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52화 (353/527)

제62장. 진짜 소원(5)

결국은 같은 말.

'앞만 보고 걸으십시오.'

다른 곳에 눈 돌리지 말고 앞만 보면서.

돌아보지 말고 그저 계속, 앞만 보면서.

그리 걸으라 했던 이가 있었다. 평생 잊히지도 않을 향기 속에 파묻혀 그렇게 오로지 앞만 보고 걸으라 한 이가 분명히 있었다.

그렇게도 지겹게 듣던 이야기를 오늘 또 듣게 되었다.

'왜.'

'왕자는 귀족들과 친분을 쌓아야 하지만, 왕위 계승자는 귀족들의 위에 군림해야 합니다. 그러니 회의장에 들어간 뒤에는 곁을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걸으십시오. 인사는 받기만 하시면 됩니다. 나누실 필요 없습니다.'

'······ 내 아우님께서 어쩐지 나를 하늘 높이 올려두려 하시는 것 같은데.'

'네. 맞습니다.'

'어차피 곧 내려놓을 자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왕세자 자리 당장 내려놓으시면 형님 죽습니다. 귀족들과 친분 나눌 왕세자로 보이셔도 형님 죽습니다.'

허나 다르다.

'세크리티아에서는 그 자리가 벼랑 끝에 선 형님 앞에 던져진 구명줄이었겠으나 여기서는 형님 목으로 날아온 올가미 줄입니다. 벗어내면 벼랑 밑으로 떨어져 죽고 계속 뒤집어쓰고 있으면 목 졸려 죽습니다. 그러니 당장 내려올 것처럼 굴지 말고 어디까지고 그저 올라가기만 할 것처럼 구십시오. 올가미 줄이나마 붙들고 잠시만 버티시는 겁니다.'

'버티면.'

'버티면, 제가 어련히 알아서 구해드릴 테니.'

같은 말을 하고 있으나 다름을 안다.

분명 같은 말을 듣고 있으나.

그 때와는 다름을 이제 안다.

이제는 안다.

* * *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죽여 없애야 할 놈.

죽으면 안 되는 놈.

꼭 살려야 하는 놈.

분류가 셋인데 두 종류라 하는 것은, 칼리안이 첫 번째 부류를 사람으로 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칼리안에게 있어 대륙에 살아 숨 쉬는 대부분의 인류는 '사람'에 속한다. 사실 알고보면 누구에게나 온화하고 섣불리 화내지 않고 인정도 많고 얼굴 고운 만큼 마음씨까지 참 고운데 완두콩까지 잘 키우는 사람이 바로 칼리안 아니던가.

······ 라고 칼리안은 믿고 있다.

뭐, 아무튼.

그렇게나 정 많고 인류애도 넘쳐흐르는 칼리안이 죽여 없애야 한다 분류해 둔 놈이면 진짜 죽어도 되는 놈인 거다. 그리고 그 놈들의 첫 번째를 당당히 차지한 것은 단연 그레이 브리센 후작이다. 그레이를 능가하는 이들은 이미 만나서 다 죽였거나 아직 못 만나서 못 죽였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니까 당장은 그레이가 첫 번째인 것이 맞다.

튼튼하던 허리에 별고가 생기기 전까지 '별채'를 몇 개나 가지고 있던 것이며 히나와 키리에에게 실수했던 기사를 화풀이삼아 잔혹하게 죽였던 일들은 그레이가 당장 죽어도 괜찮은 이유를 담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어찌됐건 그레이 역시 그 에반의 자식이 아닌가. 에반이 유독 그레이를 경계하고 멀리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브리센 후작이 생각보다 잘 참네요. 아플 텐데."

그것을 잘 아는 소공작이 느긋한 평가를 입에 담았다.

이유없이 기분이 나쁘고, 괜스레 눈에 거슬리고, 몰라야 할 것을 알게 되고. 고작 그런 것을 이유로 영지민의 목숨을 빼앗던 이를 동정할 드미레아는 아니었으니까.

"급소를 잡혔다 해도 아픈 티를 못 낼 테니."

"그렇겠죠. 소드마스터가 아닌 것을 들켜서는 안 되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큰 약점이 있으면서 왜 늘 눈 밖에 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브리센은 그것 말곤 할 줄 모를 테니까."

"그 이름으로 묶지 마십시오. 리리에는 안 그렇습니다."

"빼고."

곧장 붙어오는 대꾸에 미미한 웃음을 지어보인 드미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걱정입니다. 왕자님께서 귀족들 앞에서 브리센 후작 목을 부러뜨리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요."

"그럴 일 없어."

"장담하기엔 앞뒤 가리는 것을 너무 잘 잊는 분이신데. 저하께서 왕자님을 너무 믿으시는 것 아닙니까."

"내 아우님은 사냥감만 물어."

"······ 그런 이유로."

믿음의 근거가 좀 이상한데.

내 정혼자의 형이 내 정혼자를 뭘로 보고 있는지 알게 됐는데 딱히 반박할 구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멍멍이 오라버니만으로도 복잡한 기분인데 멍멍이 정혼자까지 가지게 되어 버린 심경을 무어라 제대로 설명할 길도 없다. 덕분에 드미레아는 잠깐 복잡해진 얼굴을 애써 추슬러야 했다.

곧 드미레아가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은 사냥 대상이 아니고 잘 살려둬야 할 놈이 그레이 브리센이었고, 칼리안이 그것까지 잊을 만큼 앞뒤 구분 못하지는 않으리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러니 그레이 말고 다른 것을 걱정하기로 했다.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있는데다 귀족들과의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음을 알았지만 혹시 누군가 이 말을 들은 것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행히 들은 이들은 없는 듯하여 고개를 조금 더 돌리니, 어느새 탐탁지 않은 얼굴로 돌아온 채 칼리안과 그레이를 지켜보는 플란츠가 보였다.

"왜 그런 낯을 하고 계십니까. 왕자님의 방법이 너무 과격해서 그러십니까."

"평소와 달리."

"안 문다고 잘 믿으시는 것 같더니."

"아무래도 내 아우님께서 내 앞에 또 실드를 두르시는 것 같아서."

그레이 목을 안 꺾어 놓을 것은 믿지만 그 의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오나 치료하느라 묻은 피 냄새 좀 풍기면서 식당에 들어갔더니 내 예비사위가 왕세자 앞에 실드부터 두르더라. 그 꼴을 보니 아무래도 르메인 다음 대를 이을 국왕의 형제 중에서는 탑에 갈 놈이 하나도 없을 것 같더라. 그리 말하며 유쾌하게 웃던 슬레이만이 생각난다. 덕분에 플란츠의 말을 빠르게 이해한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브리센 후작이 소드마스터가 아닌 것도, 칼리안 왕자님의 실제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귀족들은 모릅니다. 지금 설마 브리센 후작이 힘에 밀려서 고개를 숙였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할 겁니다."

"알고 있어."

"그러니 저건 그냥 경고입니다. 그레이 브리센을 향한. 선물까지 보내주고 축하를 건넸는데 세자 저하와 왕자님의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꾸준히 란델 왕자와 접촉을 하고. 그런 모습들에 대한 3왕자의 경고로 보여질 겁니다. 무력 말고, 앨런 마나실과 지그프리드를 배경으로 브리센 후작을 내리누르려는 의도 말입니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 정도로 하지 않고 왕세자 저하에게 갈 브리센 후작의 화살이나 다른 귀족들이 불러 낼 암살자들의 칼을 어떻게 돌아서게 하겠습니까."

"저건. 돌아서는 게 아니라 방향을 바꾸게 하려는 것 아닌가."

"네. 왕자님께로 돌리는 것 같습니다. 혹시나 세자 저하 때문에 왕자님이 위험을 감수하시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드셨던 겁니까."

"아무래도."

"그 정도의 화살 하나 칼 하나 쯤 못 막을 왕자님 아닙니다."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그레이 브리센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드미레아와 꽤 오랜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레이는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였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당장 르메인이 들어오거나 칼리안이 그 손아귀 힘을 풀지 않는 한 그레이는 절대 스스로 일어나지 못할 테니까.

"오랜만에 우리를 보아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결코 크지 않지만 모든 이들에게 다 들릴 정도는 될, 높낮이 하나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칼리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브리센 후작."

그레이의 얼굴이 새빨갛다 못해 시커멓게 변해갔다. 플란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인사 한 번을 안 했을 뿐이다. 그것에 대한 대가가 실로 뼈아프기 그지없다.

아파서 빨간 것인지 화가 나거나 부끄러워 빨간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수많은 귀족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것에 분개하여 빨간 것인지. 칼리안은 그리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어차피 그레이는 잘 참을 테니까.

당장 죽어도 되는 놈이지만 그 정도 쓰임새는 있기 때문에 잠시 살려뒀을 뿐이라는 것을 이제 다시 깨달았을 테니까.

마치 그레이 브리센이 제 사람들을 그렇게 여겨왔던 것처럼.

조용히 대답한 그레이의 시선이 칼리안의 발 끝에 가 닿았다. 사과를 전했음에도 힘이 풀리지 않는 것을 안 그레이가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조금의 살기라도 내보이게 되는 날에는 레넌의 뒤를 이어 레니시타 잎을 적시게 될 뿐임을 잘 알았다.

"플란츠 왕세자 저하께 결례를 범했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사과의 말 없는 사과를 건넸다.

멀찍이 선 채 그레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칼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특별히 칼리안이 이런 행동을 벌이리라 이야기 한 적 없었으나, 이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플란츠의 입이 열렸다.

"이해하지."

용서해주는 것.

정확히는, 용서를 하라며 칼리안에게 명령하는 것.

- 스륵.

손하나 까딱 할 수 없을 만큼 붙들려있던 뒷목에서 칼리안의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새카만 재킷 자락과 검은 바지, 그리고 먼지 하나 붙지 않은 구두가 한 발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서늘한 눈으로 그레이를 한 차례 훑은 칼리안이 몸을 돌렸다.

"내 형님 저하께서 세자위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그대들의 앞에 나서는 자리가 아닙니까. 헌데 아직도 바뀐 것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많은 듯 보여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하여, 귀족들을 대신하고 있는 후작에게 뜻을 전한 것뿐이니 혹여 노여워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이 플란츠에게 제대로 된 예를 보이지 않아서, 그리 무례하게 굴었던 귀족들 중 가장 작위가 높은 그레이의 허리를 꺾어두었다는 이야기. 그러니 결국 칼리안이 혼낸 것은 그레이 브리센 뿐만이 아니었다는 말.

밑바닥까지 내려간 위신을 아주 조금 올려주는 듯한 소리에 순간적으로 살기를 내보낼 뻔했던 그레이가 다시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야말로 고양이가 쥐 생각을 해 주는 꼴이 아닌가.

허리 접어 인사 올리게 할 때는 언제고 귀족들 앞에 나섰을 때 얼굴 붉히지 않도록 세심한 신경을 써 주고 있으니 말이다.

"······ 저희가 그리 여길 리 있겠습니까."

'저희'라는 말에 칼리안의 입꼬리가 다시 살짝 올라갔다.

몸 사리는 것 뿐 아니라 자존심까지 챙기는 머리가 에반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기민하다 여긴 까닭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당분간 고개만 까딱이며 인사를 건넬 귀족은 아무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플란츠에게 제대로 된 왕세자 대우를 하지 않으면 어찌 되는지 모두 잘 알게 됐을 테니까.

플란츠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경계해야 할 사람은 플란츠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을 터였다. 당장의 왕세자위에 오른 플란츠가 아니라 그 플란츠를 막고 서게 된 칼리안부터 꺾어놔야 하리라는 것을 여실히 배웠으리라.

귀족들의 헛소문을 잠재우고, 플란츠와의 '우애'를 과시하여 칼리안의 지지자들이 혹시나 플란츠에게 해코지를 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주고, 여전히 정신 못차리고 그레이와 손을 잡으려는 귀족들을 또 한 번 포기시키고, 왕족 앞에서 고개만 까딱이지 말고 제대로 인사하도록 예절도 다시 좀 가르쳐 놓고, 플란츠와 손 잡을 길 요원함을 알아서 어떻게든 플란츠를 끌어내리려는 그레이에게 경고도 전하고. 너무 내리누르기만 하면 튕겨나올테니 아주 조금 풀어주기도 하고.

겸사겸사 플란츠한테 서러웠던 마음도 좀 풀고.

원하던 것을 다 이룬 칼리안이 생긋, 웃음을 보였다.

정말 서운했을 뿐 악의는 조금도 없었다는 듯이.

* * *

따스한 바람이 솔솔 부는 창가에 작은 집을 놨다.

해먹도 달고 폭신한 쿠션도 올려놓았다.

루시는 해먹을 좋아했고 안네는 쿠션을 좋아했다. 그렇게 저마다 좋아하는 것들의 위에 올라 오후의 한가로운 햇살 아래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안네의 고롱고롱 소리가 가만히 들려오는 평화로운 시간.

"그래서."

속 편한 얼굴로 고기 한 점을 썰어내던 칼리안에게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나를 하늘 높이 잘 올려주셨던데."

"다행히 드미레아가 도와줘서 조금 더 쉽게 되었습니다."

"미리 이야기를 한 줄 알았는데. 아닌가."

"아닙니다. 그런 것까지 부탁하려면 뼈가 닳도록 대련해줘야 할 텐데요."

칼리안이 그레이의 기를 내리누르는 한 편, 칼리안의 정혼자가 해야 할 일을 잘 찾은 드미레아는 플란츠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계속 곁에 머물며 플란츠와 대화를 나눔으로써 지그프리드 역시 왕세자위가 결정된 것에 아무 불만이 없음을 알렸다.

퍽퍽하기 그지없는 둘 사이가 이럴 때는 또 어찌나 손발이 척척 맞는지. 둘이서 귀족 회의 한 번에 플란츠의 입지를 제대로 만들어놨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알아서 다시 내려주는 것. 어떻게 할 생각인지 궁금한데."

부드럽게 잘 삶아진 소고기가 결을 따라 쭉 찢어졌다.

사과와 무를 갈아 만든 소스에 그것을 푹 찍어 먹은 칼리안이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입에 잘 맞는다는 뜻이다.

"형님 왕세자위에서 어떻게 내려드릴지는 아직 생각 안해봤습니다."

그 말을 들은 플란츠가 살짝 눈꼬리를 찌푸렸다.

"아무튼 형님이 다 감안하기로 하신 일이니 조금만 즐기고 계세요. 란델 형님께 사과받을 일도 있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방책도 없이 그런 일을 벌이셨는지."

"오늘 안 그랬으면 내일 밤 쯤에는 암살자 만나셨을 텐데요."

"······ 하."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한 칼리안이 복숭아 향이 은은하게 풍겨오는 탄산수를 한 입 마신 뒤 말했다.

"제 자리는 제가 잘 찾겠습니다."

"너무 자신만만하신데."

"자신만만해야죠. 형님 소원 이루게 해드리려면."

뜬금없는 말을 들은 플란츠가 입에 넣으려던 베이컨 구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대구 먹고 카이리스에도 이미 잘 왔지 않나."

"그런 것 말고요. 진짜 소원 있으시잖아요."

"그런 것이 있던가."

"네."

"······ 그래."

"아무튼 걱정 마십시오. 어려울 것 없는 일 아닙니까."

플란츠를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너무 높이 계셔서 형님 도로 내려드리기 어렵겠으면, 하늘 하나를 더 만들어서라도 제가 더 높이 올라가면 되니까."

왕세자 건너뛰고 왕이 되는 것도 방법이니까.

뭐가됐건 조금도 어려울 것 없다는 듯.

정말로 담담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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