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장. 소원(4)
보존 마법.
아마 실생활에서 '클린' 만큼이나 많이 쓰이는 마법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누구나 그것을 떠올릴 것이다.
500년 된 건물을 부서지거나 녹슨 곳 하나 없이 유지시키고, 바다 하나 없는 광대한 땅의 북쪽에 위치한 카이리시스에서 대마법사의 손녀가 랍스터를 요리할 수 있게 해 주는 마법. 세크리티아에서 출발한 신 귤이 카이리시스의 체르밀 궁에 도착할 때까지도 여전히 시디 신 맛을 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런 마법이 아니던가.
누구나가 클린 다음으로 보존 마법을 떠올릴 만큼 널리 사용되는, 그리고 쉽게 접할 수 있는 마법이 바로 보존마법이었다. 가까운 마법용품 상점까지 발품만 팔면 누구나 살 수 있는 마법 등불처럼 말이다.
'보존 마법 하나를 못 걸어놨으니······.'
그런데 그것을 못했다.
그리 쉬운 일을 못했다.
앨런이 플란츠의 손에 들린 물건을 바라봤다.
지금은 그냥 맞은편 집무실 문만 열고 마법 하나만 걸어달라 말하면 끝나는 일이었으나 저것을 만든 당시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알아서 잠깐 속으로 혀를 찼다.
별것도 아닌 보존 마법 하나를 못 걸어둔 물건.
그래서 아주 조금 낡고 아주 조금 빛바랜 물건.
작은 로켓. 그 안에 들어있는 초상화. 어린 플란츠의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선물을 받은 것이 신기하여 이렇게 계속 들여다보고 계셨습니까."
"아니. 이런 걸 가지고 계신 줄 몰랐어서."
"······ 그러셨습니까······."
사실 플란츠만큼은 아니라 해도 앨런도 놀라긴 했다.
예상했던 일과 예상하지 못한 일이 혼재했다.
'편지가 아닙니까.'
'네, 스승님. 전하께서 보내셨네요.'
그날 저녁. 오랫동안 연락이 되지 않는 아들이 걱정되어 더 참지 못하고 세크리티아를 찾았다. 별관에 가니 세자와 왕자의 남은 짐 정리를 마무리한 레릭이 칼리안의 행방을 전했다.
그 길로 앨런은 레릭과 짐을 같이 싸들고 세크리티아 왕궁에 왔다. 얀의 안내를 받아 방 안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칼리안이 돌아왔다. 안색이 그리 좋지 않기에 무슨 일이 있는지, 혹시 또 어딜 다쳤는지 물으려 하는데 칼리안이 손에 들린 편지를 보여줬다.
- 네가 알아서 잘 하리라는 것을 이제 알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구나. 부디 몸조심하거라.
서툴디 서툰 걱정의 말이 담긴 그것이 바로 르메인으로부터 보내진 편지라면서.
'전하께서 편지를 보내셨다는 말씀이신지요.'
'네. 제가 키리에를 이제야 만나서, 제 것까지 있는 줄은 몰랐는데 함께 보내셨나 봅니다.'
'그럼 세자 저하께서는 전하의 편지를 보느라 저렇게 밖에 계속 서 계시는 겁니까.'
'아. 편지도 편지겠지만······. 글쎄요.'
그렇게 말한 칼리안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자리에 못박힌 듯 손에 든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던 플란츠가 눈에 들어왔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베른에게 있어 아버지란, 두려운 사람. 공격해서는 안 되는 사람. 등 뒤에 둔 체이스를 위해 언제나 마주보고 날을 세워야 했던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저 역시 온전히 다 알지는 못하겠습니다.'
아버지의 편지. 그리고 선물.
베른 역시 겪어본 적 없던 일이다. 그래서 이렇게만 대답을 했다.
칼리안을 잠시 보고있던 앨런이 자리에서 도로 일어났다. 그리고 칼리안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준 뒤 플란츠가 있는 곳으로 잠시 나왔다. 사고 잘 치는 어여쁜 아들이 또 무엇을 하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묻는 일은 조금 미뤄둔 채로.
"놀랄 일이기는 하지요. 전하께서 그런 것을 저하에게 보내실 줄은, 애초에 그런 것을 가지고 계셨을 줄은 저도 몰랐으니."
"그래."
앨런에게 부탁하지도 않고 따로 편지를 보낸 일이 놀라울 만한 것은 아니었다. 르메인이 두 아들 모두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뻔히 두 놈이 다 나가있는데 칼리안에게만, 아니면 플란츠에게만 편지를 보낼 리가 없지 않나. 둘 중 한 놈이 란델이었다면 보내는 것을 참았겠으나 그렇지도 않았으니까.
다만 앨런이 예상하지 못한 것.
초상화 담긴 목걸이를 함께 보냈을지 보내지 않았을지를 예상하는 것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문제. 르메인이 아들의 초상화를 따로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혹여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 왜."
"이제야 그런 것을 보내기 시작하는 것에 대해 말입니다."
"아니야."
늘 조금씩 느리게 돌아오던 플란츠의 대답이 빨랐다.
뭐가됐든 일단 모조리 다 잘못하며 살아온 사람이 르메인이다.
그러나 앨런은, 이번만은 르메인을 욕하지 않았다.
그 르메인의 성격에 플란츠의 초상화만 만들어두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책상 서랍이든 침대 옆이든 혹은 누구도 보지 못할 품 속이든. 보존 마법 하나 걸지 못하고 몰래 만들어 뒀던 남은 두 왕자의 초상화가 담긴 다른 목걸이 두 개가 어딘가에 더 있을 것은 안 봐도 뻔하다.
그것을 플란츠에게만 보냈다 하여 르메인을 탓하지는 않았다.
관심 안 두고 있던 아들들의 초상화를 따로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란델에게는 새로운 독이 될 뿐이고 르메인에 대한 모든 감정을 덮어 둔 칼리안에게는 아무 소용이나 감흥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유일하게, 플란츠에게만은 그렇지 않은 일이 아니겠나.
독도 아니고 소용없는 일도 아니었다.
플란츠에게만은.
란델의 깊은 속내나 칼리안의 무엇이 변했는지는 모른다 해도 적어도 그 정도는 르메인도 이제 알게 된 모양이다. 그러니 란델에게 차마 건네지 못하는 것, 그리고 칼리안에게는 굳이 건네지 않는 것, 그것을 플란츠에게만은 전해 줄 만큼은 눈치가 생겼다는 이야기일 테니 이번만은 르메인을 탓할 필요가 없었다.
"전하께 뭐라고 하지 마. 그런 것 아니니까."
"심려 마시지요. 타박하지 않을 터이니."
물론 칭찬할 마음까지 들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노력하기 시작했다 하여 지난 잘못이 덮이는 것은 아니니까. 누가 뭐라 해도 르메인은 세 아들에게 아주 오랫동안 죄를 지어 왔으니까.
"그럼 무엇때문에 이리 서 계셨는지요."
"처음이라. 어떻게 여겨야 하는지를 모르겠어서."
그깟 초상화 한 장, 편지 한 장.
그것을 두고 어찌 할 줄을 몰라 저렇게 서 있게 만들었으니까.
제 아비가 보낸 선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서, 단순히 기쁘고 고맙다는 생각만 가지기에는 깊은 골이 여전히 선명해서. 편지를 받고 열어보라 말한 것이 하필 칼리안이라, 그것에 또 신경이 쓰여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그것이 어려워 이리 서계셨습니까."
플란츠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앨런이 조용히 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실례하겠다'는 말 없이 그냥 플란츠를 품에 안았다. 바다에서 건져냈던 날 그랬던 것처럼, 대신 이번에는 한 팔이 아니라 양 팔로 꼭 안았다.
"······ 왜, 또."
그날 그랬던 것처럼 플란츠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앨런은 신경 안 쓰고 그냥 제멋대로 플란츠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직은 플란츠보다 앨런의 품이 더 컸으니까.
"체르밀 궁 계단에서 마주했을 때 제가, 플란츠 저하가 칼리안 왕자님에게 미친 짓을 했었다며 독한 소리를 했던 일을 기억하시는지요."
"기억 나."
"그 일이 혹시나 서운하십니까."
"아니."
"그건 저하께서 잘못한 일이 맞으니 혼을 냈던 겁니다. 저하의 동생 분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저하의 잘못을 본 사람으로서 혼을 낸 겁니다. 그건 이해하시는지요."
"······ 이해해."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살핌 없이 혼자 커버린 등을 꼭 안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전하를 타박하는 것도 같습니다. 전하께서 도무지 눈 뜨고 보기가 어려울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본 늙은이가 혼을 내는 중이지요. 덕분에 늙은이 속이 하루에도 열 번은 터집니다. 하나를 알려드리면 그것 하나를 배우느라 다른 것을 못 보는 소같은 놈이 아닙니까."
단단히 힘을 주고 서 있던 어깨가 잠깐 흔들렸다.
웃는 것이다.
"다만, 제가 아무리 전하를 혼낸다 해도 그건 그저 늙은이의 오지랖일 뿐입니다. 제가 저하를 그렇게 혼냈어도 저하의 잘못이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알아. 그것도."
"너무 잘 아셔서 문제라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저하의 동생이 그리 떠난 것은 저하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을 저하께서 혼자 묻어두다 보니 오로지 저하만의 잘못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생각 때문에 다른 일들에 대해 전하를 탓할 마음을 버린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저하께서도 잘못이 있다 해서, 저하와 왕자님들을 대신해 전하를 혼내주는 제가 있다 해서, 저하가 전하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다 용서해버릴 필요는 없지 않겠는지요."
"······ 아니야. 용서 안 했어."
"그래요. 그리하셔도 됩니다. 저하께서도 원망하실 수 있습니다. 전하께, 그동안 너는 나한테 무얼했느냐 이야기하셔도 됩니다. 왜 이걸 이제야 보여주느냐 원망하셔도 괜찮습니다."
"그런 것 아니라니까."
"반가워하시는 것 역시, 괜찮습니다."
르메인을 용서한 것도 아니지만 원망하는 것도 아니라 답하던 플란츠가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부모라는 건 본래 그렇습니다. 한없이 원망스럽다가 또 한없이 기대게 되는 것이 부모입니다. 기대지 못하게 한 아비가 잘못한 것이지 기대고 싶어 한 자식에게는 그 어떤 잘못도 없지요. 부모를 원망하는 것도, 그러면서도 바라보게 되는 것도, 모두 다 자식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건 그저 당연한 일입니다, 저하."
베른도 온전히 가늠하기 힘든 것.
이제부터 칼리안도 배워나가게 될 것. 그것을 플란츠에게 먼저 알려 준 앨런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플란츠. 네 아비가 너를 홀로 둔 것은 네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동안 가만히 있던 플란츠의 어깨에서 비로소 힘이 빠진다.
"그러니 네 아버지가 보낸 것을 어떻게 여겨도, 다 괜찮지 않겠느냐."
반갑다가도 원망스럽고, 원망스럽다가도 반가운 르메인의 선물은 어떻게 여겨도 괜찮다고. 그 누구도 해줄 수 없었던 허락의 말을 오지랖 넓은 마법사가 입에 담았다.
그리고 새로 난 푸성귀같은 뒷통수를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어깨에 닿은 온기가 한참동안 번져나가도록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 * *
하얀 손이 조용히 움직여 검은 커튼을 내렸다.
창 밖의 모습을 보며 아빠 뺏긴 기분을 느끼기에는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칼리안이 배고픈 것도 잊어버린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의 손에 들린 물잔을 보며 다시 배고픈 얼굴로 돌아와 울상을 지었다.
"히나가 전해드리라 해서 함께 가져왔습니다."
물 한 잔을 굳이 히나가 전해드려라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물 정도야 얀이 가져다 줄 수도 있고 칼리안이 가져다 마셔도 되고, 정 목이 마르면 그냥 물을 만들어 마셔도 되는 일이니까.
그러니 저것은, 물 말고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히나의 메시지인 것이다.
"안 먹었어. 이번에는, 정말로."
"네. 잘 하셨습니다."
큰 숨을 한 번 내쉰 칼리안이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플란츠만큼은 아니라 하나 그래도 여전히 칼리안 자신보다는 어리게만 느껴지는, 키리에를 향해서였다.
"잠깐 앉아. 키리에."
"네."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인 키리에가 칼리안의 앞에 앉았다.
서로 대화를 나눠보아야 할 사람이 히나 뿐만은 아니었지 않나. 얼굴 밖으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재주가 칼리안이나 플란츠에 못지 않은 키리에였으니까.
"키리에."
"네. 왕자님."
"휘트린, 이라는 이름을 알아?"
"알고 있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이름은 알고 있었나보다, 하는 생각을 하려는데 키리에의 말이 이어졌다.
"왕비님의 성이지 않습니까."
"······ 아. 그건."
잠시 말을 고른 칼리안이 앞에 놓인 물로 입을 축였다.
제 성을 모른다 했던 키리에의 얼굴이 떠올랐다. 성을 모르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름 역시 모르고 있었음을 이제 알게 되었다.
"네 성 같은 거야."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이름을 네 성으로 준 것처럼, 비슷한 거야. 내 어머님에게 있어 휘트린이라는 것은."
키리에의 서로 다른 빛 눈이 칼리안을 향했다.
그 눈을 마주 바라보던 칼리안이 까끌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너희 어머니의 이름이야. 키리에."
"그렇습니까."
그래."
"······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칼리안의 목소리처럼 까끌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던 키리에가 입을 열었다.
"언제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키가 큰 엘프 한 명이 찾아왔습니다. 한참동안 찾아다녔다면서, 편지들을 건네줬습니다. 그리고······ 키리에, 히나. 저희들의 이름을 알려줬습니다."
"시오나였지."
"네. 왕자님께서 설명하신 얘기를 듣고 예상을 했습니다만, 시오나 힐이라는 그 엘프였던 것 같습니다. 주고 간 것은 어머니와 돌아가신 왕비님의 편지였습니다. 그것을 전해주면서 제 어머니가 왕비님과 친분이 있었다고. 그렇게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이미 왕비님께서 세상을 떠난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으니, 아마도 그래서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미 죽은 왕비와 연관이 있다 알려지면 좋을 것이 없을 테니까.
"그래. 그런 것 같네."
"그리고 왕비님께서 휘트린 영지에 저희들이 살 수 있을 곳을 마련해두셨다고.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곳까지 가겠다면 데려다 주겠노라고, 그런 말도 했습니다."
"······ 그곳에 가 있지 그랬어."
"그곳에 가게 되면 복수는 영영 못하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히나만 보낼까 생각을 했는데 히나를 따로 떼어 둘 수가 없어서······ 결국은 제가 고집을 부려 카이리시스에 남았습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한숨이 소리없이 새어나왔다.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알려줄게. 내가 아는 것 전부."
"아닙니다. 없습니다."
"더 알지 않아도 괜찮겠어?"
"어머니 성함 알려주셨지 않습니까. 나중에 아버지 성함도 아시게 되면 알려주십시오. 그 외에는 더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래."
"왕자님은, 궁금한 것이 없으십니까."
"아니. 나도 없어."
키리에가 작게 웃었다.
칼리안이 얼마나 거짓말을 못하는지 새삼 느끼면서.
분명 묻고 싶을 것이다. 묻지 않더라도 궁금할 것이다.
브리센에 대해 여전히 복수할 마음이 드는지. 플란츠에게는 어떤지. 히나와 키리에는 달랐으니까.
그 거짓말에 대해 답하는 대신 키리에가 다른 말을 꺼냈다.
"돌아가면, 지그프리드 공작저에 가보아도 괜찮겠습니까."
시오나가 있는 곳이다.
리리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대련을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대련을?"
걱정 가득한 눈으로 키리에를 쳐다보던 엘프.
주머니를 다 뒤져서 가진 돈을 전부 다 꺼내 건네주고, 휘트린 영지로 데려다 주겠다 몇 번이고 설득을 해보려 하던 엘프. 그랬던 사람.
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걱정하지 말라 대답했던 것처럼.
"저희 남매가 무탈하게 잘 지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칼리안이 물잔을 바라봤다.
리리에를 보겠다는 말이 아니라, 시오나에게 물을 것이 있다는 말도 아니라, 그냥 얼마나 자랐는지 알려주겠다는 말이 기껍다. 그래서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가자마자 내가 꼭 부탁할게."
"감사합니다."
"그래."
밖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밖을 보지 않았음을 알리려는 것처럼 굳게 내려진 커튼을 잠시 보던 키리에가 품 속을 뒤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꺼내 칼리안에게 건넸다.
"플란츠 저하께서 전해주라 하셨던 겁니다."
"형님께서?"
고개를 갸웃거린 칼리안이 종이에 싸인 것을 열었다.
그리고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또."
육포였다.
'아우님 깨면 줘.'
'육포 아닙니까.'
'히나가 못 먹게 할 텐데. 내 아우님 먹을 걸로 탈 날 사람 아니야. 그러니까 시끄럽게 굴기 전에 그냥 줘.'
'이걸 어디서······.'
'레릭이 가져왔던데. 루시 주라고.'
'루시 줄 것을 왕자님께 주시는 겁니까.'
'소금 들어서.'
'······ 루시도 못 먹는 것을 왕자님께 주시는 겁니까.'
'싫다고 안 할 텐데.'
플란츠가 한 말을 전해들은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창 밖까지 새어 나갔다.
"거짓말."
레릭은 이제야 왔다.
급히 별장을 떠나느라 남겨두었던 짐을 정리하러 갔다가 앨런과 함께 도착하지 않았나. 그런 레릭이 대체 언제 루시 줄 육포를 가져오겠나. 게다가 레릭이 루시 주려고 가져온 육포에 소금이라니. 그런 것을 실수할 리도 없다.
소금 든 만큼 레이븐과 같은 식단 먹게 한 것에 대해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도 들어있음을 알았으나.
어쩌겠나.
"히나한테는 비밀로 해줘."
고기인데.
먹어야지.
아들 걱정한 마음 플란츠에게 전해주고, 동생 걱정한 마음 칼리안에게 전해 준 키리에를 보면서 칼리안이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히나한테 숨길 비밀 하나 나눠가져간 김에 아빠도 잠깐 나눠가져간 형이 기특해서. 그런 플란츠가 건네준 것을, 칼리안의 몸에 해로울 것임을 분명 알면서도 모르는 척 전해 준 키리에가 기특해서.
그런 둘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기특해서.