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54화 (355/527)

제63장. 희고 붉은 그 장미가(2)

언제쯤의 일일까.

가만히 그것을 가늠해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5월. 르메인의 탄신일이 있는 달.

카이리스 현 국왕의 탄신일이 포함된 5월은 대륙에서 가장 성대한 축제가 진행되는 달이다. 그렇다는 것은 베른이 신경써야 할 일들이 참 많은 시기라는 뜻이기도 했다. 각국의 수많은 방문객이 카이리스를 찾는 그 달은, 세크리티아의 세작을 카이리스에 잠입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기간이 아니던가.

때문에 꼼꼼하게 확인했었다.

르메인의 탄생을 축하하는 그 기간동안 카이리스 왕가의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어떤 손님이 찾아오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카이리스의 국왕이 혹시라도 세작의 잠입을 눈치 챈 듯한 행동을 보이지는 않는지. 가능한 많은 소식을 전해듣고 기억해뒀다. 대마법사 앨런 마나실이 카이리스를 언제 찾아오고 무엇 때문에 되돌아갔는지에 대한 것을 그렇게나 자세히 떠올릴 수 있었을 만큼.

- 카이리스의 1왕자 란델이 사고를 당했다.

그러니 란델과 관련된 일 역시 알고 있었다.

연례행사처럼 찾아갔던 기마 공연장, 그 곳에서 란델에게 벌어진 사고. 그 일의 배후라며 누명을 쓰게 되었던 멜피르 폴룬이 사형되었던 일에 대해서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 부상을 입은 란델 왕자가 요양을 위해 텐실을 찾았다.

그 사고.

란델이 한동안 카이리스를 떠나 있게 만들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그 일을 상기하고 막아내어 멜피르를 구했던 당시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

'카이리스에도 치유사가 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치유를 하실 수 있는 란델 형님이 굳이 그 정도 부상의 치료를 위해 텐실까지 가셨던 이유는······.'

과거의 란델은 카이리스 왕실의 치유사에게 치료를 받지도 않았고 스스로를 치료하지도 않았다. 대신, 치료를 이유로 몇 달 동안을 텐실에서 머무르다 돌아왔었다.

'브리센이 벌인 일임을 알아서였던 거겠지.'

란델은 브리센을 피했던 것이리라고. 사실은 멜피르가 아니라 브리센이 벌인 일임을 알았기 때문에, 브리센을 피하기 위해 그 정도의 경미한 부상을 치료하겠다는 이유로 카이리스를 떠났던 것이리라고. 카이리스에 머무르던 텐실의 치유사도 믿지 못하고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음을 알리지도 못한 채 부상을 핑계로 텐실에 찾아갔으리라고.

'그랬다는 건, 역시.'

살고 싶어 갔든.

죽기 싫어 갔든.

눈 감고 귀를 막은 채 장미만 어루만지던 왕자가 그 정도의 부상에 굳이 몸을 피했던 이유. 자신을 덮친 사고와 브리센을 곧바로 연관지을 수 있던 이유.

그 날의 사고가 처음이 아니었으리라.

적어도 한 번은 더, 목숨의 위협을 받았으리라.

"형님."

생각을 마친 붉은 눈이 다시 뜨여졌다.

연두색 눈을 향했다.

단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칼리안에게 가로막힌 제 발 끝만 내려다보던 연두색 눈이 붉은 눈을 마주 바라봤다. 세상을 담기 시작한 연두색 눈이 세상을 막기 시작한 붉은 눈을 마주 바라봤다.

"플란츠 형님."

오랜만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서늘하다 느껴지는 것이 오랜만이다.

저렇게나 붉은 눈이 어떻게 저 정도로 서늘해질 수 있는지, 그런 궁금증이 오랜만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부러 만들어 낸 눈빛 말고 저도 어쩌지 못해 드러난 기색. 그런 얼굴을 마주하는 일 역시 오랜만이다.

저 눈길이 낯선가.

저런 눈을 하고 저리 부르는 것이 어느새 낯설다 느껴지게 되었나.

"······ 왜."

그렇게나 오랜 날이 지났던가.

시간이 그리 많이 흘러갔던가.

저 부름이 낯설다 여겨질만큼.

어느새.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

"제가 뭘 궁금해하고 있는지 모르실 분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모르겠는데."

"란델 형님께서 혹시 알고 계셨는지······ 란델 형님께서 알고 계셨다는 걸 형님도 알았는지. 그것을요."

"그러니까, 뭘. 형님과 내가 뭘 알았다는 건데."

"제가 아침마다 받은 차를 란델 형님께서도 받았다는 것을. 그러니 저도."

과거.

체르밀 궁의 5층에 잠시동안 불이 꺼져있게 된 그 사이.

체르밀 궁의 3층에 불이 켜지게 될 일이 영영 사라졌다.

체르밀 궁의 4층은, 그렇게 영원히 홀로 빛나게 되었다.

"······ 나도. 독이 든 차를 받았으리라고."

"칼리안."

"란델 형님께서 그 사실을 알고 계셨는지. 그것을 형님은 알고 계셨는지. 이제는 제가 알고 싶습니다."

옛 칼리안이 지워두고 간 기억.

옛 칼리안이 남겨두고 간 기억.

옛 칼리안의 잔재 위에 선 칼리안이 서늘한 눈을 한 채로 원망의 대상을 찾고 있었다. 옛 칼리안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온전한 칼리안이기 때문에 가지게 된 원망. 그것이 담긴 눈빛임을 플란츠는 알았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저 눈 덕에 칼리안이 바뀌었음을 알게 되었었는데 이번에는 저 눈 덕에 칼리안이 바뀌지 않았음을 깨닫고 있으니.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지 않나. 미리 알 수 있었다 한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래."

"거짓말. 또."

칼리안의 다그침에, 플란츠의 눈에도 서늘함이 들었다.

- 어차피 달라질 것이 없다니. 정말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 내 생각이 틀리더냐.

- 형님만이라도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무엇이든 어떻게든 달라졌을 겁니다.

- 그래. 그랬을 테지. 적어도 이 자리에서 네 무의미한 투정을 들어 줄 형제 한 명은 사라지고 없었을 테니 그 정도면 많은 것이 달라지는 것이겠지. 그것이 아쉬워 이리 구는 것이냐. 네 어미가 네 걸림돌 하나를 못 치우게 된 것이, 그것이 그렇게나 아쉽더냐.

"······ 알면. 알았으면. 아침마다 네 시종이 들고 간 그 차에 뭐가 들었는지 형님이 알 수 있었으면. 그걸 내가 알았다면. 그랬다면. 뭐가 달라지는데. 대체 뭐가 달라지는데."

칼리안과 똑같은 눈빛을 한 플란츠가 기억 속의 란델과 똑같은 대답을 입에 올렸다. 그러자 플란츠와 똑같은 눈빛을 한 칼리안은,

"무엇이든. 달라졌겠죠. 어떻게든 달라졌겠죠."

그 날의 플란츠와 똑같은 대답을 했다.

"달라졌어야 했겠죠······."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었으나 사실은 그 어떤 것이든 달라졌어야 했다고.

무엇이든 달라져야 했다고.

하지만 달라지지 않았다고.

- 네. 아쉽습니다.

참으로 아쉽게도.

* * *

- 달칵.

조용한 움직임으로 찻잔을 내려둔 이가 입술을 달싹였다. 다만 그 사이로 말이 새어나오진 않았다. 잠시 흔들리다 움직임을 멈추는 찻물을 한동안 내려다보던 이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발을 물렸다. 그러다 안되겠다는 듯 다시 한 걸음을 다가와 조심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새벽에 비가 내렸습니다."

그렇게나 고르고 골라 꺼낸 말이 결국은 비가 내렸다는 이야기였다. 비가 내렸으니 무엇을 해야 한다거나 무언가를 보아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비가 내렸다고만 했다.

틱, 톡, 틱, 톡······.

하얀 고양이도 잿빛 고양이도 까만 고양이도 없는 그 곳에 시계 소리가 가만가만 울렸다.

찻잔만 내려놓고 나가야 했을 시종이 어쩐 일로 말을 걸어오는 것에, 그 뒤에는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에, 잔잔한 홍차 향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힘들게 건넨 것이 분명한 시종의 말에 대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답을 전했다.

"그래. 소리를 들었다."

"네, 왕자님."

틱, 톡, 틱, 톡.

사람의 목소리 대신 시계 소리가 다시 울린다.

자리를 떠나지도 않고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 란델의 시종 덴이 다시 목소리를 냈다.

"커튼을 걷어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비가 내렸고, 커튼을 걷어도 괜찮을지.

상관관계를 따져보기 어려울 말을 조심스레 건네는 덴의 눈길은 창 밖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란델의 책상 위, 정확히는 그 책상 위에 놓인 칼리안의 선물에 닿아 있었다.

참 많은 의미가 담겨있겠으나 덴으로서는 그 많은 의미를 다 파악할 수 없던 선물. 가치를 따져보기도 어려울 정원 가위들이 담겨있는 화려한 상자가 덴의 시선을 받으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두거라."

"······ 날이 좋습니다."

란델은, 체르밀 궁을 잠시 벗어났던 다른 두 형제가 돌아온 뒤로 커튼을 내렸다. 창 밖에 비가 오는지, 해가 저무는지. 달이 뜨고 새벽이 찾아드는지, 바람이 부는지. 그 모두를 무시하며 지냈다. 그렇게 지낸지 꽤 많은 날이 흘렀음에도 계속 그리 지냈다.

정원에도 나가지 않았다.

"되었으니. 두거라."

봄비가 내렸다 하는데도.

* * *

결국 플란츠는 답을 주지 않았다.

란델에게 사과 받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란델과 플란츠는 어떤 것을 알고 있었는지, 둘 사이에 대체 무슨 말이 오갔는지. 그 어떤 것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오해는······ 하지 말지. 모르셨다 했으니.'

다만 이 말만은 전했다.

칼리안의 차에 무엇이 들었을지 란델이 미리 알고 있지는 못했다고.

그것이 곧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이 되었다.

결국 란델은 옛 칼리안에게 독이 든 차가 전해지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을. 때문에 모르고 지나친 사실을 플란츠가 눈치챘다는 것을. 안 그래도 골이 깊었던 듯한 둘 사이가 그로 인해 완전히 멀어졌으며 란델 역시 플란츠의 르니에리가 되었다는 것을. 그 모든 사실을 칼리안에게 들킨 셈이 되었다.

"답을 알려드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입에 올리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말을 전해들은 현명한 대마법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 때문이겠죠."

"네. 왕자님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관련된 일이라서요."

"네. 왕자님께서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가장 만들기 어려운 민트차를 내려놓은 앨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을 덧붙였다.

"그 일로 인해 잃은 것과 얻은 것이 한 가지인데 그것을 어찌 왕자님께 상세히 알리겠습니까."

옛 칼리안이 사라진 자리에 칼리안이 들었다.

옛 칼리안이 사라졌기 때문에 칼리안이 산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이 한 가지다. 그러니 플란츠는 옛 칼리안이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해 칼리안에게 알리지 못한다. 잃어버린 자리가 비어있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동생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그 동생이 이제 없기 때문에 살고 있는 또 한 명의 동생에게 어찌 말하겠는가. 알린다 하여 달라질 것 하나 없는 그 말을. 어찌 말하겠는가.

"원망스러우십니까."

"누구에 대한 원망 말씀이십니까."

"왕자님께서 생각하시는 모든 이들에 대한 원망이겠지요. 브리센과 전하, 그리고 저하와 란델 왕자님에 대한 원망이 들지 않겠습니까."

"원망이 없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상처를 주고 결국은 떠나보낸 그 모든 이들에 대해 원망이 듭니다. 다만······."

"란델 왕자가 나서지 못한 이유도 이해가 되십니까."

"······ 네. 원망스러우나 이해가 된다 하면. 이해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원망스럽다 하면. 기만일까요."

"제가 답을 드리면, 그것이 기만이겠지요."

옛 칼리안을 대신해 원망할 자격을 허락받은 이는 오직 칼리안 뿐이지 않나. 그에 대해 앨런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는가.

"원망도 되고 이해도 되고. 그렇습니다. 그 아이가 살 수 있었다면 제가 또 어찌 되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렇습니다.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이 듭니다. 그것 역시 기만일까요."

"기만이라 하기보다는······ 슬픈 일이라 해야겠지요. 굳이 그런 것을 따져보는 삶을 살고 계시니."

칼리안이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괜찮습니다. 이미 지난 일에 더는 연연하지 않겠노라 했으니. 잠시 원망하고, 그러다 결국 이해하고. 하지만 조금 아쉬워하고. 그리 살기로 했으니 그렇게 다시 살 겁니다. 그래서 괜찮습니다."

담담하게 답한 칼리안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세크리티아에서 건네 온 귤 하나를 집어 껍질을 벗겨냈다. 익숙한 손길에 모습을 드러낸 샛노랗고 단 귤의 알맹이를 잠시 내려다보던 칼리안이 그것을 제 스승에게 건넸다. 애정 가득한 민트차와 말에 대한 보답이었다.

"다만 아버지. 그보다는 한 가지 걱정이 들어 찾아왔습니다. 입 밖으로 풀어놓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걱정이 들어서요. 누구에게든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요."

"무엇에 대한 걱정이 그리 크게 들었는지요."

"저에 대한 걱정이요."

숨김없이 답을 전한 칼리안이 민트차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은 손을 잠시 쥐었다 펴 보며 말을 이었다.

"폴룬 남작도, 히나도, 에일라도. 지금은 모두가 잘 살고 있습니다. 과거와 다르게요. 과거와 달라지지 않은 것은 저 뿐입니다."

베른을 이야기함이 아니었다. 지금의 스스로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칼리안에게 제 몸을 내어주고 과거와 같은 날에 떠나게 된 옛 칼리안을 말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몸을 가지게 된 낯선 이의 어색한 말투를 고쳐주고 기억을 넘겨주어가며 저를 도왔습니다. 저에 대해 모두 이해하였으니 죄책감 없이 계속 살아가라 다독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 하고 떠났습니다."

"네. 그랬다 하셨지요."

"그래서 처음엔, 복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비록 말로는 남은 이들을 걱정하며 떠났지만 그것이 진심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짜 속마음으로는 모두를 원망하고 저주하면서. 스스로 앞날을 바꿀 수 없다 여겨서 어떻게든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에 저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도와준 뒤에 떠난 것이 아닐까. 제가 그들 모두에게 복수해주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믿었습니다. 차라리 그리 떠났다면 좋겠다 여겼습니다. 그런데 란델 형님에 대한 기억을 지운 것을 알게 되었네요."

손에 들린 노란 귤을 한 조각 입에 넣고 삼킨 앨런은 다른 말 없이 칼리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칼리안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만약 원했던 것이 복수였다면······ 지웠어야 할 기억은 란델 형님의 무관심이 아니라 플란츠 형님의 서로 다른 행동이 아니었겠습니까."

"예전의 왕자님께서 지금의 왕자님으로 하여금, 플란츠 왕세자 저하를 이해하고 란델 왕자를 미워하지 않아주길 원했다는 말씀이신지요."

"네. 제가 새로운 형제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까봐, 그것을 염려한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그런 기억들을 감추고 지워 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옛 칼리안이 반대로 굴었다면 어땠을까.

칼리안과 단 둘이 있던 플란츠와 다른 이의 앞에서 칼리안을 대할 때의 플란츠가 어떻게 달랐는지에 대한 기억을 다 지우고. 란델 역시 독차를 마셨을 지 모른다는 기억을 그대로 두었다면.

플란츠의 속내를 지금의 칼리안이 파악하지 못하도록, 옛 칼리안에 대한 란델의 무관심을 잊지 않고 상기할 수 있도록. 그리 해두었다면. 그랬다면 지금의 칼리안이 지금의 형제들을 이해하려 들 수 있었을까. 결국 이해를 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그리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모순이 아닙니까, 아버지. 그 아이가 자신의 몸을 차지할 사람이 자신의 두 형제를 증오하고 복수라도 하면 어쩌나 그렇게 걱정을 했다면. 자신의 기억을 지우고 떠날 만큼 걱정했다면. 그랬다면 저에게 제 몸을 내어주고 저를 도울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저를 돕지 않는 것이 나은 것 아닙니까. 이 몸에 적응하지 못하도록, 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곧바로 정체를 들키도록, 그래서 탑에 가거나 광장의 레니시타 잎 위에 서게 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 네.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걱정이 됩니다. 혹시나 그 아이는 애초부터 이 모든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뜻일까봐서요. 강요받은 것일까봐서요."

"애초부터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제가 이 몸에 들어서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나 우려해가면서 굳이 제 몸을 저에게 넘긴 것이 혹여 강요받은 것이 아니었을까. 원치 않았으나 억지로 이해를 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 아이 나름대로 방비를 해두고 저를 도왔던 것이 아닐까. 하고요."

"세렌티를 말씀이신지요."

"세렌티였든. 다누였든. 시스파니안이었든. 혹은 다른 누구였든."

이유는 알지 못하나 이 모든 것이 결국 누군가의 안배였다면.

어차피 이르게 사라질 목숨이니 잘 쓰이기나 할 수 있도록, 제 몸을 차지하고 들어올 베른을 도우라며 그 아이에게 강요했다면. 그런 말도 안되는 요구를 옛 칼리안이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라면.

그 아이는.

그 강요에 순응하기로 하였으나 베른이 혹시나 제 형제들을 해칠까 그 와중에도 걱정을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플란츠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 두고 란델에 대한 기억만 지운 것이 아니었을까. 그나마라도 애를 써 둔 것이 아닐까.

"그것이 강제된 이해였을까봐. 걱정이 됩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일을 이끌어 온 것이 누구였든 저는."

그것이 걱정이 되어서.

앨런을 찾아와 전부 다 털어놓듯 입 밖으로 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만큼 비통하여서.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앨런이 깊은 침음을 냈다.

칼리안의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시게 들려서 입에 담긴 다디단 귤에서도 시디 신 맛이 났다.

"만약 왕자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신 맛을 삼켜낸 앨런이 이렇게 입을 열었다. 다만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

앨런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칼리안이 자리에서 다급히 일어났다. 그의 시선 역시 앨런과 같은 곳을 향한 채였다.

"스승님."

"네. 체르밀 궁입니다."

체르밀 궁.

그 곳에서 갑작스레 거대한 마나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곧 앨런이 칼리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칼리안과 다르게 앨런은 차분한 얼굴로,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눈으로 본 것처럼.

"가서 말리시지요. 소란이 일지 않도록 해 둘 터이니."

조용조용한 말과는 달리 앨런의 몸에서 강한 마력의 기운이 뻗어나간다. 때문에 이런 말을 듣고도 상황을 모두 가늠하지 못한 칼리안이 의문을 전하려 했을 때,

- 똑똑!

다소 다급한 듯한 노크 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그 뒤에는 다른 허락이 없었음에도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죄송합니다. 무례에 대해서는 차후에 벌을 받겠습니다. 아무래도 일이 커지기 전에 칼리안 왕자님께서 와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사과의 말.

정중하나 다급한 말이 이어진다.

"플란츠 왕세자 저하께서, 란델 왕자님 방의 테라스로 침입하셨습니다. 덴이 호위기사들을 부르려는 것을 간신히 막아놓고 오는 길입니다. 왕세자 저하를 좀 말려주세요."

스스로도 어처구니 없는 일임을 안다는 듯한 레릭의 이야기. 그 소리를 들은 앨런이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자네가 모시는 분께서 이미 윗층 창문을 깨셨다네."

"네? 우리 저하께서요?"

"그렇다네."

플란츠가 란델의 테라스로 넘어갔단다.

레릭이 그런 플란츠를 말리지 못해 칼리안을 찾아온 사이에 인내심 사라진 플란츠가 란델의 창문을 깨버렸단다. 보안 마법이 작동하는 것은 어차피 앨런이 잘 막아 줄 테니 에라 모르겠다 그냥 받지 못한 인사나 좀 받고, 인사 받는 김에 사과도 받겠다며 란델의 창문을 깨버렸단다.

시스파니안의 보안 마법이 작동하는 것을 일단 막은 앨런과 자신을 찾아온 레릭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 칼리안이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방금 전까지 앨런과 나누고 있던 아픈 말들을 싹 까먹은 채였다.

"······ 아······."

내가 뭘 잘못 가르쳤기에 우리 형님이 저렇게 컸을까.

"환장하겠네······."

아.

내가 정말.

질풍노도의 완두콩 때문에 내가 정말 환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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