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53화 (354/527)

제63장. 희고 붉은 그 장미가(1)

물론 얀은 그렇게 말했다.

이 왕궁에서 하는 일 제일 없는 사람이 바로 칼리안이라고.

"그게 좀 억울한데. 나 진짜 바쁘거든."

할 일이 태산이다.

시스파니안을 만나 해룡 아르나이젤이 시간의 축 조각을 얻었다는 것을 알려야 했고, 아르나이젤이 그걸 멋대로 쓰는 바람에 잠깐 죽을 뻔했다는 것도 일러야 했다.

물론 더 중요한 건 후자다.

"새파란 그 생선이 뭔 짓을 했는지 내가 시스파니안한테 꼭 일러바칠거야."

"생선이요?"

"응. 엄청 고약한 생선."

"생선이 뭘 했는지 시스파니안에게 이르느라 바쁘다는 말씀이세요?"

"아니야, 얀. 그것 말고도 할 일 많아."

얀에게 하모니카를 가르치고 드미레아와 대련을 하고 리리에에게 양손 쓰는 법을 알려주고 플란츠에게는 검술 뿐 아니라 마력을 슝슝 다루는 법도 계속 가르쳐야 한다. 무엇보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가는 키리에의 검을 꾸준히 봐줘야 했다.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에일라가 준비하는 새로운 정보 조직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줘야 하고 에우리아의 학교 일과 멜피르의 상단에 다른 문제는 없는지도 살펴야 한다. 간간히 휘트린 영지의 사정도 보고받아야 했고 시오나를 만나 이야기도 좀 나눠봐야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 땅에서 나는 가장 아름다운 꽃을 모아 건네주고 세상에서 가장 구하기 어려운 보석을 엮어 걸어주고 밤의 하늘과 여름의 바다와 한낮의 바람과 겨울의 숲 속에서 가장 고귀한 것들만 담뿍 담아 안겨주어도 더 줄 것이 없어 아쉽기만 할 우리 히나의 이번 생일에는 뭘 선물할지도 고민해야 했다. 벌써 몇 달 안 남았다.

아르센은 뭐.

저 혼자 뭐든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바쁘셔도 세 끼 식사에 티 타임까지 꼬박꼬박 다 즐기고 계시니까 왕자님 바쁘신 것 아무도 안 믿는 거예요. 매일매일 한 시간이 넘어가도록 목욕하는 것까지 잘 챙기고 계시잖아요."

"언제는 잘 먹고 푹 쉬어서 좋다며."

"좋죠. 당연히 좋죠. 그냥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에요."

볶은 귀리를 우려낸 차를 우아하게 마시고 내려놓은 얀이 오해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아까 보니까 레릭은 오늘도 빵이랑 햄이랑 샐러드랑 챙겨서 빌헬름 관으로 가던데요. 그쪽 일이 많이 바쁜가본데 왕자님은 그렇게 안 바쁘신 것 같아서 부럽다 하더라고요."

"내가 한가한 게 아니라 형님이 더 바쁜거야. 아무튼 자업자득이지. 그러게 누가 그렇게 무턱대고 국경 너머로 놀러가쟀나."

빌헬름 관의 일이 많이 밀렸단다.

아주 많이, 심각할만큼 밀렸단다.

그럴 줄 모르고 떠난 여정도 아니었을 테니 며칠 제대로 식사 못하는 것쯤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칼리안을 돕기 위해 벌인 일이라지만 그렇다 해서 칼리안이 빌헬름의 일을 도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아무튼 어른이 되려면 자기가 한 행동에 책임도 져 볼 줄 알아야 하는 법이 아니겠나.

제 의사와 무관하게 끌려갔던 아르센은 뭐.

저 혼자 뭐든 알아서 하겠지.

"그러고 보니 벌써 날이 꽤 지났는데."

아몬드가루와 채 썬 코코넛을 달지 않게 반죽해 얇게 구워낸 튀일을 한 입 먹자 바삭거리는 소리가 난다. 비슷한 듯 서로 다른 귀리 차와 썩 잘 어울리는 맛이다. 여유 가득한 얼굴로 나른한 티 타임을 한동안 즐긴 칼리안이 얀을 쳐다봤다.

"지그프리드 공작 부부는 아직 안 돌아오셨나?"

"네. 며칠 내로 도착할 것 같다고 연락은 받았습니다. 혹시 아버지에게 전하실 말씀이라도 있으면 정확한 날짜 확인해볼게요."

"아니. 지그프리드 공 말고, 지그프리드 남작에게 할 말이 있어."

"어머니요?"

"응."

세리에 지그프리드.

킨즈 변경백의 딸이기도 하고 슬레이만의 아내이기도 하고 얀과 드미레아의 어머니이기도 한 사람. 지그프리드 공작령을 이루는 여러 도시의 기사단을 총괄하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사탕을 잘 만들고 쿠키도 만들고 종종 여행도 다니고 온천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

칼리안이 세리에를 언급하자 잠시 의외라는 얼굴이 되었던 얀이 물었다.

"왕궁에서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공작저로 가시겠습니까?"

로젤리타를 위해 지그프리드령을 방문했던 이후로 만난 적 없는 세리에를 왜 찾는지,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 예정인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세리에의 아들이자 칼리안의 측근이 아니라 왕자의 시종이 해야 할 일은 스케줄을 정리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공작저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레릭에게도 얘기 전해서 일정 같이 잡아줘."

"왕세자 저하도 동행하시는 겁니까?"

"응. 내가 아니라 형님 일로 만나보려는 거라서."

"네. 알겠습니다. 가능한 빠르게 일정 정리해서 알려드릴게요."

이 말을 들은 칼리안이 웃는 소리를 냈다. 덕분에 얀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자, 칼리안이 조금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말했다.

"얀. 네 어머니 일이잖아. 궁금하다는 낯을 그렇게 숨기지도 못하면서 왜 물어보질 않아. 그런 건 궁금해해도 괜찮아."

키리에도 그렇고 플란츠도 그렇고, 얀까지.

다들 왜 이렇게 궁금함을 감춰가며 사는지.

"그러다 혹시나 제가 또 선을 넘을까봐 걱정이 되어서요."

그런데 얀이 이런 대답을 했다.

또, 라고.

칼리안의 웃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깜빡.

깜빡.

아무 말 없이 몇 번인가 눈을 깜빡이며 얀을 보던 칼리안이 눈을 내리떴다.

"······ 내가. 너한테."

깜빡.

- 캐묻고 궁금해하고. 적당히 넘어가는 법도 모르고. 매일매일 사사건건 하나하나 참견하려 들지. 너 그러는 거 마음에 안 들어. 불편해. 성가셔. 정말, 성가셔.

······ 깜빡.

- 상급 시종이 되고 나더니 이제는 아예 내 보호자 놀음이라도 할 생각이야? 네가, 왜? 대체 어디까지 선을 넘을 거야?

그래. 그런 이야기를 했다.

했나보다.

"아니에요, 왕자님. 제가 괜한 말을 했어요. 저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을 했어요."

"아니야, 얀. 내가 그런 말을 했던 건······."

그런 이야기를 얀에게 한 것은 지금 떠올랐는데.

기억이 안 난다.

왜 그랬는지. 무슨 일 때문에 그랬는지. 새하얀 백지가 된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지워낸 것처럼. 대리석 위의 얼룩을 물수건으로 닦아낸 것처럼.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야. 그런 게 아니었어. 미안하다고 하려고 했는데 못 했어. 말 실수를 했다는 걸 알았는데. 미안하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어서 못 했어. 그렇게 덮어두다가 잊어버렸어, 내가. 잊어버리면 안 됐던 건데.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어서.

옛칼리안이 왜 얀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진심이 아니었던 것만은 알 수 있어서.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독한 말들을 지독하게 후회했던 것만은 알겠어서.

"미안해, 얀. 상처를 줘서."

옛칼리안을 대신해 이제야 생각난 기억의 파편을 들춰내며 입을 열었다. 전하고 싶었으나 끝내 전하지 못한 사과를 대신 입에 담았다. 그대로 묻힐 뻔한 말에 대한 사과를 이제라도 건넸다.

"······ 네."

괜찮다는 말이나 그런 소리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 대신, 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많이 늦어버린 사과를 받았다.

"그럼 얘기해주세요. 왜 아버지 말고 어머니를 만나려고 하시는지, 궁금해요."

"그래."

얀의 참견을 성가셔하지 않고, 걱정을 기꺼워하고, 저보다 까마득할 만큼 강한 사람임을 알면서도 전전긍긍 어떻게든 보호하려 하는 것에 기대는 칼리안임을 얀도 아니까. 상처가 됐던 것은 맞지만 그런 칼리안을 보면서 어느새 조금씩 혼자 아물었으니까.

이미 늦은 일들을 마음에 계속 담아두는 대신, 사과 잘 받은 것으로 털어낸 얀이 차 한 모금을 더 마셨다. 그런 얀의 안색을 살핀 칼리안이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칼리안이 작은 검 두 자루의 모습을 한 오러를 만들었다. 이제는 얀도 익숙한 모양의 검, 시나스타였다. 그것을 손가락 끝으로 하나씩 잡은 칼리안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형님의 검은 이렇게, 둘로 나뉘잖아. 드미레아가 쓰는 것처럼 무거운 검으로도 쓰고 나누어서 양손 검으로도 쓰고."

"네. 기억해요."

"그런데 이걸 이렇게 잡으면."

곧 칼리안이 두 검의 손잡이 끝을 서로 마주 대고 잡았다. 그러자 가운데에 손잡이를 두고 양쪽에 날이 있는 기다란 무기가 손 끝에 들렸다.

검의 조합을 눈치 챈 칼리안이 이미 한 번을 알려준 것. 그래서 히나를 앞에 두고 싸움을 했던 플란츠도 이미 사용해봤던 방법.

"창이네요."

"진짜 창과는 많이 다르지만. 검보다 창에 가까운 길이기는 하지. 그런데 나는 검이 아닌 무기에 대해서까지 그렇게 해박하진 않아서. 특히 이렇게 긴 무기는 더더욱."

"아, 그래서 어머니를 만나시려는 거예요?"

"맞아. 에반이 이런 식으로 검을 쓰는 걸 제대로 보여주질 않았어서. 배운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두기엔 이 검이 너무 아깝거든."

플란츠는 똑똑하다.

세상의 그 누가 머리로 무기를 배우고 쓰느냐 비웃을지 모르지만 플란츠는 가능하다. 그 좋은 머리로 당장 오러를 일깨우고 검술의 대가가 되는 것이야 당연 불가능하겠지만 새로운 것을 배우고 조합하는 것에 있어서 그보다 탁월한 이는 없을 터였다.

"아, 그럼······ 지그프리드가의 사람에게 브리센의 검술을 발전시킬 방법을 배우게 되는 거네요."

"그렇지. 그래서 조심스러운데 그래도 한 번 만나서 얘기를 좀 해보고 싶어."

"알겠습니다."

여전히 얀은 선뜻 알겠다 대답했다.

"도와드릴지 말지, 어차피 선택은 어머니가 할 일이니까요. 그건 저도 드미레아도 아버지도 상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직접 얘기를 해보세요."

"그래. 고마워."

버릇처럼 이어진 고맙다는 말.

"네. 날짜 정해지면 알려드릴게요."

"응. 알겠어."

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래도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고맙다는 말이 듣기에 훨씬 더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최근 꼬박꼬박 잊지 않고 챙기는 것.

해야 할 많은 일들 하나씩 하기, 고기가 잔뜩 든 식사 많이많이 하기. 그리고 또 하나.

새카만 오닉스로 만든 욕조 속에 푹 잠겨든 채 생각의 꼬리를 이어나가는 일.

- 톡, 톡, 톡.

습관처럼 욕조 모서리를 두드렸다. 그리고 욕실의 한쪽 면 전체를 가득 채운 두터운 창 밖을 바라봤다.

밖에서는 내부가 보이지 않는 특수한 유리로 만들어진 창문. 그 너머로 밤하늘이 보였다. 달빛이 꽃잎처럼 바스라진 듯, 가느다란 달과 수많은 별이 한 눈에 들어온다. 평소였다면 다른 생각을 이어나가면서도 그 멋진 하늘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을 텐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왜 생각이 안 날까."

낮에 얀과 주고받은 대화 때문이었다.

칼리안이 기억하는, 옛칼리안이 그런 것을 입에 담았다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모질었던 말. 그것을 언제, 왜 했는지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서. 그것이 너무 이상해서 계속 기억을 떠올려보려 애를 쓰고 있었다.

"세렌티 짓은 아닌 것 같은데······."

세렌티가 일부러 기억을 지운 것이라면 기억이 사라졌다는 사실까지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 않았던가. 헌데 기억이 지워진 것은 알고 있으니 세렌티가 한 행동은 아니었다.

- 톡.

이제껏 기억이 '지워진' 것 같던 경험을 한 적 없었다.

세렌티는 아니다.

세렌티가 아니다.

- 톡, 톡.

그렇다면 단 한 명.

"칼리안."

돌아올 대답은 없을 부름이 칼리안의 입가를 맴돈다.

"무엇을······ 왜 숨겨두고 갔어?"

그 작은 목소리가 결국은 손끝의 물방울을 따라 흘러가 사라졌다. 바스라져 흩어지는 별빛처럼 스러졌다.

* * *

잘 내리지 않던 이슬비가 내리고 그쳤다.

언제 왔는지도 알 수 없도록 소리없이 찾아왔다 떠나간 비에, 새벽 왕궁이 소슬하게 젖어들었다.

- 쉬이익!

날카롭게 뻗어나간 검이 칼리안의 목젖 바로 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아직 다 밝지 않은 하늘 대신 수련장 안을 밝게 비추는 마법 등불이 여럿 있었으나, 방금 지나친 검날에는 그 어떤 빛도 반사되지 않았다.

한 걸음도 물리지 않고 고개만 살짝 뒤로 물려 그 날선 공격을 피해낸 칼리안이 곧바로 어깨를 틀었다. 쉼없이 찾아든 두 번째의 검에 밝은 불빛이 반짝, 하고 잠시 반사됐다.

어느새 둘로 나뉜 붉은 검.

두 검이 지체없이 내리그어졌다.

- 카강!

검을 되돌리는 대신 재빨리 몸을 회전시켜 칼리안의 공격을 막은 플란츠가 눈을 찌푸렸다.

- 탁!

그리고 들으라는 듯 큰 발 소리를 내며 한 걸음을 뒤로 물렸다. 낮은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또. 왜."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왜 또 생각이 많으시냐고."

칼리안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대련 중 아주 잠시 흐트러졌던 검격 한 번.

찰나와 같이 멈췄다 이어진 발 소리 한 번.

칼리안 속내를 알아보는 얀도 얀이지만, 칼리안의 행동을 죄 외워버린 플란츠도 이제는 도무지 속여넘길 수가 없게 되었다.

"제 생각이 많은 이유가 궁금하신 겁니까."

"아니면 또 뭐가 있나."

"그······ 형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사실 저도 제 사생활이라는 게 있는데요."

"어디에."

지나치게 당당한 대꾸에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진 칼리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 아닙니다. 언젠가 어딘가에는 있었겠죠. 있긴 했겠죠. 지금은 없나 봅니다. 없네요. 사생활."

불만스럽다는 듯 이야기한 칼리안이 오러를 갈무리했다. 더 이상 대련을 하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그러자 찰칵, 하고.

반짝이는 검과 반짝이지 않는 검이 하나로 합쳐졌다. 두꺼운 검 한 자루가 된 시나스타를 검집에 집어넣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설명."

자, 이제.

저 두 글자를 풀이하자면.

네 사생활이 있는지 없는지는 딱히 안 궁금하고 또 뭔 생각을 했길래 대련에 들어서까지 거기에 메여서 목이 베일 뻔했는지는 좀 궁금해졌으니 그것이나 설명하라는 뜻이다.

물론 칼리안의 해석이다.

결국, 앨런이 즐겨 마시는 커피처럼 진하고 진한 한숨을 길게 내쉰 칼리안이 이야기하기 꺼려진다는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말을 시작했다.

"지워진 기억이 있습니다."

"세렌티 말인가."

"아뇨. 세렌티가 지웠다는 것과는 양상이 좀 다릅니다."

"그럼."

"이전에는 제가 궁금해하는 기억들은 대체로 어렴풋이나마 떠오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생각이 안 납니다. 단순히 기억이 가물거리거나 자연스레 잊혀진 것과 다르게 벽에 막힌 듯한, 혹은 지워놓은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러니까······ 예전의 제가 일부러 남겨놓지 않은 것처럼, 그 한 부분만 뺀 기억을 지금의 저에게 넘겨 준 것처럼요."

"그게 어떤 건데."

"어제, 예전의 제가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얀에게 했던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과 관련된 기억이요."

"무슨."

아, 정말.

끈질기기도 하다.

"······ 그냥. 독한 말이요. 독한 말을 했는데. 그 말을 왜 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무엇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꺼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말을 했던 일은 정확히 기억이 나는데 이유가 떠오르질 않습니다."

"아우님의 그 잘난 시종에게 한 말이라며. 그럼 알 것 아냐."

"네. 그래서 얀에게 물어봤는데."

말꼬리를 길게 늘린 칼리안이 한참이 지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도로 닫았다가 한참이 지난 뒤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더 들으시면 형님 후회하실 텐데."

"반말."

"그만 들으시죠. 후회하실 겁니다."

이렇게 건네져 오는 말을 물릴 만큼 호기심 없는 플란츠가 아니었다. 때문에 플란츠가 칼리안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더 끌지 말고 얘기하라는 의미를 가득 담은 채였다.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쉰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란델 형님께도 혹시 아침 차가 계속 가는지를 궁금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얀이 그것을 왜 묻는지를 물었다고 했고요. 그랬더니······ 참견 말라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얀에게요."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플란츠의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 다시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이다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제가 괜한 생각을 한 것 같기는 합니다만. 증거도 없고 근거도 없는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 대련 그만하지."

후회한다 했을 때 말을 들을 걸.

반대로 이번에는 플란츠가 대화 마치기를 종용했다.

그리고 시나스타의 검집을 쥔 손에 힘을 한 번 꾹 준 뒤 수련장 밖을 향해 한 걸음을 옮겼다.

- 자박.

칼리안의 발이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

나가려는 플란츠의 앞을 칼리안이 막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플란츠를 살폈다.

"형님. 란델 형님께 사과 받을 일 있다고 하셨죠.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저한테 끝내 말씀 안해주겠다 하셨죠."

"그만하라고. 얘기했는데."

"그거, 혹시."

미세하게 힘이 들어간 목, 평소보다 더 내리 뜬 눈, 아주 조금 더 창백해진 손. 그것을 봤다. 칼리안이, 플란츠의.

숨기려는 것이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플란츠를 봤다. 그리고 칼리안은 그런 것을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형님께서 란델 형님께 사과받아야 한다는 일."

"아니야."

무엇이 아니라는 것인지도 설명하지 않은 플란츠의 눈이 가라앉았다.

깊은 곳.

고작 호기심 한 번을 참지 못해 뒤적이게 된 기억을 떠올리면서.

- 칼리안 뿐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 갑자기 무슨 이야기더냐.

- 아침마다 같은 차를 드신 것은, 형님이 먼저였습니다.

그리 좋아하지 않던 딸기가 맛있다 말하고.

그리 좋아하지 않던 모닝 티를 먹겠다 말했다.

매일같이 같은 차를, 매일같이 같은 차를.

- 그러니 칼리안 뿐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것을 가릴 사람이 아닙니다.

-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거라.

- 독 차. 알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형님께서도 받으셨던 것 아닙니까. 다만 형님은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었을 뿐인 것 아닙니까.

- 그것이 왜 궁금하더냐. 네 어미는 어차피 더 이상 독을 쓰려 들지는······.

- ······ 알고 계셨던 것 맞습니까.

- 그래. 똑같은 짓을 막내에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만.

- 왜······ 숨겼습니까. 같은 차가 어디로 가리라는 걸 알았으면서 왜 알리지 않았습니까.

- 몰랐다, 답하지 않았더냐. 귀는 닫고 입만 열어두는 것까지 네 어미를 닮았느냐.

- 같은 차. 같은 차를 마시는 놈이 있다는 걸 생각했어야지. 알렸어야지. 전하께 얘기를 했어야지.

흰 장미.

흰 장미 나무에 이미 독이 들었다.

그것을 알렸어야 했다.

포도 나무에까지 독이 스미지 않도록, 장미 나무에 스민 독을 알렸어야 했다.

- 얘기를 했다면. 달라진 것이 있었겠느냐. 전하께서 나서주셨을 것 같더냐. 네 어미가 과연 물러났을 것 같더냐.

결국 몰랐다.

포도 나무에까지 독이 스미도록.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다.

"사과받겠다던 그 일. 혹시 저와 관련된 겁니까."

"관련없어."

제가 독에 물든 것이 과연 장미 나무의 잘못인가.

제가 독에 물든 것을 드러내 알리지 않은 것이 과연.

- 이미 모두 다 잘 해결되지 않았느냐. 그러니 소란하게 굴지 말거라. 어차피 달라질 것은 없으니.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칼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 거짓말."

답을 알 수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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