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50화 (351/527)

제62장. 진짜 소원(3)

얀이 그랬다.

꽃 같은 우리 왕자님 몸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언제 꺾일지 가늠도 안되는 저 가녀리기 짝이 없는 팔로 드미레아의 사나운 검을 어떻게 상대하느냐고. 무겁고 강인한 그 검을 상대하기엔 아직 이르지 않느냐 했다.

얀에게는, 드미레아는 물론 칼리안 본인을 포함해 하다못해 레이븐조차도 믿어주지 않을 말을 참 당연하게 내뱉는 신묘한 능력이 있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대련은 그때 해주십시오."

그래도 드미레아니까.

다른 사람 말은 몰라도 얀의 말은 잘 들어주는 드미레아니까.

"베른 경도 있으니 그때까지는 완전히 나으시겠죠."

"그래. 언제든 와. 무조건 시간 낼게."

"알겠습니다."

"대신 검만 가지고 와야 해. 파혼 요구서 들고 오면 안 돼."

"······ 네."

약속 못 지킨 것이 전부 다 플란츠 때문이었음을 드미레아도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그것이 형님 탓이라 변명 않고 미안하다며 사과만 하는 모습에 그나마 넘어가주기로 했다. 아니었다면 다음 약속은 커녕 집에 발도 못 들이게 했을 터였다.

"그럼, 드미레아. 오랜만에 우리 산책이나 할까?"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본 드미레아가 잠시 저택 쪽으로 시선을 뒀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산책하기에는 시간이 늦었습니다."

"아. 조금 그런가."

"대신. 사 와야 할 책이 몇 권 있었는데. 왕자님 괜찮으시면 함께 가시겠습니까."

공작저 응접실의 문은 불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드미레아의 서재에 가기 위해서는 응접실이 있는 복도를 지나가야 했다.

리리에라면 모를까 기민한 플란츠가 둘이 도로 돌아온 것을 알지 못할 리 없다. 때문에 칼리안이 서재로 가지 않고 밖에서 시간을 좀 보내려 한 것을 드미레아도 눈치를 챘다. 대련은 그만두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 기다리는 것을 알면 플란츠와 리리에가 편하게 대화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 같이 가."

산책하기에는 늦은 시간이라면서 책 사러는 나갈 수 있다는 말에, 칼리안이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드미레아가 집사장이 가져온 재킷 하나를 걸쳤다. 그리고 칼리안은 거추장스런 붉은 망토를 얀에게 건넨 뒤 레이븐의 안장에 올랐다. 오래지 않아 드미레아 역시 자신의 말에 올랐는데, 드미레아의 말은 앞 발에 흰 털이 난 레이븐과 달리 온 몸이 검었던 대신 갈기와 꼬리털이 새하얀 색이었다.

간단히 외출 준비를 마치고 각자의 말에 오른 둘이 플란츠와 리리에, 얀과 레릭을 저택에 둔 채 밖으로 나왔다.

"한산하네. 올 때는 그래도 사람들이 좀 있었는데."

"시간도 늦었고, 지그프리드 저택이 워낙 외곽에 있으니까요."

공작저까지 잘 포장되어 있던 도로 주변에는 여러 귀족들의 저택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저마다의 앞마당을 저마다의 취향껏 꾸며놓은 집들을 지나, 노래하며 춤을 추는 석상이 있을 마나실 후작저의 앞을 지나쳤다.

곧 거리 끝에 다다른 레이븐이 주저없이 방향을 틀었다. 칼리안이 새로운 몸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키리에를 찾기 위해 들른 새 판매점이 있던 거리. 시장도 있지만 서점이 많이 모여있기도 한 나에랑샤로 향하는 것이었다.

레이븐을 따라 방향을 바꾼 뒤 칼리안의 곁으로 다가온 드미레아가 입을 열었다.

"의외네요."

"뭐가?"

"나에랑샤가 어디 있는지 아실 줄 몰랐습니다."

"칼 사러 강 건너 바넨샤까지도 갔었는데 나에랑샤 쯤이야."

"플란츠 왕세자 저하께서는 모르실 것 같습니다만."

"하긴. 그게 참 재밌지. 이 나라 왕자나 왕세자는 나에랑샤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데 옆 나라에서 새 키우던 왕제는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들키시는 겁니다. 왕족들이 나에랑샤에 갈 일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티를 내십니까."

혼났다.

염려와 타박이 반씩 섞인 드미레아의 말을 방긋방긋 웃어 넘긴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거리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쭉 이어진 녹빛 덤불을 가리켰다.

"이쪽에서 가는 길에는 장미 나무가 많이 있네."

"네."

"다 붉은 색 장미인건가?"

비밀 들키는 문제에서 주제를 바꾸려 질문하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그 이상 타박할 생각도 없던 드미레아는 별다른 티를 내지 않은 채 대답을 했다.

"아닙니다. 흰 장미입니다."

"그렇구나. 그럼 다 피면 볼 만 하겠는데."

"철이 되면 상당히 많이 피어나서, 사람들이 구경을 많이 온다 들었습니다."

"그럼 우리도 꽃 피면 다시 한 번 올까? 드미레아."

"왕궁에도 장미 많지 않습니까."

"다 빨간 장미 뿐이라. 빨간 꽃은 그다지 감흥이 없어서."

"반대네요. 지그프리드령에는 다 흰 장미 뿐이라. 저는 흰 꽃에 그다지 감흥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아, 하긴."

그럴 만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와인을 그렇게 많이 만드니까. 흰 장미가 수두룩할 수밖에."

드미레아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왕자님 별 걸 다 아시네요."

평소 보이던 보기 좋은 웃음 대신 작은 미소만 한 번 지은 칼리안이 대답했다

"세크리티아에서도 포도 농사 많이 지으니까. 난 이곳의 형님들처럼 살지는 않았어서, 세크리티아에 살았을 때에는 이것저것 많이 보고 돌아다녔었어. 그 정도를 알 만큼은 다녔어."

장미 나무.

포도 농장의 흰 장미 나무.

어딜 가든 포도 농장의 한쪽에는 장미 나무가 조금씩 있었다. 옅은 분홍빛의 장미, 그도 아니면 밝은 노란 빛의 장미를 기르는 곳도 있었으나 대체로 흰 장미를 길렀다. 그래서 장미가 피는 계절이 오면 너른 포도밭의 한 구석에서 풍성한 꽃을 피운 흰 장미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드미레아는 그것을 보며 예쁘다 여겨본 적이 많지 않았다. 지금 지나온 거리에 심겨진 장미 덤불처럼 보기 좋으라는 의미로 심어 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혹시 그것 때문에 흰 장미가 보고싶다 하신 겁니까."

"여기 있는 흰 장미는 그냥 예뻐서 심은 흰 장미잖아. 포도랑 상관 없이. 그러니 다 피고 나면 보기에도 더 좋을 것 같은데."

포도 농장의 장미 나무.

장미 나무가 포도 나무보다 병충해에 약하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로 심어 둔 꽃나무.

하얀 장미꽃잎이 갈색으로 타들어가거나 해충이 들거나, 혹은 시들 때. 사람들은 포도 나무에 약을 주고 물을 바꿔가며 살폈다. 포도 나무에 같은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대비를 했다.

이미 아픈 흰 장미를 보면 포도를 살폈다.

이미 아픈 흰 장미 말고 포도부터 살폈다.

"왜 심어두는지 모르는 건 아닌데. 나는 그냥. 조금 아쉬워서."

르메인의 셋째 아들.

브리센의 새끼 사자.

그리고, 베른의 베른.

그들 모두가 이미 아픈 흰 장미가 아니던가.

셋째 아들이 죽을 뻔한 것을 알게 된 뒤에야 다른 아들들에게 눈을 돌리고, 브리센의 창살 안에서 자란 새끼 사자가 같은 우리에 들었던 혈육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나락에 넣었던 이가 똑같이 나락에 들려던 이를 꺼내놓으려 하고.

"장미도 포도도 안 아프도록 보살필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이제는 좀 들어. 그냥 나는 그런데. 네 생각은 어때, 드미레아."

그런 것 없이 그냥 흰 장미도 포도도 전부 다 아프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두 함께 보살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문득 들었던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냈다.

잠시 장미 덤불 쪽에 시선을 두었던 드미레아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보살핌 잘 받는 흰 장미 다 피면, 책 한 권 더 사러 오겠습니다."

그리고 그저 이렇게만 대답했다.

* * *

얇은 쿠키 반죽을 동그랗게 잘라낸다.

그 안에 과일잼을 넣고 반으로 접어 감춘 뒤 바삭하게 굽는다.

속이 보이지 않는 반달 모양의 쿠키.

어떤 것에는 딸기잼이 들었고 또 어떤 것에는 무화과잼이 들었다. 혹은 살구나 코코넛, 아니면 우유나 초콜릿으로 만든 잼이 든 것도 있었다.

덜 익은 배 맛 사탕이 있던 것을 알게 된 세리에가 슬레이만을 엄청 혼냈다. 덕분에 부부가 온천으로 떠나기 전 리리에를 위해 만들어두었던 두 번째 간식 속에는 떫거나 쓴 맛의 잼은 들어가지 않았다. 물론 꽃을 넣은 잼도 없었다.

"저하, 그건 무슨 맛이에요?"

어린아이의 마음에 생긴 벽은 마치 얼음으로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찬 곳에 잠시만 두어도 금세 굳어지고 잘못 깨뜨리면 상처를 남긴다.

그 얼음 벽의 높이는 아이의 키와도 같았다. 그러니 위에서 아이를 내려다보는 어른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실로 투명한 얼음으로 된 낮은 키의 그 벽은, 주의를 기울여 살피지 않는다면 벽이 생겼다는 것조차 알아채기가 어려웠다.

그리 알아채기 어려운 그 벽은, 그렇지만 별 것 아닌 온기에도 어느새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망고 같은데."

"앗, 망고맛 저도 먹었어요. 맛있었어요."

"그래."

고작 몇 마디 말을 건넸을 뿐인데 확연히 달라졌다.

얼굴도 밝아지고 눈빛은 맑아졌다.

엄지손가락보다 작은 쿠키의 남은 반 조각을 보여주자, 리리에는 그 속의 노란 잼을 보며 웃었다.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몰라도 프레디아 꽃 같은 노란 속을 보며 봄을 만난 듯 웃었다. 그러더니 제 앞에 놓인 쿠키의 반쪽을 마주 보여줬다.

혹시나 저를 싫어하지는 않을까, 다른 곳에 보내러 온 것일까 겁내고 무서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해맑은 얼굴을 한 채였다.

"제 껀 석류잼 같아요."

"그래."

그러나 플란츠는 서툴렀다.

열 살이 안 된 어린아이는 왕궁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반드시 지켜야 할 법률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리 되었다. 상대가 누구인지 구분하지 못할 아이가 혹시라도 왕족에게 실수를 하게 될까 걱정한 귀족들이 어느새 그런 것을 정해두고는 그것을 멋대로 예절이라 불렀다.

그래서 서툴렀다.

형제들을 제외하고 열 살이 안 된 아이와 이렇게 가까운 곳에 함께 앉은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다못해 어린 날의 칼리안과도, 제대로 된 대화를 주고받아 본 적 없었다.

"저하께서는 무슨 맛이 제일 좋으세요?"

사실 단 맛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나마 좋아하는 딸기가 든 잼은 나오지 않았다. 공작 부부가 어찌나 솜씨 좋게 꽁꽁 감춰놨는지, 겉보기로는 속에 무슨 잼이 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덕분에 꽤 열심히 눈으로 보고 골랐음에도 불구하고 딸기 아닌 맛의 쿠키만 먹게 됐다. 그래서 이제까지 다섯 개나 먹은 다디단 쿠키 속에 플란츠의 입맛에 맞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홍차 한 모금으로 단 맛을 가라앉힌 플란츠가 조용히 대답을 골라 입에 담았다.

"다 맛있어."

말이 짧으면 안 된다고 동생 놈이 주의 준 것을 잊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툴러서, 긴 말을 건네지도 못하고 무슨 맛이 제일 마음에 들었는지 하나를 골라 말해주지도 못했다. 다만 다 맛있다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입에 맞지는 않았으나 전부 다 맛있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감상이겠지만 정말 그랬다.

겉보기로 속을 가늠하지 못할 반달 모양의 쿠키.

이미 다 먹었지만 정말 좋아했노라며 리리에가 설명하던, 색깔만으로는 맛을 알아낼 수 없는 사탕.

그 속에 든 의미를 플란츠는 곧바로 알아봤으니까.

"전부 다. 맛있었어."

"다행이에요."

"······ 너는."

"저요?"

"뭐가 제일 맛있었는데."

잠시 플란츠를 보다 배시시 웃은 리리에가 대답을 해줬다.

"바나나잼이요. 저는 그게 제일 맛있었어요, 저하."

하필 바나나란다.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잘 짖는 동생 놈이 죽다 살아날 때마다 찾아먹는 과일. 그래서 히나가 제일 경계하는 과일이 바로 바나나 아니던가. 아마 히나였다면, 바나나가 나온 순간 그 큰 눈을 또 치켜떴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플란츠가 웃는 것을 보고 이번에도 한가득 웃음을 보인 리리에가 다음 쿠키를 집어들었다.

"우와, 이건 파인애플 잼인가봐요. 파인애플 맛은 처음 먹어요."

리리에가 노란색과 주황색의 사이 쯤 되어 보이는 쿠키 속을 보여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플란츠가 문득 입을 열었다.

"파인애플이 어디에서 자라는지, 혹시 알고 있나."

저도 모르게 이런 질문을 했다.

플란츠 스스로도 조금 놀랄 만큼, 어느새 입 밖으로 말이 먼저 나오고 있었다.

리리에는 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을 해보다 대답했다.

"나무에 열릴 것 같아요."

"말고. 땅에서 자라."

"파인애플이 땅에서 자라요?"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답을 전했다.

"이렇게 길고 뾰족하고 단단한 풀 사이에서 보라색 꽃이 피는데. 그 안에서 파인애플이 자라는 거야."

엘프 도시의 실내 정원에서 보았던 것을 그려내듯이 손을 움직여가며 설명을 해줬다.

- 파인애플입니다. 가운데 있는 꽃이 커지면서 안에서 파인애플 나와요.

그때 들었던 설명을 덧붙이면서, 플란츠 역시 꽤나 신기하게 여겼던 것을 리리에에게 똑같이 알려줬다.

보고 듣고 배웠던 많은 과일나무들을 알려주고 과일도 먹지만 줄기를 잘라 상처를 치료하는 데 쓰는 식물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렇게 서로 조금씩 더 많은 말을 하고 조금씩 더 많은 대답을 했다.

"그런데······ 저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돼요?"

"괜찮아."

"혹시 저하께서도 강아지 키우세요?"

리리에의 눈길이 비로소 플란츠의 옷에 붙은 고양이 털에 가 닿은 모양이다.

갈색 푸들인 얀은 털이 그리 많이 빠지지 않았지만 그렇다해서 전혀 안 빠지는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간혹 옷에 붙은 얀의 털을 재밌게 집어들었던 리리에가 플란츠도 강아지를 키우는지를 물어왔다.

"아니. 고양이······ 두 마리."

스스로의 주장과는 달리 고양이보다는 개에 가까운 듯한, 새까만 색의 나머지 한 마리가 더 있기는 했다. 다만 그 놈은 플란츠의 생물 분류 기준 상 사족보행하는 종이 아니어서 정확한 구분이 어렵다. 그래서 일단 셈에서 뺐다.

플란츠가 옷깃에 붙은 두 종류의 털을 집어들어 보여주면서 말했다.

"이건 하얀 고양이. 루시. 그리고 이건 회색 고양이. 안네."

"고양이구나. 저 고양이도 좋아해요. 털이 길어요?"

"루시는 짧고 안네는 조금 길어."

"생긴 건 어때요? 예뻐요?"

"예뻐. 둘 다. 허리가 끝없이 늘어나는데. 많이 납작해지기도 하고, 가끔 구겨지는 것도 같고. 배가 둥글고. 따뜻하고. 둘이 발바닥하고 코 색도 달라. 루시는······."

루시와 안네의 생김을 떠올려가며 건네주는 설명을 들은 리리에가 신기해하는 얼굴이 됐다.

"고양이들은 털이 많이 빠지나봐요. 저하 옷에 고양이들 털이 많이 있어요."

"빠지는 게 아니라······ 뿜는 것 같은데. 털을. 특히 안네가."

이 말을 들은 리리에는 처음으로 소리를 내서 웃었다. 플란츠는 매우 진지했으나 아마도 재미가 있던 모양이다.

그런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 왕궁에 와. 오게 되면, 보여줄게. 고양이."

그리고 이렇게.

"다른 신기한 것도 많으니까. 왕궁에는."

고양이가 두 마리, 오리가 한 마리, 하얀 말과 검은 말과 백금색 말과 갈색 말들이 있는 곳. 잘 짖는 까만 고양이도 있고, 파란 새와 전서구도 있고 소도 한 마리······ 한 분 계시고, 여러 송이의 빨간 장미가 있는 곳.

그런 특별한 곳에 처음으로 누군가를 초대했다.

"갈게요. 꼭 보러 갈게요. 드미레아랑 같이 꼭 갈게요, 저하."

리리에는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몇 번이고 말을 했다.

억지로 이끌려 간 곳 말고, 구조되어 오게 된 곳 말고, 초대받은 곳. 처음으로 초대를 받은 곳. 와도 좋다 허락을 받은 곳.

그런 곳에 꼭 가겠노라고.

* * *

눈 앞에 내밀어진 것을 칼리안이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설마······."

드미레아와 함께 짧은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니, 잘 시간이 한참 지난 리리에를 방에 들여보낸 플란츠가 정원에 나와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늦었음을 안 칼리안은 서둘러 붉은 망토를 두르고 공작저 밖으로 나왔다.

드미레아의 배웅을 받으며 대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플란츠가 또 무언가를 칼리안에게 건넸다. 옅은 베이지색의 종이로 꼼꼼하게 포장하고 빨간색의 예쁜 리본까지 단 그것을 본 칼리안이 질문을 이었다.

"또 육포입니까."

"아니야."

그동안 플란츠가 이렇게 말도 없이 내민 것들이 몇 개 있었다.

칼리안의 버릇과 달리 씨가 있는 쪽부터 깐 바나나, 턱없이 부족했던 붕대, 그리고 육포. 몇 안 되는 것들 중 두 번이 육포였으니 이번에도 같은 것을 주는지를 의심하는 게 비단 칼리안만의 문제는 아닐 터였다.

"그럼 뭡니까."

"먹으라고."

"저 먹으라고요."

"그래."

"육포도 먹는 건데요."

"말고."

"그럼 뭔데요."

"쿠키."

"······ 형님 설마 그 아이한테도 그렇게 계속 짧게 말하신 것 아니죠."

"아니야."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쩐 일로 사람 먹는 간식을 주십니까."

물론 바나나도 육포도 사람 먹는 간식이 맞긴 하지만, 쿠키와는 좀 다르지 않나. 동물도 같이 먹는 간식이라거나 동물도 안 먹는 간식이 아니라 사람만 먹는 간식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리리에가. 주라고."

"제 몫입니까."

"그래."

"······ 의외네요. 저를 챙겨 줄 줄은 몰랐는데요."

"아우님께서 그날 뭘 하셨는지 다 알고 있던데. 모르나."

"아닙니다. 그 아이가 저를 기억하고 있다는 말은 저도 들었습니다."

"무섭지 않다고. 그것 때문에 고마워서 주는 것이란 말을 전해달라고. 그러던데."

그렇습니까, 하는 대답을 하려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칼리안은 고개만 조용히 끄덕였다.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을 종이 뭉치를 보던 칼리안이 곧 리본을 풀었다. 몸을 흔들지 않는 레이븐에 올라있기도 했지만 격하게 달리는 말 위에서도 쿠키를 흘리지 않을 자신은 있었으니까.

빨간 리본을 걷어내고 조심스레 종이를 열자, 반만 차오른 달 모양의 쿠키들이 보였다. 그 중 하나를 들고 입에 넣은 칼리안이 코코넛의 고소한 맛에 웃음을 머금었다.

"코코넛잼이 들었나 봅니다. 잘 만들었네요. 맛있습니다."

누가 만든 쿠키인지 알 리 없을 칼리안의 말. 때로 모르는 것이 약이 될 수도 있음을 아주 잘 아는 똑똑한 플란츠는, 그 쿠키들 중 절반을 만들었을 두툼한 손이 누구의 것인지를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이러한 형의 깊은 배려도 알아채지 못한 칼리안이 자신의 손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꽤 마음에 들었던 코코넛 향을 기대하며 쿠키 하나를 더 집어 입에 넣었다.

"······ 윽."

옥수수수염이 모락모락 생각나는 맛.

자몽이다. 자몽잼이 들었다.

입에 남은 쿠키 조각을 얼름 삼켜낸 칼리안이 손에 들린 쿠키들을 바라봤다.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입에 남은 자몽 향을 얼른 없애고 싶은 생각도 들어서, 작은 쿠키 하나를 다시 집어먹었다.

- 바삭!

새콤한 키위잼이 든 쿠키를 잘 씹어 삼킨 칼리안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갑작스런 웃음소리에 레이븐이 귀를 쫑긋거렸다. 미안하다는 듯 검은 갈기를 쓰다듬어 준 칼리안이 다음 쿠키를 집었다. 그렇게 라즈베리잼이 든 쿠키를 먹은 뒤에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얀. 이것 먹어봐. 맛이 다 달라."

"저랑 레릭은 실컷 먹었어요. 왕자님 다 드세요."

하나도 무섭지 않은 셋째 왕자에게 고맙다 말하고 싶어 전해 준 쿠키.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졌을지.

"······ 포도 보살피고 나니까 장미 나무도 고쳐지네."

리리에는 알까.

"장미잼이 들었어요?"

"아니,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어."

"마음에는 드세요?"

"응. 맛있어."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쿠키를 맛있게 먹었다.

"맛있어. 이거."

정말,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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