 샐러드와 우유를 거절한 채 곧바로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비가 오고 조금 쌀쌀한 것 같아서, 어제보다 조금 더 두꺼운 재킷으로 준비했습니다."

레릭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짙은 잿빛의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검은 바지와 베스트를 입었다. 은사로 수를 놓은 검은 타이를 조여 맨 플란츠의 앞에 레릭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레릭이 알아서 새로 맞춘 장신구들이 어제 도착했다는 말이 이어졌다.

레릭의 말을 흘려들으며 장신구를 내려다봤다.

"오늘은 옷 색이 어두우니 밝은 색 장신구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연보라색.

옅은 보랏빛이 감도는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커프스와 셔츠 장식.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말없이 계속 바라보기만 했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다른 것을 꺼내올지, 아니면 오늘은 그냥 장신구 없이 다니실 생각인지. 그런 말들을 꺼내기 위해 레릭이 입을 열었을 때.

- 휙!

레릭 옆의 다른 시종이 들고 있던 짙은 잿빛의 재킷을 잡아 든 플란츠가 제 손으로 그것을 입었다. 깜짝 놀란 레릭이 장신구 함을 다른 시종에게 넘긴 뒤 플란츠에게로 다가왔다.

"저하.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형님은."

"네?"

갑작스런 질문에 저도 모르게 대꾸했던 레릭이 서둘러 플란츠의 말 뜻을 헤아리고는 다시 답했다.

"죄송합니다. 란델 왕자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씀이십니까?"

"말고. 계시냐고."

"아, 네. 오늘도 5층에 계십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칼리안 왕자님이 어마어마한 정원 가위를 선물해드렸다는데 그것을 한 번 써보지도 않고 밖에 나서지도 않는다면서 덴이 걱정을 많이 하네요. 혹시나 어디가 아프신 것은 아닌지 하고요."

아플 리가.

란델의 시종이 하고 있다는 괜한 걱정을 한 귀로 흘려 넘긴 플란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문은."

"······ 아, 네. 아무도 들이지 말라 했다는 그대로입니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곁에 세워 둔 시나스타를 바라보다가, 조금 전 레릭이 치워 낸 장신구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있어."

"저 여기에 있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어디 혼자 가시게요?"

새하얀 얼굴이 다시 한 번 위 아래로 움직였다.

5층에 가는 것이 여전히 요원하니 답답한 속을 풀러 산책이라도 하시려는 걸까. 혼자 빌헬름 관에 가시려는 걸까. 혹시나 배가 고파지신 것은 아닐까.

제가 모시는 사람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꿈에도 모를 레릭이 여러 행선지를 떠올리고 있을 때.

- 저벅.

재킷의 마지막 단추를 다 채운 플란츠가 성큼 움직였다. 문 말고, 테라스로.

"저하. 바람을 쐬실 것이면, 제가 차를······."

아마 칼리안이 이런 행동을 했고 그것을 목도한 이가 얀이었다면 테라스부터 막고 섰겠으나 애석하게도 레릭은 아직 그 정도의 깜냥이 못 됐다.

- 저벅, 저벅.

그래서 비 온 뒤 조금 쌀쌀한 아침의 테라스에서 바람을 쐬려는 사람의 빈 속에는 무슨 차가 좋을지 정도의 순진한 고민을 하는 사이.

- 타앗!

테라스의 화려한 난간을 짚은 플란츠가 그 위로 가볍게 뛰어 올랐다. 잘 세워두었던 시나스타가 어느새 그 손에 들려 있었다.

"저하! 3층 문은 안 잠겼으니 그냥 계단으로 내려가셔도······."

칼 들고 3층 가서 싸움을 걸 리는 없으니 뭘 하려는 생각인지는 몰라도 일단 또 테라스를 통해 내려가려는 것은 막는 게 낫겠다, 라고. 지금 상황을 반의 반의 반도 파악 못한 레릭이 일단 서둘러 플란츠를 말렸다.

당연하겠지만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층 내려가려 계단까지 가는 것이 그렇게까지 귀찮을 일인가 하는 생각이나 떠올리고 있는 레릭을 포함한 다른 시종들과 시녀들을 덜렁 남겨둔 채.

"······ 저, 하?"

5층으로, 휙.

올라가버렸다.

* * *

책임.

자고로 사람이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내가 열심히 키우던 완두콩이 남의 방 창문 깨뜨린 일을 수습하기 위해 곧장 체르밀로 달려간 칼리안처럼 말이다.

"그대가 하는 말인즉슨."

체르밀 궁의 보안 마법이 작동했다는, 아니. 작동할 뻔했다는 말을 전해들은 이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칼리안 말고 이 모든 일에 대해 최종적인 책임을 지어야 하는 사람.

"왕세자가 1왕자의 방에 진입했다는 것인가."

오늘 사고 친 완두콩의 진짜 보호자였다.

"좋게 말해 진입이지, 가감없이 말하자면 침입이지요."

"······ 정정해주어 고맙군."

여행 마치고 돌아온 셋째 아들이 사고 안 치고 얌전히 잘 지내고 있었다. 카이리스로 돌아온 첫날에 제 형님 데리고 정혼자 만나러 나갔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입궁한 것은 르메인의 허락을 받은 일이었고, 돌아와 처음으로 참석한 귀족 회의 자리에서 그레이의 허리를 곱게 접어보인 일은 왕족에게 인사하는 법에 대해 몸소 나서 알려 준 친절한 교육이 아니던가. 그 정도의 일은 이제 르메인의 사전에 있는 '사고'의 범위에 안 들어간다.

아무튼.

그래서 이제 셋째도 다 컸구나 난 아무것도 안했는데 알아서 철이 들었구나 그걸 보고 대견하다 하면 앨런에게 또 혼날 테니 그냥 얌전히 있어야지 하고 첫째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계속 신경을 쓰며 지냈는데 그 사이 둘째가 사고를 쳤단다. 안 그래도 오늘은 커튼을 걷을까 내일은 정원에 나갈까 언제쯤 다시 얼굴을 보여주려나 전전긍긍 지켜보던 첫째를 좀 만나보겠다며 둘째가 창문을 깼단다.

"란델의 방이 5층인데."

"왕세자 저하의 방은 4층이지요."

"······ 설명해주어 고맙군."

도대체 어떻게 거길 들어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랬단다. 둘째 방이 4층이라 5층 테라스로 갔단다.

애가 셋이라 그런가.

돌아가며 하나씩 눈에서 벗어나는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하나.

"그나저나. 다친 아이는 없는가."

"마음이야 하나같이 진즉부터 해져있었고 몸 다쳤다는 말은 귀에 안 들어왔습니다."

앨런의 입에 또 칼이 담긴다.

이번 일도 결국 르메인의 잘못이 발단이기에 저리 구는 것임을 안다. 때문에 르메인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고,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앨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이 대화 중에 있고 칼리안 왕자님이 찾아갔습니다."

"그래."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르메인이 시종장 라울을 불러냈다. 그리고 체르밀 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절대로 밖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시켰다. 이 일이 왕궁 밖에 알려지면 플란츠의 세자위가 당장에 떨어져나가게 되고, 그 뒤에는 플란츠의 안위에 큰 문제가 생긴다는 것 정도는 르메인도 알고 있었으니까.

- 드르륵!

체르밀 궁의 기사들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함께 내린 르메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앨런의 목소리가 곧장 들려왔다.

"체르밀에 가려 하십니까."

"상황을 알았고, 급한 지시를 내렸으니. 가 보아야 하지 않겠나."

"그냥 계시지요."

다른 일에 대한 말싸움이 오가는 자리라면 앨런 역시 르메인을 막아서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옛 칼리안과 관련된 일이 아니던가. 그 자리에 선 플란츠가 무슨 말을 꺼낼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무턱대고 르메인을 옮겨다 둘 수가 없었다.

이런 앨런의 속내를 알 리 없고 알아서도 안 될 르메인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를 냈다.

"내 아들들의 일이네. 게다가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가서 살필 것이니 막아서지 말아주게."

"보살핌과 참견을 혼돈하지는 마시지요. 자식들의 일이라 하여 참견할 수 있을 모든 권리가 전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 때문에 벌어졌다 하여 모두 다 전하께서 끼어들 수 있는 일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만. 잠자코 지켜보십시오."

"허나, 후작."

"어려울 것 없는 일 아닙니까. 이미 숱하게 해오셨으니."

앨런의 입에 다시 한 번 칼이 담겼다.

그 칼이 결국, 르메인의 발을 막았다.

* * *

칼리안에게 할 수 없는 말을 한 번 참았다.

왜 이런 날 하필 그런 색의 장신구를 골라 내어놓느냐, 똑같이 잊혀진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 그 색을 왜 하필 이런 날 보여주느냐, 레릭을 향해 쏟아지려던 괜한 말을 한 번 참았다.

올라갔다. 그리고 물었다.

- 뚝.

언제까지 그리 숨어 지낼 생각이신지.

물었다.

창 너머로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 뚝, 뚝.

세 번.

세 번을 모두 참았다.

"······ 오랜만이구나."

에반이 죽던 날 밤.

호위를 가장한 기사 한 명이 플란츠의 창을 깨뜨리며 밖으로 뛰어내렸던 날. 그 날 들렸던 것과 같은 소리가 제 방에서 났음에도 란델은 놀라지 않았다.

들고 왔으면 창문에 대고 휘두르기나 할 것이지 한 손에 쥔 검은 곱게 둔 채로 왜 멀쩡한 팔을 써서 유리창을 내리쳤는지 묻지도 않았다. 제 어미를 빼어 닮더니 한치 앞도 못 보고 행동하는 모습도 닮아서 이러는지를 물을까 하다 그냥 내려놨다. 그런 말조차 이제는 건넬 필요가 없겠노라 여겼기 때문에.

"오랜만인 것은 아십니까."

"한 계절이 지났으니."

문 밖의 기사들이 다시 분주해지는 소리가 들렸다.

만약 란델이 큰 소리를 한 번이라도 더 낸다면 곧장 안으로 들어오겠으나 당장 들이닥치지는 않았다. 플란츠가 칼을 든 채라는 것까지는 모를 뿐더러, 이 안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어차피 플란츠가 다시 나가라 명령하면 따를 수밖에 없는 이들이 아닌가. 그들은 왕실의 기사였으며, 란델은 왕자였고 플란츠는 왕세자였으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밖의 기사들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란델의 깊고 푸른 눈이 플란츠의 손 끝에 가 닿았다. 검게 젖어든 짙은 잿빛의 재킷 소매 끝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뚝, 뚝.

새끼 손가락부터 팔꿈치까지 길게 이어진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 그것이 옅은 갈색의 카펫을 점점이 물들였다.

"치료가 필요하더냐."

"필요없습니다."

자신과 같은 것이 조금쯤은 섞여있을 그 핏자국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란델이 담담히 물었고, 그 핏자국에 찰나의 시선도 두지 않은 플란츠가 담담히 대답했다.

"다행이구나."

"네. 다행입니다."

"인사치레가 필요하더냐."

"주시면, 받겠습니다."

"받겠다 하면, 탑이 어디에 있는지 익혀두마."

"그러시겠습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왕세자에 대한 예의를 차리느니 차라리 왕궁을 떠나겠다는 대답. 정확히 예상했던대로의 반응이었던 터라, 플란츠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예를 받거나 위층에 거주하는 조용한 형제를 궁 밖으로 쫓아내기 위해 올라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치료도 인사도 필요없다면 이만 내려가거라. 차를 내어 올 상황은 아닌 듯 하니."

"하시는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내가 네게 해 줄 말이 기꺼이 들리지는 않을 터인데."

"어머니 닮았다는 얘기 지겹습니다. 말고, 다른 말 듣겠습니다."

"그것 말고 남은 말이 있더냐."

"있습니다."

"있다 한들. 내가 그런 것을 내어주겠느냐."

"하실 때까지 안 갑니다."

홍차 한 잔을 마시고 조용히 펼쳐 든 책의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찾아든 동생. 그 동생이 무어라 말을 하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창을 깨고 들어와서는 인사도 차도 필요치 않으니 다른 말 하나를 해 달라 하고 있었다.

저절로 흘러가는 시계소리를 잠시 들어넘기던 란델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하면 가겠느냐."

"미안하다는 사과입니다."

"내가 왜 너에게."

"저 말고, 형님의 동생에게 해주십시오."

플란츠 스스로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이미 안다.

플란츠는 절대로 자신을 란델의 동생이라 칭하지 않을 테니까.

"내가 그 아이에게 이제 와 미안할 일이 있겠느냐."

"있습니다."

"그 역시 있다 한들. 막내가 아닌 너에게 대신 전해야 할 이유가,"

"더 미루지 말고, 더 숨지 말고, 더 가리지 말고, 더 외면하지 말고. 형님도. 보시면 안 됩니까."

"무엇을."

"사실을."

"무슨 사실을 말함이더냐."

"아시잖습니까. 알기 때문에 이렇게 꼭꼭 숨어 계시는 것 아닙니까."

깊이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흐른다.

그 손으로 시나스타를 들어올린 플란츠가 란델의 발치에 그것을 내던지듯 내려놨다. 묵직한 것이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방을 울린다.

곧 플란츠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한 눈에 보아도 누구의 선물일지 알 수 있을 상자 하나를 가리켜 보였다.

"그 아이가, 저에게 검을 알려주고 형님에게는 장미 가지 쳐낼 칼날을 건넸습니다."

뚝.

"그런 아이가 맞습니까. 맞았습니까. 정말 기억이 안 납니까. 형님이 외면한 그 아이가 정말 그것을, 저것을 건네 줄 그런 아이가 맞습니까. 정말 맞다 여겨서 저것을 쓰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그리 숨어계십니까. 기어코 꺾인 것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는채로 이렇게 숨죽이고 계시는 겁니까."

붉은 것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린다.

플란츠의 손에서, 란델의 발치로.

- 장미가 꼭, 안네루시아를 닮았어요. 형님.

뚝.

- 그래서 빨간 장미를 보면 안네루시아 생각이 나요. 한 송이 한 송이마다 무슨 말을 누구에게 전하면 좋을까, 무슨 말을 담으면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저는 형님의 정원이 좋아요.

"형님 동생이 떠난 뒤 피워내신 그 장미가, 정말. 장미가 맞습니까."

뚝.

뚝뚝.

"······ 장미가 맞았습니까."

틱, 톡, 틱, 톡.

무엇을 해도 거꾸로 흐르지 않을 소리가 침묵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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