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장. 진짜 소원(4)
앨런의 눈이 부드러운 빛을 담았다.
앨런이 칼리안을 볼 때의 눈은 언제나 그랬다. 걱정을 할 때든, 칭찬을 할 때든. 심지어 독하게 마음을 먹고 혼을 낼 때에도 눈빛만은 늘 부드러웠다. 칼리안이 아는 그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눈매를 지녔음에도 말이다.
"아델리아를 만나서 한바탕 했을 것이라고는 예상했습니다."
자신의 반지와 연결되어 있던 칼리안의 팔찌가 부서진 것은 물론 알았다. 그런데 다른 이도 아니고 칼리안의 손목에 있는 것을 부술 능력이 있는 사람들 중 그것을 실제로 행할 만한 담력이 있을 사람은 칼리안 본인과 아델리아 뿐이 아니던가. 때문에 칼리안의 팔찌를 부순 것이 아델리아겠거니, 둘이 만나 누가 이기나 한 번 붙어나 봤겠거니, 그 정도는 예상했었다.
예상만 했을 뿐, 둘이 만나 싸움을 벌이는 것 자체를 걱정하진 않았다.
"그 상늙은이에게 있어 왕자님만큼 상극인 사람이 또 없을 터이니 둘이 싸우는 것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델리아에게 제가 상극일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누구와 다르게 저 소중한 줄도 알고 제 몸 아낄 줄도 잘 아는 그 노인네는 독하디 독한 왕자님을 절대 못 이깁니다. 상극이지요."
"그 누구, 설마 접니까."
"좋을 대로 여기십시오. 카이리스에 그런 놈이 한둘은 아닌 듯하니."
한둘이든 서넛이든 칼리안은 무조건 들어간다는 것을 칼리안도 안다. 플란츠가 제 몸을 안 아낀다며 타박할 처지는 절대 못되는 칼리안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아무튼 아델리아를 맞닥뜨린다 해서 호락호락 져 줄 칼리안은 아니지 않나. 이 인성 복잡한 3왕자는 제 뼈를 다 내어주더라도 그 세상물정 모르는 대마법사의 살 한뭉텅이는 무조건 뜯어내고야 말 지독한 성정의 소유자니까.
그러나 아델리아는 달랐다. 제 살을 내어주고 칼리안의 뼈를 취할 만큼 스스로를 아끼지 않을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니 상극이라 여겼고, 칼리안이 아델리아를 만난다 하더라도 적당한 때에 아델리아가 알아서 발을 빼리라 믿었다. 그래서 세크리티아에 칼리안을 두고 카이리스로 돌아왔다.
"여하간 거기까지는 예상대로인데······. 말 안듣기로 대륙에서 둘째가라 할 수 없을 우리 왕자님이 기어코 다누에게까지 칼을 들이댔을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델리아가 아니었다.
어머니 나무를 만났단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 나무에게까지 그 대단한 성질머리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왔단다.
"제가 또 상대 안 가리고 덤비는 것에 일가견이 있지 않습니까."
"일가견이 있다 못해 차고 넘쳐 흐르니 문제입니다. 무엇을 하다가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물어도 도통 대답을 안하시더니. 그런 이유였는지요."
"제가 세크리티아에 있을 때 스승님 귀에 그 일이 들어가면 스승님께서 곧바로 다누에게 가실 것 같아서요. 이렇게 혼도 날 것 같았고요."
"혼이 나셔야지요."
"안그래도 많이 혼났습니다. 히나와 얀에게요."
"그리 넘길 일이 아닙니다. 사리는 법을 이제는 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당히 숨기고, 사려 담고, 나중을 기약하는 법도 아셔야지요."
"모르지 않습니다. 저만큼 잘 사리는 사람이 또 누가 있다고 그러세요."
"아시는 분이 그렇게 화를 내셨습니까. 어차피 서로 이해하지 못할 관계가 아닙니까. 화를 내어 보아야 달라지는 것도 없이 생채기만 늘어나는 것을요."
"화를 삭일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상황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는 끝내 얘기해주지 않을 요량이십니까."
체이스에게 선물받은, 이제 대륙에 딱 한 병 남게 된 특별한 바질리카를 앨런의 잔에 따른 칼리안이 어여쁜 웃음을 지어보였다. 제 속을 다 깎아가면서까지 어머니 나무에게 화를 낸 이유를 기어코 말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칼리안에게 고약한 것을 보여주었던 다누가 플란츠에게까지 같은 짓을 했음을 알면, 덕분에 이성 끊긴 칼리안이 죽다 산 것을 알면, 앨런은 절대로 참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되어 카이리스의 온갖 농사를 다 망쳐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숨겨야지 별 수 있겠는가.
"걱정하실만한 일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나무와 있던 일은 그냥 그러려니 해주세요, 스승님."
안 그래도 숨기는 것에 재능 없는 칼리안이 필사적으로 감추려 드는 것을 어찌할까 고민하던 앨런이 한숨을 내뱉듯 입을 열었다.
"그렇게 웃으면 제가 또 아무 말 않고 넘어갈 것 같으신지요."
"네. 넘어가주실 것 같아요."
세상에서 가장 무구한 얼굴로 별빛처럼 웃는 저 모습을 보면서는 도무지 계속 엄하게 굴 재간이 없었다. 칼리안의 웃음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드미레아가 있다면 또 한편으로는 무조건 두 손을 들어 줄 앨런같은 사람도 있어야 이 넓은 대륙의 균형이 맞지 않겠나.
그래서 결국 이번에도 앨런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더 이상 혼을 내고 숨긴 것을 캐낼 기운도 사라졌다는 듯한 얼굴이 된 앨런이 바질리카를 들어 입에 댔다.
"······ 알겠습니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하셨을 터이니, 더는 참견 않겠습니다."
물론 넘어가겠노라 하더라도 서운함까지 없는 것은 아닌지라. 비밀 많은 아들 둔 덕에 한탄 같기도 하고 푸념 같기도 한 말이 입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런 앨런을 본 칼리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곧 칼리안이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려놨다.
바질리카와 어울릴까 싶다가도 또 어찌보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듯한 것이 술잔 옆에 놓였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공작저에 다녀왔는데 그 아이가 주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다 먹으려니 스승님 생각이 나서 아껴뒀습니다. 안주 삼아 같이 드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마음 풀어주는 것에는 선물만한 것이 또 없음을 최근에 배우지 않았던가.
"스승님 단 것 좋아하시니까."
반달 모양의 쿠키.
앨런을 생각해 남겨 둔 다디단 쿠키였다.
조용히 그것을 보던 앨런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 아버지 단 것 질색하시니까.
한 놈은 질색한다며 가져갔는데.
한 놈은 좋아한다며 가져왔으니.
이것을 두고 기분이 달다 해야할지, 속이 쓰다 해야 할지.
그것을 모르겠어서 가만히 쿠키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런 앨런을 향해 칼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세크리티아에서 보낸 것이 있으면 저에게 가져다 주시고, 향기 좋은 차가 있으면 아낌없이 가져다 주시고, 쓸만한 마법 용품이 있으면 그것도 다 가져다 주시고. 그러시잖아요."
"별것도 아닌 일을 이야기하십니까."
"별겁니다, 저에게는."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할 단 쿠키.
속절없이 밀려드는 기억 때문에 그까짓 쿠키 하나에 쉬이 손을 가져다대지 못하는 앨런을 보면서,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단 것 받을 때마다 계속 이렇게 가져다 드릴 겁니다. 단 것 받을 때마다 그냥 다 가져다 드릴 거예요. 사실은 싫어하셨든 아니든, 아버지 지금은 단 것 좋아하시니까."
칼리안이 다시 한 번 예쁜 웃음을 지었다.
"저 속상할까봐 말씀 못하시는 일들이 많은 것처럼, 저도 그런 거예요. 아버지 걱정하시는 게 싫거나 버거운 게 아니라, 참견처럼 여겨지는 게 아니라, 너무 속상해하실까봐 얘기 못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혹시나 꺼려하는건가 하지 마시고 계속 제 걱정 해주세요. 더 걱정하실 일도 없겠다 싶은 날이 오면, 그때는 제가 전부 다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그때는 저도 전부 다 여쭤볼게요."
"······ 과연 제가 왕자님 걱정을 안할 날이 오기는 할는지."
"그럼 뭐, 더 못참고 하나하나 다 여쭤봐야죠. 어리광부리듯이."
누구 동생 노릇은 참 잘 할 수 있는데 누구 아들 노릇은 여전히 서툰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남의 아들은 참 잘 챙기는데 새 아들 챙기는 것에는 조금 서툰 앨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 하시지요."
"네. 아버지."
어쩌면 앨런보다 훌쩍 더 커버릴지도 모르고, 앨런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일지도 모를 아들한테 미주알고주알 전부 다 알려 줄 그 날에는, 모르는 척 말도 한 번 내려봐야 하겠다고. 그렇게 생각한 앨런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세상에 하나뿐인 아들과 마주보고 앉아서는 세상에 하나뿐인 바질리카를 전부 다 나눠 마셨다. 대체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너무 달아서 걱정근심 싹 사라지게 하는 쿠키도 함께.
* * *
하루아침에 자리를 비웠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 먼 세크리티아에, 혼자서도 아니라 3왕자까지 데리고 길을 나섰다. 그러더니 돌아오질 않았다.
아예 세크리티아에 눌러 살 작정을 했나 의심이 들 만큼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귀족들이 제 귀를 의심할 소식들이 들려왔다.
그 먼 곳에 나가있던 플란츠에게 르메인이 세자위를 내렸다. 카이리시스의 귀족들이 전부 왕궁 안에 모여들어 상황 설명을 요청했으나 르메인은 답하지 않았다.
- 세크리티아에서 누군가가 왕자들을 해치려 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칼리안 왕자는 스스로 지킬 여력이 이미 충분하지 않나. 그러니 무력이나 배경이 부족한 플란츠 왕세자 쪽에 권력을 쥐여주면, 그게 누가됐든 플란츠 왕세자든 칼리안 왕자든 섣불리 건드리지 못할 테니 말일세.
누구인지 출처를 찾을 수는 없었으나 꽤 그럴싸한 추측이 아스트리샤 거리에 오고갔다.
- 그렇게까지 할 일이 뭐가 있나? 막말로 데블란이 카이리스 왕족에게 칼을 보낼 일도 없을 텐데. 그게 아니라 칼리안 왕자가 왕세자위를 빨리 달라고 플란츠 왕세자를 볼모로 잡아서, 플란츠 왕세자의 신변 보호를 위해 전하께서 왕세자위를 내린 것이 아니겠나?
- 그랬다면 세자위를 내린 순간 플란츠 왕세자는 세뉴 강을 건너셨을 텐데.
- 아, 하긴. 그렇군.
- 아니면 란델 왕자가 양보를 했나?
- 그럴 리가 없잖은가?
다만 애석하게도 가장 사실에 가까운 주장은 쉽게 묻히게 마련이라, 결국 이렇게 근거도 증거도 신뢰성도 없는 말이 하나 둘씩 나돌았다. 그러더니 한 술을 더 떠선,
- 전하께서 깊은 병에 드신 것은 아닌가?
- 전하께서 다음 주에 사냥 대회 여신 것은 잊었나? 게다가 왕실 치유사가 사냥 대회 여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시켜주지 않았나. 바로 어제 말일세.
근거도 증거도 없는 주장이 만들어졌다.
다만 르메인의 건강 문제에 대한 주장은 사냥대회에 아무 문제 없이 참가한 르메인이 그의 호위기사인 렌보다 더 많은, 그리하여 그 어떤 귀족보다 월등히 많은 사냥감을 잡으면서 싹 들어갔다.
- 아니면 혹시······. 플란츠 왕자, 아니. 왕세자 저하께서 칼리안 왕자를 인질로 삼고서 전하께 세자위를 요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것도 저것도 다 말이 안되는 것 같자 기어코 이성의 끈을 내려놓은 소문이 돌았다.
마법 잘 다루는 스승을 두고 있는 칼리안이 검을 그렇게나 잘 다루든 말든, 때문에 플란츠가 칼리안을 인질로 잡는 것이 불가능하든 말든, 알 게 뭐람. 듣고 말하기에 제일 재밌으면 그게 바로 근거이자 진실인 것을.
"······ 루시랑 안네도 소금 든 것 피할 줄 아는데."
결국 그래서 이렇게, 플란츠의 입에서 꽤 험한 소리가 나왔다. 하다못해 루시와 안네도 학습한 것을 써먹을 줄 알지 않나. 그런데 두 발로 걷는 것들이 그 동안 보고 배운 것이 하나도 없는 듯 하니 하는 소리였다.
칼리안의 사람을 꼽으라 하면 절대 빠지지 않는 히나 베른을 정혼자로 삼고 나서도 아직 살아있는 것을 보면 모르냐는 말이기도 했고, 귀족들과의 회의 도중에 '나는 동생을 배신할 생각이 없다'는 말을 했는데도 여전히 그런 소문이 도느냐는 말이기도 했다.
"그냥 멍청하다고 하시면 됩니다. 루시 안네와 비교하지 마시고요."
"내 아우님 입이 많이 험해지셨나본데."
피눈깔이요, 형님.
그 말 혹시 기억 안나십니까, 형님.
살아생전에 저도 그런 말은 안 썼는데요, 형님.
"저 이제 웬만한 기억은 거의 다 나거든요."
"그래서. 뭐."
······ 피눈깔이요, 형님.
멍청하다는 말이 험하다는 형님 저하의 그 고아하신 입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툭툭 나왔던 말인데요. 그것 말고도 꽤 많았는데요.
빨간 눈 꼴보기 싫다 했고 없는 취급도 참 많이 하고 늦었다고 노발대발 난리치긴 했어도 예전의 저한테 피눈깔이니 뭐니 하는 상스러운 욕은 안하셨던데요. 그래서 그게 잘했단 게 아니라 아무튼 그 말은 저한테만 하신 거란 걸 이제 잘 안다는 소리인데요. 그러니까 그 말로는 제가 맘 놓고 형님 타박할 수 있으니까 제가 다른 건 몰라도 그 말은 죽을 때까지 안 까먹을 거라고 혹시 얘기 안드렸습니까?
라고 적힌 눈으로 노려보면 뭐 하나.
"······ 아닙니다."
상대가 안 쳐다보면 그만인것을.
짧은 한숨을 내쉰 칼리안이 거대한 문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앞을 지키고 선 기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고하게."
"네. 왕자님."
아무튼 그렇게 된 것이다.
소문이 돌다 돌다 못해서 플란츠가 칼리안을 인질로 삼고 르메인을 협박해서 세자위를 얻었단 말이 나왔다. 르메인이 무마를 시켰고 회의 자리에서 플란츠의 목소리가 장내에 퍼진 이래로 소문이 잠시 가라앉나 싶더니, 둘이 왕궁에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지기가 무섭게 다시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플란츠가 칼리안을 인질로 삼은 것이 아니라면, 대체 칼리안의 어떤 약점을 잡았기에 왕세자위를 받았겠느냐고. 칼리안이 이제 왕궁에 돌아왔으니 판이 다시 뒤집히지 않겠느냐고.
그 덕에.
"플란츠 룬 카이리스 왕세자 저하와 칼리안 레인 카이리스 왕자님 입장입니다!"
돌아오기가 무섭게 귀족 회의에 동반 입장을 하게 됐다.
인질도 아니고 사이 안 좋은 것도 아니고 그냥 세크리티아 여행 잘 갔다왔고 플란츠가 세자위 받은 것에 대해 당장은 아무런 불만도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당장은.
귀족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귀족들이 둘을 향해 예를 보이는 사이, 플란츠는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 저벅, 저벅.
구두굽이 바닥을 디디는 소리가 회의장을 가득 메운다. 왕세자와 왕자가 지나간 이후 귀족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플란츠와 나란히 선 것 같으나 사실은 한 발자국 뒤에 선 칼리안이 얌전히 걷는 것을 보며 묘한 얼굴을 만들어보였다.
불만이 있었다면 굳이 그것을 이곳에서까지 숨길 필요 없는 칼리안이니까.
한 발자국 뒤.
그 차이를 알아 본 귀족들이 저마다 눈빛을 주고 받으며 소문은 그저 소문이었음을 확인하는 동안, 칼리안의 시선은 줄곧 한 곳을 향해 있었다.
귀족들의 가장 앞.
플란츠와 칼리안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필사적으로 만들어 퍼뜨렸을 사람.
'아픈 허리 잊을 때가 지났지.'
- 뚜벅, 뚜벅.
한 걸음, 두 걸음.
일부러 만들어 낸 묵직한 걸음소리가 플란츠로부터 멀어졌다. 더운 여름날 호수를 잔뜩 메운 물이끼같은 머리카락 쪽을 향해 다가갔다.
"그레이 브리센······ 후작."
하마터면 변경백이라 부를 뻔 했다는 것처럼 잠시 직위를 띄워 부른 칼리안이 고개를 살짝 모로 틀었다. 그것을 본 그레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르메인은 아직 안 왔다.
란델은 오늘도 안 온다.
살짝 숙인 그레이의 뒷머리에 칼리안의 손바닥이 가 닿았다.
"브리센은 다들 왜 이렇게······ 허리가 약한가."
칼리안이 손바닥에 힘을 줬다.
손바닥에 닿는 것을 힘주어 꾹 눌렀다.
"예를, 제대로 올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칼리안의 악력에 속절없이 밀린 그레이의 머리가 깊숙이, 아주 깊숙이 수그러들었다. 그레이의 정면에서 한 발자국 비켜 선 칼리안이 낮게 입을 열었다.
"······ 내 형님 저하께."
그레이의 뒷통수를 내려다보던 칼리안의 입술이 오랜만에 길고 긴 호선을 만들었다.
칼리안의 인성 가득한 정치질이 다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