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47화 (348/527)

제61장. 소원(5)

더는 '삐약 삐약' 하고 울지 않았다.

- 꽥꽥!

이제 어른 오리가 다 됐다.

부리도 커지고 발도 커지고, 이젠 제법 멀리 날기도 한다.

새끼 오리 시절 다 지난지도 오래였건만 코코는 여전히 엄마와 아빠를 잘 따랐다. 히나를 포함해 자주 보이던 몇몇 사람들도 곧잘 따라다녔고, 호기심 가득한 루시와 안네를 보면 도망다니기에 바쁘던 것도 잊었다는 듯 다 자란 뒤에는 어느새 많이 친해지기까지 했다.

아빠가 만든, 계절과 상관없이 언제나 적절한 온도를 자랑하는 안락한 풀장 말고 오늘은 세크리티아 왕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의 정원에 왔다. 데블란이 있을 때에도 별 상관 않고 코코를 왕궁 정원에 데려오던 파란 머리 엄마가 이번에도 함께 왔다.

일생의 대업도 다 마치고 자식농사도 잘 지어서 이제 더는 세상살이에 욕심날 것 없다는 모습으로 앉아 코코를 보던 코코 엄마가 입을 열었다.

"저 돌아가면 다시 급여 생깁니다, 협회장님."

정오의 곧은 햇살이 내리비추는 물의 정원에 앉아있던 코코 아빠, 에우리아가 아르센을 쳐다봤다.

"얼마."

"금액 묻기 전에 축하부터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 덮어놓고 축하부터 하기엔 급여 없던 기간이 너무 길었어."

그렇게 믿었던 에우리아가 이런 대답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아르센이 서운함 그득한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코코 먹이 사 줄 만큼은 됩니다. 용돈도 계속 받고요."

"얼마."

"협회장님. 사람이 저 좋은 일 하고 산다는데 돈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본래 받던 왕자님의 용돈은 안 줄이기로 했으니 결과적으로 주머니는 더 두둑해 질 것 아닙니까. 중요한 건 그겁니다."

"급여는 쥐꼬리만큼 받나 보네."

"협회장님 제 말 들으셨습니까?"

"들었으니까 대답하지. 안 듣고 대답하나. 그래서 얼마. 다시 1플로린 됐어?"

"1플로린이라니, 말씀이 심하시네요. 협회장님은 제가 그 정도로밖에 안 보이십니까."

"어. 딱 그 정도로 보여."

"좀 너무하십니다. 우리 왕자님 혼내는 베른 경도 협회장님만큼 단호하지는 않을 겁니다."

"혼나야지. 물 드시라 했더니 육포 드셨다며."

"물만 드시라 했으니 육포 드신 것 아닙니까."

"뭔소리야."

푹 쉬고 일어나 기분 좋아진 히나가 칼리안을 찾아갔다. 그랬더니 하루 사이에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진 칼리안이 보였다. 그것을 반가워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어 보았던 히나가 아니던가. 곧장 칼리안의 손목을 잡고 속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분명히 텅텅 비어있어야 할 배가 참 빵빵하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됐다.

생긋 웃은 히나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나는 치유사 몰래 육포 먹은 3왕자입니다.'라고 쓰인 종이를 가져다 줬다. 물론 '나는 치유사 몰래 동생한테 육포 준 왕세자입니다.'도 있었고, '그 육포 전해 준 기사입니다.' 라고 적힌 종이도 있었다. 루시와 안네보다 말 안 듣는 사람들이니 기나긴 자기 소개 문구를 목에 두르고 다니는 두 고양이처럼 대해주겠다는 큰 뜻을 담은 히나의 선물이다.

그걸 들고 세크리티아의 왕궁 정원 한 가운데에 한 시간 동안 서 있으라 말하는 것을 앨런이 참 힘들게 달래놨다.

"치유사 말 안 들었으니 왕자님이 잘못한 거지. 그래서 급여는 얼만데."

세크리티아에서 칼리안 죽기 직전에 잘 구해 주기도 했고 이런저런 도움을 준 공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없었던 급여가 다시 생겼다. 정확히는, 언젠가 빌헬름 관 앞에서 앨런에게 밟히고 나서 대섰던 일에 대해 용서를 받았다.

급여를 다시 받게 된 것이 좋아서 말한 것인데 그 급여가 대체 얼마인지로 이야기가 새는 바람에 본전도 못 찾게 생겼다. 말을 돌리려 한 것도 죄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꼬맹이, 너 급여 줄어든 거 헤이시아 궁 날려버려서 그런 것 아냐."

"맞습니다, 협회장님. 제가 바로 헤이시아 궁 폭발시킨 그 마법사입니다."

"자랑이다."

"자랑스럽죠. 대륙의 어떤 마법사 경력에도 없을 일 아닙니까."

"못 하는게 아니라 안 하는 거야."

"마법사답지 못한 자들 아닙니까."

"그래. 좋을 대로 생각해라. 하여간 헤이시아 궁 재건될 때까지 급여 줄었다며. 그거 아직 재건되려면 멀었잖아."

"네, 맞습니다."

아르피아 궁의 옆에 짓기 시작한 헤이시아 궁.

르메인과 앨런은 궁의 재건이 완료될 때까지 아르센의 급여를 압류하기로 했었다. 그리고 궁이 재건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르메인의 다음 대를 이을 왕의 비가 될 사람이 머물 곳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하다못해 플란츠가 왕궁에서 나가게 될 때 브리센 후작저가 완공되어 있을지 없을지도 점치기 힘든 마당인데 헤이시아 궁은 오죽할까.

그러니 아르센의 급여가 언제 돌아올 수 있는지는 다누가 와도 확답 못할 일인 것이다.

"그래도 받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까, 협회장님."

"1플로린 받는단 소리 맞네."

"아닙니다."

"그럼."

"세크리티아에서 한 일이 많아서 이제 3플로린 받습니다."

"······ 자랑이다."

치유사가 받는 급여의 반의 반의 반도 안 되는 금액이다. 같은 부군단장인 플란츠는, 물론 치유사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액수를 받는다. 치유사 급여에 비교하기 전에 루시와 안네, 혹은 레이븐을 돌보는 비용보다 적을 것이 분명한 금액을 저리 뿌듯하게 말하고 있으니 에우리아의 반응이 차가울 수밖에.

"그래도 용돈 계속 받지 않습니까."

"그러게 갑자기 급여 얘기는 왜 했어."

급여 없이 3왕자의 용돈만 받다 다시 급여 생긴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 얼굴에 웃음기가 돈다. 에우리아를 보며 씩 웃어보인 아르센이 제법 멋진 목소리를 냈다.

"얼마가 됐건 상관없지 않습니까. 아무튼 저 이제 급여 받고 일하는 마법사입니다, 협회장님."

"그래서, 뭐."

"코코 모이 살 돈 빼고 안 식상한 꽃 살 돈도 번다는 겁니다."

"안 식상한 꽃은 산 게 아니라 꼬맹이 네가 만들었던 거잖아."

"얼음 꽃 말고도 안 식상한 꽃 많지 않습니까. 무슨 꽃이어도 상관없이 어떻게든 구해서 무조건 다 사드릴 수 있습니다."

새파란 꼬맹이가 뭔 소리를 하는지 적당히 감 잡은 에우리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대신 넌 감자튀김 얼리잖아."

"이제 안 얼리겠습니다."

맥주는 딱 세 잔까지만.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이며 다짐하듯 말하는 아르센을 한참 보던 에우리아가, 실로 애석하게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세상살이에 더 욕심날 것 없다던 얼굴이 어느새 세상 잃은 사람의 그것과 같이 변해버렸다. 잔뜩 우울해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안됩니까."

"나 바빠."

"뭐가 그렇게 바쁘십니까."

"아델리아 잡을 거야. 그래서 바빠."

마법사 협회장도 하고 마법 학교 교장도 하고, 돌아가서 에일라에게 정보 조직 넘기기 전까지는 정보 조직 보스도 해야 했다. 거기에 더해 서클까지 한 두 개 더 올려서 아델리아 잡으려면 파란 머리 꼬맹이한테 꽃 받고 다닐 시간이 없었다.

이렇게 말한 에우리아가 아르센을 쳐다봤다.

지금 당장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저보다는 즐거울 것 같아 보이는 얼굴을 한참 보다가,

"그러니까 넌 맥주 네 잔 마시고도 감자튀김 안 얼리게 될 때 다시 말해. 꽃 살 생각 말고."

하고 말했다.

"어······ 어······ 협회장님."

에우리아의 말을 곱씹던 아르센의 얼굴에 꽃이 피었다.

"그때 말씀드리면 됩니까?"

"그래."

"정말입니까, 협회장님?"

"정말이라니까."

망해가던 세상 다시 살려낸 얼굴로 되돌아 온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제는 내일 쯤 마왕 잡으러 떠나는 사람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서클 늘리고 나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 그래."

"늘리고 왔더니 다른 말씀 하시면 안 됩니다."

"알았다니까."

"약속하신 겁니다, 협회장님."

"그래."

저러다 내일 당장 서클 하나 늘려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살짝 접어 둔 에우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 꽥꽥!

어느새 봄이 왔다.

"그때까지 다른 식상한 꽃 안 받고 있을 테니까."

신나게 물의 정원을 휘젓고 다니는 코코의 샛노란 부리처럼, 실로 어여쁜 봄이 왔다.

* * *

도망치려 하여도 어느새 뒤따라 붙는다.

떨쳐내려 하면 할수록 집요하게 따른다.

시간이라는 것은 보통 그렇다. 도망치려 하고 떨쳐내려 할수록 오히려 더 빠르게 흘러 결국은 나를 앞서가게 마련이다.

소금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푹 물든 채 바다를 보고 시나스타를 마주하고 세렌티의 시간을 맞이했다. 실로 많은 일을 겪었고 그 안에서 또 한 번을 자랐다. 그 사이 어느새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불다 꽃이 피어났다. 시간이 흘렀다.

악몽에 들어섰고 악몽에서 일어났다.

아르나이젤을 만나고 다누를 만났다.

시간이 흘렀다.

히나에게 혼이 난 사이, 앨런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얀에게 하모니카를 알려주고 키리에와 다시 검을 마주 댄 사이, 그 짧은 사이에.

아쉬운 만큼 찰나와 같이 변한 닷새가 흘렀다.

- 자박 자박.

- 저벅 저벅.

세크리티아의 작은 연회장으로 향하는 길.

서로 다른 발걸음 소리가 나란히 복도를 울린다.

타국 왕궁에서 안내인 없이도 길 참 잘 찾아가는 카이리스 3왕자와, 어느새 안내인보다 동생 따라다니는 것에 더 익숙해진 카이리스 왕세자의 발소리였다.

"오늘 가겠다고."

"네. 오늘이요."

카이리스로 가기 전에 체이스와 아리안느, 그리고 루이즈와 함께 아침 식사를 마쳤다. 그 뒤 체이스는 당장 급한 일을 처리하고자 잠시 집무실로 향했고 아리안느와 히나는 루이즈를 따라갔다. 독에 대한 치료가 모두 끝났지만 혹시나 또 아픈 곳이 있을까 한 번 더 살피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덜렁 남겨진 두 형제가 알아서 방으로 향하던 중, 카이리스의 일정에 대해 플란츠가 먼저 말을 꺼낸 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식사를 마친 뒤부터 카이리스에 돌아갈 때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을 듯한 얼굴의 칼리안 때문이었다.

"돌아가자마자 공작저에 가보겠다는 말인가."

"뭐, 아직 파혼 안 당했으면 들여보내 주겠죠."

"전하께서 안 내보내실 것 같은데. 당분간은."

"안 내보내신다고 안 나갈 사람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카이리스에 도착하자마자 도망갈 생각부터 하는 동생을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공작저에는 왜."

"시오나 만나서 물을 것이 있어서요. 급한 건 아닌데, 그냥요. 그냥 가보려고요."

물론 칼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플란츠는, 그런 칼리안이 아무렇지 않을 리 없다는 정도는 알았다. 다만 티를 내지 않으려 하는 것을 괜스레 들춰내어 과한 걱정을 건네지는 않았다. 그런 것을 바랄 놈은 아니었으니까.

"형님은 돌아가면 바쁘시겠네요. 바로 빌헬름 관으로 가셔야 되겠습니다."

"아니."

그래서 플란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꽤 훌륭한 답을 생각해냈다. 그러니까, 당장 헤어져야 할 형제 말고 당장 만나야 할 또 다른 형제에게로 생각을 바꿀 만한 대답 말이다.

"5층. 갈 건데."

"아."

"아프실 테니."

"······ 아."

"병문안."

"네."

"꼭."

"네, 꼭. 잘 다녀오십시오."

"알았어."

계획대로 세자위 안 내렸다.

그러니 카이리스 일행을 맞이하는 인원 중에 란델은 분명히 없을 것이 분명하지 않나. 감기에 걸렸든 체했든 햇빛을 많이 쬐여 머리가 아프든 뭐든, 란델은 무조건 아플 것이 뻔하다. 그러니 병문안삼아 찾아가겠다는 말이었다. 일국의 왕세자가, 일국의 왕자에게.

인사 받으러.

진심인지, 아니면 웃으라고 하는 말인지.

어쨌거나 꽤 훌륭한 답이 맞기는 했는지 칼리안이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르니에리 같아 보이더니 그래도 영 르니에리 같기만 하지는 않았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닭 먹는 엘프한테는 뭘 물어보려고."

"키리에가 부탁했던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도 있어서요."

조금 걸음을 늦춘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시오나에게 확인해야 할 일이라면 브리센이 연관되어 있고 그 사실을 아는 것에 대해 눈과 귀를 막을 생각은 없던 까닭이다.

"브리센과도 연관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궁금해서요. 어머님이 왜 왕궁에 들어오셨는지."

"브리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네. 시오나를 만나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브리센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왕궁에 들어온 시기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드네요."

"곧바로 왕궁에 들어왔으니까."

"네. 휘트린이 사라진 이유를 찾기 위해서든, 혹은. 복수를 위해서든. 무엇이든 이유가 있어서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프레이야는 아이샤 왕비가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왕궁에 들어왔다.

"······ 전하께서 총애하셨다 들었는데. 왕비 프레이야 쪽은 아니었을 수도 있겠군."

"전하께는 정말 죄송한 말입니다만. 어머니께서 마음만 먹었다면 어려울 것 없지 않겠습니까."

미모에 대해서야 더 말하는 것이 낭비다. 미모도 미모였지만, 시오나가 그리 말했지 않나. 성격도 칼리안을 닮았다고. 그랬다면.

"솔직히 저도 마음만 먹으면 마음을 얻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요."

"소공작."

"아."

그렇지, 참.

"제 정혼자 빼고요."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프레이야가 르메인을 속였든 아니든 플란츠가 상관할 바 아니지 않나. 어차피 왕족들의 국혼이란 서로 원하는 것을 기반으로 두고 이루어지는데.

"아무튼 만약 다른 것을 목적으로 두고 왕궁에 들었다면, 어머님이 시오나에게 뭔가를 알리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

발소리가 긴 복도를 다시 울렸다.

한동안 말없이 칼리안의 곁에서 발을 옮기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공작저에는 언제 갈 건데."

"전하께서 아마 석찬을 가지자 하실 테니, 그 후에 다녀오려고요. 그 전에는 저도 빌헬름 관에 들러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이 가."

"또 어디를요."

"공작저."

또 따라온단다.

세크리티아에 있는 내내 데굴데굴 계속 따라다니던 완두콩이 가라는 빌헬름 관으로는 안 가고 공작저에 따라온단다.

"거기 드미레아랑 시오나만 있는 것 아닌데요."

"알고 있어서 간다는 건데."

"형님 안 괜찮으실 것 같습니다."

"내가."

가겠다는데.

그 말을 하려는 것이 뻔해서, 칼리안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플란츠의 내려다보는 눈은 언제나 느끼지만 그리 적응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닮았다기에. 궁금해서."

얼굴도 닮고 똑똑한 것도 닮았다는 아이.

플란츠와 참 많이 닮았으나 이제 플란츠와 참 많이 다른 환경에서 자라게 될 아이. 그 아이가 궁금해서 가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한동안 대답없이 플란츠를 쳐다보던 칼리안이 대답했다.

"뭐. 같이 도망가죠, 그럼."

적어도 당분간은 르메인이 어디 못 나가게 할 것 뻔하니까. 어차피 도망가는 거 제 핏줄 궁금하다는 완두콩 데리고 같이 도망가면 될 일 아니겠나.

"알았어."

동생 따라 도망 잘 다니게 된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면 무엇을 할지, 새로 산 비녀를 에일라에게 언제쯤 주면 좋을지, 키리에와 시오나는 언제 만나게 하는 것이 좋을지. 그런 것들을 고민했다. 텐실의 왕세자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다누와 엘프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렀다.

* * *

잘 익은 귤이 잔뜩이다.

신 귤 많이 먹으면 안좋다는 히나의 말 잘 들어준 체이스가 신 귤을 전부 다 샛노란 귤로 바꿔놨다. 싱싱한 대구와 생굴도 한가득 싸주려는 것은 칼리안이 말렸다. 대신 다음에 직접 와서 먹겠노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이 더 듣기 좋았으므로 체이스는 과하게 많았던 선물들을 뒤로 물렸다.

"조심해서 가."

선뜻 웃으며 내밀어지는 아리안느의 손을 마주잡고 인사를 나눴다. 다음에 올 때는 정혼자도 데려오라는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그 말은 안했다. 대신,

"나 가면 잘 챙겨줘야 해. 혼자 가서 외로우니까."

직접 오겠노라는 말을 했다.

"네가 왜 와?"

"나는 가면 안 돼?"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축하드려야지. 새 친구 아버지 탄신일이라는데."

르메인의 탄신일 축제에 세크리티아 대표로 오겠노라는 말을 했다.

물론 새 친구란 칼리안을 이르는 것이 아니었다. 플란츠를 말함이다. 히나와도 많이 친해진 김에 플란츠와도 친구사이가 됐다. 플란츠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는 플란츠의 의견을 들어봐야 할 일이겠으나 아무튼 그랬다.

거기에 더해 르메인의 생일을 축하하겠다는 말은 핑계고, 사실 그동안 엄청 많이 친해진 에우리아와 레이첼, 그리고 에일라를 만나러 오겠노라는 말임을 알았으나 칼리안은 즐거운 얼굴로 대답했다.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고개를 끄덕여보이는 아리안느의 손을 놓은 뒤 한 걸음을 더 옆으로 옮겼다. 더는 기침소리를 내지 않는 루이즈가 웃는 얼굴을 한 채 양 팔을 내밀었다. 작게 웃어보인 칼리안이 거절 않고 루이즈의 품에 안겼다.

"건강하게 잘 지내세요."

"그래. 그리하마."

루이즈가 칼리안을 품어 안았다. 잊히지 않을 온기를 전해주려는 듯, 루이즈는 오래도록 칼리안의 등을 쓸어내렸다.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종종 찾아오거라. 언제든지 좋으니."

"네. 종종 오겠습니다."

루이즈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지······ 어머님께."

잠시 멈추었던 루이즈의 손이 다시 아들의 등을 쓸어내렸다. 걱정하는 만큼, 그리고 앞날의 평안을 기원하는 만큼.

"그래. 언제든지."

루이즈의 품에서 가만히 벗어났다.

한 발을 뒤로 물렸다.

아리안느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테일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체이스를 보지 못했다.

한참동안 눈을 돌리지 못했다. 아무 말도 못했다. 체이스가 그러하듯이 칼리안 역시 그랬다.

다녀오라 말할 수가 없어서. 잘 가거라 할 수도 없어서.

다녀오겠다 할 수가 없어서. 잘 가겠다 할 수도 없어서.

"······ 그래."

"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인사만 나눴다.

여전히 남은 많은 말은 어떻게든 다시 나누면 될 일이니까. 언제든 어디서든 어느때든. 이제는 다른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한참이 지나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여보인 칼리안이 한 발을 더 뒤로 물렸다. 그리고 앨런의 다독임같은 따뜻한 빛 속에 안기듯이 들어섰다.

- 따악!

앨런의 손 끝에서 안녕을 고하는 인사가 터져나왔다.

빛이 뻗어나온다. 빛 속에 몸을 채워넣고 눈을 감는다.

돌아간다.

봄이 오는 곳으로.

이제는 나의, 카이리스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