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장. 진짜 소원(1)
빛이 저물자 한기가 든다.
당연한 일이다. 카이리스의 수도 카이리시스는 세크리티아보다도 훨씬 더 북쪽에 있었으니 비록 봄이 왔다 하더라도 세크리티아만큼 따뜻해지지 않은 것이다.
뭐 그렇다 해서 이런 감각이 낯선 것은 아니었다. 비슷한 일을 이미 두 번이나 겪지 않았던가. 따뜻하기만 하던 곳에서 한 걸음을 내딛으니 살을 에는 눈보라가 몰아치던 대사막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던 일. 그리 오래되지 않은 그 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을 뿐이다.
다만 그 때와 많이 다른 것은, 그 날에 결코 비교되지 못할 만큼 옅은 추위라는 사실. 그 추위가 외려 반갑다는 느낌. 그리고 또 하나.
"어서들 오거라."
기다리고 반겨주는 이들이 마중을 나와 있는 모습.
칼리안과 플란츠의 안위를 확인하고 천방지축이 따로 없는 둘을 혼내려던 히나를 말려놓은 뒤, 앨런은 카이리스에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약속된 날에 다시 세크리티아로 찾아가 모두를 데리고 왔다.
덕분에 오늘 아들들이 돌아올 대략적인 시간만 알고 있었을 르메인이 아르피아 궁의 앞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 뒤에는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 얼마나 기다렸는지는 이야기하지 않은 채 아들들을 맞이했다.
"돌아온 것을 보니 안심이 되는구나."
조용히 떠났던 길.
그러니 돌아오는 길 역시 성대하지 않았다.
물론 국왕이 직접 마중을 나온 일이 과연 성대하지 않은 것이 맞는지를 묻는다면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다만 어찌됐건 돌아온 이들의 수보다 마중을 나온 수가 더 적었으니 한 눈에 보기에는 성대하지 않은 것도 맞긴 맞았다.
차라리 그 편이 더 마음에 들었다.
왕자의 성인식인 로젤리타를 위해 몇 달만에 왕궁에 돌아오던 날. 카이리스의 수도 카이리시스의 온 거리를 메웠던 환영 인파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환영해주는 이들이 많은 것이 부담스럽거나 싫어서가 아니라 아직은 몸이 많이 피곤한 탓에 조용히 돌아오고 싶었던 까닭이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시야가 트이고 말을 건넨 것이 르메인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칼리안과 플란츠는 곧바로 허리를 숙이며 예를 보였다.
가장 앞에 서 있는 둘을 본 르메인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로젤리타에서 돌아온 칼리안을 맞이해주던 앨런을 떠올리며 양 팔을 들어올리려다 이내 그만두고 발을 멈췄다.
아직 일렀으니까.
십 년을 넘게 르메인의 마음대로 멀어졌던 걸음이라 해서, 돌아오는 걸음 역시 르메인의 마음대로 한꺼번에 성큼성큼 다가설 수는 없는 일이라 하지 않았나. 그러니 국왕 전하를 뵙는다는 격식 가득한 인사 말고 그냥 잘 돌아왔노라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아직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놀라지 않게, 겁먹지 않게, 한 걸음만 다가와 멈춰 섰다.
"그래."
르메인의 대답을 들은 일행들이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그 사이 또 조금 자란 듯한 칼리안을 확인한 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플란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해야 할 말을 전부 다 잊어버린 얼굴이 되었다.
숙였다 들어올리는 플란츠의 뒷목과 옷깃 사이로 가느다란 은색 체인이 보인 까닭에. 그 목걸이 줄의 끝에 무엇이 달려 있는지는 르메인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 그래."
그런 속내를 모를 리 없을 플란츠는 다른 말 않고 시선을 내렸다. 초상화 든 로켓 목걸이 하나로 모든 골이 메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둘을 보던 칼리안의 눈이 르메인의 뒤에 함께 서 있던 이들을 향했다. 시종장 라울, 호위기사 렌을 포함한 세 명의 국왕 친위대 소속 기사들, 그리고 소금 넣은 것 먹는 분홍 머리 마법사 니들렌과 다른 세 명의 사단장까지. 참 오랜만에 보게 된 얼굴들이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와있는 이들의 면면을 확인한 칼리안의 손 끝이 작은 호선을 그렸다.
르메인의 바로 뒤, 그리고 라울과 렌의 앞에 서있었어야 할 한 사람. 없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안 나온 사람. 또 한 명의 형제 때문이었다.
'이리도 매정하셔서야.'
피망 전쟁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할 리 없을 형제간의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려는 참이니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잠시 들었다 가겠느냐."
르메인은 그 란델이 왜 나오지 않았는지를 설명하는 대신 이렇게 물었다.
칼리안의 속에 무엇이 들었던, 지금의 플란츠는 칼리안의 형이자 카이리스의 왕세자다. 그러니 지금만큼은 칼리안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르메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서 플란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와 함께 이어진 말.
그 말은 정말로, 정말로 칼리안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의복이 단정하지 않은 듯하여 다시 정돈을 하고 석찬에서 말씀을 드렸으면 합니다."
호선의 끝에 놓여있던 칼리안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의복이 단정하질 않으시단다.'
하고 많은 핑계 다 때려치고 의복이란다. 의복이 단정하질 않단다. 입다 말았는지 벗다 말았는지 알 수도 없을 옷을 입고 아침밥 드시러 나왔던 그 플란츠의 입에서 의복 단정하지 않다는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몰랐다.
칼리안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레릭이 아침부터 심혈을 기울여 이 이상 어떻게 더 단정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기 힘들 만큼 완벽하게 단장해 준 '왕세자의 정복'을 쳐다봤다.
"그래. 그리하거라."
"네. 전하."
그리고 소같은 르메인은 또 속아넘어갔다.
"베른 자작도 함께 오면 좋겠구나."
그와 함께, 이곳으로 돌아오면서 애써 잊으려 하던 사실 하나를 떠올릴 말을 더 꺼냈다.
아. 맞다.
우리 히나가 아직 형님 저하 저 분의 정혼자였지.
지금이 딱 스푼 내밀면 좋을 그 때인데 르메인이 앞에 있어 차마 못 꺼내놓는 아르센의 아쉬움을 무시한 채로, 칼리안이 애써 만든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럼, 저녁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그러거나 말거나 칼리안의 기분은 그다지 신경 안 쓸 플란츠가 다시 한 번 르메인을 향해 예를 보인 뒤 몸을 돌려 에스티나의 안장 위에 올랐다. 그리고 레릭과 함께 유유히 체르밀 궁을 향해 갔다.
정확히는, 체르밀 궁의 5층을 향해서였다.
* * *
의복을 단정히 하겠다 했으니 별 수 있나.
이미 단정하기 짝이 없던 의복을 훌훌 벗고 그 좋아하는 검은 욕조에서 마음 편히 목욕도 한 뒤 왕자의 정복을 새로 입을 수밖에.
정말 오랜만에 메를린의 도움을 받았다. 칼리안은, 자신이 없는 동안 메를린이 하나씩 준비해뒀던 것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새로운 커프스와 타이 장식을 했다. 검붉은 오팔로 만들어진 커프스가 단단히 채워지는 것을 보던 칼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곁에 서있던 얀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공작저에는 연락했어?"
"네. 시종 한 명을 보냈습니다."
"나 싫다고 문 안 열어주면 어떻게 하지."
커프스와 타이 장식을 한 뒤 입혀 줄 재킷을 들고 있던 얀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지그프리드 공작이 함께 있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아, 지그프리드 공 지금 공작저에 있어?"
"네. 얼마 전에 두 분 모두요. 이번에는 오래 계실 생각인지 얀까지 데리고요."
얀이 '얀을 데려 왔다'는 말을 하니 이상하지만 칼리안은 알아서 잘 알아들었다. 그 집안의 갈색 털 복슬복슬하고 꼬리 잘 흔드는 귀여운 막내가 그 집안 장자의 애칭과 이름이 같다는 것은, 얀이 어느 귀한 집 자식인지를 전해들은지 오래된 메를린마저도 알고 있던 사실이니까.
"강아지 온 것 알면 히나가 좋아할텐데."
"베른 경이 많이 예뻐하기는 했죠."
"히나 오늘 바쁜가?"
"네. 오늘 한가한 사람은 왕자님밖에 없어요."
"······ 응, 그래."
호위를 위해 함께 따라갔던 기사들은 각자의 숙소로 가 휴식을 취할 테지만 직급 있는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에우리아는 곧바로 협회로 돌아갔고 레이첼은 빌헬름 관에 들러 베로니카를 잠시 만나본 이후 마법 학교로 갔다. 협회 일을 보아야 하는 교장 에우리아를 대신해 부교장인 레이첼이 밀린 업무를 봐야 했던 까닭이다. 아르센이나 히나 역시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나만 안 바쁜 것 아냐. 형님도 같이 가신다 했어."
"플란츠, 왕세자, 저하께서는 바쁜일 서둘러 처리해놓고 동행하기로 하신 거고요."
"응······ 그래."
히나가 써 준 종이팻말 들고 세크리티아 왕궁 정원에 서게 될 뻔했던 날 이후로, 얀은 줄곧 칼리안에게 많이 매몰차게 굴고 있었다. 매일매일 하모니카 알려주겠다 했던 놈이, 알고보면 동생 단명하길 바라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형 놈이 준 세 끼 치의 육포를 잘 받아서 오물오물 다 처먹었다는데 고운 말이 나올 리가 있겠나.
하루 이틀 더 지나도록 칼리안이 말 잘 듣고 있으면 저절로 풀릴 것임을 이제 잘 아는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히나는 나중에 데려가야겠네."
"그렇게 하세요."
- 똑똑.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망토까지 모두 두르고 다시 나갈 준비를 마쳤을 때,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에일라입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얀과 메를린이 고개를 숙여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에일라가 들어왔다. 칼리안은 편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마주한 검은 소파에 앉아 맞은편을 가리켜보였다.
짧게 인사한 에일라가 칼리안의 앞에 앉았다.
"빌헬름 관에서 오는 건가?"
"네."
"다들 잘 있지?"
"네. 그런 것 같아요."
사실 모두의 안부를 확인하기에 에일라는 빌헬름 관에 너무 짧게 있었다. 그나마도 히나의 호위를 보느라 히나의 곁에만 있었으니 모두 잘 있었는지 아닌지를 에일라가 가늠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 그냥 적당한 첫인사거리로 가져왔을 뿐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은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봤어?"
"정보 조직에 대해서 말씀이시죠."
"응."
"그 전에, 궁금한 것이 있어요."
"얘기해."
"지금까지는 정보 모아오는 일을 협회 소속의 마법사들이 했었죠."
"그렇지."
"제가 그 일을 맡으면 그렇지 않을 테고요."
"마법사들이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주가 되는 건 네가 모아 올 사람들이겠지."
"그럼······ 제가 이끌게 되는 그 조직은 또다른 새들의 무리가 되는건가요?"
"내가 데블란처럼 새들을 부릴까봐 걱정돼? 나이도 안 가리고 몰래 키워낸 새들을 내맘대로 이곳 저곳에 보내고 수족처럼 다루다, 문제 생기면 잘라낼까봐?"
차 한 잔을 내 올 새도 없이 바로 이어진 대화였다.
덕분에 깨끗하게 비어 있는 테이블 위를 한동안 내려다보던 에일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말을 고르는 듯, 길고 긴 속눈썹이 몇 번을 움직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 맞아요. 사람이 살면서 보고 겪은 것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덧붙여진 말은 칼리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고 에일라 스스로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데블란이 새들을 어떻게 부렸는지 보고 겪어왔던 칼리안이 데블란의 전철을 밟지 않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는 말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그런 데블란을 겪은 에일라가 걱정을 덜어내기가 어렵다는 말인 것이다.
- 탁.
대답 대신, 칼리안이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려놨다.
"이번에도 포장을 못했네."
그리고 이렇게 조금 다른 소리를 했다.
깨끗하게 치워져있던 테이블 위를 본 에일라가 작게 웃었다.
"너무 늦게 주시네요."
비녀였다.
데블란의 마지막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 하는 에일라의 말에 반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대신 부탁 하나만, 늘 물거품처럼 지니고다니던 그 비녀를 데블란에게 직접 건네주고 오라는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 했었다. 그리고 에일라는 물방울같은 구슬과 독이 담긴 그 예쁜 비녀를 데블란에게 선물했다.
그 뒤로 늘 머리를 풀고 다녔다.
데블란이 세상을 떠나고 해가 바뀌고 다시 카이리스에 돌아오도록, 세크리티아의 바다같은 머리를 파도처럼 늘어뜨리고 있었다.
"너무 늦었나?"
"조금요. 불편했어서."
"미안."
이렇게 말하는 칼리안이 테이블 위의 비녀를 에일라의 앞으로 조금 더 밀어주며 입을 열었다.
"고민을 했어. 무엇으로 만들어줄까, 어떻게 생긴 걸 만들어줄까, 어떤 보석을 줄까. 산호를 담을까 진주를 담을까. 꽃을 달아줄까 나비를 달아줄까. 백금으로 만들까 은으로 만들까. 란델 형님에게 드린 것처럼 가장 값비싼 미스릴을 다시 구해볼까. 오랫동안 고민을 했는데."
에일라가 테이블 위의 비녀를 집어들었다.
주석으로 만들어진 긴 비녀 끝에 유리로 만들어진 푸른 빛 모조 보석이 박혀 있었다. 새하얀 가짜 진주가 한 개, 그리고 투박한 푸른 구슬이 두 개. 그 작고 동그란 것들이 비녀의 끝에 매달린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무것도 아닌 걸 주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하다 결국은 별 것 아닌 비녀를 샀다.
세공 장인에게 맡겨 화려하게 꾸민 것도 아니었고 보석이 박힌 것도, 하다못해 금이나 은으로 만든 것도 아니었다. 얀의 하모니카를 샀던 것처럼, 그냥. 상점에서 파는 것을 샀다. 이곳저곳을 들여다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그 자리에서 그냥 샀다.
아무것도 아닌 비녀를 샀다.
"마음에 안 들면 네가 다시 사, 에일라. 언제 어디서든."
에일라의 푸른 눈이 잠시 칼리안을 지켜보다 비녀를 향했다. 백금도, 금도, 미스릴도 아닌 것으로 만든 비녀. 보석 하나 박히지 않은 그냥 비녀를 그렇게 내려다보다가.
"잘 쓸게요."
그 자리에서 제 머리를 틀어 비녀를 꽂았다.
평생이 가도 버리지 못할 물건, 죽을 때까지 지녀야 할 물건, 그렇게 결국은 또 다른 새장이 될 물건 말고 아무것도 아닌 선물이 마음에 들었던 탓에. 언제든지 원한다면 새로 사도 좋을 그 흔한 비녀가, 다른 어떤 의미도 넣지 않고 그냥 에일라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지만 고민해보고 샀을 그 비녀가 참 예뻤던 탓에.
"이곳에서 일했을 때 같이 일했던 사람들 모아볼게요. 어떻게 어떤 식으로 운영할지, 정리해서 다시 올게요."
"그래."
칼리안의 얼굴에 작은 웃음이 어렸다.
"그렇게 해. 에일라."
이제야 비로소 히나에게도 보여줄 수 있을 비녀를 가지게 된 에일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보인 뒤 밖으로 나갔다.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할 테니까.
* * *
에일라가 돌아간 뒤.
오래지 않아 레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빌헬름 관에서 곧바로 아르피아 궁에 있는 르메인의 집무실로 갈 테니 알아서 오라는 뜻의 메시지였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했기 때문에,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 칼리안이 얀과 키리에만 데리고 석찬이 진행될 작은 연회장으로 갔다.
국왕의 석찬 초대도 거절하는데 왕세자의 병문안 쯤이야 얼마든지 거절하고도 남을 란델 덕에 결국 형님 그림자도 보지 못한 플란츠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언제 봐도 그저 늘 어여쁘기만 한 우리 히나가 놈의 옆에 앉은 것을 애써 속으로 삭인 칼리안이 자신을 위해 빼주는 의자 쪽으로 가 앉았다. 그 뒤 르메인이 왔고 조촐한 석찬이 시작되었다.
플란츠가 왕실의 의견을 하나도 듣지 않고 히나와 정혼하게 된 일에 대해서 르메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갑작스런 정혼을 했는지, 그대로 국혼을 치를 생각인지, 아니면 칼리안과 드미레아처럼 언젠가는 파혼을 하고 서로 각자 할 일을 하게 될 예정인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다녀오는 길에 불편한 일은 없었느냐."
그곳에서 잘 지내다 왔는지, 혹여 아프거나 다친 곳은 없는지, 발칸의 일에 대해 도와 줄 것은 없는지, 그런 것들을 묻기만 했다. 왕세자와 왕자에 이어 똑같이 건네지는 그 질문들에 대해 히나는 의연하게 대답을 했다. 때로는 고갯짓으로, 때로는 칼리안이나 플란츠가 히나의 수어를 통역해가면서 대화가 꽤 오래 이어졌다.
"텐실의 왕세자와 잠시 만나 교류했습니다."
히나와의 대화가 끝난 뒤, 플란츠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텐실 왕세자 세르제인이 르메인의 탄신일 축제 기간에 카이리스를 찾을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건넸다.
"생각을 해보마."
그리고 르메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개인적인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바로 그리하겠노라 답하겠으나 세르제인의 방문은 단순히 아들의 부탁이라 해서 들어줄 수 있을 것은 아니었으니까.
"네, 전하."
어차피 곧바로 대답을 들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플란츠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둘의 대화를 적당히 흘려들던 칼리안이 세크리티아의 것보다 간이 조금 덜한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었을 때, 르메인의 시선이 칼리안을 향했다.
"체르밀 궁의 시종 한 명이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갔다 하던데."
"······ 들으셨습니까."
"그래. 혹시 오늘 또 도망을 갈 생각이더냐."
아주 잠시 난감한 얼굴이 되었던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전하."
그 대답 참 솔직하기도 하다.
작게 실소한 르메인이 칼리안과 플란츠를 번갈아가며 한 번씩 본 뒤 입을 열었다.
"다녀오거라. 다만 늦지 않게 돌아왔으면 좋겠구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직 귀족들에게 왕세자와 왕자가 돌아온 것을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당연히 안 된다 답할 줄 알았던 르메인의 선선한 허락에 또 조금 난감한 얼굴을 해보이던 칼리안이 약속을 했다. 그렇게 석찬을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키리에의 편에 히나를 빌헬름 관까지 데려다주도록 했다. 그리고 소용 없을 것 분명한 검은 로브 대신 그냥 둘 다 각자의 정복을 입은 상태 그대로 각자의 말에 올랐다. 얀과 레릭까지 대동한 채로 왕궁을 나선 뒤에는 아주 조금 속도를 올려 지그프리드 공작저로 향했다.
공작저에 들어서기 전, 칼리안이 잠시 발을 멈췄다. 그 뒤 하얀 털과 잿빛 털이 드문드문 묻은 플란츠의 옷을 보며 작은 목소리를 냈다.
"란델 형님 못 만나셨습니까."
"많이, 아프시다는데."
"내일 또 찾아가실 생각이십니까."
"갈 거야."
"란델 형님과 사이 많이 안좋은 줄 알았는데요."
"안 좋은 것 맞아."
"그런데 왜 그렇게 만나려고 하십니까."
플란츠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답했다.
"지금 아니면 못 받을 게 있어서."
"무엇을요."
"······ 사과."
"무슨 사과인지 여쭤봐도 됩니까."
"아니."
"네."
미련없이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손을 뻗으며 마력을 움직였다. 공작저에 들어가기 전에 왕세자의 정복에 붙은 고양이털을 떼려는 것이다.
"둬."
그런 칼리안의 행동을 플란츠가 막았다.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결코 단정해보이진 않는 옷. 고양이 기르는 것 분명해보이는 꼴이 된 왕세자의 정복. 그런 제 옷을 잠깐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거대한 공작저의 대문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무서워 할까봐."
에반이 후계자로 키우려 했다던 아이.
더는 브리센 후작가의 가주로 자라지 않을 아이.
르메인의 편지를 받고 앨런과 대화하며 조금 많은 생각을 했다. 평생 만나지 않겠노라 여겼던 그 아이를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왔다. 많이 비슷하고 또 많이 다를 그 아이가 조금 궁금해져서.
그렇게 찾아온, 어느 하나 흠 없는 모습의 왕세자를 무서워 할까봐. 고양이 털은 그냥 두라고 이야기했다.
"그럴까요."
"그래."
"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칼리안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 지그프리드 공작저의 대문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 뒤를 따라 플란츠 역시 발을 들였다.
멀리, 아주 멀리.
녹빛의 머리를 뒤로 묶어내린 어린 아이가 보이는 곳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