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49화 (350/527)

제62장. 진짜 소원(2)

아르센이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다.

"애옹!"

"냥!"

새하얀 꼬리를 하늘을 향해 쭉 뻗어올린 뒤 끝을 살짝 구부린 루시, 그리고 먼지털이개같이 풍성한 잿빛 꼬리를 등 쪽으로 구부리듯 뻗은 안네가 아르센의 앞에 있었다.

"잠깐 군단장이셨다 도로 부군단장이 되신 뒤에 어느 날 갑자기 왕자님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왕세자님은 여기 안 계신다네."

물론 두 고양이가 아르센의 앞에 있던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었으니 그것 때문에 당황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잠시만 비켜주면 안 되겠나?"

위풍당당하게 서류 위에 앞 발을 턱 하니 짚은 채 아르센을 부르는 루시. 그 옆 서류더미 위에 올라가 루시를 따라하는 안네를 보면서, 아르센이 어려운 부탁을 했다.

"미앙!"

아마 싫다는 소리인 것 같다.

그런 두 고양이를 어쩌질 못하고 한참을 쳐다보던 아르센이,

"으엣취!"

거하게 재채기를 했다.

고양이 알러지가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이다.

날아다니는 털에까지 반응할 만큼 심하지는 않았으나 컨디션이 안 좋거나 고양이를 너무 오래 가까이 두고 있으면 눈이 붓고 재채기를 했다.

저도 모르게 눈을 슥슥 비빈 아르센이 책상 위의 두 고양이에게 다시 한 번 부탁하려 입을 열었다가 또 한 번 재채기를 했다. 따뜻한 곳에서 추운 곳으로 단 번에 날아오니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은 모양이다. 평소보다 알러지가 심했다. 이런 건 클린 마법으로 털을 치워내도 소용이 없다. 바로 앞에 몽실몽실한 털뭉치 두 마리가 있는데 소용이 있을리가 없지 않나.

아무튼 이럴 때면 소리없이 걸어와서 고양이 두 마리를 슥 안고 가버리던, 말 없고 인성 없고 친화력도 없는 왕세자가 드물게 필요한 이런 날. 꼭 이런 날엔 하필이면 딱 없다. 당장 시급한 몇몇 문서를 스르륵 처리하더니 르메인과의 석찬에 갔다. 그리고는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내가 자네들 재밌어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은 건 아니네만 그 서류를 지금 빨리 봐야 한다네. 그러니 잠시만 비켜주면 내가 얼른······ 으에잇취!"

"므에옹!"

"냥!"

안 간다.

안 갈 뿐만 아니라 아예 루시까지 서류에 배를 깔고 엎드려버렸다. 울상이 된 아르센이 집무실 문을 활짝 연 뒤 창문 밖 공기라도 쐬고자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때, 구세주가 등장했다.

"루시, 안네. 그래그래, 착하지······ 아구아구 이뻐라."

한 팔에 고양이 한 마리씩.

열려있던 집무실로 성큼 들어오더니 솜씨 좋게 두 고양이 엉덩이를 받치고 안아 든 사람이 플란츠의 책상 쪽으로 멀찍이 걸어갔다. 그리고 품 속에서 소금 안 넣은 육포를 꺼내 하나씩 물려준 뒤 돌아왔다.

그 사이 얼음덩어리 하나를 만들어 충혈된 눈 위를 문지르던 아르센이 도움의 손길을 건넨 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중에 술 한 잔 사지."

"당분간 술 끊고 수련하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술을 끊었다 해서 사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않겠나?"

술을 끊는다 만다 하니 굉장한 술꾼같지만 아르센의 주량은 여전히 맥주 세 잔이 맞다. 아직 6서클이 안 됐으니까.

아무튼 아르센은 갑자기 나타나 큰 도움을 준 사람. 소금 넣은 것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 니들렌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했다. 감사는 듣는 둥 마는 둥, 아르센의 책상 위를 훑어 본 니들렌이 클린 마법으로 책상 위의 고양이 털들을 다 치워냈다. 그리고 쌓여 있는 서류 뭉치 중 절반씩을 나눠 들었다.

"그건 왜 집어드나?"

"도와드리려고요."

"자네 일 다 했나?"

"저는 어디 안 갔다 왔으니까요. 부군단장님 도와드릴 만큼은 됩니다."

"그럼 나중에 비싼 술로 한 잔 사지."

"급여도 없으신 분이 자꾸 뭘 사준다고 하십니까."

"아니네. 나 급여 생겼다네."

"네에. 3플로린이요. 축하드립니다아."

파란만장한 아르센의 급여에 대한 소식이 이미 다 퍼졌나보다.

"쓸데없는 곳에 쓰지 말고 잘 아껴두세요. 또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급여 아닙니까."

왕궁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내어주는 급여 중 가장 적은 금액의 반도 안 되는 것이 아르센의 급여였다. 다만 빌헬름 관의 마법사와 기사들이 아르센을 놀리는 것은 그 급여가 적어서가 아니었다. 니들렌만 해도, 자신의 동생이 카페를 처음 시작했을 땐 한 달에 1플로린도 안 되는 금액을 벌었었다는 걸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아르센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아르센의 급여가 왜 없어졌었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라 해야 맞을 터였다.

"괜찮네. 이제 술 마시고 군단장 님 앞에서 주정부릴 일 없을 걸세."

"대신 칼리안 왕자님께서 뭐 부숴놓고 와라 하면 하실 것 아닙니까."

"그것이야 당연한 일 아니겠나. 그것 때문에 급여 깎이는 것은 상관없네."

"전하나 군단장님께서 뭐 하나 부숴놓고 와라 하면 하실 겁니까?"

"부술만한 것이면 부수고 아니면 안 부수겠지."

"칼리안 왕자님께서 시키시는 건 그냥 하시고요?"

"그렇지. 그러라고 있는 따까리인데."

"아무튼 대단하십니다."

"우리 왕자님이 대단하신 걸세."

니들렌이 피식, 하고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남의 따까리 노릇이나 하는 것을 저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아마 저 파란 머리 마법사 뿐일 것이라 생각하면서.

"미야옹······."

어느새 플란츠의 책상 위로 올라간 루시가 책상 아래로 꼬리를 늘어뜨린 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 꼬리가 또 신기했던 모양이다.

책상 밑에서 루시의 꼬리를 잡으려는 듯 두 발로 일어나 앞발을 휘적거리던 안네가, 책상에 음각으로 새겨 둔 문양의 틈을 밟고선 폴짝 뛰어올라갔다.

- 툭!

그렇게 책상 위로 올라 선 안네의 뒷발에 그만 무언가가 걸렸다.

명패, 펜과 잉크, 메모지, 수북한 서류, 작은 시계. 그 외에는 별다른 장식도 올려져있지 않은 넓은 책상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

커다란 소라 껍데기.

발칸의 대원들이 바다를 처음 만난 플란츠에게 선물했던 그것이 안네의 뒷발에 걸려 책상 밑으로 밀려나더니 기어코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른 바람을 일으켜 소라 껍데기가 상하지 않게 받아낸 니들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닥에 안전하게 놓이게 된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안에서 데구르르, 하고 마른 모래가 구르는 소리가 났다.

"모래가 들었었나보네."

처음 줄 때에는 완전히 마르지 않은 탓에 그런 소리가 안 났었는데 어느새 물기가 다 마르고 껍데기에 붙어있던 모래들이 떨어져 나온 모양이다.

중얼거리듯 이야기 한 니들렌의 손 끝에 마력이 모였다. 안에 든 것을 빼서 치우려는 듯 보여서, 아르센이 얼른 니들렌을 말렸다.

"아니야. 그냥 두게."

"모래 들어서 빼려는 겁니다."

"일전에 우리 왕자님께서도 그 모래 빼려고 하셨는데 부군단장되시는 왕세자 저하께서 그냥 두라 그러셨었네."

"모래를요?"

"그렇다니까."

자세한 설명 하기 싫다는 듯 대답한 아르센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서류 한 장을 넘겨보며 말했다.

"······ 자네들이 준 것이라며."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건드리지 말고 그냥 올려놓기나 하게."

그 말을 들은 니들렌이 손에 든 소라 껍데기를 몇 번 흔들었다. 차르륵, 데구르르, 하고 모래들이 구르는 소리가 이어진다. 파도소리 들으려 할 때마다 귓가에 거슬릴 것 분명한 그 소리를 한참 듣고 있던 니들렌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냥 두겠습니다."

잔잔한 웃음을 입가에 매단 채였다.

* * *

고양이를 꽤 좋아하지만 고양이가 잘 따르지는 않는다.

아이들도 꽤 좋아하지만 아이들이 많이 무서워했었다. 하기사, 애초에 칼리안은 아이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고양이를 많이 좋아하고 고양이도 아주 잘 따라다닌다.

아이들을 대해본 적이 없어서 아이들은 어떤지 모른다. 저 아이를 만나기 위해 직접 찾아오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는 고양이와 달라서, 그리고 아이들과 격없이 지내 본 적 없는 사람들이라서.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맞아."

"그런데 왜 안 가십니까."

멀리 보이는 수련장에서 드미레아와 목검을 마주 대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더 발을 옮기지 못했다. 둘 다, 못 갔다.

대신 둘이 저택에 도착한 것을 알리기 위해 얀과 레릭, 그리고 저택의 기사 한 명이 먼저 드미레아쪽으로 갔다. 말에서만 내렸을 뿐 수련장 가까이로 더 다가가지 않고 멈춰 선 칼리안이 대답없는 플란츠를 향해 다시 말했다.

"저 아이, 만나게 되면 형님 혼자 보셔야 합니다."

"왜."

"혹시 저도 같이 보려고 하셨습니까?"

"애들 좋아한다며."

"그거야 얀이랑 히나 또래 얘기죠."

얀이랑 히나가 왜 애들이냐고.

너보다 나이 많다고.

잠깐. 너 그럼 평소에 나를 대체 뭘로 보는 거냐고. 그래서 그렇게 툭하면 반말하는 거냐고.

많은 질문을 일단 참아 넘긴 플란츠가, 왕세자와 왕자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것을 알고 이 쪽을 쳐다보는 드미레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모르면, 내 아우님께서 잘 알려주실 테니."

"아이들 상대하는 방법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건 제가 알려드려야 할 일도 아닌데요. 게다가 저 아이는 아마 형님보다는 저를 더 무서워 할 것 같고요."

"왜······."

누가 봐도 아이들이 덜 무서워 할 사람은 시도때도없이 생글거리고 있는 칼리안 쪽이 아닌가 생각하던 플란츠가 입을 다물었다. 다른 경우면 몰라도 저 앞에 서 있는 아이에게만은 다를 수 있었다.

칼리안이 에반과 검을 대던 모습을 봤다 했으니까. 에반의 손에 들려있던 검이 어디를 뚫고 지나갔는지를 고스란히 봤다 했으니까.

"그래."

"그러니 먼저 가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는 시오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테니."

"알았어."

"아이들은 그냥."

어느새 많이 다가온 드미레아, 그리고 그 손을 꼭 잡고 따라오는 어린아이를 보던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 봐주시면 됩니다."

"알았어."

"말 짧게 하지 마시고요."

"알았어."

"그렇게 눈 매섭게 뜨고 내려다보지도 마시고요. 애 웁니다. 고양이 털 붙여 둘 것이 아니라 저처럼 시도때도없이 잘 웃어주셔야 겁을 안 먹죠. 생글생글, 방긋방긋, 예쁘게요."

"······ 짖지."

틈새를 안 놓치고 짖은 칼리안이 제 말대로 생글생글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플란츠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공작저의 집사장을 따라 먼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더 다가와 자신을 제대로 보기 전에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짜증 가득한 얼굴을 지운 플란츠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서 있는 플란츠를 발견한 아이가 발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있던 드미레아가 함께 멈추어 섰다. 그리고 아이와 몇 마디 말을 나누는가 싶더니 곁에 있던 하인 한 명에게 아이의 손을 넘겼다.

곧 하인의 손을 잡은 아이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플란츠와 따로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인사를 해보지 않은 채였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만나보기 싫다 했을까. 무섭다 했을까. 꺼려했을까.

가만히 생각을 이어나가는 플란츠의 앞에 드미레아가 와서 섰다. 그리고 가볍게 예를 취한 뒤 입을 열었다.

"옷이 예쁘지 않아서."

만나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무섭고 꺼려져서가 아니라.

"새로 산 옷으로 입고 오겠다고 합니다."

예쁜 옷으로 갈아입고 오고 싶다 했다고 알려줬다.

먼지 투성이 옷을 보고 혹시나 지저분하다며 싫어할까 걱정을 했단다. 흠 하나 없는 왕세자의 복장이 혹시나 아이에게 무섭게 느껴질까 걱정했던 것처럼.

"······ 그래."

"함께 들어가시죠.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플란츠가 칼리안이 먼저 지나간 길을 따라 저택으로 들어섰다.

* * *

시오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슬레이만과 세리에도 없었다.

'힐 경이 아버지와 대련 중에 몸을 좀 다쳤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다 같이 슈린츠로 갔습니다. 전하께서 왕실 별궁을 쓰도록 허락해주셔서요.'

온천으로 유명한 슈린츠 영지.

칼리안과 앨런이 자리를 비운 동안 고생 많았던 시오나가 슬레이만 때문에 다친 것을 안 르메인이 슈린츠에 있는 별궁을 내줬다 했다. 이제 조금씩 뼈마디가 쑤신다던 공작 나부랭이에 대한 예우라 하기보다는 소드마스터인 시오나에게 건네는 특혜일 터였다.

'석찬 때 전하께서 그런 말씀은 안하셨는데.'

'굳이 알려주실 필요 없지 않습니까.'

'하긴. 내가 시오나 만나러 여기 올 거라고도 생각 못하셨겠네. 차라리 형님께서 저 아이를 만나러 올 거라 여기셨으면 몰라도.'

'네.'

'지그프리드 공이 없었는데도 용케 문은 열어줬구나. 난 오자마자 파혼당할 줄 알았어, 드미레아.'

'안그래도 이제 그 말을 할까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나는 내 정혼자님이랑 벌써 파혼하기 싫은데. 한 번만 봐주면 안돼?'

'왕자님 저한테 별로 도움 안 됩니다. 약속하신 것 하나도 안 지키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신 옆에 두고 보고있으면 흐뭇하잖아.'

'흐뭇한 구석 없습니다.'

생글생글 방긋방긋 웃으면 뭐하나.

애들은 둘째치고 정혼자한테도 안 먹히는데.

파혼 안 당하려 애쓰던 동생 놈이 결국은 지금 당장 대련 한 번을 하러 다시 밖으로 나갔다. 온전히 다 나은 것은 아니겠으나 그렇다해서 드미레아의 검을 받아내지 못할 만큼인 것도 아닐 테니, 플란츠는 칼리안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대신 '멍멍이 얀'과 재회의 기쁨을 누리느라 대련 소식을 뒤늦게 접한 얀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서는 둘이 간 곳으로 서둘러 따라나갔다.

덕분에 매우 조용해진 응접실에서 말린 오렌지와 딸기가 들어간 차를 반 쯤 비웠을 때.

- 똑똑.

참 오랫동안 다시 준비를 한 듯한 작은 노크소리가 들렸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뒤에 서 있던 레릭이 걸어가 문을 열었다.

하인을 놔두고 직접 노크를 했던 아이가 레릭을 따라 조심조심 걸어와 곁에 섰다. 샛노란 원피스 끝에 달린 하얀 레이스가 작은 걸음을 따라 예쁘게 움직였다.

플란츠의 연두색 눈이 아이를 향했다.

여전히 목에 걸고 있던 로켓 속 초상화. 그 안의 플란츠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

"왕세자 저하께 인사드립니다. 제 이름은 리리에 브리센입니다."

작은 손을 모으고 어울리지 않을 말투로 허리를 숙이며 예를 보이는 어린 아이, 리리에. 그런 리리에를 한참 바라보던 플란츠가 잠깐 숨을 멈췄다 내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플란츠."

태어나 단 한 번도 입에 올려본 적 없던 것.

평생을 불려왔으나 막상 내뱉으려니 낯설기 짝이 없는 제 이름을 알려줬다. 미들네임도 떼고 거창한 성도 떼고 그냥 이름만 알려줬다.

그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리리에가 아주 조금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플란츠가 가리켜보이는대로 맞은편에 앉았다.

생각했던 것만큼 닮진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리리에를 보던 플란츠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더 이상 건네 줄 말이 없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러 왔으며 무엇을 확인하려 부득부득 이곳까지 칼리안을 따라왔는지 다 잊어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5층 복도에서 란델 나오기를 기다리든가 란델 방의 테라스로 올라가 볼 것을 그랬다. 차라리 그 쪽과 할 말이 더 많을 것 같다.

"저는 여기가 좋아요. 드미레아가 좋아요."

그런데 리리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은 플란츠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 아."

그리고 이제껏 잊고 있던 것을 그제야 떠올렸다.

옷에 묻은 고양이 털까지 보기에는 아이의 눈높이가 너무 낮았다는 것. 아무리 영특하다 해도 첫 눈에 그것을 눈치 챌 만큼 자라지는 않았다는 것.

-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 봐주시면 됩니다.

동생 놈이 한 말을 이제야 다시 떠올린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야."

- 말 짧게 하지 마시고요.

이제야 알았다.

예쁜 옷으로 갈아입은 것이 플란츠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 입은 것이 아니라, 먼지 투성이 옷을 입고 있으면 더 싫어할까봐. 안 그래도 꺼려하던 아이를 더 싫어하게 될까봐. 그럴까봐서.

"너를 여기서 내보내게 하려고 온 게 아니야."

에반이 평소 플란츠를 어떻게 대해왔는지, 아무리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라 해도 분명히 보고 들은 것이 있을 터였다. 에반이 플란츠를 그렇게 대했는데 플란츠라 해서 다르리라 생각했을까. 플란츠 역시 에반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으리라 여겼을 것이 뻔하다. 그런 에반이 키우던 아이를 플란츠가 기껍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왔음을 이제야 알았다.

너무 섣부르게 찾아왔다.

"걱정이 되어 온 거야. 잘 지내는지. 걱정이 되어서."

아니.

이미 오래전에 찾아왔어야 했다.

세상 모든 이들이 저를 미워하리라 여기던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면서. 드미레아가 잘 대해주고 있다 하였으니 알아서 잘 자라리라 마음을 놓은 채로.

"너를 싫어하지 않아."

귀찮다며 말을 줄이지도 않고, 다른 말 속에 진짜 의미를 숨기지도 않고, 고스란히 다 말했다. 고작 고양이 털 하나로는 보여줄 수 없는 것을 알려줬다.

언젠가의 플란츠에게 가장 필요했던 말을.

언젠가의 플란츠에게 누군가 해줬어야 했을 말을.

그러나 전해지지 않았던 말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아."

리리에가 플란츠를 올려다 봤다.

신록을 담뿍 담은 녹빛의 눈이, 이제야 피어나기 시작한 연두색 눈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다행이다······."

그리고 가만가만 속삭였다.

너무 늦지 않게 전해진 말을 들은 것에 이제야 안심하고서. 잔뜩 집어먹었던 겁을 이제야 물려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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